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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24
    원하는 대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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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8/18
    작가/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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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8/14
    사랑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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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8/12
    sweet is the mel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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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8/08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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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03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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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7/30
    야간비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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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7/29
    "학교로"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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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7/28
    육하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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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7/27
    What is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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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살기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산다. 사방을 둘러싼 의무의 벽 속에서도, 그나마 하고 싶은 걸 한다. 밥값을 아껴서 딸애 학원비로 쓰기도 하지만, 원해서 그리 하는 것이다. 밥값을 아끼는 것보단 딸애 학원을 못 보내는 게 더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을 피하고자, 그렇게 한다. 그들은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걸 찾아 나선다. 그들이 보기에는,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원하는 걸 찾는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항상 원하는 대로만 산다. 주어진 조건 아래서는 원하는 대로만 산다. 그러나 진짜로 원하는 걸 찾는 사람들은 결코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살 뿐이다.

 

물론 조건이란 건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의 원인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이다. 대신에, 우리에겐 학문-종교가 필요하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사람들은 일상을 견뎌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어떤 일의 발견은 그 일 이외의 모든 일의 의미를 삭제한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말은, 예외적인 능력 없이는 공허한 말이다. 의미를 겹겹으로 쌓아 두텁게 만드는 화려한 수사들에 속고만 살 수는 없다. 이점에서, 책은 꼭 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쉽게 속이기 때문에.

 

악세사리라고, 이 모든 게. 나는 치장하는 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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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간

1. 전에 미당에 관한 고종석의 글을 인용했었다. 정치적으로(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미당의 삶과, 문학적으로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여주는 그의 시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혹은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혹은 일관된 설명을 위해 사실을 훼손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글이었다.

 

2.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넘어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위대한 언어를 쏟아내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작품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즉, 자기가 썼되 그 결과물에는 자신이 표현/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죄와 벌>>은 누구의 사상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을 빌어 세상에 외출한 것일까. 그 누구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그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보다 깊고 풍부하며 복잡하게 사고할 줄 아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일까?

 

3. 텍스트에서 작가의 무의식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 작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구별되는가? 징후는 작가에게만 적용되는가? 작가는 이 세상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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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음악을 모아두는 곳을 마련했어요.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생길 때마다, 그저 혼자라도 듣고 또 들으면서 끙끙대기만 했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네요. 네이버에 새로 블로그를 만들어서 열심히 노래들을 수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들러주세요.

 

요 옆의 <놀러오세요~>를 클릭하시고, "뮤직뮤직사랑방"을 또 한 번 클릭하시면 됩니다.^^

 

이게 다, 아래 애슬린 데비슨의 노래 덕분이에요. 이렇게 새 집까지 장만할 줄이야. 하지만 자꾸 이렇게 말하면 기대가 너무 커져서 노래가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음, 노래가 사실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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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 is the melody


 

aselin debison - sweet is the melody(2002)

 

쥬얼 이후로 이런 느낌은 처음인 듯.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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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어찌어찌하다가 생각났는데, 예전에(대학에 오기 전에) 끄적거렸던 것들을 폴더 하나에 모아서 그걸 숨김 파일과 같은 형식으로 속성을 변경해서 "내 문서" 폴더 아래에 쳐박아 두었었다. 물론, 끄적거렸던 것들 중에서도 숨겨야만 했던 것들, 그러니까 은밀한 고민이나 비밀, 개똥철학 같은 것들이 여기에 들어있다.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최근에 발견했다.

 

어제는 인터넷이 안 돼서 하릴없이 쭉 읽었는데, (예상대로) 매우 재미있었다. 과거의 나를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보는 일은 참 간질간질하면서도 스릴있다. 부끄러우면서도 대견하다. 이런 글쪼가리들도 나중에 보면 그런 느낌을 줄까? 언제까지 그럴까. 나는 언제까지 변할까. 이런 변화도 성장일까.

 

이런 글이 있다. 2000년 9월 12일에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1 가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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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해도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살아서 더 오래 숨쉬는 만큼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는 다르겠지. 모든 일을 머리를 쓰며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복잡해 질 수밖에. 타고난 성격이라 고칠 수는 없어도 숨길 수는 있다. 남을 의식하며 숨기려고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복잡한 사고 과정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렇게 따지면 난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위해 태어났나보다. 남들은 '이중인격'이라 말하지만 난 나만의 신조가 있다. 'Grin and Bear it' - 웃으며 참자는 말이다. 내 본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난 평생 '다듬어진 나'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반년 동안은 잘 버텨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자신이 있다. 이미 밝혔듯이 난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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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특히 '이중인격'이라는 말에 집착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조금은 낙관적인 갈등이었나보다. 다음은 같은 해 11월 22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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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의 행동기술의 범위와 수준은 중학교 3학년 1학기 말 때를 절정으로 하고 있다. 나는 유머있어 보였으며 친근해 보였고 카리스마있어 보였으며 지적인 듯이 보였고 사려깊은 것처럼 보였고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남이 힘들어 할 때 같이 힘들어 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자존심있어 보였고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아는 듯이 보였다. 나는 나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해 주었고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으리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한 편과 다른 편의 중재적 역할을 하였고 그 어느 쪽에 속하든지 어색하지 않았으며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했고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잘 이끌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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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은 너무 재수없어서 생략. ㅎㅎ

 

아, 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똑같은 것 같다. 지금이랑. 저게 다 해당된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는 방식이라든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라든지. 혹은 어떤 기질이나 성향이.

 

그냥 이렇게 멍하니 서서, 어디로부터 왔나, 어디로 가고 있나,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이 짓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건 고2 여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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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과 장래 희망…… 삶의 목적을 정해 놓고 삶을 시작한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이야기다. 삶을 사는 과정에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리라. 바로 지금, 난 장래희망이 불분명하다. 내가 커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확고한 개념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싶어하는 것도 있고, 되고 싶은 것도 있다. 하지만 어느 때 부턴가 높다랗기만 한 현실의 장벽을 실감하게 되고, 어쩌면 나 자신이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무엇인가가 꼭 되어야 하겠다는 욕심이라든가 야망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욕심은 꼭 필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려는 욕심을 야망이라 한다. 아집이나 독선 따위와는 다른 것이다. 야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취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청소년기에 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눈부신 가능성을 썩혀버릴 수 있는 위험한 행위인 것이다. 청소년기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일단 그것에 도전해 보는, 가장 용기있고, 또 아름다운 인생의 시기이기에……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번 쯤 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즉, 이것이 나를 잠시 거쳐가는 생각일 뿐인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재미있다. 거쳐가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신경을 쓰고. 그만큼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왜 내가 청소년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런 생각이 거쳐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공 ― 나는 이 단어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 것이다. 그것이 아무 의미없는 물질적 충족만을 구하는 행위임을 - 그리고 그것의 종점임을 -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다. 겨우 이따위 물질적 풍요를 나의 생의 목적으로 세우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너무나 아쉽기 때문이다. 나의 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다. '인격의 완성'이다. 아니, 그보다는 평생을 두고 인격의 완성을 위해 자신을 도야하는 한 인간의 평온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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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좀 슬프다. 이건 겉으로만 단호할 뿐, 체념의 정서가 그득하다. 이런 생각은, 그 때의 내 감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릿한 기억.

 

그 시절에 난 왜 그리도 많은 것에 치이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하고 받아들이려 했을까. 그러면서도 왜 나를 둘러싼 악조건보다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무기력을 더 미워했을까. 미워하면서도 그걸 끝끝내 감싸안고 어쩔 줄 몰라했을까.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라도 분명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얻었던 그 만족감, 그런 만족감이 내가 하루 하루를 버텨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니. 이 고민들은 이제와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었기에 돌아갈 곳을 잃고 허둥대는 작은 짐승처럼, 보기에 못내 안쓰럽지만,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내 몸집보다도 더 커다란 짐을 등에 지고 낑낑대는 나의 모습... 작은 방에서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끄적이며 한숨을 내쉬던 그 시절의 내가 한없이 못나 보이고 바보같고 철없고... 가끔은 사랑스럽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준 것은 누구일까. 누구인지 모르지만 감사드린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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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내 글을 기억하는지. /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도, 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나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는. …… 이제 자명한 것은, 나의 한계는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종교적', 또는 '신앙적' 한계라는 것이다. 굳이 한계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정말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기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 한없이 무지하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했다.  …… 빛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는 조그만 희망을 아껴서 먹고 사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이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그 뜻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너무나 무지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래서 좌절하지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연명하는,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리라는 마음 속 깊은 소망을 안고 사는, 한마리의 작고 순한 짐승이다. […] (2003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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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알바가 모두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내 블로그에는 3,000번째 손님이 다녀간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에다 알바로부터의 해방감까지 더해지면서 내 심장은 불이라도 붙은 듯 쿵쾅거리며 머리카락이나 손톱 끝 모세혈관까지 들뜬 감정을 배달하고,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다보면 어느새 몸서리쳐지게 배가 고픈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덧) 디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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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야간비행
김애란 | 소설가

상경 후, 처음 방을 구하러 다니던 날의 날씨를 기억한다. 8월이었고, 숨막히게 무덥던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비지땀을 흘려가며 낯선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서울 물정이라면 둘 다 무지했고, 가진 돈은 터무니없이 적고, 날은 대책없이 덥기만 했던 어느날. 그럴듯한 방을 얻지 못해 소가지를 부리고 있던 나를 길가에 한참 세워두고, 작열하는 도시 한복판에 서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땀과 파운데이션이 뒤범벅된 탓에 진흙처럼 금방 흘러내릴 듯했다. 우리는 너무 지친 나머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다. 이상하리만치 천장이 높은, 깊고 서늘한 방이었다. 다행히 조건이 맞아 어머니는 내게 몇평의 애잔함을 떼어줄 수 있었다.

그날의 기다랗던 정오, 이 땅의 지난하고 유구한 상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방을 구한 뒤, 머리를 맞대고 함께 팥빙수를 먹었다. 깊은 피로 사이로 투명하게 부딪치던 얼음 소리, 하얗게 질려 있던 여름 하늘.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수도(首都)의 볕은, 누군가를 미워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강렬했고,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연신 땀을 훔쳐댔다. 나는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셋방을 스무번도 넘게 옮겼다는 아버지의 일기(日氣)도, 그날의 20세기 태양도, 저렇게 크고 어지러웠을까?’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날 우리들 머리 위로 떠 있던 크고 둥근 해를, 그 대낮의 따가웠던 서울의 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매일 몸을 뉘었던 방은 어둡고 선득한 곳이었다. 작은 문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면, 세로로 놓인 관처럼 깊은 내부가 시원하게 나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방에 책상과 컴퓨터 등 참으로 학생다운 가재를 들여놓았고, 네모난 가구들이 만들어내는 깔끔한 각을 보며 흡족해했다. 나는 자주 밥을 거르고, 밤을 새우고, 술을 마셨지만, 스무살의 내 몸은 지나치게 건강해 아무 때고 벌떡벌떡 일어나 놀러 나갈 수 있었다. 음악은 잘 듣지 않았고, 책은 늘 엎드려서 읽었다. 빨래를 자주 미뤘고, 어머니에게 가끔 세금을 속였던 것도 같다.

내 몸엔 아직 읽고 쓰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았지만, 이따금 나는 대가리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보곤 했다. 시인이신 나의 스승이 좋은 문장이라도 한번 칭찬해주는 날엔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웃었다. 나는 그 작고 불편한 방에 신을 벗고 들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쉬러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방을 구하던 날 이후 영원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던 태양,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록 고향을 떠나오긴 했지만 나는 내 몫의 그 작은 어둠과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그 육면(六面)의 어둠 안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하늘에서 닻처럼 내려온 형광등 줄의 흔들거림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좋아했다. 딸깍이는 스위치 소리 한번에 세계는 일순 조용해졌고, 나는 반듯하게 누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나간 빛을 한껏 빨아 통통해진 야광별들이 천장에서 총총 빛나고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도, 루카치의 별도 아닌, 납작 엎드려 가까스로 빛나던 형광색 스티커들.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무더기였다. 나는 이사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이 닿지 않았고, 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아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고 생각하며,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나만한 크기의 몸을 가졌을 허약한 자취생들,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들, 월급과 적금, 어디론가 송금할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젊은이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갖고 있었을 많은 사람들. 몇년째 책장에 꽂아둔 채 절대 읽지 않은 오디쎄우스는 아직 내게 '떠난다'는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 언제 이렇게 많이 떠나오고 또 떠나갔던 것일까?'

모처럼 찾아온 고요 속에서, 아늑한 어둠을 방해하는 발광물질을 보며, 나는 퍽 심란해했다. 아무래도 좋을 마음으로 '야광별 따위라니!'라며 투덜거렸던 것도 같다. 그런데도 나의 독립과 사생활의 의미는 어떤 통속성 안에서 저 별빛처럼 자꾸만 초라해지는 듯했다. '당신들의 계급'이 아닌 '우리들의 취향'이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고, 이 방이 내 방도 당신의 방도 아닌 우리들의 방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들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라고 안도할 수 있는 어떤 범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잘도 기어들어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오랜 시간이 지나고, 결국 나는 별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약하고 조금쯤은 천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빛 가까이에 있으려고 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 빛 역시 내가 알아야 할 빛 중에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곳을 떠난 지 몇해가 지났고, 그 방은 이미 헐려 사라졌지만, 이따금 나는 내 성정의 경박하고 아름다운 어떤 부분, 내가 껴안는 상스러움의 어느 부분들은 그 별들의 영향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우울한 기질의 학자들처럼, 빛을 흡수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 야광별빛의 영향을 받으며, 나는 길을 걷고, 물건을 사고, 가끔은 그 대가리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전화가 오면 다시 벌떡 일어나 놀러 나갔던 것은 아닐까 하고.

 

[창비주간논평(http://weekly.changbi.com/)에서 퍼왔음. 7월 25일자. 이 글 읽고 소설집도 사서 읽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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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학교로&quot;에 대한 추억

꽤나 오래된 기억이라 아마도 미화되었을테지만, 학교로 선본이 총학을 잡았었던 처음 두 해는 참 좋았었다. 이른바 태평성대였다. 그러니까, 총학이 무슨 뻘짓을 할 지 조마조마해 할 필요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아니면서도(정확히는 "아니기 때문에") 총학이라는 것이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그걸 잊어가고 있다. 아쉬운 일.

 

지금 총학은 "운동권이 싫어요!"를 온 몸을 던져가며 외치고 있다. 그 외침은 눈물나게도 진실되어 보인다. 안쓰럽다.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대립은 이제 아주 거대한 감정싸움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 대립(혹은 투쟁), 갑자기 완전히 멈춘다고, 지구가 두쪽날까? 혹은, 노동자들이 피를 토하고 쓰러질까? 지금보다 사정이 악화될까? 나는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문득, 아주 래디컬한 상식주의가 그리운 시점. 혹은, '아주' '래디컬한' '자유주의'.

 

덧) 지금 총학도 '관악 2만 학우' 운운하더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는다더니. 봉준호의 괴물이나 보러 가야겠다.

 

덧2)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는,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치료제이면서도(즉 현실에 가장 필요한 '운동'이면서도), '운동'이 될 수 없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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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하원칙

몸은 편하고 마음은 힘든 날.

 

1년 전까지 썼던 글들 중에는 건질 게 없다. 내 감정을 토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짓말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꼭 끄집어내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마도 기억 속의 사건과 기억 밖에서 직접 대면함으로써. (지금은 기억 속에서만 자꾸 대면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 이게 더 어렵다.

 

점심밥과 저녁밥을 먹는 1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땅 밑에 있었다.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소설을 읽고 싶다. 누군가 반쯤은 농담투로 권해준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든가. 기왕이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나는 육하원칙의 대부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도 '산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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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Poetry

What is Poetry

 

 

When we refer to “language”, we should be aware that there are kinds of languages in use, that differ mainly in function. In our everyday lives, we communicate information about the weather, the newly published books, or the best way to get a good score, through the language which is said to be in practical use. Otherwise language persuades us to buy some clothes, to visit our friend's house, or to vote for a candidate. This time, it is in argumentative use. Lastly, there is another use of language that seems to exclusively relate to literature. The language in literary use creates concentrated and organized experience in many works of literature. The language in poetry may be called, as in other kinds of literature, to be in literary use.

 

             As to the poetry, it is experience. When it is said to be experience itself, it is not about experience. Actually, ordinary language is frequently about experience, so the language can have it as its object. The poetic kind of language, however, may not regard to experience as a thing or an object which can be transferred, handled, and analyzed. This kind rather composes, constructs, and synthesizes experience. While ordinary language analyzes experience and puts it under the process of our intellects, poetic language synthesizes it and opens its ways to our senses, emotions, imaginations, as well as intellects, or to something else if later discovered.

 

             As far as the language is “poetic”, here is made the distinction between poetry and other kinds of literature. The poetry is condensed in form when compared to other kinds. When a work of literature narrates something about an experience, it simultaneously hides something as it gives us impression that it provides everything we need to recompose in our mind the reality of the experience. Though, a poem is condensed in that it does not pretend to present everything, so it does not hide anything. It retains the comparatively intact reality in relatively short length and by limited words, which is ironical. But this distinction needs to be understood as a continuum which takes purely poetic language and purely ordinary one as its two extreme ends. They may exist only in our thought, and actual works of literature may be holding their position between the two. In other words, other genres of literature tend to use ordinary language more, but the poetry rarely does.

 

             We may pay more attention on our definition of poetry by considering a brief and famous statement that MacLeish suggested in his poem, “Ars Poetica”: “A poem should not mean / But be.” It seems that the verb “mean” implies, for to mean is to mean something, the existence of the meaning or the content of the poem, so experience is contained in the poem and may be, when readers read it, transferred to them as a thing, a bundle of words, independent of the poem itself. The verb “be”, on the other hand, shows that there is no other thing which is on a different level than the poem. A poem is something itself. So, a poem should not express out of itself something like content, reality, or experience, but should be experience itself.

 

             If a poem is divided into two parts—the poem itself, and the thing it expresses—, the latter is said to be transferred to a reader through the medium of language. As the very part of the reality can be carried through the language, the poem cannot help but distort the reality, or the experience. If a poem is, however, not divided, there is nothing conveyed to a reader. What is given to the reader is the poem itself, and s/he may only participate in it. As we read a poem, we participate in an event and experience it, constructing it with our other prior experiences. We participate in the being of the poem.

 

             Experience, as far as we consider it as the meaning contained in a poem, is presented through the medium of language that, to some degree, necessarily reduces and distorts the reality. If we strive to catch what the poem really means, there is always something leaking and we are sure to misunderstand or partly understand it. To experience is somewhat different. Its concern is the reality before it is articulated by language. When reading a poem, we should not try to turn the whole thing into some language-concerns, but rather make it our own experience which is not articulated and interpreted. What is the most difficult is that we should do it with language. So, poetry is a struggle to grasp the reality itself through the language that never touches it without distorting it. The struggle may not come to an end.

 

 

[영미시강독 수업에서 레포트로 제출했던 것을 아주 약간 손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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