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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라'고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윤리학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점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질문이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면, 답은 좀 더 쉽게 '가능하지 않다'가 될 수 있겠다. '이렇게 하면 좋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아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와 같은 비판/충고/불평을 듣고서, 대안이나 해결책은 당사자가 직접 찾으면 된다. 그런 과정에서 물론 일종의 매뉴얼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황-의존적일 것이므로 '강령'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런 게 억압이라고? 부정이라고? 초자아? 법?
그렇다면 원하는 게 무엇인가? 자유?
자유가 아니라 도대체 윤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는,
아래의 글은 최근 보건의료노조와 한 대학 총학생회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관한 것으로서, 현장에 있었던 총학생회장(직무대행)이 작성한 글이다. 우선, 이 글에는 "이상이 사실관계"라고 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상 왜곡이나 오류, 누락 등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현장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상황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내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글을 기초로 몇 가지를 확인해 두고 싶어서 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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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대학교 학생여러분
총학생회장(직대) ㅇㅇㅇ 입니다.
새벽에 있었던 사건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1. 기숙사에 계시는 분들이 총학홈페이지, ㅇㅇㅇㅇㅇ 등에 제기한
소음에 대한 항의글과 총학 집행부 핸드폰으로 들어오는
"소음 항의"를 해결하기 위하여
저와 ㅇㅇㅇ 미디어국장은 집회의 장소인 노천강당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숙사생들이 항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지 노천강당을 빌려 쓰는 게 아니꼽거나 꼴보기 싫어서 의도적으로(적극적으로) 노조원들을 몰아내고자 이런 불평을 쏟아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항의는 복잡한 상황 파악을 기피하는 일반 사생들의 중의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소음 항의를 해결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장과 미디어국장은 어떤 준비를 하고 가야 했을까? 즉, 어떻게 해야만 그 항의를 '해결하는 것'이 되었을까?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사를 완전히 중단시킬 작정이 아니었다면, (행사를 하는 것 자체가 아니꼬운 게 아니라 다만 시끄러웠을 뿐이었으므로) 어느 정도까지 행사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볼륨을 줄여야 할 지는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준비나 합의가 되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다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즉, 그냥 "줄여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줄이고자 하는 측에서는 상대편이 줄인 것보다 더 줄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고, 행사를 주관한 측에서는 상대편이 줄이라는 것보다는 조금 덜 줄이고 싶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줄였는가 하는 것은 절대로 논쟁이 될 수 없다. 처음에 '시끄럽다'고 한 사생들에게 물어보았어야 하는 것.]
2. 보건의료노조 "ㅇㅇㅇ 단장"을 찾았으나 자리에 안 계셔서
우선 사운드를 총괄하는 무대 옆 콘솔 쪽으로 갔습니다.
3. 여기서도 단장을 찾았으나 안계시고, 책임자를 자처하시는 분이
계셔서 "ㅇㅇ대학교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잠을 못 이루고 있으니
볼륨을 줄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4. 우선, 지금 진행 중인 한 곡만 끝나고 볼륨을 줄여주신다고 하여
한곡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의외인데, 바로 여기에서 주먹이 안 날아간 것만 해도 다행이다. 나는 솔직히 이 아저씨들이 몹시 무섭다.]
5. 한곡이 끝나자 소량의 볼륨을 줄이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크기의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요청 드렸습니다.
역시 또 소량을 줄이시기에 다시 줄여달라고 요청 드렸습니다.
그러자 지금 진행중인 한 곡 끝난 후에 줄이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실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는 모양이지만, '얼마나 줄였나'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양 측에서 모두 소리의 크기에 대해서는 자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만 증명할 따름. 차라리 사생에게 물어보았어야 했다. 전화 연락 등의 방법을 사용해서.
요컨대, 음량을 줄여달라고 요구하는 측에서 계속해서 음량을 줄여달라고 할 경우, 그건 행사 주최측에 대한 도발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계속 줄여달라고 하다가 어느 선에서 물론 그들은 만족하겠지만, 그렇게 볼륨을 줄인 측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요구하는 측이 완전히 자의적으로 음량을 판단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따라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어야 했다.]
6. 이러한 언쟁이 계속되는 도중에 총학 미디어 국장이
콘솔의 볼륨을 내렸습니다.
[이것 역시 도발적 행동인데, 딱히 할 말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존심이 센지, 오만한지, 혹은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7. 이에 운용자는 바로 볼륨을 올렸고, 운용하시는 분 왼쪽에 계시는 분이
ㅇㅇㅇ씨의 멱살을 잡고 오른쪽에 계신분이 주먹으로 ㅇㅇㅇ씨 얼굴을
가격하였습니다.
[아무리 정상 참작을 하고 사실 관계에서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역시 이 부분(과 여기를 포함하여 아래에 계속되는 폭행에 대한 기술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큰 짜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할 수 있겠다.
1) 싫다.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라는 걸 잘 의식하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만)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 어찌 그리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지. 아니, 아무리 자기 감정이 상했기로서니 거기서 손찌검을 하는 식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발동하는지. 정말 유치원(혹은 유치장)에 다시 가라고 말하고 싶다.
2) 무식하다. 어쨌든 그 사람은 일을 다 그르쳤다. 바보. (일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있는지도 모르겠지만)]
8. ㅇㅇㅇ씨는 뒤로 넘어지고, 노조분들 수십명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노조원들과 ㅇㅇㅇ씨를 분리시키려고 막고있는 중에
ㅇㅇㅇ씨가 일어나면서 노조원들에게 몸부림을 치고, 신발을
던지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실 관계에서 문제가 있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ㅇㅇㅇ씨가 무술인이 아닌 이상 여러 '노조원'들을 상대로 대단한 무공을 펼쳐 폭행을 가했을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ㅇㅇㅇ씨가 아무리 그 상황에서 싸가지없게 보였다 한들(분명히 그랬을테지만) 어쨌든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아래에서 좀 더 확실해진다.]
9. 이어 노조원들이 ㅇㅇㅇ씨를 넘어뜨려 수십명의 노조원들이
ㅇㅇㅇ씨를 발로 밟는 등의 구타를 행하였습니다.
(노조원 한 분과 ㅇㅇㅇ씨가 싸웠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수십명으로 부터 구타 당한 것입니다.)
[이런 데에서.]
10. 어느정도 간부급의 사람3~4명이 오자, 수십명의 노조원들이
저와 ㅇㅇㅇ씨 머리채를 휘어잡고 천막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에서도.]
11. 저와 ㅇㅇㅇ씨는 천막에서는 따귀를 5~6 차례 불특정 다수로 부터
맞았습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채로 고개 숙이기를 강요받고
뒤통수를 4~5차례 타격 당하였습니다.
[정말 혐오스럽다. 이게 정확한 사실이라면, 소위 운동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인간들의 일부가 (아마도 일상적/가능적으로)하는 짓거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부를 마치 썩은 살처럼 도려내지 않는다면, 운동의 구호도 공허할 뿐이다. 나는 이런 인간이 내뱉은 구호 따위는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바로 앞 문장은 분명히 오버한 것이지만, 일단 그대로 둔다)]
12. 총학이 노동자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하시면서
사과를 강요하셨습니다.
우선 먼저 볼륨을 내린 행동은 무례했다고 사과드렸습니다.
[모든 것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 같다. 당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팩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싶다. 사생들 잠은 못 재울 망정...]
13. 돌아가려고 하자 강제로 잡혔습니다. 계속해서 머리 숙이기를 강요 받으며
ㅇㅇㅇ씨의 핸드폰을 뺏고, 갖은 욕설을 퍼붓는 등의 강압적인 행동이 계속되었습니다.
14. 노조 규찰대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우리끼리 해결하겠다" 면서
옆에 계시던 청원경찰 분들을 막았습니다.
15. 노조 규찰대원들은 일단 단대 학생회에 연락해서 해결하겠다면서
전화를 하자 농대회장, 농대 부회장, 법대 회장, 사범대 부회장 등이
와서 저와 ㅇㅇㅇ씨를 관망하였습니다.
16. 노조원들은 강압적인 행동으로 사과를 강요하였고, ㅇㅇㅇ씨가
먼저 폭행을 일으킨 것처럼 진술하도록 강요하셨습니다.
(ㅇㅇㅇ씨가 볼륨을 먼저 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폭행은
노조원들이 일방적으로 퍼 부은 것이었고, ㅇㅇㅇ씨는
이를 막기위한 몸부림 과정에서 신발을 던지는 등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17. ㅇㅇㅇ 집회 단장이 와서 학생처 주임선생님과 농대, 법대 회장이 있는 가운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사과를 하셨고, 저는 ㅇㅇㅇ씨가
볼륨을 내린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사과드렸습니다.
18. 청원경찰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ㅇㅇㅇ씨는 진찰을 받고
입원을 해야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 입원 수속을 밟았습니다.
19. 어두운 곳에서는 못 봤지만, 이두희씨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으며,
온몸이 피와 상처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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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사실관계 입니다.
노조 간부들과 여러 단대회장/부회장들은 대책회의를 하여
입장을 맞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곳이 몸도 아프고, 정신도 혼미하여
입장이나, 향후 대책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학생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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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내 입장인 바, 여기에 제기된 내용이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가 여기에 덧붙인 나의 의견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 이런 식의 지긋지긋한 정치는 제발 그만두라고, 제발 끝장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위대의 폭력과 전경의 폭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철학(혹은 학문)은 (그 체계 구축에 있어서) 정교해야 하고, (현상과 텍스트 분석에 있어서) 엄밀해야 한다. 혹은 최소한 이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이 엄밀성은 하늘이 두 쪽 나고 바다가 갈라져도 꼿꼿하고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는 엄밀성이다.
그러나 그런 엄밀성은 과연 있기는 할까?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하나의 철학이 절대적일 수 있나, 혹은 영원할 수 있나? 내 생각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것만은 절대적인 듯하다) 그럼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종류의 엄밀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철학, 혹은 그러한 철학함의 방법은 모순이 아닐까? 아마도 모순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나름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않을까? 모순은 곧 경계이고, 항상 경계에서만 무엇인가가 발생하므로. 요컨대, 그 목표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곧바로 폐기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이 모순이 '무의미'한 것으로 남겨져서는 안 되겠다. 의미있는 모순만이 폐기의 위협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엄밀성을 추구한다는 것(+A)'과 '절대적인 엄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B)'은, 양자 각각의 부정(즉 -A와 -B)에 해당하는 입장과 결정적으로 갈라짐으로써 이를테면 다소 유동적이고 불안한 연대를 맺는 바, 이 연대의 그러한 유동성으로 인해 철학(학문) 자체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다. 즉, 이 연대는 부정적으로는 '-A도 -B도 아닌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처럼 느슨한 규정이 철학함의 다양성을(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다양한 철학들의 적합성을) 보장한다.
'-A'의 문제는 사유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여기서 방점은 '엄밀성과 정교함을 추구하느냐 추구하지 않느냐'에 찍히는 것이지, 그 존재 여부에 찍히는 것이 아니다. 즉, 마치 절대적인 엄밀성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럴 때에만 학문의 '발전'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동어반복적이지만, 발전이라는 것이 곧 더욱 정교하고 엄밀한 사유로 이행하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학문(철학)의 민주주의'란 없다. 혹은 불가능하다. 혹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리학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만큼,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대중화와 민주주의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 역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틀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자(학자) 자신에 대한, 혹은 특정 철학에 대한, 더 나아가서 이론 일반, 그리고 인간 일반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인데, 이 자신감이 학문과 인간을 병들게 한다. 절대적 학문이 있다손 치더라도, 의심을 불허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학문이란 곧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을 지양하는 학문이란 더 이상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의미있는 모순'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학문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엄밀성과 정교함을 추구하는 것. 따라서 온갖 반론과 예외적인 경우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삶과 세상의 가장 복잡한 측면들을 왜곡 없이 보여주는 것. 그러면서도 절대적인 엄밀성이나 정교함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애써 획득한 복잡성과 섬세함을 특정한 이름으로 환원함으로써, 이론의 가치를 날려 버리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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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존재를 증명받지 않아도, 나는 나 - 우에노 치즈코 제목 참 선정적입니다. 그렇지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인 <언니네> 특집에 왜 저딴 제목이 올라왔는지 분노의 포스로 클릭한 언니들이라면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굴한 변명의 서를 읽어주세요. 나는 한 가지 질문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나는 한국인일까요? '우리나라'를 꼭 '한국'이라고 부르고 월드컵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단군상이 망가져도 상관없고 일본 소설을 탐독하는 나는 한민족일까요? 해외에서 현지 여자들을 사서 끼고 다니며 가부장의 속성을 버리지 못해 못난 짓을 일삼는 악명 높은 한국 남자들과 다른 취급을 받기 위해 나는 부단히 애썼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나는 얼굴이 까만편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곧잘 깜둥이라고 놀림을 받았지요. 어리석게도 정말로 내 외모가 한국 사람이 아닐까봐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보면 알 수 있어요. 납작한 코, 평평한 얼굴, 영락없는 한국인입니다. 아, 눈은 좀 큽니다. 참 깨끗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도 인종도 국가도 모두 같은 곳이지요(이 글에서 복잡한 국가와 민족 개념을 혼동해서 사용한다고 해도 용서하세요). 그러니까 '순혈주의'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 건지도 몰라요. 이렇게 쉽게 민족을 찾고 혈통을 찾는 것도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일일 겁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은 터지고 아직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죽었던 열사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하지요. 아들들의 이름으로 민족을 찾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요(어떤 아들은 힘들기도 하겠지요). 잠깐, 나는 여기서 그동안 계속되어왔던 민족의 꽃인 딸로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뛰쳐나간 뒤 가족과 절연을 선언한 딸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이 민족이라는 담론이 그토록이나 싫어하고 부정했던 가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비유입니다. 그렇지요?) 유태인계 미국 작가인 예지얼스카의 <브레드 기버스>에서 주인공인 로라는 유태인 가정의 답답함이 싫어서 뛰쳐나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결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앨리스 워커의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에서도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인 타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돌아가 여성 할례의식을 받습니다. 그녀들이 행복해졌을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기 힘듭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아, 혹은 신세계의 진보를 누리던 그녀들이 가부장적이고 구시대의 악습으로 왜 돌아가야만 했을까요. 나는 그녀들의 선택이 옳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녀들이 그렇게 선택하게 된 이유를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세기 전에, 어떤 훌륭한 페미니스트는 '나는 국가가 없다. 나는 여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훌륭한 페미니스트는 <3기니>를 썼던 버지니아 울프랍니다) 나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 말을 반쯤은 믿고 있지요. 하지만 때로는 나는 '나는 국가(민족)가 있다. 나는 여성인데도'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독일인 여자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녀와 저는 각자 자신의 모국(이 얼마나 눈에 거슬리는 말입니까)이 아닌 나라에서 만나서 우정을 나누었지요. 그녀는 레즈비언이었고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와인도 좋아하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지요.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클럽에서 술을 마시면서(저는 우유를) 그녀와 나는 그날따라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유가 너무 들어간 탓이었을까요? 나는 신이 나서 이 멋진 여성 동지에게 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마초 같은 지를 떠들어댔습니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내 이야기에 심하게 공감하면서, 그녀가 그려오던 제 3세계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1970년 대쯤의 한국 사회에나 들어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독일 통일 이전에 히틀러가 살던 시대쯤으로 한국 사회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분명히 저 훌륭한 독일 페미니스트인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의 한국판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나는 어리석게도 가부장제는 세계적인 공통의 억압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말이지요. 공감과 분노를 원했던 나의 이야기는 어느새 저 미개한 아시아 나라 중 하나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상황이 되었있더군요. 그녀에게 나는 아마도 'Exception'이였을거예요(독일어로 쓰고 싶은데 독일어를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또 왜 영어인가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의도는 전혀 없었을거예요. 그래도 나는 이 '무식한' 백인에게 설명해야 했을까요? 발끈하며 삼성이니 LG니 조금 유명세를 탄 기업들을 들먹여 가면서 한국이 얼마나 독일에 지지 않을만큼 성장했는지, 우리는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을까요. 또다른 제 3세계와 차별하기 위해 말이지요. 어쨌든 그 순간만큼 나는 민족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타자와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민족주의자인 나를 깨달아 갑니다. 조금 이야기를 돌려서, 어떤 경우에는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여전히 무섭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강연을 들은 한 일본인 남학생이 강연이 끝난 뒤 벌떡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하고 착한 남학생인가요?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람들을 국가(민족)와 자신을 동일시해버리는 게 아닐까요. 이라크 전쟁이 나고 김선일씨가 살해당했을 때, '저 더러운 이라크 놈들을 다 죽여라'고 소리쳤던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는 섬뜩한 것이었습니다. 딜레마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이자 전쟁 가해국의 시민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일본군인들이 조선인 여성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했던 한국남자들의 행위에 대해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여성으로서 아픔을 공유하고 남자들을 미워해야 할까요?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까지 책임 지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시위를 하는 할머니들은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녀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이미 죽어 흙이 되었을테니까요. 이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진 않았지만 선택한 것과 진배없는 민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피해와 가해는 얽혀있습니다. 다른 민족이 저질렀던 간악한 범죄를 내 민족이 받았고, 이제는 내 민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민족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나는 그저 여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그저 '나'로 남아있고 싶습니다만 세상은 이미 나를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해 놓고 그 틀에 맞추어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김치 따위 잘 먹지 않고 대장금을 잘 안보는 한국인입니다만, 그러나 언제나 내게 돌아오는 질문을 그런 것이지요. 나도 남들에게 그렇게 합니다. 부모는 누가 뭐래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쩐지 화가 나는 말이지만 불교에서 말한대로 전생의 업에 따라 좋은 부모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말이지요. 어디서나 이 납작한 얼굴과 "Where are you from?"은 나를 따라다닙니다. 나는 시작된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도 가족이 점점더 그 중요성을 잃어가는 개인 사회에서 언젠가는 나도 이 공고한 국가 권력과 민족 정체성과 인종주의의 꼬리표가 조금은 희석되어서, 그 경계가 흐려지고 '타인에게 존재를 증명받지 않아도, 나는 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능하다면 '그 사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겠고 그들도 내게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당장에 나는 치사한 방법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미 세상은 그들의 경계 나누기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를 내부로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반민족주의자가 되겠고, 나를 외부로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친민족주의자가 되겠습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닌 기회주의자일 뿐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국을 다시 선택하는 셈이지요. 어쩐지 말장난에 한바탕 놀아난 것 같지요. 선정적인 제목에 분노하기도 아까울만큼 우유부단한 글이지요. 그래서 또 하나 우유부단한 말을 던지고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는 여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이기도 하고 한국인이 아니기도 합니다. 사족: 이 글의 물음의 많은 부분은 우에노 치즈코의 글이 실려있는 <경계에서 말한다>(2004)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번 특집을 계기로 나는 이 여자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1994), <내셔날리즘과 젠더>(2000)같이 재미없는 책만 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빛나는 글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재미가 없습니다). 이 책에 실린 우에노 치즈코의 글은 아주 읽을 만한 글입니다. 월간 언니네(www.unninet.co.kr) 2006년 6월 특집 "민족주의에 박치기!" 중 |
[아래쪽에 써있듯, 언니네에서 퍼왔음.]
http://gurru.com/dictionary/french/dic_fr_hu.htm
http://parole.fr.pusan.ac.kr/multidico/
http://www.online-dictionary.biz/french/english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읽기
— 기억과 공감의 연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1)을 읽은 후에 이 책에 대해서 즉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정리하려 한다면 이는 순서에 맞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면 이 소설은 ‘나’의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해서’ 쓰는 것은 오히려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이 소설에 의해 영향 받은 것들에 대해서 쓰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이 글은 나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될 것이다. 나는 이반과 알료샤에게 동시에 감정을 이입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물론 이는 라끼찐의 말을 빌면 ‘까라마조프적’ 특성을 나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다른 까라마조프, 이를테면 드미뜨리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일 것이다. 알료샤 역시 정욕으로 가득 찬 드미뜨리와 자신이 단지 정도의 차이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이 ‘까라마조프적’이라는 형용사의 분열적 의미는 인간 일반을 수식하는 데 특별히 적절한 듯하며, 아마도 이로 인해 나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인 이상 “아주 극단적인 모순”을 가지며, 우리의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심연을 동시에(1221)”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충분히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확대된’ 해석으로 간주해 경계하고 인간 일반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논점을 제한하는 태도가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좀 더 맞아 떨어질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이 소설은 인간 세계 전체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읽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반성’이라는 말은 아주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 역시 이반-라끼찐-꼴랴가 공유하는 오만불손한 가치관을 가지고 타인의 마음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재단하곤 했었다. 이런 모습의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굳이 변호하자면 이는 아마도 더욱 올바른 삶을 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삶과 사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쉽게 가정하므로, 삶과 세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욕구는 이를 치료하고자 하는 욕구와 구별하기 힘들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의식하고 또한 책임지겠다는 욕구가 정당하며 진실하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나는 너무도 쉽게 ‘나의 지식’이라는 무딘 메스를 들고 세상을 해부하려 들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소설 전체에 걸쳐 빛을 발하는 작가의 심리학은 주요 주인공 중 어느 한 사람도 만만하게 파악되거나 분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구체적 인간이 아닌 인간 일반에 대한 이렇고 저런 평가가 얼마나 쉬운가를, 또한 그러므로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쉽게’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바로 오만일 것이다. 작가는 엄청나게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인간학적 현상이나 인간 자체에 대해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그가 포착하려는 것 자체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단순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오만한 이론과 이반
이렇게 무력한 지식, 혹은 지식의 무력에 대한 비판은 이반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이반의 “모든 무신론자들의 입장에서 악행은 허용되지 않을 수 없으며 가장 필연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출구로 인정된다(131)”는 사상이 설령 이론적으로는 흠이 없다고 할지라도, 작가가 이 사상과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요약할 수 있는 이반의 사상을 둘러싼 논의에서, 방점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에 찍힌다. 이 표현은 이반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 주는데, 이로 인해 문장의 명확한 의미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이반은 후에 동생 알료샤와 함께한 자리에서 신과 불멸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아버지 표도르의 질문에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243).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악행이 허용되며, 그것이 심지어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반의 생각은 알료샤에게 서사시 「대심문관」의 내용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이반의 대심문관에 따르면 예수는 기적을 행해 보라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선사해 주었다. 기적에 의해 강요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예수는 인간에게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인간이 그렇게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오히려 견뎌내지 못하며, 자유로운 선택의 부담 때문에 짓눌리기 보다는 강제에 의한 평안을 원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적을 사용해 빵을 만들어 보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인간은 빵을 제공하는 권력에게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한다. “당신은 사람들이 […] 소리 지르며 조롱하고 놀려 대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소. 당신이 거기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적에 의한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열망했기 때문이오. […]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았소.(455)” 신, 즉 “<기적>과 <신비>와 <교권>(457)”은 인간을 ‘속박하고 동시에 해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말하는 신은 이미 ‘악마’다(458).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사실은 권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사랑으로 신/악마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평안을 보장한다. “인간을 덜 존중하고 그에게 더 적은 것을 요구하면 그의 부담이 줄어들 테니, 더욱 사랑으로 다가가는 길이 될 거요.(456)”
여기에서는 이반이 자신과 ‘일반 민중’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지성의 판단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 여부가 중요하지도 않지만, 허약하고 비열한 보통 인간들에게는 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진정한 무신론자인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지식인인 자신만이 자율적 존재이며, 인간 일반이 자신의 수준까지 지적으로 고양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 이것이 이반의 오만이며, 지식과 이론의 오만인 것이다. ‘오만한 이론’이 아닌 ‘이론 그 자체의 오만’은, 이론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이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만을 다루는 ‘이론적 틀’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오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이론 스스로가 이론이 아닌 다른 것과 직면해야만 한다. 이반의 이론이 현실과 교접하는 지점이 바로 스메르쟈꼬프의 범죄이다. 불쑥 잠입한 이 실재 앞에서 이반은 자신의 언어(logos)를 잃고 침잠한다.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
이러한 이론 비판을 통해 작가는 더 이상 윤리‘학’으로 포섭될 수 없는 독특한 지점들을 가지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했다. 그가 제시하는 윤리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 한다. 첫째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는 (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그에게 윤리는 이론이 아니라 믿음이다. 따라서 이론을 구성하는 증명의 확실성은 믿음이라는 좀 더 겸손한 원리로 치환된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때 종교라는 말은 제도가 아니라 어떤 ‘영성(靈性)’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과학은 보편자에 대한 담론인 반면 이 종교/윤리는 개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 이 조건은 말 그대로 보편자보다 개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뜻이지, 보편적인 실천의 원칙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가 가장 난처한 부분일 것인데, 이 윤리는 사실과 당위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진통제]’이라고 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의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의 환상에 불과한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적인 지복의 세계를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이반은 맑스와 정 반대편에 선다. 즉, 이반은 인간에게는 신과 같은 강인한 능력이 없으므로, 종교를 폐기하기는커녕 이를 적극 이용해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름대로 사실(fact)을 존중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수많은 사례들을 들어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421-437). 이 점에 있어서는 작가도 섣불리 이반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어떤 완벽한 이론이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구멍’이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론을 통한 사회의 개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리가 없다. 요컨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의 이성적 변혁을 추동하는 이론은 오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가 윤리적 허무주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현실과 당위의 사이 어딘가에 서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작가가 제시하는 윤리는 이른바 ‘기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단어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잠깐 제쳐두고 이 윤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알료샤와 그의 또 다른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를 통해 설파되는 작가의 윤리는 조시마 장로의 형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머니, 우리들 중 누구나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많은 죄를 지었어요.(511)” 이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죄인의 처지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인간은 능력 없고 무식한 비열한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죄인’일 뿐이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 문제로 된다. 즉, 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부터 이반의 윤리적 허무주의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우리의 ‘이웃들’에 대해서 죄인이다. 이어서 이 깨달음은 1인칭으로 다시 표현되며, 그 순간 이 명제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에 대한 인식의 원리를 넘어서서 윤리적 실천의 원리가 된다. 바로 ‘내가’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는 투사가 아니라 이웃들에게 죄를 저지른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악행과 부조리를 용감하게 떠맡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죄를 저지른 ‘나’는 구체적인 선행을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세상의 불의를 모두 해결하는 엄청난 일은 ‘신이 아닌 이상’ 해낼 수 없다. 그저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악행에 대해서 사죄하고 개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선행으로서 이를 되갚아야 한다. 이 작은 선행이 소설에서는 알료샤가 그루셴까에게 (상징적으로) 베푸는 “파 한 뿌리(633)”, 그리고 의사 게르쩬쉬뚜베가 드미뜨리에게 준 “호두 1푼뜨(1175)”로 나타난다. 이러한 작은 선행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면 책임과 선행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에는 촘촘한 그물 모양의 연대를 이루는 인류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 개인에 대한 선행이 분명하게 우위에 있는 윤리적인 보편 명제이다. 이 윤리는 강령으로써 개인을 덮어버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개인에 대한 서로 간의 공감의 능력에 바탕을 둔다. 이 공감의 테마는 소설 속에서 조시마가 시골 아낙네들과 대화하는 장면(92-103), 스네기료프의 처절한 고통을 목격하고 알료샤가 눈물 흘리는 장면(361-371), 일류샤가 쥬츠까에게 바늘이 든 빵을 먹이고 괴로워하는 장면(933-934)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드미뜨리-알료샤와 비교했을 때 이반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러한 공감하는 마음,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 즉 형제[자매]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인류는 비로소 ‘형제[자매]로서’ 하나가 된다.
윤리 체계로서의 종교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의 ‘기독교’는 종교적 제도라기보다는 하나의 가치관 체계로서 기능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그들이 종교를 믿기 때문에 그 종교의 윤리관을 따라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윤리를 실천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관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기독교’라는 단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와 작가가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기독교’라는 단어는 아마도 그 기표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영성’이며, 이는 신자들의 물질적 욕구의 절실함과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공공연하게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현대 한국의 개신교에도,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기독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당대의 기독교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일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말하는 ‘신(神)’도 기독교적 인격신으로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즉, 작가가 말하는 기독교가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라기보다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적 관점이라고 본다면, 그가 말하는 신 역시 기독교적 의미의 신이라기보다는 형제[자매]애가 무한히 확대된 상태로서의 어떤 ‘전체성’ 혹은 ‘무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종교적’ 주제는, ‘무한한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윤리적 언명으로 전환된다. 물론 이 전체라는 것이 개별자들을 단박에 엮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슬 모양으로 하나씩 하나씩 연결시키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이 기적을 일으킬 리는 없다. 조시마 장로의 ‘썩는 냄새’가 바로 이를 증언한다. 왜냐하면 자연 전체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신론이 전혀 아니다. 영성이란 굳이 인간적 형상을 가진 존재와 마주하고 있지 않더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손에 대한 책임과 시간의 연대
과학과 이론 때문에 인간이 잃어버린 것, 혹은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던 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연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것을 보편적 틀로 포획하는 추상적인 이론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접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연대이다. 조시마는 소위 말하는 보편적 사랑이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사랑과 오히려 상충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111)” 이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알료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직접 발로 뛰며 만나왔던 것이다. 한 인간의 보편적 철학이 세계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윤리는 구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연대에 하나의 차원을 추가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시간’이다. 여기에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연대의 독특성이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작가의 윤리적 언명은 보편성을 거부하면서도 또한 다시금 보편적인 것일 수 있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의 서문에서 이 일대기는 두 개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작가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첫 번째 소설뿐인데, 이 소설의 말미에서 우리는 알료샤와 아이들의 테마가 그 다음 편에서 이어질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두 번째 소설을 통해 그가 자신의 윤리관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할 생각이었다는 점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추측을 좀 더 강화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 테마의 중요성이다. 알료샤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독립적인 두 이야기, 즉 ‘어른들’의 이야기와 ‘아이들’의 이야기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전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타락한 인간들에게 파 한 뿌리를 선사하는 것, 그들을 윤리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일류샤와 아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즉, 일종의 교육을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제시한 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화석화된 인간인 ‘어른’이 구원받는 길이고, 하나는 ‘아이들’이 구원받는 길이다. ‘어른’은 최소한 친부 살해범으로 기소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할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 없이는 정신적 변화를 쉽게 일으키지 못한다. 작가는 드미뜨리를 통해 이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길 하나뿐이라면 그의 윤리관은 실천적 힘을 지니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들의 길을 제시한다. 아이들은 고통이 아닌 교육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지식의 배움이 아니라 감정의 배움이어야 한다. 알료샤가 꼴랴에게 ‘가르친’ 것도 바로 사랑과 공감이었다(964-974).
바로 알료샤-아이들의 연대가 도스토예프스키적 연대의 독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의식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확장되고 전파된다. 공동체 의식은 무엇보다도 후손에 대한 책임과 기억이다. 후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작가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소설의 에피그래프에 잘 드러나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9)” 실제로 악의 화신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가장 크게 잘못한 일 역시 아들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이다. 표도르는 자신에게 세 아들이 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했다. 후에 아들 드미뜨리가 그루셴까를 두고 아버지와 다툴 때에 그는 엄청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루셴까가 새로운 연적인 폴란드 인과 떠나버리자 그는 놀랍게도 연적에 대한 증오나 질투심 없이 순순히 양보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방해하지 않고 양보하겠어. 나도 양보할 수 있단 말이야.(700)” 그 후에 변호사의 증언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드미뜨리는 아마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적이 바로 아버지 표도르였기 때문에 더욱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 기억하지 않은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드미뜨리의 증오는 동정을 받고 다소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건의 발단이 아버지 표도르가 자식들의 존재를 망각한 데 있는 만큼, 이 소설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가장 중대한 윤리적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윤리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망각하지 않고 잘 기억해두어야 하며, 이러한 기억을 새로운 연대의 기초로 삼을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직접 ‘타인이 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는 타인과 온전한 연대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고립된 채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를 이루어야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타인의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적 차원의 연대이다. 어른은 과거에 누구나 아이였으며, 아이 또한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면 그는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 또한 자라서 어른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처럼 연대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다.
나의 오만을 극복하는 방법은 최대한 많이 나의 경험들을 꺼내어 보고, 그 때의 감정들을 되살려 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어느 때에 나는 분명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타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을 것이고, 그 때의 나의 감정을 기억해냄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기억의 윤리이다. 언어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 그 한 쪽 극단이 보여주는 사악함의 심연, 개별자의 차이를 사상하는 연대와 이성적인 사회 변혁 기획의 허구성.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윤리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끝)
1) F. M. 도스또예프스끼, 이대우 옮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하)>>, 열린책들, 2002. 너무 익숙해져서 쉽게 바꿀 수 없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명 표기는 책에 나온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페이지만 적어 넣었다.
["러시아 명작의 이해" 레포트를 조금 수정한 것.]
'희망의 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구호는 "맑스가 아니라 진보"였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맑스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그저 맑스냐 비-맑스냐 하는 틀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맑스가 아니면서도 맑스적인 다른 이론들로 맑스주의를 전개/확장하려는 것인데, 이런 노력은 사실 맑스주의 이론이 탄생한 순간부터 계속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를 읽어도 푸코를 읽어도, 알튀세르 맑스주의 혹은 푸코 맑스주의라는 식. 기준은 진보다. 맑스가 아니라 진보.
그러나 내 생각엔, "진보가 아니라 윤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유비적으로, '진보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진보/보수의 틀을 상대화하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삶과 세상의 극히 일부분, 즉 '정치적인'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틀은 삶에 대한 여러 잣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잣대는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여기에서는 이 '일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치환해 버린다.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진보'라는 말은 삶을 정치(학)화한다. 단순화한다는 말이다. 이론은 단순하면 경제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삶이 단순한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내 삶뿐만 아니라 남의 삶까지가 문제로 된다면 이는 극도로 세심/소심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첫 문단의 유비를 하나 더 끌어오자면, "진보가 아니라 윤리"라는 말은 '진보가 아니면서도 진보적인 다른 이론들로 진보 개념을 전개/확장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전개보다는 확장에 방점이 찍힌다. 맑스와 진보의 불연속성보다는 진보와 윤리의 불연속성이 단연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격한 변환은 아니다. 묶였던 매듭이 '급격하게' 풀려 봤자, 뭐 대단히 격한 장면이 연출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mbti 검사를 또 했다. 그러니까, 총 네번째로 한 거다. 그런데 네 번 다 다르게 나왔다!
INFJ → ENFJ → INFP → INTP의 순서로 변했는데, 왜 이렇게 변했는지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mbti(사실은 정식 검사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떠도는 야매 검사지만)에 대한 나의 신뢰는 아직 유효!
INTP에게 어울리는 직업으로 철학자가 있으니 어쨌든 만족이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이나 자야겠다.
) 방문자수가 2000명을 넘었다. 블로그를 연지 5개월이 되었으니까 하루 평균 10명도 넘는 방문객이 다녀간다는 말인데...
누구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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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글을 기초로 몇 가지를 확인해 두고 싶어서 퍼 왔다."그 분이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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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명백하게 해 두고 싶었다." <- 이거 내가 올해 2월에 쓴 거야. 거봐, 원래 이랬잖아.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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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런가....( ")(" )...ㅋ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