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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1
    졸지에 삼촌이 된 나, 야쓰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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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1/21
    이 거리 고도부끼에서 혼자 기거하는 사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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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은 언제나 배고픈 짐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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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야쓰모도(프롤로그+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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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1/04
    E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해피뉴이얼한 투쟁가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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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삼촌이 된 나, 야쓰모도

  • 등록일
    2008/01/21 08:58
  • 수정일
    2008/01/21 08:58
 

< 졸지에 삼촌이 된 나, 야쓰모도 >


이삼술씨는 일본식 이름으로는 이와모도라 불린다. 고도부끼에서 불법 체류하며 산지는 5년째. 동남아 출신의 역시 불법 체류자 신분인 여자와 현재 동거 생활중이다. 애도 하나 낳아 키우고 있다. 꼬마의 姓은 아버지 국적을 따라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 그의 정식 아내는 아닌 동거녀는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제법 곱상하고, 몸매도 시원스레 잘빠진 편, 이곳 고도부끼의 한 식당에 허드렛일을 나가고 있다. 그들의 사랑이, 동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고도부끼에는 여러 각국, 주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필리핀,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등으로부터 중국, 한국에까지 여러 국적의 불법 체류자들로 득시글댄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일본당국에서 모르고 있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여기에 있는 불체자들을 당장에 모두 추방시켜 버린다면 요코하마 일대의 부두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를 터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윤택해진 일본인들 3D 업종에서 몸을 빼려고 하니 그 부족한 인력을 외국에서라도 수입해서라도 메꾸어야 하는 상황이니 그들로써는 값싼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쓰는 셈이니 사실 꿩 먹고 알 먹고 인 셈 일 것이다. 이 정도로 해서 일단 고도부끼에 대한 배경 설명은 넘어가기로 하고 이와모도 아저씨의 러브스토리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러니까 서른 일곱의 한국인 이삼술씨와 말레이지아 출신의 방년 스물 다섯의 여자-사실 그녀의 이름은 생소한 외국이름이라 까먹었다-가 맺어지게 된 전말은 이러하다.

이곳 고도부끼에서 처음으로 일을 했던 날, 이와모도 아저씨와 같은 조가 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날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바람에 한 삼십분 정도 배에서 냉동 연어박스를 내리다 일은 중단되고, 아이고 지화자! 좋을시고 점심 도시락 나온 거 일찌감치 까먹고 봉고안은 포커판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나, 야쓰모도는 이와모도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날 하루치의 일당은 다 받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입에서 지화자 소리가 나온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일단 차에 타서 일터에만 도착하면 그날 하루치의 일당은 무조건 나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날 그가 자기가 기거하는 여관으로 놀러오라고 해서 저녁에 한잔하기로 약속,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방문을 두드리고“저예요.” 하자 웬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가 문을 열어주는 것 아닌가! 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뜸 아저씨 계면쩍어하는 모습에 웃으며...

“미리 귀뜸 해주지 않아 미안. 내 아내일세 예쁘지!” 

방 한구석에는 세 네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애가 자고 있다. 이와모도 아저씨가 “손님 오셨으니까 인사해야지.” 하고  깨우니,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는 고개짓을 한다. 그 애를 끌어안으며 이와모도 아저씨 왈.

“이 녀석은 내 아들 영수, 그래도 순 한국식 이름지어 붙여주었다고.” 

“영수, 이영수. 귀엽지.” 

꼬마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주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의 아내를 쳐다본다. 여자의 활짝 웃고 있는 입이 함지박만하다. 그들 식구와 저녁을 같이 하고 술도 조금 마셨다. 이와모도 아저씨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근질근질 거렸던 나, 야쓰모도의 궁금증을 가볍게 긁어 해결해준다.

“저 여자는 오빠와 같이 이곳에 일하러 왔었지. 바로 내 옆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방문 앞 늘 보기 좋게 나란히 놓여있던 남녀 한 쌍의 신발 두 켤레 중 남자 신발 한 켤레가 보이지 않더라구. 한 일주일이 지나니까 슬슬 궁금해지더라구. 그래서 그 오빠라는 친구가 일하러 나가는 용역회사 십장한테 물어보았지. 들어본즉 그 친구 운전하다 사고를 내 제꺽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더라구. 그리고 어느날 인가부터 그 친구 동생인 여자가 며칠 일도 안나가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더라구. 그건 그 여자 신발이 하루 웬 종일 방문 앞에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보고 알았지. 그때 일도 별로 없었던 때였어. 어느 날 나도 일을 못나가 그저 방에서 TV 보다 자다 시간 죽이고 있는데 변소조차 안가고 인기척도 거의 내지 않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지. 아니나 다를까 몸져 드러누워 있더라구. 몸이 영 말이 아니기에 며칠 먹을 것도 좀 챙겨주고, 병간호도 해주고 하다보니 정이 들더라구. 그러다가 자연스레 합치게 되었지. 오빠는 형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본국으로 추방되었어. 저 TV위에 놓여진 사진, 저속에 친구 보이지 바로 저 친구가 내 처남일세. 참 잘 생겼지. 자네 자주 타고 나가는 똥차 운전사 다나까 마누라는 아마 한국 여자라고 하지? 그래도 내가 그 친구보다는 재주가 좋지. 처녀 장가 들었으니까.” 

운전사 다나까상의 아내는 고도부끼 한 모퉁이 술집에서 일하던 호스티스였었다고 들었다. 이와모도 아저씨가 애한테 말을 시킨다.


“자 얘야 이리 온. 이 아저씨는 이제부터, 니 삼촌이다. 자 삼촌이라고 불러봐.” 

꼬마가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앙증맞은 소리.

“삼추-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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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 고도부끼에서 혼자 기거하는 사내들

  • 등록일
    2008/01/21 08:57
  • 수정일
    2008/01/21 08:57
 

< 이 거리 고도부끼에서 혼자 기거하는 사내들

  밀린 성욕을 해결하는 가장 깨끗하고도 값싼 방법 >


이 거리 고도부끼에서 혼자 기거하는 사내들, 밀린 성욕을 해결하는 가장 깨끗하고도 값싼 방법 하나를 공개한다.

 

일단 일을 마친 저녁, 더러워진 몸을 씻으러 코인 샤워장으로 비누와 수건, 그리고 목욕 요금으로 백엔 짜리 동전을 두 개 준비해간다. 이것만 있으면 충분히 밀린 때와 밀린 성욕까지 깨끗이 처리할 수가 있다. 오입을 하고 싶지만 돈이 없거나, AIDS가 무서운 사람들을 위해 한가지 방법을 공개한다. 물론 방안에서 TV켜놓고 야한 광고를 보면서, 혹은 잡지에서 오려낸 미와자와 리에 등의 일본 톱스타 여배우들 아슬아슬한 반라의 사진을 보면서 수음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건 방바닥 청소를 깨끗이 해 놓아야 하고, 휴지를 눈에 띄지 않게 잘 치워 놓아야하는 수고스러움, 이런 귀찮은 경우가 있으니 가장 청결하고, 깨끗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일석이조, 목욕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 또한 부록으로 끼워 소개한다.

일단 코인 샤워장안으로 들어가 동전을 하나 넣으면 5분간 따뜻한 물이 샤워기를 통해 뿜어져 나온다. 그럼 일단 몸에 물을 축이고 머리를 2분내지 3분 사이에 후딱 감고 나머지 2분 동안은 물을 조금 더 뜨겁게 해서 몸의 때를 불린다. 그리고 물이 끊기면 그때부터는 몸의 때를 밀기 시작한다. 대강 때가 다 밀리면 툭툭 몸의 때를 손으로 털어 내고 비누를 온몸에 골고루 칠한다. 그리고 더불어 밀린 욕망을 함께 처리하는 것이다. 여기 부분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몇 줄 빈칸으로 처리.






그리고 나서 다시 백엔짜리 동전 하나를 추가로 집어 넣고 5분간 물이 공급되는 동안 깨끗하게 몸을 헹궈내면 일석이조의 모든 과정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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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언제나 배고픈 짐승이라

  • 등록일
    2008/01/20 01:21
  • 수정일
    2008/01/20 01:21

늘 오락가락한다.

결정을 내리기전에 늘 오락가락

감정적 판단이건 이성적 판단이건 간에

마음 가는데로 혹은 몸이 이끌어주는데로

올곧게 가고픈데~ 참 쉽지않다.

오래전에 썻던 시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라

그저 오늘의 심경을 대신해 올려 본다.

가끔은 사는게 쓸쓸하고

먹먹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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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쓰모도 1

  • 등록일
    2008/01/17 14:54
  • 수정일
    2008/01/17 14:54
 

< 고도부끼에서의 하루 - 5000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졸린 손으로 더듬더듬 창문을 열고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니 차가운 늦가을의 바람에 가로수 이파리들이 부르르 온몸을 떨고있다. 아직 어둑어둑하기만 새벽 거리, 배가 몹시 고픈 짐승처럼 등을 푹 수그린 사람들이 하나둘 여관 문을 나서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우라질! 오늘 하루는 지지배라도 하나 꿰차고 공원에나 놀러가 여자친구가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까먹으면서 야들야들한 허벅지나 베고 누워 한숨 늘어지게 낮잠이나 실컷 자보았으면 좋으련만, 아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잠이 들깬 상태로 노상 쓸데없는 몽상부터 한다. 늘 아침은 이렇듯 엉뚱한 상상으로 시작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씨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니미랄 좆도. 일 나가야지 별 뾰족한 수가 있나.”


나, 야쓰모도는 혼자 궁시렁 궁시렁 툴툴거리며 냉장고를 열고는 우유와 바나나를 꺼내 간단히 아침요기를 하고 거리로 나섰다.


날이 제법 차다. 거리는 벌써 하루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온 불법 체류자들로 득시글 득시글 대고 있다. 한 부랑자가 종이박스를 태워 밤새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느라 딱딱하게 굳은 몸을 녹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불현듯 처음 이 거리에 왔을 때 느꼈던 황량함이 새삼스럽게 다시 느껴진다. 첫날 이곳 고도부끼에 일을 하기 위해 왔을 때 어두컴컴한 길가 여기저기에선 지린내가 진동을 하고, 길 모퉁이 구석마다 술 냄새와 구정물 냄새를 풀풀 풍기는 부랑자들 이 라면박스나 신문지를 깔고 잠을 자고 있었다. 더군다나 귓가에 들려오는 친근한 모국어로 된 신선한 욕지거리들.


“야 이 씨발놈들아, 너희들 죽고 싶냐. 이 개새끼들아.”

“좆같은 새끼들 어디 남의 돈을 떼어먹으려고 그래...”


아주 곱게 분단장한 계집과도 같은 얼굴의 일본, 그러한 모습만을 보아왔던 나,야쓰모도에게 이 거리는 무척 낯설었지만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도 한 달이 거의 다 되었고 이제 웬만한 이들은 한 두어번씩 이상은 같이 일을 나가 이제 이 거리의 몇몇 얼굴들은 낯이 익을데로 익어버렸다.


종이 박스를 불태워 그 온기를 조금이라도 몸에 옮겨 보려하는 부랑자들.

허겁지겁 값싼 우동 국물을 들이키며 아침 허기를 달래는 일당 용역 노동자들.

눈구멍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비루하기만 한 생의 뒷골목 스산한 아침 풍경들.


“어이 야쓰모도 어제 일했냐.” 

나와 똑같이 야쓰모도라는 일본이름으로 불리는 아저씨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예 어제 코일 싣고 들어온 배 있어서 다행이 일 나갔어요. 아저씨는요?”

“나 3일간 일 못했다. 그나저나 방세 밀려 큰일이야.”

“그래도 자넨 젊고 일본말도 좀 하니까 일본 놈 십장들이 웬만하면 데리고 나가주잖아.”

“요새는 그렇지도 않아요. 돌아가면서 쉬게 하더라구요.”


고도부끼 인력시장의 사거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중변소 앞에 주차해서 똥차라고 불리는 봉고차가 거리로 들어서고 있다. 공중변소가 세워진 이유 역시 술취한 부랑자들, 노동자들이 하도 노상 방뇨를 해대서 결국 공중 변소를 길거리 한가운데에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일본에 와서 길바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지린내를 맡아본 곳은 딱 여기 고도부끼 뿐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르 모이를 얻어 먹으려고 물위로 모여드는 금붕어 떼 모양 차 앞으로 다가선다. 십장이 차에서 내리더니 손가락 아홉 개를 펴 보인다. 오늘은 아홉 명을 쓴다는 뜻이다. 언제나 똥차 앞에 모여선 사람의 경쟁률은 두 세배에 달한다. 십장하고 안면이 있어 고정적으로 일을 나가는 인원을 제외하면 고작 네 다섯 명 정도가 일을 할 수 있다. 손가락이 하나 하나 사람들을 지목한다. 지목된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잽싸게 차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서 자리를 잡자마자 대개 눈을 질끈 감고 모자란 아침잠을 청한다.


운이 좋았다. 고정적으로 일 나가는 일본사람 하나가 오늘은 일을 나오지 않았다. 나, 야쓰모도는 그 사람의 대타로 지목되어 맨 마지막으로 차안에 올라탄다. 다른 야쓰모도 아저씨는 오늘도 공쳤다. 그가 쓸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봉고차는 서서히 출발하고 사람들의 시선들이 계속 봉고차를 따라온다. 그들의 눈동자가 새까만 똥파리로 변하더니 눈구멍에서 쏙 빠져 나와 까맣게 창문에 들러붙는 듯한 상상이 문득 들었다. 십장은 파리채를 꺼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파리들을 한 마리씩 탁탁 쳐서 죽여 버린다. 창에 들러붙은, 허연 내장을 들어낸 짓이겨진 몸뚱이들. 가느다랗게 발을 달달 떨며 죽어 가는 파리 떼들. 나, 야쓰모도는 눈을 질끈 감는다. 이른 새벽 차안에 먼저 자리잡은 이들은 그새 곤한 잠에 빠져 있다.


가장 먼 곳으로 일을 나가기에 아침 새벽에 제일 일찍 거리로 들어오는 이 똥차가 귀국 수속을 밟는 동안의 나, 야쓰모도의 밥줄이다. 몇달전까지만해도 일거리가 제법 있어 사람들이 일을 골라 나갔다 한다. 똥차는 여기 요코하마 고도부끼 부두 노동자 인력시장에 처음 온 사람들이나, 정 일이 없을 때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일찍 일어나면 탈 수 있는 마지막 밥벌이 수단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경기가 별로 안 좋아 이 똥차마저도 경쟁이 불 붙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거리로 나와 7시까지 일을 기다리다가 결국 일이 없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갈 때의 참담함. 그래도 자식 새끼들 딸린 아저씨들에 비하면 그나마 심적인 부담은 적은편이라고 자위하며, 방 한구석에 야한 그림 깔아놓고 빳빳하게 선 아침 좆, 딸딸이나 한번 쳐 자빠트리고, 다시 밀린 잠이나 더 자다가 일어나 점심 대강 때우고, 낯선 타향의 거리를 하릴없이 쏘다니는 게 일을 나가지 못한 날의 일과이다. 일요일이면 하라쭈꾸나 신주쿠, 이께부꾸로, 아끼하바라와 같은 도쿄의 중심 가에 나가 사람들 구경과 눈요기 쇼핑을 한다. 햄버거나 라면, 야끼소바 같은 것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며 돌아다니다 여관으로 돌아와 TV나 조금 보다가 내일 일을 위해서 일찍 잠을 청한다.


도쿄에서 일하던 공장의 사장 집에 정원 정리를 하러 간 적이 문득 생각이 난다. 하루종일 정원을 뒤덮은 잡초를 뽑고, 땅을 갈아엎고, 정원수에 농약을 치고, 그리고 저녁밥을 얻어먹고, 하룻밤 잤다. 그뿐이었다.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나날들. 농담처럼 그때 같이 일하던 이다까라 불려지던 불법체류자에게 이 피끓는 청춘을 풀이나 뽑는 데나 쓰고 있다니 제기랄! 하고 푸념하곤 했었다. 푸념하면서 이러한 지긋지긋한 일상의 노가다들이 똥거름이 되어 나,야쓰모도가 생의 꽃을 활짝 피우는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반문하곤 했었다.


운전사 다나까상만을 빼놓고 사람들은 모두들 정신없이 잠들어 있다. 아침을 늘 사먹는 길거리의 조그만 도시락가게 앞에 봉고차가 서자 부스스 일어나는 좀비와 같아 보이는 사람들. 도시락으로, 컵라면으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운다. 가게 아주머니는 언제나 해사한 밝은 웃음으로 우릴 반긴다.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우린 그녀 가계의 밥줄이다. 그녀의 애들은 우리들이 매일 아침 지불하는 밥값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일과가 시작되었다. 어제 하던 일이 남아있어 그 작업을 시작한다. 세 개조로 나뉘어 한 조는 배 안에서 수십 톤이나 되는 동그란 자석같이 생긴 강철코일에 구슬 꿰듯 철사 줄을 크레인에 걸어주고-이걸 일본말로는 다마가끼 라고 한다-바깥의 한 조는 코일을 내릴때 컨테이너 트럭에 싣기 좋게 방향을 잡아주고, 마지막 한 조는 컨테이너 트럭 위에 강철코일을 부린다. 나, 야쓰모도는 배 안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야마모도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반백의 머리를 한 할아버지와 그리고 일본인 노무자. 셋이서 배 안에서 일을 한다. 야마모도 할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으로 이곳에 온 지는 삼십 년도 더 되었다고 한다. 나이를 여쭈어보자 올해 환갑이라고 하신다. “이제 그만 쉬실 때도 되지 않으셨어요?” 라고  말하자 펄쩍 뛰시며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한푼이라도 더 벌어 들어가야지 속 편하지. 자식놈들 눈치보며 사느니 지금처럼 일하면서 한푼이라도 더 버는것이 오히려 속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잠시 쉬는 시간 담배를 태우면서 배의 맨바닥에 대충 퍼질러 앉아 쉬는데 같이 일하게 된 일본인 노무자 나, 야쓰모도가 곧잘 일본말을 알아듣고,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되니 이것저것 꼬치꼬치 질문을 해온다. 하긴 누구든 외국인을 만나면 무어든 궁금해지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는, 가족은, 전에 무엇을 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등등 대개 이러한 것들이 누구나 비슷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가끔은 이야기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기따조센(북한)과 강고꾸(한국)는 같은 민족이면서 왜 날마다 싸우느냐고 질문했을 때 어느 편에도 손들어 줄 수 없었던 답답하기만 했던 부끄러움들.

그의 손가락은 몇 개가 잘려나가 있다. 처음에는 산재(産災) 때문인가 했는데 야마모도 할아버지가 슬쩍 뺨을 손가락으로 쓰윽 긋는 시늉을 한다. 아하! 야꾸샤 출신이었구만. 조직에서 손을 떼려면 손가락을 자르고 나와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는데 여기 실제 인물이 있었구만. 게다가 그는 아래위 이빨이 하나도 없어 틀니를 끼고 다닌다. 별 이상한 규칙들을 다 만들어내는 인간들이란, 또한 규칙에 희생 당하면서까지 규칙을 지켜야만 한다고 믿는 인간들이란, 도무지 이해하기 싫은 족속들이다.

그가 처음에는 꺼림칙하게 생각 들었지만 차분차분 말하는 그의 말투 때문인지 처음에 느꼈던 꺼림칙함이 차차 엷어지고 나름대로 선량하게 느껴진다. 담배도 곧잘 나눠주고, 점심도 같은 탁자 위에서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보니 그 또한 그저 보통의 사람일 나름이다. 나, 야쓰모도의 짧은 일본어실력을 가지고 대단하다고 연신 칭찬해주는 아래위 이빨이 하나도 없는, 손가락이 여럿 잘려나간 전직 야꾸샤 출신 부두 노동자.


도시락을 다 까먹고 선창가로 나와 담배나 한 대 태우며 무료하게 날아가는 갈매기나 쳐다보며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는 해파리 수를 하나하나 세보고 있을 때였다. 한 한국인 아저씨가 얼굴이 벌개져서 나, 야쓰모도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나, 야쓰모도에게 말한다.

“이봐, 자네 이런 말 들어 본적 있어?”

“먼데요?”

“자네 혹시 고도부끼에 한국 창녀 있다는 말 들어봤나?” 

“아뇨?. 그런 건 없을 텐데. 술집 호스테스는 있어도 무작정 몸 파는 곳은, 또 그런 여자는 아마 없을걸요.” 

“그래 그래.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말한다.

“근데 저기 저 일본 놈 십장새끼가 밥 처먹다가 5000엔만 주면 한국 여자와 한판 할 수 있다고 자랑하잖아. 혹시 그런 여자가 있긴 하나. 약간 미친것 같은 여자가 고도부끼에 하나 있긴 하잖아.”

“네? 아저씨 뭐라구요.”

머리끝까지 피가 치솟아 오름을 느꼈지만 나, 야쓰모도는 애써 태연한 척 화난 감정을 지근지근 밟아 눌러 버렸다.

하긴 이곳 일본 긴자 같은 데는 술 팔러, 몸팔러 들어온 우리 나라 여자들이 꽤 많으니 5000엔은 거짓말 좀 보탠 얘기일지라도 그런 실제 비슷한 여자들이 있긴 한 셈이다. 처음 일하던 공장에서 같이 있던 이다까란 친구도 긴자의 한 술집에 여자애들 두 명을 소개시켜주어 한 달에 10만 엔씩 두 당 20만엔 꼬박꼬박 소개비로 챙기는 것을 보긴 했다.


5000엔만 있음 한국여자와 한 번 할 수 있다고. 그 말이 하루 웬 종일 자꾸만 나, 야쓰모도의 귓가에 맴돈다. 언젠가 같이 잠시 일했던 한 일본인. 자기 회사에서 단체로 한국 관광 보내준 것 자랑을 하더라. 미아리가 어쩌고 하는데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무슨 모텔인가, 호텔에서 콜걸 불러 재미 좀 보았다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기 이곳 고도부끼에 일하는 최하층의 부두 노동자까지도 회사에서 한국 관광을 단체로 보내주곤 한다고 한다. 사실 여기 일본에서는 남자들이 내세울만한 직업을 가지지 못한 능력없는 하층계급인 경우 제대로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는데 어찌보면 그들 밑바닥 인생들의 욕망은 여기저기 동남아 각지에서 몸 팔러 온 여자들이 해결을 해주고 있다. 정태춘씨의 ‘육만엔이란다‘라는 노래가 문득 떠오른다. 관심 있는 분은 한번 들어보시기를 권해본다. 나, 야쓰모도는 이곳 고도부끼에서 또 하루를 살아 보았다. 5000엔이라? 나, 야쓰모도의 그 날 하루 일당은 9000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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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야쓰모도(프롤로그+에필로그)

  • 등록일
    2008/01/16 12:32
  • 수정일
    2008/01/16 12:32
 

< 나, 야쓰모도 - 프롤로그 >


요코하마에 주재한 출입국에 가서 불법 체류자인 나를 신고했다. 출입국에 신고를 해야 공항을 통과할 수 있는, 즉 딱 하루 기한의 출국 용도로 쓸 수 있는 비자를 내주기 때문이다. 출입국 대기실 복도에는 출국을 하기 위해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신고를 하러 온 한국인 불법 체류자들이 제법 많았다. 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연유로 이곳에 와서 생계를 도모하기위해 일을 하고 이제 다시 고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제각기 다른 삶들이지만, 똑같은 절차의 신고를 하고 저마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갓난아이를 등에 들쳐업고 있던 한 젊은 여자, 생김새가 꼭 동남아출신의 여자 같아 모두들 그렇게 짐작하고 말을 붙이지 않고 슬핏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한국말이었다. 고도부끼에 일하는 남편에게 갓난 첫 아이를 보여주기 위해 이곳 일본에 관광비자로 입국해 같이 지내다 그만 보름이라는 체류기간을 훌쩍 넘겨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출입국에 와서 신고를 하고 이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댁이었다. 다들 아기가 이쁘다고 덕담을 내뱉는다. 수줍어하면서도 내심 발그레한 웃음을 띠는 여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엿다.


탈옥했다 잡혀 들어온 죄수처럼 가슴에 한국인 누구누구란 이름이 크게 적힌 종이쪽지를 들고 벽 한쪽 구석에 섰다. 자동 카메라로 찰칵 사진을 찍는다. 일본에 온 후 처음으로 내 이름을 서류에 적어 넣었다. 그리고 오른손, 왼손 다섯 손가락의 지문을 서류의 한쪽에다 골고루 눌러 찍고 나서 불법 체류자를 담당하는 출입국 관리와 면담을 했다. 혹시 이곳 일본에서 불법 체류하며 불이익 받은 것이 있는지, 어느 곳에서 또 어떤 일을 얼마간 했는지, 보수는 얼마를 받았는지 대개 그러한 내용들이다. 일단 귀국 후 일년 동안은 이곳 일본으로 재입국할 수 없다고 내게 설명해준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가슴 한 켠에 느긋하게 밀려온다. 돈도 한 100만엔정도 벌어 집으로 부쳤다. 꼭 사려고 맘먹었던 전자 기타 한대와 클래식 기타 한대 그리고 기타 멀티 이펙터도 장만했다. 코끼리표 밥통은 아니지만 어머니한테 드릴 일제 전기밥통도 하나 사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유창하지는 않지만 간단하게나마 일상적인 일본어나마 읊조릴 수 있게 되었다.


요코하마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데 두 시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창 밖을 스쳐 가는 이제 낯이 익을 데로 익은 일본의 거리, 도시 풍경들. 이제 야쓰모도가 아니고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가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야쓰모도라는 이름은 가슴 속 한 귀퉁이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집어넣고 단단히 잠궈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분명 어느날 야쓰모도라는 이름을 다시 끄집어내서 끄적거릴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을 떠나던 날도 비가 제법 오더니 다시 귀국하는 날에도 비가 은근히 뿌린다. 공항 검색대를 무사 통과했다. 아버지 친구가 이곳 공항에 있어 별다른 검색 없이 여권만 압수 당하고 입국대를 빠져 나왔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보인다. 어머니가 나를 먼저 알아보시고는 반갑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신다.

“일안(日安)아!”


이제 나, 야쓰모도(安本) 나의 본래 이름을 일년만에 다시 찾았다.



  < 글시렁 구시렁 - 에필로그>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현대는 첨예한 경제 전쟁의 시대이다. 전 지구상 가장 강대국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경제적으로 일본이란 나라는 그 다음 갈 것이다. 내가 살고있는 한국이란 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종속된 반식민지 상태이지 않을까?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은 식민지이면서도 착취자가 되어 한국의 초국적 자본은 남미나 동남아로 진출해 그곳의 노동자와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고 한다. 서열이 매겨진 국가 간, 인종간의 관계들. 그리고 나, 야쓰모도라는 일본이름으로 경험한 일본이란 나라에서의 불법체류의 체험들. 이렇게 다시 글로나마 되살아나는 그때의 기억들.


전 지구적으로 조직화 되가는 거대 자본의 논리. 그 앞에서 속수무책인 개인의 삶들. 그리고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서열 매김들. 착취되는 노동들. 삶의 질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사회학적인 어떤 체험을 그때 몸으로 했었던 듯 하다. 공부나 이론을 통한 것이 아닌 몸으로 부대껴 얻은 일종의 의식화라고 말할 수 있을성 싶다. 모두들 남다르게, 남부끄럽지 않게 아니 남부럽게 살고 싶어한다. 보다 나은 의식주와 레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 단순한 물음이 늘 내 머리와 가슴을 물어뜯는다. 한때 난 자본주의의 전장에서 최첨병인 셈인 이벤트 기획자의 생활을 했었다. 그러한 자본주의에 충실한 하지만 늘 쫓기는듯한 삶은 늘 허기가 진다. 그 기간 사실 한편의 시를 써내기도 힘들었엇다.


야쓰모도라는 이름으로 겪은 모든 경험들은 신기루일 따름이었던가. 자본을 비판해보았자 상업 자본주의 그 틀 안에서 허락되는 수준의 제스츄어로 그칠 뿐인 한계 상황들. 야쓰모도의 이름으로 경험한 모든 사람들. 그들 노동자들과 사실 깊이 가슴으로 연대하니 하는 이야기는 도무지 할 수가 없다. 다만 난 내가 야쓰모도란 이름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스케치하듯 덤덤하게 그려내 보이는 수밖에 없다.


가끔 길거리에서 동남아각국 여러 곳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과 얼굴을 마주치곤 한다. 그들은 그들끼리 몰려다니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거리를 지나다닌다. 5호선 지하철 화곡역 한구석, 서로를 눈이 부신 듯 바라보고 있던 까무잡잡한 피부빛깔을 한 연인 한 쌍이 문득 떠오른다. 서로에게 폭 빠져있는, 나른하고 달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청춘 남녀들. 제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그들이 과연 제대로 된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 중 어느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친 나는 그들에게 짧게 목례를 하며 엷은 미소를 실어 보낸다. 내 미소의 의미를 그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스물 다섯살때의 나, 야쓰모도 또한 이주 노동자였다는, 그런 나의 미소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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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밤

  • 등록일
    2008/01/13 23:30
  • 수정일
    2008/01/13 23:30


사람들은 아니 나는,

나란 인간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감잡지 못하고 있다.

 

미칠 노릇




미친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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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그대로 여전히 여전히 가만히 가만히

  • 등록일
    2008/01/10 15:01
  • 수정일
    2008/01/10 15:01
  길의 맨살

내가 사랑한 사람들, 헤어진 그들에게서

향기가 슬핏 뿜어져 나온다

나의 따뜻한 체온, 나의 숨가쁜 사랑, 나의 짧았던 열락

다만 반갑고 슬프다.
 

오랜만에 어릴적 살았던 동네길로 한밤중 너털너털

한짐을 등에 잔뜩 짊어지고 걸어 돌아오다.

 

내 어릴적 살던 2층 연립 주택은 허물어진지 오래... 

산 자들의 입구에는 붉은 십자가 하나 들어서있고
고층 아파트는 새로운 묘지처럼 어두컴컴


눈에 보이는 풍경들은 거의 다 바뀌었지만

골목 골목 작은 구멍가게들 자리에는 또 다른,

이름만 바꿔달은 조그마한 가게가 들어서 있더라.

 
어린 시절 페달 자전거를 타고 올라 가기에는

늘 숨 가팠던 골목길 오래간만이라며

찡끗하고 내게 윙크를 한다.
 

차에 치어 죽어가는 강아지 한마리

그 죽음 한 10여분 동네 아이들과 얌전히 기다렸다가

후미진 길가 언덕 가로수밑에 묻어준 기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연립 주택의 뒷편 가로수 아래 살과 뼈는 삭아

초롱초롱한 나뭇 이파리가 되어 매달렸었겠지.

다시 낙엽이 되어 사람들 발밑을 굴러 다녔겠지.

 
이제 마흔의 나이가 되어 

열 두어살때의 길을 다시 걸어보다.

 
길의 맨살은 거죽만 바뀌어진채

그대로 그대로

여전히 여전히

가만히 가만히 놓여있더라.




이제는 헤어진 사람의 블로그에서 내가 머물렀던 체취을 가끔 맡게 된다.
내가 그이에게 간접 소개해준 사람들을 통해~
박상륭, 닉드레이크, 김두수와 같이 전혀 몰랐던 이들을
그들이 나를 통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것을 떠올리면
사탕과도 같이 추억은 달디 달아진다.

나는 찜질방을 좋아하게 되고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도자기 보는 눈이 조금 싹을 틔웠고

그랬건 어째건 갑자기 보노보노가 떠올랐다.

보노보노는 정말 좋다. 누가 소개시켜줫는지는
떠올려 보니 그 쉐리하고는 완전 절교했다.
그 놈 내 돈 떼먹고 안갚았다.
그 용도는 낙태비였다. 씨벌놈 현재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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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당이 싫어~

  • 등록일
    2008/01/08 23:27
  • 수정일
    2008/01/08 23:27


아주 오래전 조선일보 기자가 쓴 기사에 무장 공비들에게
이승복 어린이가 입이 찢어지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오래전 초딩시절 6.25 반공 웅변대회에서 각반의 대표 선수들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소리높여 외치던 풍경이 떠올라서 만든 노래


고백 하나 추가

저 한때 하나도 안빨간 주황색 귤을 무척 좋아했어요.

하여간 이 노래가 요새 거리 공연에서 메인곡이 되어 버렸어용.

'나는 박성수가 싫어'가 시흥역 홈에버 투쟁에 따라 추가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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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가 卒로 보는 세상

  • 등록일
    2008/01/07 12:54
  • 수정일
    2008/01/07 12:54

계급장의 사회, 마초들의 사회.

 

문화부 장관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유인촌'이 거론되고 있더라. 예상한 일이다.

이명박씨가 서울시장으로 재림했을때부터 단지 어느 드라마에서 현대건설 CEO시절의 역할을 했던것 만으로 문화재단의 대표로 취임이되고나서 굽신 굽신 잘도 쫓아다니더만, 이번에는 이명박씨가 대권을 움켜쥐자마자 그러한 이야기가 솔솔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게 굽신거려서 얻은 자리로 자기 소신 있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나갈수가 있을까? 정말 정말 정말로 궁금하다.
 

정치하는 인간들에 비해 나름 한 아트한다고 하는 인간들이

권력 즉 힘에 밀리는 것은 유사 이래로 여전한 늑대의 법칙이다.

 

문장강화를 쓴 해방 후 당대 최고의 문장가중 하나였던 이태준 선생이 월북 후 잘나가다가

김일성 장군뇜의 전기를 써달라는 부탁이 들어오자 대뜸 솔직하게스리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전기를 어케 쓰냐고 빡세게 확실히 개겼다고 한다.

그 개김으로 말미암아 당근 좌천 숙청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이태준 선생 자기평하기를 내가 모질긴 참 모질다고 한것을 김현이라는 비평가의 글로도 읽었다. 사실 북한의 예는 그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무희였던 최승희씨로부터 기타 등등 아트는 아니지만 믿거나 말거나 미제의 압잡이로 둔갑이 된 남로당 거두 박헌영씨에 이르기까지 졸라게 많다.

 

요 남한 사회는 역시 안그러한가?

아니 어찌보면 이 지구안의 인간들 세계가 다 그렇지 아니한가?

여전히 계급장 높은 호전적인 수컷들과 자본가 마초들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

늑대 패밀리와도 같은 적자 생존과 약육 강식의 룰에 점점 더 충실하게 닮아가는듯한

동물의 왕국.

천민 자본주의 X 신자유주의 사회. (+가 아니고 X이다).

 

초,중,고등학교 아마도 모든 남학교의 한 반에는 새로 학년이 바뀌면

그 반안에 대략의 주먹 서열이 정해진다.

쌈장으로부터 운동짱, 공부짱과 같은 또 다른 서열 의식들.

여성들은 무언가 또 다른 서열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예상컨데 얼짱,몸짱 이게 일단 대세이지 않을까싶다?
 

이러하듯 수컷들의 서열 의식들 계급장 의식과 마초 의식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걸까나?

 

어째든 요사이 고민하고 있는 화두의 하나는, 딴따라들 즉 문화 노동자들 그리고 겉보기에 유명한 명망가들이 아닌  현장에서 맨바닥에서 분투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정치 활동과  그 정치 세력화 그리고 그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것일까에 물음표를 던져보고 있다.

 

중요한건 약아 빠진 닳고 닳은 정치꾼들과 어떻게 맞짱을 떠야하는지, 비정규직 영화제 노동자로써 민노당내의 아마추어틱하고 지리멸렬한 정파싸움을 지켜보면서 어째거나 피눈물과 울분을 울컥울컥 집어 삼키면서 가지는 생각이다.

 

그리고 칼보다는 확실히 오래가고 강하다는 그러나 권력과 금력에는 뭉툭해진, 그저 만만한 이들에게만 뾰죽해진 펜들(언론나부랭이들)과의 싸움 역시 어떻게 전개해야할런지... 생각만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우쨌거나 아트가 여전히 로 보이는 세상이다. 사실 졸로 보이는 이유야 가지각색이다.

돈 냄새에 찌들고 말초적인것에 문드러진 대중 예술만 아니라 결국 부르조아에 기생해 살면서도 우아 잘난척하는 고급 예술들. 또한 여전히 학벌지상주의로 거들먹거리기나 일삼는 알량한 문화 권력들, 여러가지로 주먹 불끈쥐게 되는 썩어빠진 정치적 상황 눈물 쏟게하는 아픈 사회적 상황에 무뇌아적으로 반응하는 아방가르드한 아트들에 이르기까지 문제점은 참으로 많기도 하다.

 

문화운동에서 운동이 아니라 문화에 밑줄을 그어야한다는 이야기를 어떤 무크지에서 읽어본것도 같은데 그게 한 10년도 한참 지난 이야기다.

 

내 주위의 많은것들, 세월이 참으로 많이 낡고 헐었다.

 

그 낡은 피를 어떻게 해야지 다시 신선하게 바꿔 나갈 수 있을까?

 

본인의 잡스런 경향이야 머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 게다가 아방하고 샤방가르드한 전위주의

대략의 사실주의와 경험주의 그리고 생태주의 이런것들에 눈길을 홀딱 빠트려 두고 있는

무정부주의자 경향에 가장 가까울듯 싶다.

 

어째든 2008년 새해 벽두부터 참말 소란스럽다.

한여름 구더기 끓는 된장통같은 소란속에서도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것들은 있겟지.

어째든 새로운 지옥에서도 전망은 보일것이라고 믿고 싶다.

 

2008년 계속 고민해보자고~ 여럿이 함께~ 맨바닥에서 계급장 다 떼고~굴러보자고~

 

 

추신 : 자주파 에일리언들도 평등파 좝파들도

         ‘다함께’ 고민하면서 ‘전진’ 했스면 좋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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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해피뉴이얼한 투쟁가요

  • 등록일
    2008/01/04 11:27
  • 수정일
    2008/01/04 11:27

 

시작은 어렵고
시작은 어렵고
중간은 힘들어도
중간은 힘들어도

마지막은
마지막은
마지막은

헤피엔딩이 좋아요.


박성수 나빠요
해고는 나빠요

이랜드 물건사면
홈에버 물건사면

(이랜드 계열사 쫙 호명해야징)

마지막엔
마지막엔
마지막엔

천국가기 힘들어요. 반복
(지옥가기 딱좋아요)

이랜드 투쟁은
홈에버 투쟁은
여러분 힘으로
조합원 힘으로

마지막엔
마지막엔
마지막엔

승리하기 꼭 바래요.

어째건

시작은 어렵고
시작은 어렵고
중간은 힘들어도
중간은 힘들어도

마지막은
마지막은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좋아요.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좋아요.

 

 

 

역시 방구들 녹음보다는 거리에서 현장에서 부를때가 더

팔딱팔딱 재미있다는~사실 ㅋㅋ

.

요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머 해피엔딩이 아니라두 괜찮으니

목마른 댓글을 남겨 주시얍~

 



오래전 10만원 비디오 페스티발이란 영상제가 있었다.

 

그곳에 작품 출품하는것이 꿈중에 하나였는데 이루지못한 꿈이 되어버렸다.

 

어째건 그 비됴 페스티발 참 재미난 영상축제중에 하나였다.

 

그 마지막 페스티발의 슬로건이

 

바로 시작은 어렵고 중간은 힘들어도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좋아요. 였다.

 

그 슬로건을 보자마자 언젠가 꼭 롹앤롤 풍의 노래로 만들어 야지 생각 했었는데

 

드뎌 완성했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분좋게 해피하게

 

즐겁게 따라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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