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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게트, <<고도를 기다리며 >>, 2005

기다림과 고독


고도를 기다려도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고도이기 때문이다.
고도는 사용 가치 use value 가 아니라,
교환 가치 exchange value 의 대상이었다.
- 권택영, 《잉여 쾌락의 시대》

 

오로지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는 이 지루한 드라마 한 편을 보고 기다림과 지루함에 관해 생각한다. 왜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이를 지겹도록 기다리는 두 사람, 그가 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속 터지는 관객들, 무작위로 내뱉는 재미없는 대사들에 짜증나는 관객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명확하고 불안하며 불쾌하다. 이 작품이 씌어진 때가 그런 시기였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적막했던 전후(戰後). 이 작품은 1953년에 처음 무대에 올랐다. 저 사람들(50년 지기인 극중 두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왜 저러나 한 번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었다. 그것밖에 할 게 없기 때문이다.

 

에스트라공 : 이젠 뭘 하지?
블라디미르 : 글쎄 말이다.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다 ……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
에스트라공 : 바람을 맞혀버릴까?
블라디미르 : 우릴 벌할걸.
에스트라공 :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갈 곳이 없고, 고도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려야 목을 맬지 말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는데, 그것은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즉 살아내는 것 그 자체 이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루한 기다림의 반복 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시대에서, 속도가 모든 것 - 기다림을 포함한 - 을 삼켜버려 이제는 눈곱만치의 기다림도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0년이다.

 

관객들이 느낀 고독과 불안감은 어떤 것일까. 극과 극은 종종 맞닿아 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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