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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들 드라마로 뛰어들다!

4월 하순에 일터 원고로 보낸 글이다. 그 이후 드라마 전개를 보면 한가인이 뛰어난 영어실력 등을 보이고 있어 글 쓸떄랑 약간 차이가 있는데 뭐 큰 주제에 어긋남이 없어 그냥 여기도 올리련다.  

 

 

발자크라는 프랑스 소설가가 있다. 못말리는 왕당파에다가 사생활도 문란하기 그지 없었던 사람인데, 일찍이 맑스는 "서점의 잡다한 경제학 서적을 뒤적이는것보다 발자크 소설을 읽는것이 경제학 공부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상찬한 바 있다. 말인즉슨, 뛰어난 리얼리스트 발자크의 소설은 발자크 자신의 사고와 별개로 19세기 프랑스 자본주의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인게다.


지금이야 발자크는 대문호로 평가받고 ‘고리오 영감’을 비롯한 그의 ‘인간희극’시리즈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당시 그는 대중소설가였고 그의 소설들은 대중소설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글쎄 방송작가 김수현과 비견할 수 있을라나? 우리가 발딛고 있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이, 훌륭한 소설이나 영화 혹은 티비드라마들은 그것의 제작의도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별개로 현실의 핍진성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아니 현실의 핍진성을 드러낼때 만 그 개별 작품들은 생명력을 얻고 대중의 호응을 받게 된다.


한류열풍이란 말도 지겨울 정도로 한국 TV드라마들이 동아시아를 호령한지 몇 해가 지났지만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불치병(근골격계 환자들은 절대 티비에 안나온다. 재벌회장이든, 시장에서 생선장수 하는 주인공 엄마든 거의 90% 암에 걸린다!) 같은 클리쉐들이 판치는 것은 마찬가지다. 


티비 드라마 만드는 자기들도 지겨운지, 아주 가끔 독특한 소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면 계급상승 욕구의 불타는 화신 하지원이 역시 마찬가지 캐릭터인 소지섭한테 책을 빌려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 책이 무엇이었던고 하니 글쎄나...그람시의 옥중수고 였던게다. 소지섭은 하지원에게 헤게모니가 어쩌고 설레발을 풀지만 결국 소지섭은 재벌 조인성과 나란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발리에서 생긴 일’은 사랑도 결코 이길 수 없는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비극적으로 그렸다는 측면(?)에서 볼때 옥중수고를 적절하게 삽입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쎄...내 눈에는 옥중수고와 헤게모니에 대한 소지섭의 그럴싸한 설명이 극의 리얼리티를 더했다기 보다는 주인공의 ‘쿨함’을 장식하는 도구로 느껴져 눈살이 찌푸려지더라.


‘발리에서 생긴 일’이야 인기라도 좋았지 ‘현실’을 소도구로 잘못 써먹으면 큰 코 다친다.이효리가 “저를 섹시가수로 보지말고 연기자로 보아 주세요”라는 야심찬 발언과 함께 데뷔한 드라마가 있었으니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세잎 클로버’라는 연속극이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인가 어딘가의 후원을 받아 제작했다는 이 드라마에서 이효리는 용접공 역할을 맡았었다. 이효리 눈웃음 치는걸 안 보여줄수 없어 용접마스크도 제대로 안씌우고 일시키며 뻔한 신데렐라 드라마에다가 “본 드라마는 뜨거운 노동의 현장인 한 산업체를 배경으로 블루칼라로 대변되는 가진 것 없는 소박한 사람들의 고된 일상, 그 속에서 피어나는 밝고 소중한 가치들을 운운”하는 기획의도를 가져다 붙인 SBS는 가히 재앙에 직면했다.  나름대로 네임밸류를 자랑하던 장용우 PD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도중하차 했고 황금시간대 드라마인데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수요예술무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그냥 하던 대로 해라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 했다.


이런 판국인지라 그나마 왜적을 무찌르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이나 심드렁히 보고 있던 차에 얼마전에 세 연속극이 시작됐으니, 그 제목은 바로 ‘신입사원’이다. 일단, 이 드라마 재밌다. 백수 혹은 청년실업자가 코미디 영화나 드라마의 주변인물로 등장한 적은 심심찮게 있었지만 일단 이 드라마 주인공은 백수다. 건강한 백수 답게 가족의 핍박에도 꾿꾿한 우리 주인공 ‘강호’는 그야말로 로또 복권 맞기보다 더 힘든 우여곡절을 거쳐 대 LK그룹에 입사했는데 그 행운의 가능성 여부야 드라마니까 일단 넘어가자. LK그룹의 로고나 풍경이 SK그룹이랑 비슷한 점도 눈 감아주자. 취업에 흥분한 우리의 주인공 강호가(문정혁 분) “너 내가 세계적 회사 대 LK그룹 신입사원만 아니어도 안 참았어”하면서 애사심에 불타는 멘트를 연방 날리는 것도 뭐 좀 그렇지만 참아주자--;;


어쩌다 보니 참아줄 것만 먼저 말했지만 이 드라마의 대사나 장면들 우습지만 그냥 우습지 않은 것들 꽤 많다. 역시 백수인 친구 자취방에서 연이은 취업실패에 분루를 흘리며 깡소주 뺐어 마시던 주인공에게 방주인은 세계경제체제와 신자유주의란 거시적 분석틀을 동원해 실업의 구조적 문제를 알기쉽게 설명한다. ‘세계적 기업 LK그룹’내에서 벌어지는 하청업체 접대 관행, 줄타기, 밀실인사, 정실인사는 어색하지도 않다. 게다가 이 드라마가 특기할 만한 것은 비정규직 문제를 우회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당당한 정규직인 우리의 주인공 강호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정규직 직원들이 계약직 직원들을 보는 눈초리가 심히 거시기하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닌 것이 계약직 직원들이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백수’들을 보는 눈초리 또한 만만찮다.


고졸 계약직 직원인 여주인공 이미옥(한가인 분)이 ‘부당계약해지 철회하고 정규직화 하라’며 회사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방송된 날에 이 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이 비정규직 시청자들의 지지글로 메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 상고 나와 LK에 입사해 5년동안 업무 외에 커피심부름, 청소까지 도맡았던 이미옥의 일인시위는 시청자들과 우리의 주인공 강호의 열화와 같은 지원을 받지만 이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시위 한 번 하려면 50만원 내야 되는 현실도 뭐 일단은 잊자. 이 드라마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참 좋다. 이 드라마 보고 ‘공부 안하면 백수 된다’는 엉뚱한 교훈을 얻은 학생들 탓에 도서관이 붐비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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