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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에 도착하다.

26시간의 페리 여행 끝에 도착한 푸에르토 프린세사. 페리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이 도시의 트라이시클 기사들은 모두 정직하다고, 마닐라 같지 않다고 이야기해주었지만, 항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몰려드는 호객꾼들을 쉽게 따라갈 수는 없었다. 큰 길이 나올 때 까지 가방을 끌고 걸어보기로 했다. 페리의 도착예정시간은 7시 30분이었지만, 하선이 끝났을 때는 이미 9시가 넘는 시간. 필리핀에서는 거의 한밤중과 다름없는데, 나는 혼자서 처음 온 도시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대로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곧 포기. 이대로 걷다간 끝이 없을 것 같다. 트라이시클도 없으면 큰일이다. 게다가 나는 방향치가 아닌가. 부두 앞에 있던 적극적 호객꾼들이 거의 사라진 시점에서 길가에 서있는 트라이시클 기사와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숙소 이름을 대고 협상을 했다. 40페소, 25페소, 협상은 간단히 30페소에서 마무리. 물가와 거리를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나의 최대 예상액이 30이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나. 짐 가방과 함께 트라이시클에 실려 어두컴컴한 도시를 달려가던 5분 정도, 나는 한 손엔 전화기를, 한 손엔 지도를 들고 최대한 익숙하고 대담한 척 노력해야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별 일 없이 도착한 숙소엔 이미 인적이 없다. 문을 열어준 가드와 방값 협상. 에어컨 룸 밖에 없다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던 그에게, 절대로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겠다며 디스카운트를 계속 부탁해야했다. 결국 매니져에게 전화까지 거는 친절함을 보인 가드는 나를 침대 두 개의 안락한 에어컨 룸에 500페소를 약속하고 넣어주었다.

 

혼자 지내기엔 너무 좋은 숙소이다. 멋진 정원, 안락한 룸, 나름 합리적인 식당 가격까지. 단점이라면, 불빛이 충분치 않아 방이 너무 어둡다는 것과 뜨거운물 샤워가 불가능하다는 점. 독립된 테라스가 없다는 것도 단점일 수 있지만, 이렇게 한국사람이 없는 지역에서는 원할 때에 충분히 혼자일 수 있으니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마치 냉장고 같았던 페리 선실에서 너무 떨었던 터라 긴 바지와 긴팔 티를 덧입고 잠이 들었다. 자기 전엔 페리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속옷과 양말 빨래. 나머지 옷들은 내일 빨래서비스를 알아봐서 맞겨야지 생각했다.

잠에서 깬 건 창살 틈으로 바깥이 희뿌옅게 밝아오는 게 보이던 새벽 여섯시. 화장실에 다녀오고 조금 추운가 하고 것옷을 한겹 더 입고 다시 잠이 들었다.

 

지나치게 좋았던 숙소 모습,

사실 체크아웃 하기 직전 대충 찍은거라...

내 방 앞으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

저 정자엔 한번도 앉아보지 못했다.


북부 여행을 할 땐 그렇게 일찍일찍 일어나지더니, 뭔가 긴장이 풀린 것인가, 몸에 힘이 없어서인가, 그냥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시 일어나 보니 아홉시 반. 선풍기 앞에 널어놓은 빨래들은 잘 마르고 있고 방은 조금 후끈하다. 이제야 찬물로도 샤워할 생각이 나니 다행. 씻고 나서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식당에 들러 게-옥수수 스프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페리에서도 거의 계속 비가 왔고, 새벽에 빗소리가 들리더니, 여전히 날씨는 우중충. 일찍 일어나서 볼거리를 찾아 출발하지 않은 게 오히려 잘되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식당에서 보이는 정원의 나무들이 싱그럽다. 밥을 먹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지하강 투어를 예약했다. 아침 7시 부터 저녁 5시 까지, 관광과 음식이 포함된 비용이 1,200페소. 예상보다 비쌌지만, 어차피 가려고 했던 곳이고, 가이드북에서도 여행상품으로 가는 게 편하고 저렴하다고 한데다, 혼자 이것저것 물으며 돌아다니기도 서글플 듯 해서 그냥 예약해버렸다.
 

어차피 오늘은 뒹굴거리기로 했겠다, 게스트하우스 빨래 서비스도 별볼일 없는 것 같아서 남은 빨래를 신나게 해치웠다. 이로서, 페리에 타서 부터 오전까지 꾸준히 해온 덕에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전체를 빨았다. 부모님이 귀국하시고 나서부터 열하루 동안 쌓인 빨래라고는 하지만, 너무 많지 않나. 결론은, 지금 가지고 있는 옷이 너무 많다는 것. 안그래도 부피 크고 무거운 가방을 건사하기 어려워 어떻게든 짐을 줄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옷들을 포기해야 할까보다. 여기 중앙우체국이 가까이 있다는데, 서울에 보내버려?

 

버릇 대로 점심을 대충 거르고 동네 구경에 나섰다. 어차피 물도 사야하고 간식거리도 좀 살 겸, 큰 길을 따라 걸어서 이 동네의 유일한 실내 쇼핑몰까지. 지나다나는 사람들이 모두 서글서글하고, 호객꾼이나 구걸하는 사람들도 매연도 거의 없는, 정말 평화로운 도시다. 팔라완에서 가장 큰 도시가 이러니, 다른 동네들은 어떨까? 이 동네가 너무 맘에 들어버렸다. 가는 길에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인터넷 카페를 발견, 들어가서 부탁했더니 쉽게 노트북을 연결해서 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북쪽 여행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업데이트 할 내용은 없고, 그저 메일과 은행 잔고 확인. 한국의 현실들이 몰려들었다 사라진다.


배가 슬슬 고프지만, 어쩐지 뭘 먹을 기분은 안난다. 인터넷 카페와 쇼핑몰 사이, 졸리비(필리핀 최대 패스트푸트점)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망고카라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먹으며 에어컨을 좀 쐬어주었다. 좀 더 걸으니 나타난 쇼핑몰은 생각대로 소박하다. 이 숙소에 며칠 있을테니 이동 걱적 없이 2리터 짜리 물을 사고 (물 값은 아끼지 말고 하루에 1리터 씩 꼬박꼬박 먹기로 결심했다.), 바나나 작은 송이와 배고플 때 땜빵으로 애용해 온 빵 같은 과자도 샀다. 뭘 하나 살 때 마다 짐이 느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여행자이지만, 궁금할 때 먹을 거리를 쟁여놓고 싶은 욕심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꽤나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어떻게 돌아갈까 고민하면서 일단 쇼핑몰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트라이시클 호객꾼들을 피해 좀 걸었더니, 지프니가 보인다. 큰 길을 따라 쭉 가면 되니까 지프니를 타면 되겠다 생각해서 물어봤더니, 모두 트라이시클을 타라며 마침 옆에 온 기사에게 내 목적지를 설명해준다. 비싼 거 아닐까 저어하는 나에게, 요금은 단지 7페소라는 반가운 이야기. 그냥 지프니 가격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지역에선 가까운 거리는 트라이시클로 움직이고, 터미널이나 공항, 항구 혹은 다른 지역 등 먼 곳으로 갈때나 지프니가 다니나보다.


여하튼, 편하게 잘 돌아와서 보니 빨래들은 착실히 마르고 있다. 빨래를 널고 마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왜이리 재미난지, 나도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 카페에 있을 때 부터 연락을 시도했던 동생이 지금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조금 비싸지만, 숙소 컴을 이용해서 동생을 만날 수 밖에. 노트북은 연결할 수 없었지만, 스카이프가 있길래 부모님께 목소리도 전해드릴겸 전화를 했다. 동생과는 msn으로, 한글을 읽을 순 있지만 쓸 순 없는 컴이라, 동생은 한국말로, 나는 영어로 소통을 해야 했다.
7월 17일 쿠알라룸푸에서. 동생은 겨우 비행기표를 구했고, 17일 오후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은 다음 18일 새벽 0시 35분에 도착하는 나를 공항으로 마중오기로 했다. 진짜 필리핀을 뜨는구나. 아직 못본 것들, 더 보고싶은 것들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저러나, 천국 같다던 팔라완에 왔지만, 나는 지금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적어도 주말엔 마닐라에 돌아가야 할 텐데, 배 표도 확실하지 않고, 사실 홍콩에서 필리핀 입국하면서 급하게 인터넷으로 산 비행기표가 왠일인지 왕복으로 결재되어서, 그것도 해결해야 하는데... 일요일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잠시 방에 누워있다 살짝 졸았을까, 배가고파 일어났다. 전에 경험했던 좀비 같은 증상...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어두워 지기 전에 밥먹을만한 곳에 도착해야 할텐데, 아까 장보는 길에 까먹고 돈을 뽑지 못했기에 돈도 ATM 기계도 찾아야 한다. 일단 돈부터 뽑고 보자 싶어 기계를 찾아 걸었지만, 생각만큼 쉽게 발견되질 않는다. 거의 예의 쇼핑몰에 다와 갈 무렵, 저 멀리 은행 간판이 보이는데, 정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다. 물가 싼 나라에서 굶고 다니는 바보짓은 이제 그만 하고 생각했었지만, 또 무슨 짓인지... 마침 눈을 돌려 보니, 허름하게 보이는 베트남 음식점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사실 가이드북에 소개되어있는 화려한 식당에 혼자 가서 밥을 먹긴 조금 저어되기도 한 상황이었는데, 딱 좋지 않은가? 가격은 왜이리 착한지, 소고기 쌀국수 35페소, 콜라 한 병 14페소로 저녁을 때웠다. 기대하던 닭국수는 없었지만, 훼 지방 스타일로 매콤하게 요리된 소박한 국수가 꽤 좋았다. 조금 더 걸어 ATM에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 필리핀 화폐 인출.

이미 해가 진 다음이지만, 푸에르토 프린세사의 거리를 걷는 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꾸준히 도로를 메우고 있는 트라이시클, 비교적 서늘한 일요일 밤을 즐기러 밖으로 나온 젊은이들... 아까 낮에도 매력적으로 보여 잠깐 들어가 보았던 관공서 건물 앞마당, 작은 공원엔 은근한 조명과 함께 은은한 음악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벤치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나 커플들 틈에 섞여 또 잠시 여유를 즐겼다.
그래, 작은 도시에 오는 기쁨은 이런 것이었지. 베트남 메콩삼각주의 작은 도시 미토의 강가 산책로에 앉아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숙소에 돌아와선, 방 앞 테라스에 나와 앉아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끄적거리기 시작. 분위긴 최고였지만, 왠걸 모기가 넘 많아서 물림방지약을 뿌리러 다시 들어가야 했다. 도시 사람들은 팔라완에 갈 땐 말라리아 약을 먹고 가라고 하기도 했는데, 몇 대 물리고 부어오르기 시작하니 조금 귀찮아져서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이적과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며 일기를 쓰고 있자니, 이제야 내가 상상하던 동남아 여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 느긋한 시간, 자유.
하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은 따로, 아주 우두커니 버티고 있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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