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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역량이다. 즉,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을 갖는다는 말이다. 역량은, 정지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체로 활동이거나 활동 중에 있으므로,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작용이다.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은 '작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말과 같다. 또, 이 활동은 항상 무언가를 생산해낸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의 힘, 제도의 힘, 즉 권력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그것은 비생산적이며 본질적으로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관련이 없으므로 존재의 고양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역량의 한 측면일 뿐이며, 다른 측면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한 크기의 '변용될(affected)[영향 받을] 수 있는 역량'이 자리하고 있다.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생산'과 '감수성'은 동일한 역량의 두 측면이다. 이 때 역량의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으려면 이러한 역량의 내부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작용은 단일한 순수 자발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 같기 때문에 오히려 그 내부가 불분명하고, 변용은 구조를 파악하기가 더 쉽다.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자.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전체의 크기는 그 변용의 종류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변용에는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이 있다. 능동적 변용은 내부적 원인에 의한 것, 수동적 변용은 외부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수동적 변용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될 뿐이며, 따라서 역량의 결여를 표시한다. 능동적 변용들이 바로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직접 관련되며, 내적인 원인을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충만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즉,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구성하는 변용들 중에, 능동적 변용의 비율이 높을수록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총합이 증가하며, 이는 동시에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증가를 의미한다. 반대로 수동적 변용이 상대적으로 많을 경우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이 감소한다.

 

그러나 인간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은 수동적 변용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외부적인 어떤 것과 수동적으로 맞닥뜨린 다음에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왜냐면 인간 실존에 비해서 자연의 힘은 무한히 크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동성이란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문다.

 

이 수동적 변용은 다시금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물론 우연히 마주친 것이지만 그 신체의 본성이 나의 신체의 본성과 일치한다면, 즉 그것이 나의 신체와 '양립 가능'하고 '합성 가능'하다면, 그래서 나의 신체와 그 신체가 합성되어 새로운 신체를 생산해낼 수 있다면, 그 변용은 '좋은', '유용한' 변용이 된다. 이처럼 본성이 일치하는 신체들의 만남에 의한 변용을 '기쁜 수동적 변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좋은' 변용이라는 말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이 커졌다는 말, 즉 능동적 변용의 상대적 비율이 증가했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기쁜 수동적 변용이 수동적 변용을 능동적 변용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우연히 마주친 신체와 나의 신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즉 능동성의 원리로 전환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안에도 존재하는 어떤 것을 다른 신체와의 공통성으로 찾아냈으니, 이것은 외부적 원인이면서도 내부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 신체들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신체들은 우연히 만난 다른 신체를 제약하거나, 분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으로 도약함으로써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을 증가시키지만, 슬픈 수동적 변용은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을 맺을 뿐이므로 실존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감소를 가져온다.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 원리적으로 인간들은 본성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주침은 그것이 우연적이더라도 기쁜 것이어야 하며, 이렇게 찾아낸 인간들 본성 내부의 '공통적인 것의 관념'이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전환하여 능동성의 원리를 낳고, 이어서 인간이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게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 능동적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한에서만 맞는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발적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한 인간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인간 신체는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 변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서로 다른 본성들을 갖게 되며, 서로에게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역량이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또한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다르며, 서로간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그 만남들은 서로의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킨다.

 

섣불리 대안을 생각하기에는 여운이 너무나 강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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