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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mobilit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goût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progrés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
직접적 의식의 그러한 말살이 감정의 현상들에서만큼 충격적인 곳은 없다. 격렬한 사랑이나 깊은 우울증이 우리의 영혼을 침입한다. 그것은 수천의 다양한 요소들이 명확한 윤곽도 없이, 서로에 대해 외화하려는 경향은 조금도 없이, 상호 융합하고 상호 침투한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 그 감정들의 독창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의 덩어리 속에서 수적 다수성을 분간해 낼 때, 그것들은 이미 왜곡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고립된 것으로서 동질적 장소—그것을 이제 시간이라 부르든 공간이라 부르든 원하는 대로이다—에 펼쳐 놓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방금 그들이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부터 그들 각각은 정의할 수 없는 색채를 빌려왔다. 그들은 이제 탈색되어 이름을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감정 자체는 살아 있고 발전하며,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우리를 점차적으로 어떤 결정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살아 있는 것은 감정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속이, 그 지속의 순간들 서로가 스며드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즉 시간을 공간에 펼쳐 놓으면서 그 감정들의 생기와 색채를 잃게 한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분석한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죽은 상태들의 병치로 그것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 상태들은 말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각각이 주어진 어떤 경우에 사회 전체가 느끼는 인상들의 공통적 요소, 따라서 비인격적 잔여물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태들에 대해 추리하고 그것에 우리의 단순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고립시켰다는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을 유genres로 세우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미래의 연역에 봉사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
─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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