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80년대

- 아래 글은 내가 많이 사랑하는 후배 변기석이 자신의 후배들을 위해 쓴 글 중 나에 대한 부분을 옮겨온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이 글을 발견하여 신고해준 이 선배들의 영원한 귀염둥이 _ 장기영에게 감사함

 

 

 

문학과 운동-터앝문학동인회 86학번 고광연 선배- (춘을)

 

후배들은 모두 시험이 끝났는가? 이젠 방학에 들어가는 셈인가?
축하드려야겠군. 모두들 알찬 한 학기였길 바라네.

먼저 고광연 선배를 말하기 전에 정리해둬야 할 것이 있다. 이이현 선배나 송상준선배 이수철 선배는 모두 터앝문학동인회 회원들이다. 그런데 고 선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준거집단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동과 사고와 있어 문학을 늘 그 시작점으로 삼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중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기꺼이 그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 고광연선배를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고광연 선배는 국문과와 터앝문학회, 조선대학교의 학생운동사에서 기억할 만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남 영암의 도갑사 근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마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에서 활동했다고 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꽤 비싼 돈을 들여 그가 트럼펫을 샀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트럼펫을 그가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아마도 그 악기는 그의 마음속에 세겨진 어떤 이상과 닮은 악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에게 그것은 악기라기 보다는 보물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노래를 퍽 좋아하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 배운 그의 기타솜씨는 서툴렀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수많은 운동가요를 그는 알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폼나게 탈 줄도 아는 그는 낭만적이며 전투적인 사람이었지만80년대의 운동가들 속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듯 했다. 그는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이었지만 같은 단대내에서조차 운동가들에게 자유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이었다. 우리같은 새내기들은 그 사실을 알리 없었다. 우리가 들어온 대학은 그리 녹녹한 곳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대학은 사상과 이념 논쟁의 장이었으며 수많은 조직이나 사상이 그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또다른 싸움터이기도 했으며 조선대학은 박철웅씨의 전제에 맞서기 위해 아주 비밀스런 형태의 활동이 남아있던 시기였던 듯 하다.
당시 고광연 선배는 전투적 학생회의 학생회장이 되기는 했지만 간부로서의 지위를 제대로 보장받지는 못한 듯 하다. 내가 그와 친해진 것은 그의 외모와 나의 외모가 조금은 닮은 까닭이 컸던 듯 싶다. 나는 일학년 시절 3학년이자 학생회장이었던 그를 따라다니며 여러 학생회장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나를 그의 이종사촌동생이라고 소개하면 다른 사람들이 깜빡 속곤하던 일이 기억난다.
그와 내가 문학에 대한 무언가의 토의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가 88년 여름에 조선대학교 공동올림픽 및 평화통일쟁취 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공특위-의 위원장이 되고 나서인 것 같다. 이 공특위 활동기간 동안 나는 그의 주보였는데-주보란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주시)을 보호하는 사람을 일컫는 은어-이 때부터 그와 많은 토론을 했던 것 같다. 주로 한국사회에 대한 성격을 토론하곤 했는데 나는 당시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10월달이었을까? 나는 우연히 부산대학교 국문과 86학번이었던 양영진 열사의 운구행렬을 광주에서 보게되었다. 많은 차량이 줄을 이어 망월동묘지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누가 또 죽었나보다 하고 울분을 토했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고선배에게 양영진 열사가 쓴 팜플렛을 받아보고서 크게 놀랐다. 놀랍게도 그 팜에는 한명의 문학도이자 운동가인 청년의 시작품으로 빽빽했으며 문예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 가득한 했다. 그것은 80년대 후반을 살던 용기있는 한 청년학생의 유서이자 비망록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문예운동의 필요성을 피력한 부분은 고선배와 나를 충동질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로부터 나는 6년이 흐른 어느 여름에 부산에서 극적으로 양영진 열사와 함께 문학을 했던 그의 단짝 친구를 만나 그날의 감회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니 이 사람의 운구행렬을 본 것은 나의 학생시절에 어떤 운명적인 계시였나보다.
나는 며칠 후 고선배, 이수철(그는 당시 국문과 학술부장이었다.),허오범과 함께 조선대학교의 최초 문학운동체 [전선]을 구성하고 백민서점에 우리의 출정선언문과 작품을 걸고는 문예운동을 선언했다. 우리의 1차 목표는 함께 할 수있는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보아 국문학과의 터앝문학동인회를 문학운동체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와 오범이가 터앝문학동인회에 가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가 터앝문학회에서 짤리게 된 다음해 여름까지의 [전선]기가 된다.
시실 전선은 선언적인 것에 불과 했으며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단체이며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지만 의미있는 것이었다고 본다.전선이란 싸움의 전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싸움의 최 전선, 앞을 으미하기도 한다. 즉 아방가르드의 의미였다. 이 이름은 당연히 고선배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음은 문학운동체[전선]에 대한 평가를 써볼까 합니다.그럼 이만.

 

문학과 운동-[전선] (춘을)
간밤에 망월동에 다녀왔다. 양영진 형의 묘지에 개망초꽃 한 가지 두고 왔다.
미친 짓이다.
누가 내글을 상당히 불쾌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보다. 나도 이글을 쓰는데 아주 곤혹스럽고 여전히 어렵다. 다만 이제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기 바란다. 나는 예전에도 듣기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다만 소문으로, 혹은 옆구리로.

그럼 전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선은 실패했지만 고선배는 터앝문학동인회를 개조하는데 성공했고 오범이나 나는 지금의 개밥바라기의 탄생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여긴다. 우리는 가는 길이 달랐으나 처음 마음먹은 일을 결국 한 셈이니 절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터앝문학회와 나락문학회가 그 활동을 멈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프다.

전선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첫째 이유는 당연히 구성원들의 무지와 부족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전선에 대한 과도한 의미와 지위부여이다.

먼저 무지와 부족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만 할 것 같다. 우리는 문학운동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해본다. 양열사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는 몰랐다. 모임을 구성하고 적극적인 문예선전활동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점은 일찌기 저 카프운동기의 지식인들이 무지한 대중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선동적인 문학을 생각했던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하물며 그 창작역량이 부족하며 이제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수준높은 역량을 요구하는 선전대를 만들었으니 우습지 않겠는가!!
두번째의 한계에는 문예운동의 비밀이 들어 있다. 과도한 지위부여라는 것은 단순한 문학패가 문예운동을 지도하고 전체 운동의 선동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있다. 사실은 앞선 여러 글들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문예운동이란 단순한 하나의 문학회나 문학패, 창작단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 것은 전체 운동 안에 하나의 부문운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각 계급계층의 감각기관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조직에는 소속집단의 모조직이 있는 것이다. 사실 학생으로서 문예운동은 학생회와 같은 좀더 본질적인 조직이 있는 것이고 그 안에 문학회가 있는 것이다. 다소 무식하게 표현된 듯한 이 말에는 문예운동이 그 것만으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만들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는 문예가 가지고 있는 즉,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된다라는 고전적인 명제에서 비롯되는 개념이며 조직적인 측면에서 정치나 계급적 조건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선은 완전히 독립적인 조직으로서 그 근본적인 형태에 있어서 전문작가의 동인회나 클럽과 다를 바 없었으며 자기 발전의 단계를 만들 수 없는 측면이 강했다.
전선이 결성된 후 우리는 모두 터앝문학동인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것은 앞선글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터앝문학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학생회의 많은 정치일정을 소화해내야 하는 처지로서 언제나 학생회의 일정을 최상위로 놓고 행동하곤 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문학회활동의 결정적인 방해요소가 되었다. 문학회의 모임이나 시화전, 품평회 등은 늘 학생회의 일정과 겹치곤 했는데 우리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학생회의 활동이 늘 이러한 문학회의 일정에 우선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문학이라는 부문운동과 전체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겨둔 셈이다.

결국 전선은 89년 터앝문학회가 자신의 정치노선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오범이와 나, 수철이형은 학생회로 광연이 형은 학생연대의 노선을 선택하면서 외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해소되고 만 것이다.
당시 광연이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전혀 모임이 되지 않는 전선의 좌장 격으로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깊이 있게 다룰 수 없지만 노선의 차이는 심각한 불이해와 감정의 골을 만들어 놓는다. 후에 우리와 광연이 형은 인간적인 신뢰가 깨지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학생회와 다른 노선의 길을 가기 시작한 터앝과 학생회간에는 학생회라는 대중조직의 권력을 놓고 격돌하는 상황이 해년마다 반복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 사이에 통문연과 터앝의 미묘한 갈등이 놓이게 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등은 언제나 문학의 밖에서 발생했다.

후배들에게는 이 정도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 줄로 안다. 다만 분위기만 알아주길 바란다.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공부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이 문제를 깊이 다룰만한 능력이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전선은 터앝문학회의 변신과 통일문학연구회의 결성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비록 유치한 수준에서 문학운동을 상정했지만 그 것은 이후 우리 행동에 근원을 형성하는 사건이었다.

다음은 통일문학연구회와 학생회에 대한 글을 쓸까 한다.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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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2 20:45 2006/07/1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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