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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무런 바탕 없이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학술서일수록 더 그렇다. 서평을 이미 찾아 읽어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저자의 학문적 성향이라든가, 최소한으로는 그/녀가 속해 있[다고 간주되]는 학파나 무슨무슨주의, 그리고 그것들의 주요한 주장과 개념 등에 대해 알고 있거나 입소문으로라도 들어보았을 확률이 크다. 나름의 평가도 아마 내려 보았으리라.

 

안타깝게도, 이렇게 얻은 선입견으로 우리는 그 책의 주장을 미리 재단한다. 책을 직접 읽어 내려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악화된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자신의 선입견과 배치되는 부분은 눈에 안 들어오거나 심지어 반대로도 읽히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거나 억지로 그 틀에 끼워맞춰진다.

 

이러니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다. 그저 몇 가지 개념들을 얻었고,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들과 새로 얻은 이 개념들을 사용해 뭔가 있어 보이는 '명언'을 가공해낼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학문적 성향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학문도 독서도 아니며, 자신의 신변잡기의 어줍잖은 일반화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탈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탈주, 저 책을 읽어도 탈주,라고 진지하게 해석해내며, 그 책은 탈주를 못했네, 그래서 좋은 책이 아니네,라며 거리낌없이 평가한다.

 

개념과 범주들은 편의를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의가, 더욱 철저하게 공부할 힘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대한 내용을 개념과 범주로 축약하여 표현하고 소통하라는 말이지,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 생각하지 않고 개념들을 편하게 막 사용함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없음을 가리라는 뜻이 아니다.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는 후자의 편의가 난무하고 있으므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생각들이 없다. 그러니 세미나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남는 건 자존심과 배짱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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