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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오늘(8.25) 박홍 주사파 파문 터뜨리다.

1994년 8월 25일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이 여의도 클럽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후 정치, 언론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취임 당시 '어떠한 동맹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라는 파격적 취임사를 통해 전향적 모습을 보였지만 김영삼의 개혁드라이브는 94년으로 접어들어가며 흐지부지 되는 모습을 보였다.뒤이어 94년 봄 김영삼은 우루과이 라운드 쌀개방 파동을 통해 '대통령 직을 걸고 쌀개방만은 막겠다'던 자신의 호언장담을 썡까버렸다.

 

곧 이어 정국돌파용으로 김영삼은 김일성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놀랍게도 김일성 또한 그 회담을 전격적으로 수락했다.(정국 돌파와 여론 반전을 위한 김영삼의 노림수와 대북봉쇄와 자연재해, 천리마식 경제개발의 한계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김일성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속셈이야 어떻든 전향적인 제안이었고 남북관계는 유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조선일보 조차도 어리둥절해 했고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하여튼 김영삼 특유의 퍼스낼러티가 발휘된 사건이었다.

 

한편 민족주의 정국에도 불구하고 94년 6월 24일 지하철 노조는 파업을 벌였고 철도 기관사들 역시 전평 총파업 이후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좌파 학생들은 농활을 미룬채 궤도 농활을 외치며 연대투쟁에 돌입했으나(나 또한 미제의 압잡이가 되기 위한 카투사 원서를 찢어버리......고 간게 아니라 투덜거리면서--;; 합류했다)   가열찬 투쟁은 남북 정상회담에 묻혀 학생운동의 다수였던 NL계열의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이러던중  별안간 들려온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정국을 급반전 시켰다.

 

어리둥절 해 하던 다수 언론과 다르게 조선일보는 발빠르게 김일성 까대기를 시작했고 뒤이어 정부가 조문을 할 용의는 없는지 물었던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에 대한 공격, 각 학교에서 터진 조문 파동.....유화적이었던 사회분위기는 공안정국으로 급반전됐다. 언론, 보수정치권, 경찰, 검찰, 안기부는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가 되어버렸다. 당시 우리과도 과방을 싹 뒤집어서 관련 문건들을 정리했을 정도였다.

 

이 때 독재에 저항했던, 학생운동권의 친구였던, 술고래라는 설명과 함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자랑하면 (BGM 두둥)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바로 그 였다.

 

박홍 총장은 94년 8월 25일 그 유명한 주사파 발언을 하였다. 주사파가 몇만명이고 그 중에 자신이 회개 시킨 사람이 수백이라는 둥, 예수께서도 일찌기 성전앞의 환전상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셨다는 둥 심지어 사노맹 뒤에 사로청이 있고 그 뒤엔 김정일이 있다는 골때리는 발언까지 하셨다.

 

물론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당시 주사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주사파가 사회 각처에 진출한것도 사실이다. 노무현의 오른팔로 삼성에서 승용차로 불법 정치자금 수십억 떙긴게 뽀록나 지금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는 안희정, 그 안희정도 그 유명한 구국동맹의 일원 아니었던가? 미문화원 점거를 배후에서 기획했다던 전 삼민투 위원장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도 계시지 않던가? 어디 주사파 뿐인가? 에전엔 남로당원들도 많았고 남로당원들도 사회 각처에 진출하지 않았던가?(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하지만 당시 박홍 총장의 그 발언은 우습지만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언론들은 박홍 총장을 용기있는 지식인, 시대의 양심으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주사파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라는 질문들에 대해서 박홍은  스스로 나타나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해선 증거 묻는 사람이 바로 주사파라는 심오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그 뿐인가? 김일성 장학금을 탄 사람이 교수가 되어 있다는 연속된 발언들을 통해서 박홍 총장은 자신의 선배격인 매카시의 수준을 우습게 뛰어넘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빵으로 보내 콩밥을 멕였던 박홍 총장은 이후 서강대 예수회 재단 이사장으로 영전해갔다. 그리고 박홍 총장 아니 박홍 재단 이사장님은 오늘날까지 이 사회의 공산화를 막기위한 험난한 길의 중심에 서 계신다. 지난 8월 17일 박홍 재단 이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이유로 모든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다. 사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원은 못해 줄 망정 경영권을 빼앗아 교사ㆍ교수들에게 주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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