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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이렇게 지구를 착취하면서 지구의 암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 역시 없지는 않았지만."

 

그 부채감에 짓눌려 죽고 있는 중. 누군가 와서 '그건 무게가 있는 게 아니니 허리를 꼿꼿이 펴면 된다'고 말해 주었으면.

 

"채식주의자들의 존재는 내가 단순히 '그냥' 고기를 먹고 있는 게 아니라 '굳이'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각을 시켜주었다."

 

"그건 내게 너무 먼, 나보다 훌륭한 다른 사람의 문제였다."

 

게다가, '난 다르게 훌륭한거야, 훌륭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고 변명을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까. 나의 말에 내가 질식하는거야. 나는 아마도 앨리스처럼 작아지고 있나봐.

 

"그래서 이 정도의 실천만으로도 뿌듯해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사실 별로 뿌듯해하지도 않았다. 그만 좀 씨니컬하시지. 그게 없다면 뭔데? 뿌듯해해도 괜찮아, 그냥 좀 더 나을 뿐인 것도 아니야, 난 이렇게 해야만 해.

 

"식생활이 외식에 의존하는 만큼, 나는 곧장 동물의 살점들을(그러니까 고기를) 안 먹는 대신 버린다."

 

정당화와 비판 사이의 칼날. 머릿 속에서 수 만 마리의 새들이 푸드덕.

 

"난 내가 육지 동물의 고기를 덜 먹는 만큼 해양 동물의 고기를 먹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는데도 말하지 못했다. 뭘 어쩌라는 거야! 제길.

 

"내가 이미 합법적인 선택지들을 편안하게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윤리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이제 그만.

 

정착하고 싶다. 나는 흄을 읽지 말아야겠다.

 

(따온 말들은 "언니네 방"의 한 글에서,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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