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 : 일본근대국가론에 관한 비판적 각서 (혼다 노부요시)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 : 일본근대국가론에 관한 비판적 각서

혼다 노부요시(本多延嘉)


*본 논문은 1960년 12월에 발표되었다. [본 논문은] 일본공산당 스탈린주의 내부의 천황제를 둘러싼 강령논쟁, 시가 요시오(志賀 義雄)-카미야마 시게오(神山 茂夫)논쟁1의 지양을 통해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을 만들어낸 역사적 문서다. -해당 문서를 개제한 측에서 달아둔 해제(옮긴이 주)

 

-일러두기: 해당 문서에서 인용된 구절은 박종철출판사에서 펴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전 6권)」을 기초로 재인용하였습니다. 옮긴이가 재인용한 부분은 각주가 달려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각주를 달아두지 않았습니다.


 

 천황제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사상의 과학(思想の科学)」 1월호를 중앙공론사가 후환을 두려워해 자주적으로 ‘발행금지’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일본적 근대주의 패배의 과정이 지금 다시 반복되는 것을 보는 듯했다. 미국적 기능주의에 분식함으로써 살아남은 이 왜소한 일본적 근대주의가 일본 부르주아사회의 구석에 몰린 채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자의 늙은 완력에 무참히도 박살 나는 과정을 보면서도 나는 이 패배자들에게 한 푼의 동정도 주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왜냐하면 엉터리 연극처럼 이 지적 광대들은 막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의상을 걸치고 등장하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일본의 지적 용사들의 최고의 ‘무기’는 자살 사상의 결여가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로 불패의 사상적 입각점을 형성하려면 우리는 패배에 만취하거나 무감각해진 패잔병들에게 약한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과학」이라는 우둔한 상업잡지가 폐간된 것을 나는 조금도 안타깝다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러운 점은 우리의 힘으로 정신적 인도를 하지 못하고 늙은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자에게 선수를 빼앗긴 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본적 근대주의가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자의 일갈로 전선에서 도망친 점, 더구나 그 시중이 일본적 지성의 시정잡배 같은 중앙공론사였다는 정성스러운 플롯이 일본적 근대주의의 최후를 장식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즉 모든 부르주아적 일본의 문장까지 거세당한 천황제에 대해 비판적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자신의 진보성을 입증하려 하는 ‘좌익적’ 저널리스트의 방법은 ‘대정봉환2’을 부르주아에게 진언(眞言)하는 천황제주의자와 같이 어떤 현실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무의미한 투쟁을 아마도 부르주아는 업신여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확언한다. 부르주아적 일본의 주인공들은 천황일가에 애완적 감정을 품어야 할 만큼 존경 등의 약으로 쓸 것도 갖고있지 못하다. 성금이 가보를 싹쓸이하듯, 부르주아의 귀족주의적 취미를 만족하기 위한 낭비라고 나는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미츠코시 백화점의 입구에 서있는 사자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는 거꾸로 자신의 귀족적 상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민감해지는 것이다.

 원래 일본의 부르주아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발흥기 부르주아처럼 청춘의 때의 환상에 머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더 흉측하고 더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혁명이나 자유 같은 환상적 투쟁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귀족적 천황제의 내부에서 천천히 침식되었고, 결국 부르주아의 국가형태로 변질되었다.

 젊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부르주아적 국가로 변질되어버린 천황제(보나파르트주의적 통치형태)에 맞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혁명적 실현(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사활을 걸었을 때, 늙은 부르주아는 정치투쟁의 뒤로 물러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5.15사건3에서 도조 히데키(東条 英機)정권의 성립까지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 과정은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에 부르주아적 부패의 일소를 환상적으로 맡긴 농민=군사적 반란이 현실에서 군사적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강력하게 형성하는 동력에 흡수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전후 부르주아는 제국주의 전쟁의 책임을 부르주아적 실체를 뺀 ‘일본군국주의’에 전가했고, 구 군인이나 고집 센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자에 맞서 프롤레타리아가 소아병적인 투쟁에 집착하고 있는 사이 정치적 권력을 한순간에 장악했다. 이러한 전후 일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패배를 은폐하고 부르주아적 지배의 완성을 미화하기 위한 기만적 강령이 악명높은 「일본민주혁명」이었다(「공산주의자」 제4호, 田宮씨의 논문 참조).

 그러나, 전후 일본이 기본적으로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지주와 부르주아의 권력)에서 의회 민주제(부르주아의 권력)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에서 바로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의 정치적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유화를 계기로 격화할 제국주의적 시장경제와 소련권의 경제적 투쟁에 대비해 일본의 부르주아는 국내 정치질서의 부르주아적 안정을 위한 일련의 공격을 시작·강화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필요하다면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중추를 꺾기 위해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자를 동원한 흉폭한 부대를 첨병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적 지배의 방위를 위해서지 그 반대는 아니다.

 전전(戰前)의 천황제적 통치형태에 빗대 부르주아를 ‘비난’하는 방법은 더 이상 아무런 현실성을 가질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의 흉폭성은 실로 일본 부르주아의 위기 구조에서 필연화된 정치적 표현이며, ‘황태자 붐’으로 상징되는 전후 천황제의 개화적 성격은 실로 일본 부르주아의 정치적 안정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일본의 주인공들은 극도로 경직된 민주혁명론자나 근대주의자들의 저 멀리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제국주의적 재편의 강제적 실현의 후방에서 드러난 흰 거품의 난무를 보고 “민주주의를 지켜라!”라 말하며 쩔쩔매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부르주아적 질서의 혁명적 전복-이것이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자의 폭력과 사상을 이겨낼 유일한 길이다. 일본적 근대주의의 최후는 다가오고 있다. 사회주의학생동맹의 사세구같은건 아니지만,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 (1962년 1월)

 

 

〔1〕

 전전 일본 공산주의운동이 직면한 천황제 권력의 계급적 특징은 어떤 것이었나?-이 문제의 이론적 해명은 이미 천황제가 통치형태의 전면에서 물러난 오늘날의 혁명논쟁 속에선 근본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천황제는 패전 직후의 혁명적 격동과 일본공산당의 배신 속에서 부르주아에 의해 해결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천황제는 국가의 정면에 새겨진 문장에서까지 거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우리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천황제 문제에서 손을 떼는 것을 용납할 것인가. 우리는 노동자와 학생의 마르크스주의적 서클 속에서 천황제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만나고 있다.

 이는 대략 아래와 같은 사정에 의한다.

 첫째, 사회혁명의 지향은 일반적으로 현존하는 국가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광범위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 천황제라는 ‘예외적 국가’가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둘째, 천황제 문제는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좌절과 패배의 기본적 회전축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역사적 과거를 향한다면 필연적으로 이 핵심에 닿을 수 없다는 점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검토를 행하려는 사람 앞에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천황제’론이 파렴치하게도 길게 줄 서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기성의 ‘천황제’에 관한 모든 이론들은 노농파도 포함해 전후의 ‘민주혁명’ 속에서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혁명운동의 몸속에 깊이 망령처럼 박혀있다는 점이다.

 넷째, 우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론의 망령을 전면적으로 퇴치해야 하지만 이는 거의 없었고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위와 같은 사정은 우리에게 극히 곤란하나 분수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을 강제한다. 과거 엥겔스는 「주택 문제에 대하여」의 서문에서 “현대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철저히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운동의 ‘극복된 관점’도 알아 두어야 한다4”고 했는데, 천황제에 대해선 부르주아가 이미 ‘극복된 관점’에 도착해있는 데 반하여 프롤레타리아쪽에선 아직 ‘극복된 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와세다대학신문(早稲田大学新聞)」 816호에 개제된 시시도 쿄이치(宍戸 恭一)의 「현대 진보적 문화인론(現代進歩的文化人論)(상)」은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日共公認の史観)을 타파하기 위해 최초로 착수한 작업”으로서 “그 첫째는 전전의 일본공산당운동이 대결한 국가권력의 성격은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가 아니라 ‘절대주의 천황제’라는 점의 확인에 있다”고 밝혔다. 즉 시시도 쿄이치는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인 시가설=천황제 파시즘론을 ‘타파’하기 위해 카미야마설=절대주의 천황제론을 대치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 있어, 과연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은 ‘타파’된 것일까.

 분명 카미야마 시게오의 ‘이중 제국주의’=‘절대주의 천황제’론은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은 아니었다. 왕년의 시가-카미야마 논쟁에서 카미야마설은 일본공산당 내부의 관료주의적 통제에 의해 이론적으로 봉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이후 ‘카미야마문제’로 이어지는 불길한 징후이기도 했다.

 사실, 스탈린=부하린적인 2단계전략에 입각하며 이른바 32년 테제5에 의거해 전개된 카미야마의 ‘천황제 파시즘’론 비판은 나름 일관된 이론으로, 시가이론과 32년 테제의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빈틈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이러한 카미야마와 그 일파의 정력적인 이론활동은 그 자신은 극히 희화적인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이론의 불확정 전략적인 본질과 그 파시즘론의 현상론적인 특징을 폭로했다는 의미에서 그 나름의 유효성을 가졌다.

 천황제 파시즘론의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는 시가의 “메이지 이후 천황제가 강대한 독립성을 가진 국가권력이 되어, 1931~44년 사이에 절대주의적인 천황제가 제국주의적 권력으로 그대로 파피스트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에 대하여(軍事的・封建的帝国主義について)」”라는 소설이 얼마나 하찮은 현상론인지 우리는 여기선 이 이상 언급하진 않고 반(半)봉건적 권력으로서의 절대주의와 근대적 권력으로서의 파시즘과의 질적 차이를 카미야마와 함께 지적하려 한다.

 다만 오늘날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을 ‘타파’한다고 칭하는 카미야마의 과거의 이러한 관점이 부활하려 한다는 사실에 직면해, 우리가 느끼는 점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8월 15일까지 일본에 절대주의가 존재했다는 견해는 어느정도의 경향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선 상당한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카니시 츠토무(中西 功)나 사토 노보루(佐藤 昇), 시바타 타카요시(柴田 高好)같은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선 나름의 이론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패전 당시의 천황제를 절대주의라 규정하고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천황제문제의 이론적 혼란에 대해 새삼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단순히 스탈린주의자 사이의 일에 그치지 않고, 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 隆明)같은 사람조차 천황제를 ‘지주=관료제’라 생각해 카미야마의 「천황제에 관한 이론적 문제들(天皇制に関する理論的諸問題)」에 있어서의 분석을 “내가 아는 한, 제일 정확한 일본 파시즘에의 이해(「일본 파시스트의 원형(日本ファシストの原型)」)”라 말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천황제를 절대주의라 규정하는 원인은 나름의 현실적 기초와 심정적 상황이 있다. 예를 들어, 요시모토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초안이 “전전·전쟁기·전후를 직접적인 아스팔트 도로에서 절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나 같은 사람이 품고 있는 비전은 이와 매우 다르다”고 말하며, “태평양전쟁기엔 32년테제가 규정하는 권력구성이 점차 구조를 바꿔간 과정이었고, 패전·점령기엔 부르주아적인 변혁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전후세대의 정치사상(戦後世代の政治思想)」). 이 논문에서는 정치적 개념의 혼란, 즉 32년테제의 질곡이 짙게 각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개념상의 혼란을 사상(捨象)해 이 소설에 상상력을 부여한다면 요시모토가 전후의 일본사회=국가의 변화에 심각한 정치적=사상적 의의를 구하려 고심했다고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전후 일본혁명 패배의 원인을 해명하고 그 굴복의 길을 밝히려 할 때, 전후의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일본공산당이나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요시모토와는 상당히 상이한 의미이지만 “전전·전쟁기·전후를 직접적인 아스팔트 도로에서 절개”하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공인된 이론’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 한다.

 우리는 오히려 전전 천황제와 부르주아의 관계를 예각적으로 재구성해 절대주의도 파시즘도 아닌 별도의 부르주아의 ‘예외적 국가’로서의 보나파르트주의적 군주제로서 천황제를 파악하고, 전후의 변화를 이러한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에서 의회민주제의 해체-재편과정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우리의 견해는 「안보투쟁 : 정치적 총화(安保闘争 : その政治的総括, 현대사조사(現代思潮社)출판)」에서 일본공산당 비판과 관련해 극히 간단한 식으로 소묘(166-167페이지)했으나, 여기서 더욱 상세히 그 이론적 근거와 현실적 기초를 분명히 하려 한다.

 

 

〔2〕

 알다시피, 영국에서 발달한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과정 속에서 일본이 직접 투입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된 근대적 통일국가―즉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제―는 그 자신으로서는 봉건적 가신들이 군사적, 경찰적 관료제로 전환됨으로써 형성된 극히 절대주의적인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미열강과 대항하기 위해선 스스로의 기초인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엥겔스가 러시아에 대해 [말한] “만약 러시아가 크림전쟁 이후 자기자신의 대공업을 필요로 했다면 러시아는 이를 세 형태, 즉 자본가적형태로만 얻을 수 있음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자본가적인 대공업이 그 외 일체의 국가에서 이뤄지는 결과를 받아들어야만 했던 것(「마르크스·엥겔스선집(マルクス・エンゲルス選集) 3권」)”과 같은 사정이 일본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메이지 초년의 일련의 농촌개혁은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에서 근대적 토지소유로의 과도적 형태로서의 과소농제를 보편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주요 산업에서 집중적으로 외국의 높은 수준의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전개된 일본 자본주의는 유기적 구성의 극히 고도의 산업을 형성하는 동시에 극히 저조한 산업을 남겨두고, 초근대적인 중공업과 전근대적인 가내공업이 공존하는 기묘한 이중구조를 형성했다. 또한 이러한 일본 자본주의발전의 특수성은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력의 유출을 어렵게 만들었고, 몰락한 토지를 포기한 농민이 다시 좁아터진 땅을 빌려 경작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을 보편화했다. 이러한 과소농제의 위에 고리대적인―다시말해 상품생산자로서의 소작농으로 되돌아가는 보통이윤의 모두를 횡탈하고 보통노동의 보수 대부분을 횡탈하는―기생지주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소농제를 기초로한 고리대적 지주제는 야마다 모리타로(山田 盛太郎)가 말한 것처럼 일본 자본주의의 ‘반예농적특징’을 결정하는 ‘기저’가 아니라, 역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성과 토지의 사적소유를 조건지었다.

 이렇게 우리 일본의 자본주의는 근대문명에 남겨진 ‘야만인’같은 과소농과 가내공업자의 상당히 거대한 찌꺼기를 사회 구석에 몰아넣으면서 일본사회의 기본적인 사회구성으로 승리한다. 메이지 23(1890)년 개설된 제국의회에서의 황실세비(皇室歳費) 심의권을 둘러싼 정부와 민당의 투쟁은 앞서 말한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초를 둔 민당과 귀족 사이의 모순의 하나인 환상적 형태였다. 반(半)봉건적인 토지귀족과 부르주아의 균형 위에 성립된 절대주의 천황제는 메이지 29(1896)년의 선거, 적어도 메이지 31(1898)년의 오쿠마(隈板)내각의 성립 이후의 해체―부르주아적 변질 과정에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메이지 29년엔 노동입법이 문제가 되었고, 다음해엔 아시오광독사건6이 일어났으며, 노동조합기성회(労働組合期成会)의 결성, 소작인조합결성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부르주아는 너무 늦게 생겨났기 때문에 유럽에서 이미 부르주아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때에 그들의 정치적 전성기를 맞았다. 부르주아가 그들의 공업, 상업, 교통수단 등을 발전시킬수록 그들은 이에 비례한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이는 반드시 모든곳에서 동시에, 혹은 같은 발전단계에서 일어날 필요는 없다―그들은 그들의 분신인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을 좇아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순간부터 부르주아는 독점적인 정치적지배의 힘을 잃는다. 부르주아는 단지 그들의 연약한 피부를 지키고싶은 듯 그들의 지난날의 적, 일체의 반동적 세력(귀족적 지주계급)을 동맹군으로 발견하게 된다.

 엥겔스는 「독일 농민전쟁」 3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업의 급격한 발전은 부르주아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투쟁이 융커들과 부르주아들 사이의 투쟁을 뒤로 밀어젖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낡은 국가의 사회적 기초는 내부적으로도 완전한 변혁을 겪었다. 1840년 이래 천천히 사멸해 가고있던 군주제는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그 투쟁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쇄도에 대항해 귀족을 보호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로 되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 쇄도에 대항해 모든 유산 계급들을 보호하는 것이 문제가 된 순간부터, 낡은 절대 군주제는 특별히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 형태로 완전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보나빠르뜨주의적 군주제.7

 우리는 일본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메이지 29~32년경 시작되어 다이쇼 2(1913)년의 호헌운동, 늦어도 다이쇼 7(1918)년의 하라정우회(原政友会内閣)에서 다이쇼 13(1924)년이 호헌3파내각의 성립시점까진 완료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리는 외견적(外見的)입헌군주제는 “낡은 절대왕정의 오늘날의 해소형태인 동시에 보나파르트주의적 군주제의 존재형태(엥겔스, 「주택 문제에 대하여」”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변화 속에서, 지배적 블록 내부의 부르주아의 지위는 점차 확대되어 귀족 또는 지주와 부르주아의 동맹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이쇼 6(1917)년 이후 “급격히 수를 늘리고 그 계급의식을 두드러지게 강화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포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부르주아의 구사회에 대한 투쟁의 불철저함은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 아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사회의 곳곳에 찐득한 전근대적 오물을 칠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전근대적 오물은 무엇보다 농촌에서의 과소농제와 도시 가내공업제의 광범위한 존재에 물질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악취를 풍기기 시작할 정도로 성숙한 독점자본주의에 대응하면서 경제적 빈곤과 문화적 퇴폐를 더욱 심화했다.

 이러한 정황은 단지 독점자본주의에까지 발전한 자본주의적 여러 관계와 토지의 사적소유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않는 이상 결코 지양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지를 갖지 않은 소부르주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소농민의 구제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대립을 ‘초월’한 국가적 의사의 강력한 실현을 요구하는 한편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 혁명’을 고도의 독점자본의 손을 거치지 않고 현실화하려는 환상에 갇혔다. 지금은 러시아혁명의 천둥소리로 자신의 프롤레타리아적 임무를 자각한 젊은 혁명가들이 유례없는 흉폭한 국가권력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요시노 사쿠조(吉野 作造)나 오오야마 이쿠오(大山 郁夫)같은 급진 데모크라시스트 아래 좌경화한 혁명적 인텔리겐차의 대부분이 국가의 직접적인 흉폭성에서 천황제를 절대주의로 파악하는 현상론에 빠졌고, 이러한 오류가 스탈린=부하린적인 2단계전략과 결합해 날로 격화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과 별개로 ‘천황제 타도’를 내거는 반동적 역할을 다하게끔 했다.

 이러한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적 경향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적 투쟁의 발전, 쇼와 2(1927)년의 금융공황·1929년 세계공황에 의한 계급투쟁의 격화에서 종종 프롤레타리아쪽으로의 경향을 보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론과 2단계 혁명론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결국엔 시가의 ‘악명 높은’ 불확정전략을 결정하고 말았다.

 

 

〔3〕

 마르크스는 1858416일에 엥겔스에게 부친 편지에서 독일의 사태 전체는 일종의 농민 전쟁의 재판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지지될 가능성에 의해 좌우될 것이네. 그렇게 될 경우 사태는 아주 좋아질 것8이라 말한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동맹문제를 제기한 이 유명한 한 구절은 전후 일본혁명운동의 좌절에 대해 검토할 경우 매우 귀중한 시각을 우리에게 준다.

 왜냐하면, 전후의 이른바 농지개혁에 직면해 당시 모든 마르크스주의이론가와 모든 프롤레타리아 지도부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마르크스적 관점에 서지 못하고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의 붕괴부르주아적 의회민주제의 성립 과정을 민주혁명’, 혹은 민주적 개혁이라 긍정적으로 파악해 그 불철저함을 논쟁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농민전쟁의 제2판같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도울 가능성을 부르주아의 의도대로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일본 부르주아는 자신의 오랜 정치적 동맹군인 지주를 내던졌고, 고리대적 지주제 아래서 생산력의 발전을 저지당한 구 과소농민을 자작소농민으로 바꿈으로써 이 방대한 소부르주아를 자신의 새로운 동맹군으로 획득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중하게도 이 부르주아적 과정에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보태 이러한 변화를 미화했고, 노동자계급을 부르주아의 꼬리 끝에 묶어버렸다.

 카미야마는 말한다일본의 정치적·사상적 분파중 예나 지금이나 전쟁과 반동의 원흉인 천황제 폐지를 주장해온 당파는 3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공산당 뿐이다. 따라서 종전 이전에선 전략적 타도의 목표였던 천황제에 대한 태도의 결정, 즉 전략문제를 둘러싸야만 공산당과 그 지지자들의 이합집산이 이뤄질 수 있었다. () 당 정통파는 평화··토지·자유를 위한 투쟁을 집약하는 전략적 투쟁의 목표로 절대주의적 천황제의 타도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시대의 패배주의자와 타협주의자들은 모두 천황제 만세를 외쳤다. 또 소위 양심적 전향자는 일본의 지배권력이 절대주의가 아닌 금융독점자본 또는 파시스트의 손안에 있다고 주장해 천황제 권력에의 자기항복을 합리화했다(카미야마, 천황제에 관한 이론적 문제들(天皇制する理論的諸問題, 葦会출판)서문, 1953)”.

 즉, 카미야마에 의하면,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절대주의적 천황제의 타도를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시도 쿄이치의 일본공산당이 인정한 사관을 타파하는 첫 번째 작업이 전전의 일본공산주의운동이 대결한 국가권력의 성격이 천황제 파시즘이 아니라 절대주의 천황제라는 점의 확인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희화적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이러한 주장은 그만한 심정적인 기초가 없지 않다. , 전전의 혁명가들의 혁명적 심정 하나의 회전축이 많던 적던 천황제적인 지배체제에의 증오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혁명적 대열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그 대부분이 천황제에 굴복하는 형태를 보였다.

 예를들어, 대역사건으로 천황제의 교수대에 선 메이지시대의 혁명가=고토쿠 슈스이(幸徳 秋水)조민선생(兆民先生, 메이지 35년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아, 파리 성 안의 평민, 한번은 장대를 내걸고 외치거나, 유럽제국의 왕후 수상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무엇보다 민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자유평등의 대의(大義)이지만, 가엾게도 동양의 작은 제국에는, 전혀 이 지극히 당연함의 채색은 나타나지 않고, 전혀 이 대의(大義)단비가 내리는 일도 없었다.

 환하게 빛나는 독재의 완고한 꿈은 아직까지 눈을 뜨지 않고, 꿈틀대며 아직까지 야만의 성 안에 존재한다……(조민)

 선생님의 프랑스에 있다면, 깊은 민주공화주의의 영광을 받들고, 계급을 금기시 하며 부정한 것(蛇蝎:뱀과 전갈)과 같으며, 귀족은 악몽이나 적대시 하는 것과 같으며,  맹세코, 그것이 없어질 경우  백성의 권리를 보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민권은 타인을 위해서 하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 그것을 회복시켜야만 할 뿐이다.

 그의 왕후 귀족에게 무언가를 하사받으러 가는 자 또한 그것이 박탈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와 현재의 동서에서, 한번 선혈을 쏟지 않고, 틀림없는 진실의 민권을 얻으려고 하는 자.

 인류는 말한다,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독재정권을 뒤집어 엎고, 정의자유로운 제도를 건설해야한다고.9

 슈스이가 나카에 조민(中江 兆民)혁명의 고취자로 칭송하고, 파리코뮌에 감동하고, 전제정부의 전복에 열중하는 조민을 말할 때 그또한 천황제 타도의 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정부=천황제에 대한 혁명적 태도는 그 이후에도 모든 혁명가들에게 계승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다음과 같은 점에 관계된다. , 청일전쟁 이후 급속히 수가 늘어난 프롤레타리아,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격화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이러한 전제정부=천황제와의 투쟁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가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여기서 일본공산당 정통파는 이러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균형이 가져온 천황제의 부르주아적 변질을 간과하고, 스탈린·부하린적인 2단계 혁명전략에 입각한 천황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주장했고, 또 일본공산당에서 분리된 노농파는 2단계혁명론을 부정해 올바르게도 제국주의 부르주아의 타도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지만 천황제를 단지 봉건적 유산으로 파악해 일본 국가권력구조의 특징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르주아=지주라는 계급적 실체와 천황제 권력이라는 국가적 형태의 형식주의적 분리는 구제불 능의 혼란을 전전·전후의 혁명운동에 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다음과 같은 사정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다.

 즉, “낡은 절대 군주제의 기본 조건인 토지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균형과 나란히, 현대 보나빠르뜨주 의의 기본 조건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균형을 발견하게 된다(엥겔스, 주택 문제에 대하여)10하는 상황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진출에 대한 소유자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라는 형태로 자신의 정치권력을 실현해온 일본 부르주아는 다이쇼 6(1917)년 이후 급격히 수가 늘어나고 그 계급의식을 두드러지게 강화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포때문에 토지귀족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화학공업의 급격한 발전을 축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촉진하고, 자작농창설유지법보조규제(自作農創定維持補助規則, 1926)의 제정을 기점으로 농촌의 부르주아적 개혁에 착수한 것이다. “가장 온건하며 항상 점진적이라는 기분 좋은 멜로디와 함께.”

 독점 부르주아의 이러한 농촌정책은 전시경제에 의해 촉진된 은행과 중화학공업의 집중·독점·국가자본과의 융합, 미츠이(三井)재벌의 이케다 시게아키(池田 成彬)의 개혁으로 표현되는 구재벌의 재편,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과정 속에서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농지조정법(農地調整法, 1938), 소작료통제령(小作料統制令, 1939), 미곡관리규칙(米穀管理規則, 1940) 등 일련의 일본농업을 향한 국가독점자본주의적 통제는 소작료의 금납화(金納化)를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임시농지 등 관리령(臨時農地等管理令, 1941), 작부통제규칙(作付統制規則, 동년), 농업생산통제령(農業生産統制令, 동년), 식료관리법(食料管理法, 1942), 농업단체법(農業団体法, 1943) 등에 의한 전면적 농업통제의 확립은 지주제의 해체를 심각화했다. 그리고 징병의 확대에 의한 농업노동력의 절대적, 상대적 축소는 고리대적 지주제의 성립을 근거로 삼고 있던 하나의 조건인 토지기아를 해소했다.

 이러한 일련의 농업정책은 지주층의 몰락을 급격히 촉진시킨 동시에 정치적 지배층 내부에서 토지귀족의 정치적 비중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직접 토지귀족의 정치적 몰락이 지배층의 부르주아적 균질화라 결론짓는 것은 잘못되었다. 일본 지배계급의 극도의 반동성을 결정지은 이러한 요소가 완전히 일소된 것은 전후에서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즘론자의 소박한 반영론은 천황제절대주의론자로 하여금 소환파를 비판한 레닌의 오류-전제정치와 군주제의 망각, 이를 직접 상층계급(부르주아)순수의 지배로 되돌린 것이라는 단편(斷片)에 매달려 일단 설득력을 가졌다.

 

 

〔4〕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군사적 패배, 그에 의한 군의 자기붕괴, 관료제도의 정체, 그리고 패전 전부터 심각화된 생산의 저하 등등 일본 자본주의의 위기는 전후 급격한 템포로 고양된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대응함으로써 전(前)혁명적 정세를 만들었다.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의 ‘독립성’의 실체를 구성해온 군대의 붕괴, 경찰·관료제도의 해체, 지주=토지귀족의 실질적 몰락, 그리고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고양과 농촌의 농민적 동요[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경동은 한순간 부르주아의 통치형태였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를 붕괴시켰다.

 지금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 부르주아의 이런저런 통치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부르주아적 지배의 타도가 현실적 과제로 등장했다. 패전에 의한 부르주아적 질서의 혼란은 ‘내란’으로 전화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공연한 활동의 자유를 획득한 일본공산당은 「인민에게 고함(人民に訴ふ)」이라는 제 1성명에서 절대주의 천황제 타도를 강조했고, 32년테제에 충실하게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을 호소했다. 일본 부르주아가 이미 낡은 통치형태인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의 붕괴를 확인하고 새로운 통치형태를 모색하고 있을 때 노동자 ‘전위당’은 그들을 대신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고 지주제의 일소에 의한 소농의 보편적 성립을 강령적 과제로 삼아 싸운 것이다.

 전쟁중, 천황제 권력의 규정을 둘러싼 시가-카미야마 논쟁은 이러한 ‘민주혁명’의 환상 위에서 화려한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엔 레닌의 논문의 단편을 둘러싼 훈고학자적 탐구는 있어도 노동자계급의 현실적 투쟁이 제기하는 과제들과의 생생한 교류는 편린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실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 자유주의화된 부르주아·인텔리겐차의 슬픈 각종 편견을 피해갈 수 없(카미야마, 앞의 글)”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전 자본주의논쟁 속에서 2단계 혁명론에 반대하며 ‘일본식 트로츠키주의자(内田 穣吉, 「일본자본주의논쟁·역사편(日本資本主義論争・歴史編)」’으로 낙인찍힌 노농파 또한 이러한 사정을 근본적으로 바꾸진 않았다.

 노농파의 투장(鬪將)이라 불리는 사키사카 이츠로(向坂 逸郎)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정치경제의 동향과 일본의 새로운 사회정세는 아마 일본의 프롤레타리아의 전략과 전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왔다. (…) 새롭게 생겨난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주요한 당면의 계급적 임무를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에 두는 것밖에 없게끔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일본국민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사회주의 사회에의 진전이 이른바 평화적인 길을 통해 최소한의 마찰로 수행될 수 있느냐를 결정할 것이다. (…) 즉 일본 사회정세의 변화는 사회혁명을 일단적이라 말하기보다 오히려 이(2)단적이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일본 자본주의의 문제들(日本資本主義の諸問題)」 재판 서문, 1948년).”

 즉, 사키사카에 따르면 전후 국제정세의 변화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에게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이라는 ‘주요한 당면의 계급적 임무’를 준 것이다. 이러한 사키사카의 견해는 야마카와 히토시(山川 均)의 「민주혁명론」의 ‘민주적 권리의 확대’라는 표현과 대응시켜 생각해본다면 노농파의 주요 견해인 셈이다.

 우리 ‘사회주의혁명’론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야에 직면해 이제 ‘민주주의 혁명의 완수(쓰시마 타다유키(対馬 忠行), 「일본민주혁명론(日本民主革命論), 1949」)’라는 1단계를 사이에 둠으로써 이러한 전(前)혁명적 정세를 유산시켜 부르주아가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시기를 주고, 이러한 과정을 ‘좌익’적으로 미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부르주아는 스탈린주의자와 좌익사회민주주의자의 배신에 의해 구조되어 패전에 의한 혁명적 위기를 극복하고, 미 점령군의 ‘힘’에 의해 사회질서의 혼란에 대처한 것이고, 농지개혁을 수행하고 경찰·관료제를 기본으로 ‘부르주아지배의 일관된 형성(엥겔스의 베른슈타인에게 보내는 편지, 1883년)’인 민주적 의회제로 이행했다. 이러한 전후 일본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에서 의회 민주제로의 전환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에 의해 안정된 정치적 계급관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회피는 단지 소부르주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배신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피투성이 패퇴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전후 이 ‘민주화’를 ‘민주혁명’으로만 인식했던 일체의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가 1848년 독일혁명에서 소부르주아 좌파의 역할에 대해 서술한 다음의 글과 얼마나 닮았는가.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사회 전체를 변혁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회 상태가 변화되어 현존 사회가 가능한 한 자기들이 견딜 만하고 살기 편하게 되는 것을 갈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보다도 관료제를 축소하여 국가의 지출을 줄일 것을, 그리고 주요 세금을 대토지 소유자들과 부르주아들에게 전가할 것을 요구한다. 다음으로 그들은 자신들과 농민들이 자본가 대신에 국가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대부할 수 있도록 공공 신용 기관을 설치하고 고리 대금업 단속법을 제정함으로써 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압박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 그 다음으로 그들은 봉건주의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농촌에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을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을 실시하기 위해 그들은, 입헌적이든 공화제적이든 간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동맹자인 농민들을 다수파로 하는 민주주의적 국가 제도를 필요로 하며, 자치체 재산에 대한 직접적 감독권과 현재 관료들에 의해 행사되고 있는 일련의 기능들을 자신들의 손에 쥐어 주는 민주주의적 지방 자치제를 필요로 한다(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동맹에 보내는 중앙 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11”.

 

1960년 11월

*이 글은 「비판과 전망(批判と展望)」 2(1962년 4월)호에 게재되었음.

 


원문: 天皇制ボナパルティズム論 : 日本近代国家論にかんする批判的覚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1. 1947-48년 일본공산당 내부에서 시가와 카미야마를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 천황제국가의 성격에 관한 논쟁. 일본은 군사/봉건적 제국주의와 근대 제국주의가 공존한다는 ‘이중 제국주의’론(카미야마)과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군사/봉건적 제국주의의 형태를 띠게 되었으므로 ‘이중 제국주의’는 없다(시가)는 내용의 논쟁이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大政奉還. 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 사건. 에도막부의 붕괴를 보여준 정치적 사건이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1932년 5월 15일에 일어난 일본 해군 청년장교 중심의 극우 쿠데타.텍스트로 돌아가기
  4.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4권」, 박종철출판사에서 재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5. 1932년 5월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일본의 정세와 일본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테제’. 전전 일보의 지배체제를 절대주의적 천황제, 지주적 토지소유, 독점자본주의의 결합으로 규정해 당면한 혁명의 과제는 절대주의적 천황제를 타도하기 위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2단계 혁명론)이라는 내용. 일본공산당 강좌파의 기본원리가 되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足尾鉱毒事件, 아시오광산의 공해(公害)사건.텍스트로 돌아가기
  7.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3권」, 박종철출판사에서 재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2권」, 박종철출판사에서 재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9.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옮긴이). 「鳴乎巴里城中の平民、一たび竿を掲げて叫ぶや、欧州列国の王侯宰相為めに霑惶せるは何ぞや。他なし、民権は至理なれば也、自由平等は大義なれば也、憐れむ可し、東洋の小帝国、曾て此至理の彩華を現ずるなく、曾て此大義の甘雨に浴するなし。コウコウ然として専制の頑夢未だ覚めず、蠢々乎として猶ほ蛮野の城中に在り。……(兆民) 先生の仏国に在るや、深く民主共和の主義を栄奉し、階級を忌むこと蛇蝎の如く、貴族を悪むこと仇讐の如く、誓って之を苅除して以て斯民の権利を保全せんと期せるや論なし。且つ謂らく、凡そ民権は他人の為めに賜与せられるべき者に非ず、自ら進んで之を恢復すべきのみ。彼の王侯貴族の恩賜に出る者は、亦其剥奪せらるる有るを知らざる可らず。古今東西、一たび鮮血を濺がずして、能く真個の民権を確保し得たる者ある乎。吾人は宣く自己の力を揮て、専制政府を顛覆し正義自由なる制度を建設すべきのみと。」텍스트로 돌아가기
  10.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4권」, 박종철출판사에서 재인용.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2권」, 박종철출판사에서 재인용.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