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다는것

분류없음 2016/03/08 02:05
 

 

1.

일전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한 번만 읽고 반납한 책,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단정했던 그 책을 결국 샀다. 그리고 졸업한 컬리지에 들러 파트타임 수업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오랜만에 들른 그 곳은 그대로였다. 갖가지 아름다운 추억과 기억들이 오롯이 남아있는 학교,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일도 했고 또 그를 통해 평생 잊지 못한 기억을 만들었던 학교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삶을 다시 시작한 곳에 진배없는 곳이니 (reborn place!) 이 낯선 기억을 초심 (初心, "Stick on your initial resolution!")  으로 여기고 끝까지 잊지말아야겠다, 그런 다짐도 했다. 봄에, 아니 곧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늘 공부하고 있다. 그것만은 잊지 말자.

 

 

2-1.

토요일 이브닝 근무시간에 경찰이 데려온 한 클라이언트. 경찰과 간호사 (간호사도 역시 경찰이긴 경찰이다) 2인1조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클라이언트 모두 범상치 않았다. 글쎄, 뭐랄까, 여느 경찰관이나 여느 클라이언트들과는 사뭇 달랐다. 우선 클라이언트의 태도. 버릇없고 건방지고 동양인을 깔보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는데 뭔가 다르다. 정신질환 진단에 따른 증상도 확실하고 왜 여기에 왔는지 이유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가운데 깍듯한 예의, 기본 바운더리가 확실하다. 뭐랄까, 전형적인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캐나디언" 이라고 해야 하나. 중간에 요가 슈즈를 두고왔다며 엉엉 울었는데 잠시 뒤 백인 남자 경찰이 오피스로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클라이언트의 집에 다시 들러 요가슈즈를 가지고 온 것. 인테이크에 같이 참여한 백인 여자간호사는 한술 더 뜬다. 클라이언트가 자기 옷은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한다며 투덜거리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구글링을 해서 드라이클리닝샵을 찾는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투 머치 (too much) … 클라이언트에게 네 눈을 보여줘, 선글라스를 잠시 벗어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는데 간호사가 끼어들어 이 분은 늘 선글라스를 하세요… 병원에 간 기록을 알려줄 수 있나요, 하고 물었는데 간호사가 대신 대답하려는 찰나, 잠깐만요 저 분에게 직접 듣고 싶어요, 말씀을 끊어서 미안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대체 이 클라이언트 집안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러는 거야. 이러쿵저러쿵 잘 설득해서 인테이크를 마쳤다. 나중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렇게 황당하리만치 과도하게 친절한 경찰은 처음 본다며 웃었다. 그 중에 한 명, 반은 차이니즈/반은 캐리비안 백그라운드의 흑인 동료 [이 친구는 넓은 의미에서 '한 방울의 법칙 The One Drop Rule' 에 따라 흑인이다] 가 이런 말을 했다.

 

클라이언트도 백인, 경찰도 백인, 간호사경찰도 백인. 쟤네들은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 거야. 집안이 잘 살고 하이클라스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보통의 가정에서 자랐어도 백인은 백인인 거지. 경찰이 다른 클라이언트 [바로 전날 경찰이 데려온, 흑인/아시안들이 밀집해서 사는 가난한 동네에서 온] 를 어떻게 다뤘는지 생각해봐.

 

 

2-2.

지난 주에는 이십대 초반의 중국인 클라이언트 한 명이 떠났다. 물컵을 들고 있다가 다른 한 명 (백인 남자) 클라이언트와 부딪혔고 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졌다. 중국인은 자기 습관대로 상대방에게 괜찮냐며 물었는데 이게 과도한 폭력으로 간주되었던 것. 목소리도 컸고 손짓도 컸다.  그랬을 것이다.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캐나디언" 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중국인의 행동은 "과도한 폭력"이 되고도 남았던 것이다. 중국인 클라이언트는 이민온 지 8년이 지났음에도, 꽤 어린 나이에 건너와 중등교육을 캐나다에서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나고 자랄 때 습득한대로 "몸이 반응" 했다. 역시 중국인인 담당 워커가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와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 젊은 친구는 퇴거 조치를 받았다.

 

 

2-3.

흑인 남성은, 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무슬림 백그라운드를 지닌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경우를 많이 겪는다. 오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게 아니고 사실은, 이라고 말하는 순간 변명이 되고 뻔뻔한 사람이 된다.

 

 

2-4.  

그리고 여성은, 더 많이, 일일이 설명하기에도 복잡할 정도로 이해받기 힘들다. 워커들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여성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것이 종종 더 힘들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3.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남자 캐나디언" 이라는 범주에 흑인은, 아시안은, 무슬림은, 여성은 들어가지 않거나 포함되더라도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남자 캐나디언" 처럼 품행이 방정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을 겪기 쉽다. 어쨌든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남자 캐나디언" 이 표준인 까닭이다.

 

 

4.

한편,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캐나디언" 들은 여러 나라의, 여러 인종의 엑센트가 섞인, 혹은 깨진 영어조차도 잘 알아듣는다. 그런 편이다. 가령, 일터에서 만나는 동아프리카인, 인도인은 나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시 일터에서 만나는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캐나디언" 들은 - 직원이든 클라이언트든지 막론하고 동아프리카인, 인도인, 한국인, 중국인, 아랍인 등의 강한 엑센트 섞인 영어를 아주 잘 알아듣는다. 그래서 그들은 더 포용력 있어 보인다. 참 신기한 일이다.

 

 

5.

클라이언트도 백인, 경찰도 백인, 간호사경찰도 백인. 쟤네들은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 거야. 집안이 잘 살고 하이클라스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보통의 가정에서 자랐어도 백인은 백인인 거지. 

 

'한 방울의 법칙' 에 의해 흑인이 된 동료의 말을 듣고 잠시 억압의 내면화 (internalized oppression) 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동료는 어머니가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을 싫어한다. 떠나온 나라에서 살 때 중국인들이 하도 돈만 밝히고 흑인들을 구박해서 그런다고 했다.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그 친구와 친해지는 데 애를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 친구 또한 억압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거다. 그 고백을 들으며 숙연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인간 개개인이 깊이 지닌 "억압의 내면화" 는 결국 누구를, 어느 집단을 이롭게 할까. 나는 내 속에 침잠 (沈潛) 한 이 억압을 언제쯤 끝장낼 수 있을까. 살아있는 동안에 그게 가능할까. 아마도, 불가능하지 싶다. 순간순간 깨닫고 애쓰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그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어 보인다. 진정한 의미의 탈식민지적 (decolonization)  실천은  삶 속에서 그냥 애쓰는 수밖에는 길이 없는 것 같다.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왜냐면 깨닫는 그 순간 순간 자기혐오 또한 함께 샘솟기 때문이다. 배우는 게 참 힘들다. 

2016/03/08 02:05 2016/03/08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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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슴둘레 2016/03/08 22:05 Modify/Delete Reply

    우리나라로 들어오십시오!!

  2. Marco 2016/03/17 07:55 Modify/Delete Reply

    http://cafe.daum.net/Labour 공산당창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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