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06
    평택 1
    pug
  2. 2006/04/21
    채식
    pug
  3. 2006/04/06
    스피노자의 판글로스 비판
    pug
  4. 2006/04/01
    코기토 명제의 도출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1)
    pug
  5. 2006/02/16
    남자(1)
    pug
  6. 2006/02/14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pug
  7. 2006/02/11
    황우석 시나리오
    pug
  8. 2006/02/08
    성의 구별
    pug
  9. 2006/02/04
    독서
    pug
  10. 2006/02/01
    글쓰기
    pug

평택 1

어제 날맹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는데, 평택에서 벌어진 일들 뿐만 아니라, 날맹이 지금껏 해 왔던 일들, 또 평택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내 기억으로만도 1년은 넘게 자보를 붙이고 퍼포먼스를 했던 적극적 평화행동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했던 그러한 활동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자극으로 다가왔나보다.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그간 나는 집회에 가지도 않았고, 운동판에서 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그런 척을 한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었다. 집회는 가기가 싫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강연회, 토론회, 퍼포먼스, 액션 등등에 참여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지 않고 버티려면, 사실은 꽤나 정교하고 탄탄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더 확신이 없었다. 집회하는 방식이 싫다고 집회에 가지 않는 게 과연 맞나. 가지도 않으면서 괜히 잔소리만 늘어놓고, 오히려 운동을 갉아먹는 꼴이 아닌가. 내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옹호하면서도 항상 찝찝했는데, 이 일로 그간 나를 정당화해 왔던 많은 말들이 중심을 못 잡고 한꺼번에 허물어져 버렸다. 나는 뭐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꼭 몸으로 활동이나 집회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기획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투쟁과 너무나 관계없는 것으로 보일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정치적 예속'이 아닌, 좀 더 넓고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예속'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투쟁이다!"라고 외치기는 싫었다. 그저 어느 정도의 부채감을 느끼며, 그 부채감이 나를 계속해서 자극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근본적인 추동력은 바로 이것이기를 바랬다.

 

또 다른 것은, 집회 방식에 대한 나의 느낌인데, 이것은 거의 혐오에 가깝다. 이 느낌을 꺼내어서 풀어놓아야 할 것이고 추상적이나마 대안도 제시해야겠지만, 생산적인 논의는 조금 뒤로 미루어 놓자. 그저, 나는 이러한 자기 정당화의 기제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직후에, 무엇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바로 어제 당일 저녁 7시에 있었던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기제들이 허물어졌다는 말에 내가 방점을 찍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단단한 조각들은 엉성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허물어졌을 뿐이며, 어제 집회를 다녀오는 와중에 또다시 어느 정도 재구성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 재구성의 과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채식

"이렇게 지구를 착취하면서 지구의 암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 역시 없지는 않았지만."

 

그 부채감에 짓눌려 죽고 있는 중. 누군가 와서 '그건 무게가 있는 게 아니니 허리를 꼿꼿이 펴면 된다'고 말해 주었으면.

 

"채식주의자들의 존재는 내가 단순히 '그냥' 고기를 먹고 있는 게 아니라 '굳이'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각을 시켜주었다."

 

"그건 내게 너무 먼, 나보다 훌륭한 다른 사람의 문제였다."

 

게다가, '난 다르게 훌륭한거야, 훌륭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고 변명을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까. 나의 말에 내가 질식하는거야. 나는 아마도 앨리스처럼 작아지고 있나봐.

 

"그래서 이 정도의 실천만으로도 뿌듯해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사실 별로 뿌듯해하지도 않았다. 그만 좀 씨니컬하시지. 그게 없다면 뭔데? 뿌듯해해도 괜찮아, 그냥 좀 더 나을 뿐인 것도 아니야, 난 이렇게 해야만 해.

 

"식생활이 외식에 의존하는 만큼, 나는 곧장 동물의 살점들을(그러니까 고기를) 안 먹는 대신 버린다."

 

정당화와 비판 사이의 칼날. 머릿 속에서 수 만 마리의 새들이 푸드덕.

 

"난 내가 육지 동물의 고기를 덜 먹는 만큼 해양 동물의 고기를 먹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는데도 말하지 못했다. 뭘 어쩌라는 거야! 제길.

 

"내가 이미 합법적인 선택지들을 편안하게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윤리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이제 그만.

 

정착하고 싶다. 나는 흄을 읽지 말아야겠다.

 

(따온 말들은 "언니네 방"의 한 글에서,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 슬프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피노자의 판글로스 비판

볼테르의 [캉디드]에 나오는 판글로스의 목적론적 주장을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비판해보시오.
1) A4 1장 이내로 작성하되, 판글로스와 스피노자 사이의 대화 방식으로 글을 꾸며볼 것.
2) 다른 사람들 것을 베끼면 F를 줄 거예요. (-_-b)

 



어쩌다가 스피노자가 100년쯤 늦게 태어나서, 1755년 리스본 지진의 폐허를 앞에 두고 판글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캉디드는 폐허 속으로 음식을 좀 찾으러 갔다.

 

판글로스: 정말 엄청난 지진이로구나.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잘 되어 있는 것이지. 이 지진 역시도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이 세상의 일부인 것이네.


스피노자: 아니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 대체 뭡니까.


판글로스: 원래 모든 사물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네. 이 코를 보게나. 코가 없으면 안경을 쓰지 못할 게 아닌가. 그러니 코는 우리가 안경을 쓸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네. 마찬가지로 돌은 성벽을 만들기 위해 있고, 돼지는 먹히기 위해 있는 것이니, 이 지진도 무언가를 위해서 있는 것이네.


스피노자: 그렇다면 저기 저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무언가를 위해 있습디까?


판글로스: 그 개개인에게는 불행이로되 이것은 필시 인간 전체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네. 왜냐면 목적을 가진 모든 사물은 필연적으로 더 좋은 목적을 원할 것이고, 결국 가장 좋은 목적을 얻게 되니까 말일세. 이 모든 것은 필요 불가결한 것일세.


스피노자: 개인들의 불행이 오히려 더 큰 목적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이 지진의 목적은 뭡니까.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판글로스: 자네도 참. 그건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왜냐면 그건, 이미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일세. 그건 앞으로 차차 알 수 있을 테니, 내 말에 일일이 토를 다는 수고는 그만두게나. 어차피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세상, 무어 그리 의심이 많은가.


스피노자: 의심할 수밖에요. 지금 당신은 결과를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어찌하여 이미 일어난 일의 원인입니까? 그리고, 더 큰 목적과 더 작은 목적이란 게 있다는 모양인데, 이를테면 돼지를 기르는 농가에서 돼지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 음식물들은 돼지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돼지 자신은 또한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니, 그렇다면 그 돼지는 무엇하러 먹이를 먹었다는 말씀입니까?


판글로스: 그거야, 살이 피둥피둥 쪄서 인간에게 더 많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것이 돼지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이야. 이처럼 모든 사물에는 목적이 있네. 이것이 바로 모든 일의 원인이 아닌가. 그 원인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 원래부터 있는 것일세.


스피노자: 철학자여! 당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모든 사물들이 목적을 갖는다고 해 놓고는, 모든 사물들이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말 속에서 나는 인간의 목적 이외의 것은 찾지를 못하겠더이다. 게다가 자기도 모르고, 또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는 원인에다가 목적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다니, 그런 것이 사물들의 참된 원인을 구하는 철학자의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판글로스: 어쨌든 나는 저 위대하신 형이상학자인 라이프니츠를 따라 내 입장을 유지하겠네. 철학자로서 말하건대, 그는 틀릴 수 없어!

 

스피노자는 판글로스를 떠나 한숨을 크게 쉬며 독백을 한다.

 

스피노자: 자신의 의지만을 의식하고 있을 뿐, 그 의지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그러고서도 철학자라고 착각하고 있다니. 모든 일에서 놀라며 신만을 찾으며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 우중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속에서 이 세상을 그저 정당화하고 있을 따름이로구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기토 명제의 도출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도 코기토 명제의 도출 과정에 대해 의문점들을 좀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몇가지는 아래 학생의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을 읽은 뒤에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가는 것이 있어 이렇게 질문 드립니다. 회의를 중요한 철학적 방법으로 설정한 데카르트인 만큼, 그의 명제에 대한 제 의심에 대해서도 그가 기특하게 생각해 주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

 

먼저 데카르트 자신은, "나는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낼 때 사용한 논증 구조에 대해 별다른 부연을 하지 않은 듯 합니다. 이 논증은 "어떤 것이 사유한다는 사실은 바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것이 사유한다는 사실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유한다"는 말은, "어떤 것이 [이미] 존재하며, 그렇기에 그것은 사유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는 명제로의 확장에 의해서 그 사유 행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유 행위의 증명으로부터 존재의 증명으로 이어지는 추론 과정은, 그 두 증명의 엄격한 선후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는 사유한다"는 명제에 대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후행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앞의 명제로부터 뒤의 명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논리적인 것이든, 직관적인 것이든, 혹은 하나의 절대적인 흐름이든 간에,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가정된 이 세계에서, 심지어 악령의 가설을 통해 수학적 사실마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상황에서는,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왜곡, 어떤 방향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유한다"는 명제에 대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선후관계상 앞선 것으로 생각할 경우에만 우리는, "나는 사유한다"의 확실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나는 존재한다"의 절대적 필연성을 선취된 것으로서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추론과정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암묵적으로 도입하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것은 그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명제에 엄격히 따르자면, 어떤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즉 전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그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것 역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의 경우, 그는 "내가 의심한다"는 그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는, 의심하는 행위의 행위자인 "나"의 존재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의심한다"라는 명제 역시 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 합니다. "프랑스 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미리 증명하지 않은 채로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명제의 참/거짓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도 않는 프랑스 왕에 대해서 그가 대머리다, 혹은 아니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나는 의심한다"는 명제는, 어떤 특별한 이유, 이를테면 그것은 의식 외부의 대상과 관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의식의 내부로부터 알려진다는 사실 등에 의해서, 위에서 우리가 논증 과정 속에 암묵적으로 들어와 있는 것으로 동의했던 명제─행위자의 사유는 그 행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명제─의 도움 없이도 증명이 가능하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의 도움 없이는 어떤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로써 여전히 "나"의 존재여부는 불투명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것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명제에 동의할 경우, 우리는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 없이 "나는 사유한다"는 것을 참으로 간주하지 못할 것이며, 그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나는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하나의 완결된 사고과정 속에서 도출한 결론인 만큼, 그 과정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쉽게 오류가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읽고 지적해 주세요.

 

그럼 다음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덧) 지난 수업에 몸이 좋지 않아서 가지 못했거든요, 죄송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자

오늘 새터책 회의에 들어가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악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가, 납득이 안 간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도 안다, 전략적인 과장이었다. '고민하는 척' 하는 게 제일 싫어서 그랬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는 과장이 아니기도 하다.

 

권력은 최대한으로 버려야 한다. 물론 생존법으로서의 권력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의 수혜를 입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그 말은 유효하지 않다. 그 사람은 바로 '남자'다.

 

여기서 물론 '남자'는 여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적 소수자도, 장애인도 아니며, 학벌이 좋으면 설상가상이요, 결과적으로 재산도 있고 성격도 좋으니 첩첩산중인 인간의 종류를 말한다. 버려야 할 권력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중에 한 가지 권력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문제는 이 다종다기한 권력들의 '한 곳으로 모이려는 경향성'이다.

 

이 권력의 결집체를 나는 그냥 '남자'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교(개신교)중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을 그냥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건 나의 어법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스스로를 나머지의 '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권력은 또 다른 권력을 찾아 모여드니 그 이름(이를테면 남자)으로 보통 지칭되는 영역 내에서 실제로 차지하는 비율도 가장 높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남자'의 경우, 모든 권력들이 그의 어깨 위로, 혹은 발 밑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는 움직이는 권력덩어리다. 많은 사람들의 그의 존재만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건 억지로 둘째치더라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들이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사회적 기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나는 말한다. "'남자'는 존재 자체가 해악이다."

 

그래서 '남자'는 '권력을 어떻게 버려야 하나' 하는 질문에 앞서 다음을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 살아야 하나.'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까뮈가 "진정으로 철학적인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자살"이라고 했을 때 그는 제대로 짚은 것이다. 단 하나뿐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가 출발점(혹은 도착점)은 맞다.

 

무기력하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 무기력을 곧장 딛고 일어서는 '남자'들에게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진 사회적 책임의 무게는 알량한 두 개의 다리 근육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이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해서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하지 않음으로써 바꾸어지는 부분이 꽤 크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권력의 자신감은 정말 메스껍다.

 

덧) 조금 고민하다가, 이것 역시 일부분이라는 걸 덧붙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역량이다. 즉,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을 갖는다는 말이다. 역량은, 정지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체로 활동이거나 활동 중에 있으므로,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작용이다.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은 '작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말과 같다. 또, 이 활동은 항상 무언가를 생산해낸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의 힘, 제도의 힘, 즉 권력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그것은 비생산적이며 본질적으로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관련이 없으므로 존재의 고양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역량의 한 측면일 뿐이며, 다른 측면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한 크기의 '변용될(affected)[영향 받을] 수 있는 역량'이 자리하고 있다.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생산'과 '감수성'은 동일한 역량의 두 측면이다. 이 때 역량의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으려면 이러한 역량의 내부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작용은 단일한 순수 자발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 같기 때문에 오히려 그 내부가 불분명하고, 변용은 구조를 파악하기가 더 쉽다.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자.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전체의 크기는 그 변용의 종류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변용에는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이 있다. 능동적 변용은 내부적 원인에 의한 것, 수동적 변용은 외부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수동적 변용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될 뿐이며, 따라서 역량의 결여를 표시한다. 능동적 변용들이 바로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직접 관련되며, 내적인 원인을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충만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즉,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구성하는 변용들 중에, 능동적 변용의 비율이 높을수록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총합이 증가하며, 이는 동시에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증가를 의미한다. 반대로 수동적 변용이 상대적으로 많을 경우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이 감소한다.

 

그러나 인간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은 수동적 변용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외부적인 어떤 것과 수동적으로 맞닥뜨린 다음에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왜냐면 인간 실존에 비해서 자연의 힘은 무한히 크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동성이란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문다.

 

이 수동적 변용은 다시금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물론 우연히 마주친 것이지만 그 신체의 본성이 나의 신체의 본성과 일치한다면, 즉 그것이 나의 신체와 '양립 가능'하고 '합성 가능'하다면, 그래서 나의 신체와 그 신체가 합성되어 새로운 신체를 생산해낼 수 있다면, 그 변용은 '좋은', '유용한' 변용이 된다. 이처럼 본성이 일치하는 신체들의 만남에 의한 변용을 '기쁜 수동적 변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좋은' 변용이라는 말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이 커졌다는 말, 즉 능동적 변용의 상대적 비율이 증가했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기쁜 수동적 변용이 수동적 변용을 능동적 변용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우연히 마주친 신체와 나의 신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즉 능동성의 원리로 전환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안에도 존재하는 어떤 것을 다른 신체와의 공통성으로 찾아냈으니, 이것은 외부적 원인이면서도 내부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 신체들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신체들은 우연히 만난 다른 신체를 제약하거나, 분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으로 도약함으로써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을 증가시키지만, 슬픈 수동적 변용은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을 맺을 뿐이므로 실존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감소를 가져온다.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 원리적으로 인간들은 본성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주침은 그것이 우연적이더라도 기쁜 것이어야 하며, 이렇게 찾아낸 인간들 본성 내부의 '공통적인 것의 관념'이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전환하여 능동성의 원리를 낳고, 이어서 인간이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게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 능동적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한에서만 맞는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발적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한 인간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인간 신체는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 변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서로 다른 본성들을 갖게 되며, 서로에게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역량이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또한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다르며, 서로간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그 만남들은 서로의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킨다.

 

섣불리 대안을 생각하기에는 여운이 너무나 강한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황우석 시나리오

'윤리적' 문제로 섀튼과 결별했던(그에게 결별을 당했던) 황우석 박사는 줄기세포연구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인 미국의 P 박사와 손을 잡고 연구를 계속한다.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MBC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만다. 혹은 그렇게 발표된다. 진실은 그 누구도 몰랐으나, 그저 대중들이 'MBC 드라마 안보기 운동'을 일사불란하게 전개하는 동안, 클럽박스에 올라오는 드라마 영상 파일의 다운로드 횟수는 단연 MBC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이었다. 연구는 수월하게, 그러나 특별한 성과 없이 계속되었고, 언론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 번씩 별 것 아닌 자잘한 실험의 성공을 대서특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이 계속해서 유지되도록 엄호한다. 사실, 대중의 관심은 '유지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대한민국 대중들은 이제 신문의 정치란보다는 모든 일간지에 신설된 교양과학란을 본다. 대통령보다 더욱 큰 영향을 행사하는 그 인물의 자리는 종신직이었다. 문제는 P 박사가 특허와 관련해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문제였는지는 이 세상 모든 언론이 없어져야지만 명확해질 것이었으나, 어쨌든 문제는 사후적으로 일파만파 커져갔다. 황우석은 참담한 표정으로 P 박사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그 발표문의 마지막 문장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형적으로 증폭된 분노의 심지에 점화의 불꽃을 당겼다. "과학기술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미국에 의한 이 수모를 우리 국민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중들 앞으로 미국의 경제적 보복 의혹에 관한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급기야 황우석이 청와대에 친히 왕림하시어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하며 '국력 증강'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 후, 국방비의 비율이 국민의 분노 게이지 만큼이나 엄청나게 올라간다. '전쟁막는세상' 등에서 목숨을 걸고 성명서를 발표하였지만, 오히려 거시적 수준의 테러를 당하고 잠수한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가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명동의 한 가게에 난입해 사냥용 엽총으로 7명을 살해한다. 문제는 그들이 3명의 미국인, 2명의 독일인, 1명의 캐나다인, 1명의 혼혈아(캐나다-한국)였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정당화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치를 각오를 다진다.

 

후에 학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파시즘을 새롭게 정의하였고 역사적 사례를 추가하였으며,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만큼 유명해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의 구별

누군가가 여성이라면(또는 남성이라면) 그는 왜 여성(또는 남성)일까? 또는 그가 여성이라면 그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여성이라는 것일까? 이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며,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각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의 동일적인 성이 하나의 개체에게 할당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잠정적인 것이고(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있어서 문제지만), 아무리 잠정적이더라도 굳이 그렇게 동일적인 성을 각 개체에게 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가능한 주장들의 접근 통로를 모두 열어두고 일단 밑그림을 그려보겠다. 왜냐면 이 작업은, '권력의 포기는 가능한가'라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다. 대중들은 '생물학'이라는 잣대를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요인은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지배적인 힘을 갖는다. 생물학 안으로 들어가 더욱 정확하게 짚어 보자면, 성을 구분하는 이 생물학적 잣대는 바로 염색체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느 정도 논점이 존재하는데(물론 이것은 학적 의견이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정도의 객관성은 가지겠지만), 가령 호르몬의 분비량같은 생물학 내부의 다른 기준이 더욱 일반적인 성 구분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혹은 이러한 다른 요인들은 성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학적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또한, 이 염색체의 모양은 그것이 성기의 모양이나 체형 등을 결정하는 요인이기에 중요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염색체가 부여한 성과는 다른 성의 외관을 후천적으로 획득했다면, 이 역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해진다.

 

성은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개체는 이 과정을 통해 성적 구별을 획득한다기 보다는 경직된 성 구별 관념을 형성한다. 또한 법적인 기록을 통해 그러한 성 정체성을 공적으로, 그리고 고정된 것으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장에 다양한 기준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두 번 반박당하는데, 한 번은 '객관적 과학'을 자처하는 생물학, 또는 그 생물학을 신봉하는 대중들에 의해서이고, 또 한 번은 개체가 사회화를 겪으며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 경직된 성 관념에 의해서이다. 이 강요는 후에 자율성으로 둔갑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으면, 그 다음에는 사회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을 차례다. 그러면 개체는 자신의 '여성임'을 '자율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법적인 '여성임'에 의해 보증된다.

 

그 과정에서 성은 자아에 의해 의된다. 이 의식은 이처럼 사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아의 성적 의식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과 대부분 일치하게 되지만(그 일치에 일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바로 그 사회적 성 관념이 이 불일치에도 일조할 수 있다). 각각의 자아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의식하려면,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틀, 즉 여성과 남성의 이항 대립적 체계 속에 자신의 성을 끼워 맞춰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간적 성 정체성을 가진 개체는 혼란을 겪게 되며, 좀 더 일반화하자면 모든 개체들이 어느 정도 혼란을 느낄 것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 경직되어 있을수록, 자아가 의식하는 자신의 성과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이, 더욱 강하게 일치하거나 불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성은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을 남성으로 경험하는 어떤 심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쨌든 나는 여성이니까'라고 그 개체가 생각함으로써, 혹은 그 개체의 언어적 틀 안으로 포착되지 않음으로써 의식되지 않은 상태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역시 성 구분의 요인이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직되어 있을수록 이런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이 기준은 너무 포괄적이며, 또한 실재하는지 의심스럽고, 그러므로 공시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성은 타인에 의해 의식될 수도 있다. 이로 인한 성 구분은 다른 모든 기준에 의한 것들과 어긋날 수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며 법적으로도 여성이고, 심지어 자아에 의해서도 여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외관상 남성이면 대부분의 타인들은 그를 남성으로 의식한다. 그와 동시에 남성에 해당하는 사회적 이미지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권력이 발생한다. 왜냐면 권력은 개체-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의식되는 성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보통 옷을 입고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인식에 관한 것이지만,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옷 안의 신체가 다른 성의 외관을 갖게 된 경우와도 문제를 공유한다. 이는 염색체의 모양이 지시하는 성과 신체적 외관이 가리키는 성이 서로 다른 경우와의 연관성을 가지며, 이것이 선천적 불일치라면 수술 등에 의한 것은 후천적 불일치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불분명하며 법적으로는 남성이고 자아에 의해서도 남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심지어는 그가 사회적 생활을 남성의 모습으로 영유한다고 해도, 그 생물학적 외관에 의해서 타인들은 그를 여성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물론, 수술 등의 조치를 일부러 취해서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면(그러면 물론 스스로 여성으로 규정할 것이며, 사회적 생활도 여성의 모습으로 영유하겠지만), 타인이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가 바로 원하던 바였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한 명의 '남성'에게 있어서, 그가 생물학적 기준을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고 해도, 사회적인 성적 규정을 무시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고 해도, 심지어 스스로를 여성으로서 정체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출함으로서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일단 타인에 의해 자신이 남성으로 의식되기만 한다면 여전히 그 역겨운 권력은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매우 결정적이다. 이 세상 속에서 그를 만나는, 혹은 그를 스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남성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바로 그 순간 권력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과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폭력적인 권력 행사는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답하겠다.

 

[이 내용은 '권력의 포기란 가능한가'라는 더욱 큰 문제의 일부분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쓴 것은 그러한 문제를 설득력있게 제기하기 위한 하나의 자세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에 대해서 논박할 여지는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독서

아무런 바탕 없이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학술서일수록 더 그렇다. 서평을 이미 찾아 읽어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저자의 학문적 성향이라든가, 최소한으로는 그/녀가 속해 있[다고 간주되]는 학파나 무슨무슨주의, 그리고 그것들의 주요한 주장과 개념 등에 대해 알고 있거나 입소문으로라도 들어보았을 확률이 크다. 나름의 평가도 아마 내려 보았으리라.

 

안타깝게도, 이렇게 얻은 선입견으로 우리는 그 책의 주장을 미리 재단한다. 책을 직접 읽어 내려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악화된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자신의 선입견과 배치되는 부분은 눈에 안 들어오거나 심지어 반대로도 읽히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거나 억지로 그 틀에 끼워맞춰진다.

 

이러니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다. 그저 몇 가지 개념들을 얻었고,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들과 새로 얻은 이 개념들을 사용해 뭔가 있어 보이는 '명언'을 가공해낼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학문적 성향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학문도 독서도 아니며, 자신의 신변잡기의 어줍잖은 일반화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탈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탈주, 저 책을 읽어도 탈주,라고 진지하게 해석해내며, 그 책은 탈주를 못했네, 그래서 좋은 책이 아니네,라며 거리낌없이 평가한다.

 

개념과 범주들은 편의를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의가, 더욱 철저하게 공부할 힘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대한 내용을 개념과 범주로 축약하여 표현하고 소통하라는 말이지,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 생각하지 않고 개념들을 편하게 막 사용함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없음을 가리라는 뜻이 아니다.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는 후자의 편의가 난무하고 있으므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생각들이 없다. 그러니 세미나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남는 건 자존심과 배짱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글쓰기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왜 한동안 쓰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기어코 다시 쓰기 시작하려는지. 뭐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필요하다. 잠깐이라도 붙들 수 있는 어떤 확신이 없다면 나는 다시금 곧 주저앉을 것이다.

 

공유욕 때문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고픈 욕망이 내게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 욕망으로부터 또 다른 욕망, 즉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을 분리해낼 수 없다. 내가 정말로 읽고 감명받은 책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반응, 이를테면 존경이나 부러움 따위를 유도하려는 책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둘은 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를 보여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순수한지 아닌지를 따지는 그 고민의 와중에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저 서둘러서 무언가라도 끄집어내고 만들어내려는 욕심이 내게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며, 그게 꼭 그렇게 나쁜 마음은 아니라는 것 등을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명백하게 해 두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준다는 것은, 강요하는 것도 소리 높여 고함을 지르는 것도 아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항상 급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런게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그저 고함만 질렀을 것이었으며, 지금에서야 이런 것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자연스러워질 때도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러울 수 있을 테니까. 결국은 소통을 갈망하는 것이지만, 내 모습을 온전히 보여줌으로써, 그 이외의 다른 불필요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서로 침묵함으로써 맺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통을 나는 갈망한다.

 

아니어도 좋다. 기록해두지 못하는 아쉬움이 그간 나를 괴롭혀왔다. 이제 내 손끝은 내가 보고 느낀 것만을 기록하도록, 그 이상의 더 많은 것들을 주조해내지 않도록, 더욱 예민해져야 할 것이다. 거짓말은 이제 그만이다, 정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