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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천 년 전 인간의 흔적, 프람바난 사원

프람바난 사원은 족자 근교 프람바난이라는 지역에 있는 사원 유적 군으로, 보르부두르와 비슷한 연대, 그러니까 11세기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접해 있는 네개의 유적들을 묶어 (일정한 배치 양식을 가진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묶었다기 보다 원래 건축 당시 부터 하나의 컴플렉스였을 것 같다.) 공원 비슷하게 조성을 해 놓았는데, 이 중 제법 규모가 있는 힌두 사원 하나와 불교 사원 하나는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이 되어있다. 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런 정치적 관계들과 경제적 목적들로 성립되는 것이라 무슨 준거틀이 될 순 없겠지만, 일단은 그 문화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보기에도 그럴듯 하다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 만은 확실하다. 유네스코에서 지정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의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장점이라면, 입장료가 달라로 책정되며 그만큼 비싸진다는 단점도 있다.
여하간에, 오늘은 그 프람바난 사원을 보는 날이다.

 

지난 밤 모처럼 기분 좋게 맥주를 한 캔 하고 잤더니 숙면을 취한 느낌. 알람 소리에 가뿐하게 눈을 떠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숙소에서 주는 아침을 챙겨먹었다. 아침을 먹으며 메모리카드에 있는 사진들을 노트북으로 옮겼는데, 왠 사진을 이리도 많이 찍었는지, 골라내고 정리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6시에 일어났건만 어버버 하다 보니 숙소를 나선 8시다. 인포센터에서 알아본 대로 숙소 근처에서 족자 메인 터미널인 기왕안 터미널로 가는 4번 버스를 타고, 거기서 솔로행 버스를 타서 중간에서 내린다. 뭐, 쉽다. 어딜 가려고 하던, 고유명사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알려주겠다, 싸겠다, 버스 길 따라 동네 구경도 하겠다,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가이드북에도 써있고 여기 사람들도 누누히 이야기를 하더라만, 버스 안에서 별 위험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긴,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가방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차장 아저씨가 내리라는 곳에서 내려 보니 역시 사원 정문 앞에 내려주는 건 아니라서, 순간적으로 멍하다. 삐끼들의 공세도 피할 겸 얼른 근처 슈퍼로 들어간다. 캔 커피 하나를 고른 다음 사원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니, 영어를 못하는 슈퍼 언니들은 꽤나 당황하는 눈치다. 그럴 땐, 그림이라는 만국 공통어가 있지. 볼펜과 종이를 꺼내서 큰 도로와 슈퍼 위치를 그리고 볼펜을 건네드리니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하고 숫자로 얼마쯤 걸으면 되는지도 써준다. 그리고 서로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말이 안통해도 언니들이 최고다. 덕분에 역시 애매한 사원 입구를 별 고생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비싼 입장료를 학생 할인(이게 또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의 특징이랄까... 국제학생증으로 40% 정도는 할인이 된다. 떠나기 전에 급하게 국제학생증 유효기간을 연장한 게 도움이 되는군... 네가 무슨 학생이냐고, 아니, 나도 어엿한 방통대 학생이다.)으로 조금 싸게 끊고 들어가서 팜플렛도 받아들었다. 이 사원의 역사며 문화적 배경을 올칼라 사진들과 함께 설명해놓아 좋긴 했는데, 각 사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각 건물에 대한 해설이 없는 점이 좀 아쉬웠다.

그나저나, 내리쬐는 햇볓이 엄청나다. 구름 한점 없는 환한 하늘에서 적도의 태양이 작렬하는데, 내 작고 얇은 양산으로는 그 빛을 가리기에 역부족. 사원 바닥의 모래들도 서로 질세라 빛을 반사하면서 빛나고, 검은 돌로 지어진 사원과 대비되어 엄청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니, 사원 안에서 양산도 대여해준다. 말이 양산이지, 집중호우 때나 쓸만한 거대한 짙은 청색 우산이다.

네 가지 사원 중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힌두 사원은 꽤 볼거리였다. 몇 개의 건물이 장방형의 공간에 우뚝 서 있는데, 각각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3신인 브라흐만, 비슈누, 시바의 사원이다. 조금 규모가 작은 애들은 가루다, 앙가, 그리고 또 하나 뭐더라, 여하튼, 그들이 타고다니는 동물(?)에 대한 사원인 듯 싶다. 짜임새 있는 건물에 꽤나 정교한 부조들이, 힌두교가 잘 나가던 시기 힘써서 만든 사원임을 알게 해준다. 아쉬운 건 각 건물에 가까이 가거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는 것. 2003년에 일어난 거대한 지진으로 인해 복원해놓았던 사원들이 많이 훼손되어서 아직도 복원이 진행 중이고 안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주변만 삥 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인도네시아의 왠만한 사원들에는 가이드 같은 것이 있어서,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고용을 할 수 있다. 가격도 별로 비싸지 않은데, 10달러 선에서 협상 가능하고 대체로 6달러면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디 가나 돈 쓰는 걸 아까워하는 나는 언제나 공공 서비스를 아쉬워하며 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윽, 하지만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서 가이드를 대동하고 돌아다니는 웨스턴들 주위를 얼쩡거려 보지만, 아, 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 많이 오지 않는 것인가. 대부분이 네덜란드 사람들에 가끔 불어도 있긴 하지만, 한마디도 못알아듣고 만다. 아아... 일본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찬찬히 돌아보다 기회를 노려 이 사원 주변에 아주 극소하게 분포한 그늘 아래 벤치를 차지했다. 이 뙤약볓에서 잠시 쉴 수 있는 유일한 자리를 둘러싸고 관광객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단 말이다. 아까 슈퍼에서 산 캔커피와 함께 싸가지고 온 빵(이번엔 족자로 오는 기차에서 옆자리 아저씨가 남겨준 빵)과 귤로 맛난 점심을 먹었다.

 

첫번째 사원을 나서 박물관에 들렀다. 작은 박물관이지만 근처에서 출토된 각종 힌두 조각들이 있고, 그 조각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설명이 영어로 짤막하게 붙어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힌두교와 관련된 신이며 신의 아바타며 신이 타고다니는 것이며 무기며 하는 것들은 너무 많아 기억하기가 힘들다.
박물관에는 또, 이 유적의 발굴과 복원에 대한 자료들도 좀 있다. 여기 와서 새삼, 내가 대학에서 배웠던 고고학과 미술사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천년 전 인간의 흔적을 문화를 발굴하고 복원하고 해석하고 현재 사람들이 공유하고 각자 무언가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는 의미있고 규모도 있는 문화적 프로젝트에서 하나의 작은 역할을 하고싶었던 것 같다. 한참 뮤지컬에 빠져 있었던 때는 무대 스탭이라도 안될까 싶었고, 영화라는 작업 자체도 그렇고, 대학에서 문화제를 기획하던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런 발굴과 복원 작업 만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작업이 또 있겠는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안중에도 없었던, 가끔 강의실이나 답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잠깐의 희열이, 입학 이후 10년이 지나 먼 인도네시아에서 유적과 박물관들을 보면서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너무 다른 길을 너무 멀리 그리고 후회 없이 왔다. 지금와서 다시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가고 불교와 힌두교에 대해 공부하고 유적이나 미술품들에 몰두한다고 생각해보면 꽤나 재미있달까 신선하긴 해도,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은 내 속에 분명하다. 여하간에, 여행을 하고 많은 걸 보다 보니 예상치도 않았던 자극들도 다가오는구나 생각이 든다.

 

첫 사원 부터 네 번째 사원 까지는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듯 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원을 걸어서 찾아가는 길, 정말 덥고 멀었다. 게다가, 두 사원은, 사원이라고 할 수도 없지, 작은 돌무더기들에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 김이 새고 말았다. 그나마 아스팔트 길을 피해서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샛길을 따라 걸었길래 망정이지. 가는 길에는 신기하게 사슴이며 양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기한 것도 아닌 게, 유적들에 양치는 사람들이 와서 풀을 먹이곤 하는 것 같다. 어느 곳 보다 잘 관리 된 넓은 풀밭이 있으니 말이다. 여하간에 덥고 지친 나는, 마지막 유적 바로 앞, 지붕이 덮힌, 마치 들마루 같이 생긴 구조물을 발견하곤 주저앉아버렸다. 앉아 보니 시멘트로 되어 있는 바닥이 시원하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보니 이렇게 후련할수가! 내친 김에 아주 배를 깔고 누워서 다이어리도 끄적거리고 사탕도 우물우물 하며 한참을 쉬었다.

 

조금 체력을 회복해서 바로 앞에 있는 사원으로 진출해보니,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꽤 규모있는 건물군이 보인다. 이건 앞의 두 폐허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 지쳐서 안와봤으면 후회할 뻔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유네스코에서 지정받았다고 육백몇번이라고 번호 까지 커다랗게 써있다. 역시 불교 사원이다 보니 첫 사원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둥글둥글한 상부 처리가 인상적이다. 여긴 통제가 되어 있지 않아서 꽤 가까이 가서 탑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외벽 부조들이 상당히 훼손되어있고, 복원이 끝나지 않은 것도 많고, 무엇 보다 중심 탑이 지진의 후유증인지 아시바에 둘러쌓여 있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약간 흐려지기 시작한 하늘을 배경으로 탑 사이사이 둘러보고 있자니, 인적이 드문 오래된 유적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불교 사원 전경. 으으... 대낮에 역광

 

돌아가는 길도 어렵진 않았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내렸던 곳 반대쪽에서 한참 차를 기다리니 솔로에서 족자로 가던 버스가 와서 세워서 탔다. 족자에 내려서는 가까운 쇼핑몰에 있는 꽤 슈퍼에 들러 가방을 맞기고 휴지 등의 생필품과 내일 사원에 가서 먹을 빵과 과일을 좀 샀다. 이것이 내가 족자에서 즐기는 나름의 도시 놀이랄까. 그리고 오랫만에 쇼핑몰 푸드센터를 이용해보았다. 길거리에서 먹는, 싸지만 위생을 장담할 수 없는 한정된 음식들에 조금 질렸달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싸고 세금도 붙는 음식은 그저 그랬다. 하루 치 관광을 제대로 끝낸 하루를 기념하여 슈퍼에서 사온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취침. 내일은 버스를 여러번 갈아타고 디엥 플라토라는 유적을 보러 간다. 화이팅!

 

 

프람바난 기념 셀카. 쏟아지는 태양볓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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