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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3/26
    지하철 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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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3/15
    무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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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3/08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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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2/16
    남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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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2/14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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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2/11
    황우석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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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2/08
    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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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2/08
    성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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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2/07
    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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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2/04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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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막차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숙제를 뒤로 하고 집으로 출발했다. 막차를 탈 정도로 늦게까지 있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주말인 걸 깜박해서 계산을 잘못한 결과로 결국 안산행 막차에 겨우 올랐다. 시간은 12시가 다 되어갔다. 방송에서는 자꾸만 이게 막차라는 걸, 이거 놓치면 집에 못 간다는 걸 강조했고, 그게 고맙기도 했지만 짜증도 났다. 평일 막차와는 달리 앉을 자리도 있어서 불평은 미뤄두고 남은 숙제를 펴 들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남자가 바퀴 달린 바구니를 끌며 열차 칸의 중앙으로 왔다. 수도 없이 본 장면이다. 그래도 뭘 파나 싶어서 슬쩍 봤는데, 흔한 건 아니었고 이리저리 돌려서 맞추는 큐빅 모양의 퍼즐이었다. 피곤하거나 술취해서 자는 사람도 많았기에 열차 안은 꽤나 조용했고, 그 침묵을 비집어 열며 행상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순간, 시간이 꽤나 늦었다는 생각, 행상인이 돌아다니기는 좀 힘들 만큼 늦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남자는 오프닝 멘트를 끝내고 제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큐빅이다. 바구니 안에도 같은 게 잔뜩 들었다. 12시 근처였다. 평범하디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그리고 그 바구니 안에 과연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다. 몇 년 전의 대구 지하철 사고의 악몽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온 몸을 휘감았다. 12시인데. 퍼즐을 팔며 돌아다닐 리가 없다. 게다가 이건 막차고, 여기 탄 사람들은 다들 필사적으로 탄 거다. 그 아저씨가 퍼즐을 소개하려고 팔을 번쩍 들 때마다 소름이 확 끼쳤다. 갑자기 아저씨가, "야이 새끼들아, 지금껏 니네 사람 우습게 봤지!"하며 퍼즐을 바닥에 냅다 던지고, 그 외피 속에 들어있던 폭탄이 터지며 불길이 치솟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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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졌을까

무뎌진건지 그 반대인지도 잘 모르겠을 만큼, 무뎌졌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었다. 굳이 '그 반대'라고 하고는 그걸 '예민해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민망하기 때문이다. 재수없는 표현이지만,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은 알았달까. 재수없는 표현일 수도, 그냥 내가 재수없어진 것일 수도. '생각하기'의 기준을 높게 잡다 보니, 그게 두려워졌고, 그래서 잘 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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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길을 걸어가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는데, 요전에는 그나마 그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리느라 머리를 쥐어 짜면서 보내던 황금같은 밤시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깐 컴퓨터가 집에 없어서, 아예 생각들이 줄줄 밖으로 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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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오늘 새터책 회의에 들어가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악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가, 납득이 안 간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도 안다, 전략적인 과장이었다. '고민하는 척' 하는 게 제일 싫어서 그랬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는 과장이 아니기도 하다.

 

권력은 최대한으로 버려야 한다. 물론 생존법으로서의 권력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의 수혜를 입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그 말은 유효하지 않다. 그 사람은 바로 '남자'다.

 

여기서 물론 '남자'는 여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적 소수자도, 장애인도 아니며, 학벌이 좋으면 설상가상이요, 결과적으로 재산도 있고 성격도 좋으니 첩첩산중인 인간의 종류를 말한다. 버려야 할 권력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중에 한 가지 권력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문제는 이 다종다기한 권력들의 '한 곳으로 모이려는 경향성'이다.

 

이 권력의 결집체를 나는 그냥 '남자'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교(개신교)중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을 그냥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건 나의 어법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스스로를 나머지의 '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권력은 또 다른 권력을 찾아 모여드니 그 이름(이를테면 남자)으로 보통 지칭되는 영역 내에서 실제로 차지하는 비율도 가장 높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남자'의 경우, 모든 권력들이 그의 어깨 위로, 혹은 발 밑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는 움직이는 권력덩어리다. 많은 사람들의 그의 존재만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건 억지로 둘째치더라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들이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사회적 기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나는 말한다. "'남자'는 존재 자체가 해악이다."

 

그래서 '남자'는 '권력을 어떻게 버려야 하나' 하는 질문에 앞서 다음을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 살아야 하나.'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까뮈가 "진정으로 철학적인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자살"이라고 했을 때 그는 제대로 짚은 것이다. 단 하나뿐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가 출발점(혹은 도착점)은 맞다.

 

무기력하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 무기력을 곧장 딛고 일어서는 '남자'들에게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진 사회적 책임의 무게는 알량한 두 개의 다리 근육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이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해서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하지 않음으로써 바꾸어지는 부분이 꽤 크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권력의 자신감은 정말 메스껍다.

 

덧) 조금 고민하다가, 이것 역시 일부분이라는 걸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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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역량이다. 즉,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을 갖는다는 말이다. 역량은, 정지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체로 활동이거나 활동 중에 있으므로,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작용이다.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은 '작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말과 같다. 또, 이 활동은 항상 무언가를 생산해낸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의 힘, 제도의 힘, 즉 권력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그것은 비생산적이며 본질적으로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관련이 없으므로 존재의 고양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역량의 한 측면일 뿐이며, 다른 측면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한 크기의 '변용될(affected)[영향 받을] 수 있는 역량'이 자리하고 있다.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생산'과 '감수성'은 동일한 역량의 두 측면이다. 이 때 역량의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으려면 이러한 역량의 내부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작용은 단일한 순수 자발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 같기 때문에 오히려 그 내부가 불분명하고, 변용은 구조를 파악하기가 더 쉽다.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자.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전체의 크기는 그 변용의 종류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변용에는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이 있다. 능동적 변용은 내부적 원인에 의한 것, 수동적 변용은 외부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수동적 변용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될 뿐이며, 따라서 역량의 결여를 표시한다. 능동적 변용들이 바로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직접 관련되며, 내적인 원인을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충만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즉,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구성하는 변용들 중에, 능동적 변용의 비율이 높을수록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총합이 증가하며, 이는 동시에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증가를 의미한다. 반대로 수동적 변용이 상대적으로 많을 경우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이 감소한다.

 

그러나 인간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은 수동적 변용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외부적인 어떤 것과 수동적으로 맞닥뜨린 다음에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왜냐면 인간 실존에 비해서 자연의 힘은 무한히 크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동성이란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문다.

 

이 수동적 변용은 다시금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물론 우연히 마주친 것이지만 그 신체의 본성이 나의 신체의 본성과 일치한다면, 즉 그것이 나의 신체와 '양립 가능'하고 '합성 가능'하다면, 그래서 나의 신체와 그 신체가 합성되어 새로운 신체를 생산해낼 수 있다면, 그 변용은 '좋은', '유용한' 변용이 된다. 이처럼 본성이 일치하는 신체들의 만남에 의한 변용을 '기쁜 수동적 변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좋은' 변용이라는 말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이 커졌다는 말, 즉 능동적 변용의 상대적 비율이 증가했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기쁜 수동적 변용이 수동적 변용을 능동적 변용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우연히 마주친 신체와 나의 신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즉 능동성의 원리로 전환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안에도 존재하는 어떤 것을 다른 신체와의 공통성으로 찾아냈으니, 이것은 외부적 원인이면서도 내부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 신체들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신체들은 우연히 만난 다른 신체를 제약하거나, 분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으로 도약함으로써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을 증가시키지만, 슬픈 수동적 변용은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을 맺을 뿐이므로 실존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감소를 가져온다.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 원리적으로 인간들은 본성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주침은 그것이 우연적이더라도 기쁜 것이어야 하며, 이렇게 찾아낸 인간들 본성 내부의 '공통적인 것의 관념'이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전환하여 능동성의 원리를 낳고, 이어서 인간이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게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 능동적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한에서만 맞는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발적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한 인간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인간 신체는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 변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서로 다른 본성들을 갖게 되며, 서로에게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역량이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또한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다르며, 서로간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그 만남들은 서로의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킨다.

 

섣불리 대안을 생각하기에는 여운이 너무나 강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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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시나리오

'윤리적' 문제로 섀튼과 결별했던(그에게 결별을 당했던) 황우석 박사는 줄기세포연구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인 미국의 P 박사와 손을 잡고 연구를 계속한다.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MBC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만다. 혹은 그렇게 발표된다. 진실은 그 누구도 몰랐으나, 그저 대중들이 'MBC 드라마 안보기 운동'을 일사불란하게 전개하는 동안, 클럽박스에 올라오는 드라마 영상 파일의 다운로드 횟수는 단연 MBC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이었다. 연구는 수월하게, 그러나 특별한 성과 없이 계속되었고, 언론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 번씩 별 것 아닌 자잘한 실험의 성공을 대서특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이 계속해서 유지되도록 엄호한다. 사실, 대중의 관심은 '유지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대한민국 대중들은 이제 신문의 정치란보다는 모든 일간지에 신설된 교양과학란을 본다. 대통령보다 더욱 큰 영향을 행사하는 그 인물의 자리는 종신직이었다. 문제는 P 박사가 특허와 관련해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문제였는지는 이 세상 모든 언론이 없어져야지만 명확해질 것이었으나, 어쨌든 문제는 사후적으로 일파만파 커져갔다. 황우석은 참담한 표정으로 P 박사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그 발표문의 마지막 문장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형적으로 증폭된 분노의 심지에 점화의 불꽃을 당겼다. "과학기술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미국에 의한 이 수모를 우리 국민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중들 앞으로 미국의 경제적 보복 의혹에 관한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급기야 황우석이 청와대에 친히 왕림하시어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하며 '국력 증강'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 후, 국방비의 비율이 국민의 분노 게이지 만큼이나 엄청나게 올라간다. '전쟁막는세상' 등에서 목숨을 걸고 성명서를 발표하였지만, 오히려 거시적 수준의 테러를 당하고 잠수한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가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명동의 한 가게에 난입해 사냥용 엽총으로 7명을 살해한다. 문제는 그들이 3명의 미국인, 2명의 독일인, 1명의 캐나다인, 1명의 혼혈아(캐나다-한국)였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정당화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치를 각오를 다진다.

 

후에 학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파시즘을 새롭게 정의하였고 역사적 사례를 추가하였으며,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만큼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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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

결정론적 요소들이 무한히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 체계는 결정론적인가?

 

어떤 운동이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이 부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존재하는 예측 불가능한 대부분의 운동들은, 일정한 법칙으로 환원은 가능하지만 무한히 많고 다양한 하위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요소들이 운동 안에서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내부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서로에 작용하는 중력이 서로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만약 세 개의 별들이 모인다면, 그 별들간 중력의 상호작용을 모두 계산해 정확한 운동을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복잡계의 운동들을 예측할 때 우리는 오직 근사치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 오차범위 내에서이겠지만)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도 생긴다. 단순히 기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무한히' 많을 경우에는 기술의 진보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법칙이 부재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이것을 과연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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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구별

누군가가 여성이라면(또는 남성이라면) 그는 왜 여성(또는 남성)일까? 또는 그가 여성이라면 그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여성이라는 것일까? 이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며,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각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의 동일적인 성이 하나의 개체에게 할당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잠정적인 것이고(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있어서 문제지만), 아무리 잠정적이더라도 굳이 그렇게 동일적인 성을 각 개체에게 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가능한 주장들의 접근 통로를 모두 열어두고 일단 밑그림을 그려보겠다. 왜냐면 이 작업은, '권력의 포기는 가능한가'라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다. 대중들은 '생물학'이라는 잣대를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요인은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지배적인 힘을 갖는다. 생물학 안으로 들어가 더욱 정확하게 짚어 보자면, 성을 구분하는 이 생물학적 잣대는 바로 염색체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느 정도 논점이 존재하는데(물론 이것은 학적 의견이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정도의 객관성은 가지겠지만), 가령 호르몬의 분비량같은 생물학 내부의 다른 기준이 더욱 일반적인 성 구분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혹은 이러한 다른 요인들은 성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학적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또한, 이 염색체의 모양은 그것이 성기의 모양이나 체형 등을 결정하는 요인이기에 중요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염색체가 부여한 성과는 다른 성의 외관을 후천적으로 획득했다면, 이 역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해진다.

 

성은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개체는 이 과정을 통해 성적 구별을 획득한다기 보다는 경직된 성 구별 관념을 형성한다. 또한 법적인 기록을 통해 그러한 성 정체성을 공적으로, 그리고 고정된 것으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장에 다양한 기준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두 번 반박당하는데, 한 번은 '객관적 과학'을 자처하는 생물학, 또는 그 생물학을 신봉하는 대중들에 의해서이고, 또 한 번은 개체가 사회화를 겪으며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 경직된 성 관념에 의해서이다. 이 강요는 후에 자율성으로 둔갑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으면, 그 다음에는 사회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을 차례다. 그러면 개체는 자신의 '여성임'을 '자율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법적인 '여성임'에 의해 보증된다.

 

그 과정에서 성은 자아에 의해 의된다. 이 의식은 이처럼 사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아의 성적 의식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과 대부분 일치하게 되지만(그 일치에 일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바로 그 사회적 성 관념이 이 불일치에도 일조할 수 있다). 각각의 자아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의식하려면,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틀, 즉 여성과 남성의 이항 대립적 체계 속에 자신의 성을 끼워 맞춰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간적 성 정체성을 가진 개체는 혼란을 겪게 되며, 좀 더 일반화하자면 모든 개체들이 어느 정도 혼란을 느낄 것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 경직되어 있을수록, 자아가 의식하는 자신의 성과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이, 더욱 강하게 일치하거나 불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성은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을 남성으로 경험하는 어떤 심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쨌든 나는 여성이니까'라고 그 개체가 생각함으로써, 혹은 그 개체의 언어적 틀 안으로 포착되지 않음으로써 의식되지 않은 상태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역시 성 구분의 요인이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직되어 있을수록 이런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이 기준은 너무 포괄적이며, 또한 실재하는지 의심스럽고, 그러므로 공시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성은 타인에 의해 의식될 수도 있다. 이로 인한 성 구분은 다른 모든 기준에 의한 것들과 어긋날 수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며 법적으로도 여성이고, 심지어 자아에 의해서도 여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외관상 남성이면 대부분의 타인들은 그를 남성으로 의식한다. 그와 동시에 남성에 해당하는 사회적 이미지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권력이 발생한다. 왜냐면 권력은 개체-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의식되는 성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보통 옷을 입고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인식에 관한 것이지만,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옷 안의 신체가 다른 성의 외관을 갖게 된 경우와도 문제를 공유한다. 이는 염색체의 모양이 지시하는 성과 신체적 외관이 가리키는 성이 서로 다른 경우와의 연관성을 가지며, 이것이 선천적 불일치라면 수술 등에 의한 것은 후천적 불일치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불분명하며 법적으로는 남성이고 자아에 의해서도 남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심지어는 그가 사회적 생활을 남성의 모습으로 영유한다고 해도, 그 생물학적 외관에 의해서 타인들은 그를 여성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물론, 수술 등의 조치를 일부러 취해서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면(그러면 물론 스스로 여성으로 규정할 것이며, 사회적 생활도 여성의 모습으로 영유하겠지만), 타인이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가 바로 원하던 바였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한 명의 '남성'에게 있어서, 그가 생물학적 기준을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고 해도, 사회적인 성적 규정을 무시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고 해도, 심지어 스스로를 여성으로서 정체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출함으로서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일단 타인에 의해 자신이 남성으로 의식되기만 한다면 여전히 그 역겨운 권력은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매우 결정적이다. 이 세상 속에서 그를 만나는, 혹은 그를 스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남성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바로 그 순간 권력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과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폭력적인 권력 행사는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답하겠다.

 

[이 내용은 '권력의 포기란 가능한가'라는 더욱 큰 문제의 일부분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쓴 것은 그러한 문제를 설득력있게 제기하기 위한 하나의 자세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에 대해서 논박할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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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Columbine: Whose Fault Is It?)

 

이 지상에서 초창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냉혈적인 살인을 고무시키기 위한 책이나 영화, 게임, 음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카인이 아벨의 머리를 박살내던 날 그가 필요했던 유일한 동기는 자신이 가진 인간의 폭력성향이었으나 성경을 문학으로 해석하든 신-그것이 뭐든지 간에-의 마지막 말로 해석하든 상관없이 기독교는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죽음과 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반라의 죽은 사내가 대부분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목에 걸려있고 우리는 그것을 평생 당연시해왔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인가, 아니면 절망의 표상인가? 이것이 나타내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자살 사건은 또한 죽음의 아이콘의 탄생, 명성을 위한 청사진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모든 숭고한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가스펠의 어디에도 지성이 미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의 밴드를 이러한 절망과 위선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었거나 결코 깨닫지 못했다. 나 마릴린 맨슨은 미국이 살인자들을 타임지의 커버면에 실어 인기 영화배우 못지않은 평판을 부여한다는 슬픈 사실에 기뻐해 본 적이 없다. 제시 제임스에서 찰리 맨슨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는 초창기부터 범죄자들을 대중적으로 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딜런 클레블랜드와 에릭 해리스, 이 망할 것들의 사진을 모든 신문의 1면에 실어 그들을 마치 영웅인양 미화하였다. 아직 지각이 없는 아이들이 이 둘을 새로운 우상으로 섬기게 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 인류를 파멸할 수 있는 폭탄의 제조에 갈채를 보내고, 또 텍사스에서 우리의 대통령의 머리가 박살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시대는 더욱 과격해지지 않았다. 단지 시대가 텔레비전 미디어에 좀더 많이 포착되고 있을 뿐이다. 남북전쟁이 전혀 문명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텔레비전이 있었더라면, 분명 그들은 거기에 가서 영국의 다이아나 왕세자빈의 차를 맹렬하게 쫓던 것처럼 남북전쟁 현장을 취재하고 아마도 거기에 참여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들은 역겨운 독수리처럼 시체를 찾고 그것을 착취하고 엉망으로 만들어 그것을 필름에 담아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제공한다. 이것은 끝없은 인간의 우둔함의 탐욕스러운 현시이다.

콜로라도주의 리틀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돌 하나를 던져보라. 그러면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맞힐 것이다. 우리가 무책임하게 아이들이 총을 소유하는 것을 내버려 둔 바로 그 당사자들이다. 우리가 바로 텔레비전을 켜놓고 아이들이 총으로 무엇을 하는지 시시각각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들이다. 한사람의 죽음은, 특히 그 죽음이 알고 지내고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라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TV 연속극의 마지막회를 시청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쓰지 않는다. 미디어가 뱀처럼 살며시 들어서서 눈물 한방울도 놓치지 않고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인터뷰하고 장례식을 중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녀사냥은 이 법석에 뒤이은 것이다.

인간은 무질서를 가장 두려워한다. 이 아이들이 단순한 흑백논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희생양이 필요했다. 해리스와 클레볼드가 검은 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마치 나 마릴린 맨슨처럼 화장을 하고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 보도된 적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추측은 삽시간에 과장되어 나를 세상의 모든 악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두 천치들은 화장을 하지도, 나나 고쓰(Goth)의 복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 아이들이 실제로 즐겨들었던 음악은 KMFDM과 람슈타인(Rammstein)과 같은 음악들이었는데 미디어는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것을 골랐던 것이다.

양식있는 저널리스트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리스와 클레볼드가 나 마릴린 맨슨의 팬이 아니며 그들이 나의 음악을 싫어하기조차 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이 설사 팬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그들에게 전혀 변명거리가 된다거나 음악이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제임스 휴버티가 맥도날드에서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엇이 그를 고무시켰는지 알아 본 사람이 있는가? 티모시 맥베이는 무엇을 즐겨 시청했는가? 데이비드 코레쉬나 짐 존스는 또 어떤가? 당신은 오락물이 킴 킹클을 고무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오레곤 주의 스프링필드에서 살인을 위해 사용한 총을 사주었다는 사실을 비난해야 하는가? 무엇이 빌 클린턴을 자극하여 코소보 시민들을 박살내고 있는가? 모니카 르윈스키가 그에게 한 말 탓이었을까? 살인은, 그것이 베트남에서든, 존스보로(Johnsboro)나 아칸소에서든 상관없이, 그저 살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정당한 명분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당한 명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누간가가 차를 몰거나 총을 살 나이가 되면 이것은 또한 그 자신이 차와 총을 가지고 행하는 행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혹은 만약 그가 아직 십대라면 그로 하여금 18세에 걸맞는 도덕적 수준을 갖추게 시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미국은 죄를 전가할 아이콘을 즐겨 찾는다. 내가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사람들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활동과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신의 기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우스꽝스럽게도 사람들은 벌써 그렇게 빨리 앨비스와 짐 모리슨, 오지를 잊어버렸을 정도로 순진하다. 이들 모두는 한때 똑같은 해묵은 논쟁과 검열, 편견에 시달렸다. 내가 'Lunchbox'라는 곡을 쓴 일이 있는데 어떤 저널리스트는 그것을 총에 대한 노래로 해석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노래의 내용은 괴롭힘을 당하는 한 아이가 도시락통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도시락통은 내가 어릴 적 놀이터에서 무기삼아 사용하던 것이기도 하다. 79년에 철제 도시락은 비행 청소년들이 위험한 무기로 사용할 소지가 있다고 해서 금지되었다. 나는 'Get Your Gunn'이란 곡도 썼다. 제목의 철자에 두 개의 'n'이 있는 것은 그 곡이 플로리다에서 낙태반대론자에게 살해된 닥터 데이빗 건(David Gunn)에 대한 것으로 곡의 'Gunn'이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이다니, 그 사건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위선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이들 노래들의 다소 긍정적인 메시지는 선정적 미디어가, 내가 실제로는 스스로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들인데도, 오히려 그것들을 조장한다고 오역하는 부분이다. 현재 모든 사람들이 리틀튼에서의 사고와 같은 것들을 어떻게 방지할 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에이즈를, 세계대전을, 공황을, 자동차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우리는 자유로운 국가에 살지만 그 책임과 함께 개인적인 책무의 부담도 있다. 아이에게 무엇이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옳고 그런 것인지를 가르치기 전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지배하는 법이 무엇인지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당신을 지옥을 믿지 않음으로써 항상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죽음과 감옥은 벗어날 수 없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은 수많은 정보를 직접 접할 수 있다. 그들은 헛소리로 이루어진 세상속에 자신들이 살고있다는 사실을 직접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무언가를 보다 낫게 바꾸고 운영하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어버렷고 인터넷과 과학기술 때문에 어디로 벗어난 길이 없다. 사람들은 어디에도 똑같다. 때때로 음악이, 영화가, 책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느낀다는 것을 알게하는 유일한 매체가 된다. 나는 항상 지배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 괜찮거나 더 낫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라. 오하이오 출신의 어떤 괴짜가 꽤 괜찮은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의지력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기만 하다면 당신이라고 해서 안될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온갖 TV쇼로부터 출연요청을 받았지만 모두 거부했다. 미디어의 광기에 뛰어들어 그것에 맞서 나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는 독선적 비난의 목소리를 이용해 명예를 쫓는 저널리스트나 기회주의자들을 이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오락물을 비난하다니, 종교도 결국 최초의 오락물이 아닌가?

사람들은 의상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영원한 팬의 세계에 자신을 바친다. 클린턴이 그의 적을 제거하고 진정한 정치적 형태의 폭탄을 퍼붓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는 것에 어느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뉴스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오락물이 비난받아야 하는가? 나는 미디어계의 논평자들의 지성을 촉구하고 싶다. 그들의 사건 취재내용이 바로 우리가 보아온 것 중 가장 끔찍한 오락물이 아니었던가?

나는 사람들이 전미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가 너무 벅찬 상대라서 컴퓨터 게임이나 기타 오락물에 대신 시비를 건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쟁은 내가 레코드나 표를 파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논객이다. 나는 감히 그리고 기꺼이 나의 생각으로 맥빠지고 공허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에 도전하는 음악과 비디오를 만든다. 나의 작품에는 우리가 살고있는 미국을 진단하고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다고 비난하는 악마가 실제로는 우리 각자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항상 노력했다. 어느날 별안간 세상의 끝이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의 끝을 경험해 온 것이다.

 

99년 5월 28일, 마릴린 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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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무런 바탕 없이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학술서일수록 더 그렇다. 서평을 이미 찾아 읽어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저자의 학문적 성향이라든가, 최소한으로는 그/녀가 속해 있[다고 간주되]는 학파나 무슨무슨주의, 그리고 그것들의 주요한 주장과 개념 등에 대해 알고 있거나 입소문으로라도 들어보았을 확률이 크다. 나름의 평가도 아마 내려 보았으리라.

 

안타깝게도, 이렇게 얻은 선입견으로 우리는 그 책의 주장을 미리 재단한다. 책을 직접 읽어 내려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악화된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자신의 선입견과 배치되는 부분은 눈에 안 들어오거나 심지어 반대로도 읽히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거나 억지로 그 틀에 끼워맞춰진다.

 

이러니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다. 그저 몇 가지 개념들을 얻었고,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들과 새로 얻은 이 개념들을 사용해 뭔가 있어 보이는 '명언'을 가공해낼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학문적 성향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학문도 독서도 아니며, 자신의 신변잡기의 어줍잖은 일반화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탈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탈주, 저 책을 읽어도 탈주,라고 진지하게 해석해내며, 그 책은 탈주를 못했네, 그래서 좋은 책이 아니네,라며 거리낌없이 평가한다.

 

개념과 범주들은 편의를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의가, 더욱 철저하게 공부할 힘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대한 내용을 개념과 범주로 축약하여 표현하고 소통하라는 말이지,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 생각하지 않고 개념들을 편하게 막 사용함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없음을 가리라는 뜻이 아니다.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는 후자의 편의가 난무하고 있으므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생각들이 없다. 그러니 세미나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남는 건 자존심과 배짱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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