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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에세이-한국전쟁 당시 실화극

  자서전 서막 - 한국전쟁과 당시 나의 고향에 있었다던 이야기

 

(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귀촌후 틈틈히 나의 인생이야기를 기록중이며, 그중 공유의 글을 올리는바입니다. )

 

 

때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경 유엔군과 군경이 전남지역을 수복하면서,
좌익들은(인민군 일부와 빨치산)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인민유격대 조직은 전남도당 유격사령부 예하에 6개 지구 체제로 재개편한 무장조직이었다.
약 6만여명이었던 이들은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 휘하로,
전남도당 위원장은 박영팔, 부위원장 겸 빨치산 총사령관은 김선우이다.

이중 제5지구당 (불갑산)불갑지구는 함평, 영광, 무안, 목포가 활동무대로 약 2,500명이었다.
(위원장; 김용우, 빨치산사령관; 박정현, 모두 구빨치산 출신)


한편 1951년 2월 20일경 새벽 대대적인 불갑산 토벌작전인 남한 군경합동 '대보름작전'이 전개된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에 11사단 20연대와 영광과 함평경찰, 청년방위대와 지역우익단체가 동원됐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을 당한 빨치산중 일부는 나주 금성산으로 후퇴하여, 나중에는 영산강을 건너 장흥으로 향했다.
그중 금성산으로 퇴각하다 흩어진 몇몇 빨치산은 나주야산에 머물다,
봄에 피난주민 행색으로 위장한체 노안면 양천리 계량재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계량재 아래에 인가를 발견하고 내려가 왠 불탄 성당이 있어 내려가다 멈짓하고 산으로 다시 올라 숨는다.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망산,뿔바위 인근 전경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 노안성당 (현제모습)

 

 

 

왜냐면 그 성당은 붉은색 성당으로 멀쩡했기에, 반공대가 유인책으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순간 선듯하다.
이들은 계량재를 지나 망산 인근에서 하산하여 인근마을(국룡)을 우회해 들판을 지나 산에서 발견한 방죽으로 향한다.
방죽(장등제) 들판으로 진입해 은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바라보다,
원거리에 있는 기이한 풍경인 고인돌 유적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빨치산은 순간 저 고인돌 유적지 주인은 아마 이지역의 지주일거라 판단하고,
야산길을 따라 고인돌이 있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가면서 야산밭에서 일하던 지역 농민에게 고인돌 야산주인집을 수소문하여 그 마을로 향한다.

 

  ∇ 양천리 장등방죽으로 사진위 중간 남색둥근표시가 고인돌 유적지이다.

 

빨치산 : "수고하십니다. 전쟁 난리통을 격다 길을 잃어 배회중이외다.. 참, 저 신기한 고인돌 야산주인이 누구요?"
지역주민 : "아이고, 어쩌다 여기까지 피난 행렬이요?.. 그 야산주인은 저기 금동마을의 신철수아들네이지라~"

 


즉, 위 고인돌과 관련된 마을은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이며, 나의 할아버지의 본가였던 집성촌 마을이다.
또한 나의 평산신씨인 할아버지 본가는 소유 야산중에 조상이 오랬동안 관리했던 위 고인돌 야산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때부터 지주에 속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고한다.
이 빨치산은 그날 늦은오후 짐에 숨겨둔 노획한 국군총을 꺼내들고 나의 금동 할아버지집을 급습하였다.
댁이 대가족이었으나 당시 집안엔 방금 밭에서 온 할머니와(중년여성) 한 작은아들만 있었고,
나머지는 다들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댁에 총을 들이밀고 먼저 요구한것이 요기거리로 중년여성이 먹거리를 내오자, 좀 희안한 광경이 펼쳐졌다.
빨치산 간부가 자신은 망을 보는데 주념하며,
부하에게 먼저 식사하라하고 먹거리를 거의 양보한체 자신은 대충 먹는것이다.

그리고 있다 조용히갈터이니, 자금과 식량을 내주라면서 다는 줄필요없고 알아서 주라는것이다.
그러자 이 큰집터의 아들이 앞뒤다짜르고 아니꼬아하며  한마디 거든다.

 

 

 

작은아들 ; "앰병~ 그럴거면 머하러 총을 겨누고 지랄이요? 차라리 좀 달라고 구걸하지.."
빨치산 간부 ; "이런 삭아지하고는.. 이보시오 동무, 총알받이로 있다 저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이나 대리고 나오시오."
하고는 나의 큰할머니인 중년여성이 챙겨주는것을 받고, 먼저 엄호하며 길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럴즈음 집안의 가장 할아버지가(중년남성) 바깥일을 마치고 귀가중,
누가 뭐라하는 소리를 듣고 살피자 집안서 총을 든 괴한과 맞닥뜨린다.

집안의 중년남성은 만류하며 내아들 말고 나를 잡아가라 자처했고, 부하는 이내 중년남성을 인질로 하여 길을 나섰다.
왜냐면 총알받이로 소년은 불필요했으며, 간부도 이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 나의 할아버지 본가집터 옛모습

 


이 빨치산은 초저녁 인적이 드문 계림리를 거처 서광산(평동 남서쪽)을 지나
지금의 공항 남서쪽 천변을 끼고 서창동으로 향했다.

아마 무등산과 화순야산의 거점지 근황이 궁금해서인듯하다.
이 두명의 빨치산에게 인질이 처음엔 나의 할아버지 혼자였지만,
평동끝을 지나다 길에서 마주친 주민 두명을 생포해 인질이 셋이 된다.

인질 손을 묶은체 끌고가면서, 가다 주민이 물으면 빨치산 내통자를 끌고 가는거라 둘러댔으며,
주민은 낮선 반공대원이긴 하지만 국군총을 소지하고 있어 긴갑다했고,
그래도 의심하는듯 보이는 행인을 잡아가는것이다.

이들은 늦은밤 인적이 드문 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동(회재로) 인근 (백마산)큰야산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송정리 인근 지역주민이 밤에 왠 수상한 사람들이 지나는것을 보고,
급히 지역 파출소 같은 반공치안대에 알렸다.

당시 반공치안대엔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규합해 반공조직을 관리감독하거나, 독거다이 왕초가 종종 있었다.
치안대에 당직을 서다 지역주민의 급보를 받은 서북청년단출신 대원은 전공을 독차지하고자
지역출신 대장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총 몇개와 전쟁중에 노획해 숨겨둔 수류탄 한개를 챙기고,
급히 (반공청년단)반공대원을 소집하여 빨치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독거다이 왕초인 서북청년단출신 반공대원은 지리에 밝은 지역반공대원들을 앞세워 단독으로 빨치산을 추격해,
서창동 인근야산 아래 능선들판에서 애워싸며 매복한체(5명이상), 빨치산을 기다리며 급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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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때이른 새벽 빨치산이 야산에서 내려와 신작로 같은 탁트인 농로를 걸을즈음,
대각선방향에서 폭탄이 날아와 이들 앞에 떨어진다.

폭탄이 날아오기 몇초전 한 일질이(나의 할아버지) 대각선방향에서 누가 숨어 공격직전임을 감지하고,
위험하다 외치며, 손이 묶인체로 농로옆 도랑으로 몸을 내던지어 피신한다.
그 말에 순간 빨치산들은 총으로 엄호하며 두리번 거리는 순간, 이내 폭탄이 인근에 날아와 터진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런 폭탄과 함께, 미처 피하지못한 총알받이 인질 둘은 사지가 찢기어 그자리에서 죽고,
빨치산간부는 중상, 좀 뒤에서 걸어온 부하는 반사적으로 엎드리며 짐으로 몸을 엄호해 가벼운 부상을 당한다.
그간부는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은 틀렸으니 후일을 도모하라며 부하에게 도망치라며 손타레친다.
빨치산부하는 급히 몸을 은폐하고 자신의 총이 멀쩡한지 확인후,
급히 무기를 챙기고 간부에게 경례를 신속히 한후 현장을 피한다.

그러는 사이 도랑으로 몸을 날려 몸을 피한 인질(나의 할아버니)은 폭탄은 피했으나, 그렇다고 몸이 건사한게 아니었다.
도랑에 처박힌듯 되어 허리,옆구리 부상등 크고 작은 전신 찰과상이 생겨 거의 중상자 처지가 되버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군도 재수없는자들이라 판단하고, 아무도 없는 쪽으로 무조건 도망을 쳤다.

 

한편 매복해 30M인근에서 수류탄을 막무가내로 까낸 사람은 서북청년단출신으로,
이런 막무가내 공격으로 나중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폭탄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확인하고 이후 덮치러 달려갔는데,
위기의 순간에도 빨치산 부하는 총을 쏘며 저항을 하였다.

그 바람에 지역반공대원 한명이 총상을 당하자, 순간 잠시 대원이 몸을 숨기는 사이, 그 빨치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부상당한 빨치산이 도망치는것을 보고, 대원 몇명은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폭탄이 터진 현장으로 향했다.
빨치산을 추격한 지역반공대원중 한명이 총을 들고 있었으나 총을 잘 쏘지못하여 총알이 헛나갔고,
빨치산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폭탄현장에 있다 답답한 서북청년단출신은 뒤늦게 희미해보이는 적을 향해 격발했으나, 이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한 반공대원은 도망치는 인질을 향해 아군이니 안심하라, 쉬었다가라 소리치지만 일없다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추격을 포기하고 폭탄현장에 와보니, 반공대에 심각한 난관이 봉착하게 된다.
사망자가 적군 1명이지만 양민 2명으로, 아군이 양민까지 죽인처사가 된것이다.

갑자기 당황해진 치안인솔자는 무과실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지역반공대원에게 삽하고 응급약을 챙겨오라 지시한다.
이후 인가에서 약과 삽들을 챙겨오자, 한명은 부상대원을 치료하고 나머지들은 음침한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편 그곳 인가에서는 앞면있는 먼 지역주민(반공대원)이 왠 약과 삽을 달라해서 줬기는 줬으나 무슨일인가 궁금하여,
폭탄,총소리에 놀란 주민과 함께(몇명이) 그 대원을 미행했다.

가다 어떤 인질로 보이는 사람이 대각선쪽으로 힘겹게 지나길래,
지역주민중 한명은 일단 도와주러 그쪽으로 조심히 서둘러 이동했다.

그리고 다가와 묶인 손을 풀어주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잠시 휴식만 취한체 이곳을 벋어났다.


폭탄현장으로 간 주민은 멀찍이 숨어서 그 현장과 그들의 현장조치를 보고 이내 놀랄수밖에 없었다.
암매장하려던 사람이 빨치산이 아니라 어디서 본적이 있는듯한 주민으로 둘다 양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무등산,화순야산 인근에 임시주둔지로 두고 지역정찰을 하고 있던 몇명의 빨치산이,
5KM인근 고지대에서 폭탄 소리를 듣게된다.

이 인민유격대는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지리산지구 제2병단) 조직부대중 하나였다.
본능적 직감이었는지 빨치산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그 빨치산은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에 다다르자 서창동에서 폭탄부상을 당한 대원 한명을 만나게 되고,
그대원 동지가 알려준대로 사건현장으로 찾아갔다.

서창동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시신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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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합세해온 빨치산이 현장으로 숨어와 사격하자, 서북청년단대원은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총상 총 두명)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빨치산은 총상으로 미처 현장을 빠져나오지못한 반공대원 두명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고한거냐고 추궁한다.

그래서 시인하길 "서북청년단출신 사람이 전공에 눈이 멀어 신중한 작전을 뒤로하고 막무가내로 폭탄을 던졌어라.
그바람에 주민인 인질이 죽었지라, 그래서 이걸 숨기려 암매장하고, 폭탄으로 빨치산만 죽인걸로 위장하려고 했지라~..."

 

이렇듯 이북출신 반공대원이 단독으로 치안대를 인솔하며 막무가내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치안대 폭탄을 맞아 인질인 무고한 양민이 죽어있었다.

하여 무과실 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인질인 지역양민을 암매장하다, 결국 이렇게 발각된것이다

합세해온 빨치산은 조금전 운명한 불갑산 인민간부를 인근에 임시 매장하고 잠시 애도하였다.
그리고 총상자 반공대원에게 "인민에 총부리나 겨누지 말고 농사에나 전념하시오." 충고를 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빨치산이 폭탄현장에서 짐을 챙기고 자리를 완전히 뜨자,
멀찍이 숨어 남아서 지켜보던 주민 몇이 그 현장으로 나온다.

폭탄현장에 와 아직도 아수라장 흔적이 생생함을 보고,
허탈하여 한주민이 총상당한 반공대원에게 말을 건넨다.

 

마을주민; "아이고, 꼴이 말이 아니구만이랴~..
그건그렇고, 삽가지고 뭔 난리요~ 빨갱이하면 우리도 싫어하니까, 삽달라해서 줬는데, 이건 아니지않소?"


반공대원 "죽것소. 묻지 마시요~"


마을주민 ; "애고 모르것다. 우리 주민도 오늘 못본걸로할테니, 젊은양반 어디 나서지말고 농사나 전념하게요 들~."
 
반공대원 ; "아이고, 알았당께~ 아주마이~ 나좀 부추켜주시요~"

 

그러했다. 당시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주민이든 서로 묻지말아야할 일이 많았다.
 "묻지를마세요." 트로트는 현대에 김성환 아티스트가 애정을 담은 가요이다.
만일 격동기때 이곡이 시판됐다면 애환곡으로 널리 불리었을지 싶다.

아무튼 졸지에 패잔병이 된 반공대원은 지역주민의 부축하에 이 현장에서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한편 해는 천연덕스럽게 슈퍼선이 되어 동쪽 무등산 위로 높게 드리우고 있었다..

 

한편 서창동 폭탄현장을 수습하고 나온 빨치산(남부군)은
다시 무등산 방향으로 발길을 잡고, 광주에 당분간만 은신하게 된다.

군경토벌대의 무등산 포위작전이 개시된 상태여서, 이들은 이후 화순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화순 야산에 은신하여, 한동안 화순 토벌대의 후방을 교란하다, 이후 또다시 방랑자가 된다..

당시 군경은 무등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경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신작로를 개설했다.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까지 계림동에서 원효 계곡에 이르는 12㎞ 구간에 도로를 개설한것이다.
그 후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이 현재의 관광도로이며,
지금의 산수동~원효사 간 구간은 6.25 전쟁이 낳은 산물이라 하겟다.

또한 1951년 초가을때 무등산 중봉자락 규봉암(영평리)일대에 전투기로 화학무기를 살포하며, 포위작전을 펼쳤다.
빨치산에 점점 은신에 취약해지자, 이들은 산발적으로 탈출해 화순으로 도피하거나 지리산 본거지로 향했다.

 

PS (추신; 덪붙임)


이사건의 진위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이라도 지역주민에 수소문하려한들 잘 알길이 없다.
왜냐면 당시 반공파 목격 주민 스스로도 누구에게 말하기 민망할만큼,
위처럼 그 광경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황망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광주지역 반공치안대 스스로도 쪽팔려서 이사건을 입다물고 있었기에 더욱이 알수가 없다.
다만 알수있는것은 이처럼 빨치산에 비해 반공치안대에 의한 양민의 이러저러한 피해가 더 많았고(예; 누명),
그 행태 또한 치졸했다는것이다.

(1951년 봄 국군 11사단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개시하며,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 작전, 지시로 인근 월야, 해보, 나산면 마을로 피난을 했지만, 되려 인명피해가 더컸다고한다.
해보면 성대마을로 피난 간 주민 대다수는 국군 5중대('5중대 사건)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다고한다.)


그리고 격전지가 이 백마산 인근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만 지금은 고인이된 동네 문중큰어른이 당시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당시 광산군 어떤주민이 목격하길, 양천리사람 한명이 어떤자에게 끌려가는듯했다한다.(나의 할아버지로 추정)
그리고 풍문에 그다음날 무등산 못가 광주 남서쪽 변두리의 크고작은 야산이 많은곳에서,
왠 폭탄소리와 총싸움이 좀 있었다는것이다.

그때 즈음 반공대원이 빨치산에 깨진적이 있고, 그럼에도 무슨 모의를 하려 했다는것 등등이다.
 이를 증명하듯 인근에 양민 몇이 암매장되있다 사라졌다고한다.
한편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 잠시 실종되었다 며칠후 나타났는데, 거의 반병신 상태였다는것이다.
그리고 문중어른이 이르길 그것은 전쟁 후유증이라며, 그후 오래 못살다 결국 운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 당시 양천리내 행방불명자였던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만으로, 이러저러한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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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하늘자산;5천만원이상, 땅자산;1억원이상 달성;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1# 하늘자산 : 약5천만원이상 달성.

안녕하세요. 
생활수기에 붙여 저의 소개를 잠시 할까해요.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동이며, 1971년생에 가난한 농가의 전쟁고아 집안입니다.
2013년에 개봉된 '마이리틀히어로'에서 저와 닮은 주인공 김영광의 스토리처럼
환경은 다르지만
집안이 여의치않고 화목치 않아 순탄치 않은 유년시기를 보내었어요.
원래 본 고향은 격동기때까지만해도 뒷마을 나주시 노안면 금동마을로
성산에 조상때부터 관리했던 고인돌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부터 동네 토우에 속하는

 

좀 부유한가문이었다고합니다. http://cafe.daum.net/sdsms/2R8A/12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학생때부터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으나, 유년기시절에 불미스러운일로
갑자기 머리를 다쳐 후에도
후유증(편두통,기억상실증)이 있어 사회생활이 원만치않았어요.
회사에서 일이 서툴다고 종종 짤리기도 해서, 기술과 자산을 모으는게 더디었지요.

그래서 절망과 고독의 삶이 연속이었지만, 분발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마이리틀히어로, 김영광을 보면 나의 삶이 오버랩..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5
현대판 생계형 이산가족상봉기-꿈에본 내고향 방문..http://cafe.daum.net/mmnix/FDjK/125416)


 

1993년 군복무이후부터 ~ 2006년까지 직장을 다니면서 모은 푼돈으로
기독교(교회) 신앙활동을 하며 헌금도 꾸준히 하였어요.

1993 ~1995(광주에서 서울로 정착시기) 매월5만원선 = 헌금 약200만원,

서울정착시기 ~ 2001년까지 일반교회 다니면서 매월10만원선 ; (약6년) = 헌금 약1000만원

2001년~2006년까지 동포.이주노동자선교교회 및 단체 (약5년) 후원금; 약1천5백만원
활동내역
2001년 여름부터 2002년 11월까지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주일날 자원봉사를 시작,
2004년 ~ 2005년 '조선족의친구들'(동북아신문 내조 및 동포후원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함,
또한 서울조선족교회 후원언론 '동북아신문'에서 객원기자로 활동을 겸함.
2003년 ~ 2004년까지 가리봉중국동포타운에서 사이버팀장으로 자원활동 참여함.

 

 

2006년 ~ 2009년 이주인권단체 및 지역신문시민기자 활동; 후원금; 약1천200만원
예)2009년 한해; 후원금 약400만원 (비공식통계까지합산함)
(2009년 MY사회기부 통계- http://blog.daum.net/chmanho/16883623)
주요 활동내역
2006년 ~ 2007년 서울경인이주노조에 연대활동차 이주노조미디어활동가로 참여함(이후 후원회원)

이후 네띠(NTM)뉴스, 커널뉴스(팩트티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등으로 자원취재 활동.

(http://www.ntmnews.co.kr/, http://facttv.kr/facttvnews/, http://www.ohmynews.com/)

 

 

 

 2010년 ~ 2015년 ; 후원금 약1천200만원



 ∇ 최근 후원내역 관련 이미지동영상


 

 2# 땅(바닥)자산 : 약 1억원이상 달성
(부동산보증금+생활저축;약9천만원 + 자동차 및 생필품,생활가전품등;1천만원이상)

 

가사난으로 중퇴후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히 검정고시 공부를 하여, 대입검정까지(고졸) 마치었습니다.

저의 경제활동 주수입은 금속가공업에 1998년까지 한동안 종사하였고(당시 월급70~90만원선), 
2015년 11월까지 매일경제.구로보급소에서 신문보급업 일을 했어요.
수입: 2004년까지 100만원선, 2013년까지 125~135만원선,
불황으로(구독자 900부에서 600부이하로 급격히 감소) 2013년 7월부터 110만원으로 삭감.

 

그리고 신문일을 하며 (2013년 이후)부업으로 잠시 빌딩건물 관리 등을 겸했어요.(수입 25~35만원선)

 

   ∇ 월급통장

 

  ∇ 각종저축통장들 (청약저축은 이자표기가 없으나 150만원이상 이자적립됨)




 각종저축통장들중에서 주저축통장 저축내역일부



혹자는 제가 수입이 잘해야 140만원선인데 매월 후원금 10만원 이상 하고,
생계용 차(다마스) 유지비까지 있는데도 어찌 100만원까지 저축이 가능할지 의아해할것입니다.
물론 일반인에게는 택도없는 소리로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알뜰히 살려한다면 80만원까지 저축을 문안하게 할수있습니다.
일단 자동차 유지비에 대해 예기해보겠습니다.
자동차 유지비를 최대한 아끼는 방법이 첫째는 연비이며,

또한가지는 사고않나게, 차 고장않나게 잘타는것입니다.
 안전운전을 하다보면 종합보험까지는 필요가 없으며 책임보험만으로도 충분하게됩니다.
 설령 사고가 나더라도 상대편이 냈으면 냈지 내편이 아니고,

부득히 과실로 냈더라도 경미한 사고가 일반인바
책임보험으로도 충분히 다 물어주고, 할증 또한 낮습니다.
연비에 있어서 출발은 차분히 하고 과속을 않내게 하여 타는거지만,

실업무에 있어서 바쁘다보니 그게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리하시면 됩니다. 바쁠대 출발은 약간만 빠르게 하고

과속은 무리하지않게 적당한선(속도제한 상한선)으로 하고,
가다 신호가 바뀌면 유독 신호가 더디 바뀌는 큰 교차로가 있을시

시동을 끄고 기다리다 다시켜서 차분히 진행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것이 차를 놓고 최대한 걸을수 있다면

한쪽에 놔두고 가까운거리는 걸어서 움직이는것입니다.
(예로 저의경우 다마스로 밤12시에 출근하여 오전 6시경에 배달일이 끝나고,
바로 빌딩건물관리 장소로 이동해 잠시 일한후 퇴근하며(9시경),

주말에는 청계천까지 다마스로 장을 보고도 LPG값이 한달에 8만원 안팍밖에 않나옵니다.

그 이유는 배달일할때 걸을수있는 단거리는;총30% 최대한 걷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처럼 뚜벅이 정신이 없다면 이또한 연비 절감은 택도없는 소리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활비를 알뜰히 사용하며 절감하고 살기에 가능합니다.

지금의 난방비 절약법은 '초절전 난방법 전격 공개, 자린고비 체험수기'를 참조하세요.
http://blog.daum.net/chmanho/14400528

 

아래 사진을 보시면 청계천벼룩시장에 군바리용품을 파는곳에서 전투식량 3봉을 천원에 샀습니다.

(요세는 전투식량은 잘 내놓지 않고 깡통류나 식품류 등이 보이니, 갈때 참고하세요.)
그리고 전자랜지용(210g) 즉석공기밥을 시중보다 싸게 2팩에 1천원에 있기도합니다.

그리고 청계천벼룩시장에는 각종식품 및 물품등이 저렴히 판매합니다.

 

 

 

 위 사진은 주로 라면해먹을때 사는 라면사리이며 대형마트나 식품할인점에 보면,

5봉에 1500원에 지금도 판매하는곳이 있습니다.

라면스프는 청계천에서 조미료(다시마)를 싸게 사시거나, 혹은 진라면 5봉에 2천원하는데요,

 

라면1봉지당 나오는 스프를 다 사용하지마시고 많아야 70%정도 사용하고 나머지는,

따로 조미료통을 준비하여 그곳에 담아놓거나 아니면 남은 스프봉지를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또 라면을 개봉할때도 스프를 좀 남겨놓으면 다음에 라면사리만 넣고 끌여도 충분한 스프량이 확보됩니다. 어차피 라면을 드실때 라면만 달랑 드시는게아니라 김치나 반찬을 곁들여먹기에

그리하게되면 나트륨(소금)량이 초과되니, 스프는 적당히 넣고 라면에 김치나 양념류를 끌인 1분후

넣으면 맛도 일품이고, 이만한 저염분 웰빙라면이 없는것이지요.


 그리고 위 사진은 초당두부가 아니라 제가 즐겨먹는 400~500원하는 판두부입니다.

솔직히 두부 사드실때 1천원부터하는 초당두부를 사먹는등, 먹고싶은거 괜찬은거 다사다먹노라면,

생활비 절감은 고사하고, 무슨 후원은 염두도 안나옵니다.

또한 식비절약 예로 가끔 편의점중에서 본사밀어내기로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이나 도시락을 반품시키지 못하고 떠않고 폐기하는곳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한 편의점을 유심히 봐뒀다가 점주나 종업원에게 조심히 가서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반값에 챙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반값이하로 쳐줍니다. 이리하여 2~3일에 한번꼴로 염가로 사서 전자랜지에 돌려 해먹으면 됩니다.
유통기한은 도시락의 경우 여름이면 며칠안에도 괜찮으며,
겨울이면 3~5일이 되도 되는것이 있습니다.
(참 자주오면 종업원 입장에서도 귀차니즘이고 하니 며칠 간격을 두고 찾아가거나 ,
점주가 상주를 잘않하는곳이면 종업원에게 부탁하여 비용을 종업원 용돈하라고 몰래 주는게 나음)

이렇듯 좀 짠한삶을 감수하고 인내하고 하면 못해도 생활비 절감은 됩니다.

저의 경우 박봉이지만 저렴한 식품 및 외식이나 문화생활등 이리 절감하고 저리 절감하여

월90만원안팎 저축과 함께 10만원 이상 불우이웃후원도 가능하였습니다.

저의 생활 신조는 '진리와 의로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자'입니다.

 이만 줄이오며, 긴 수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생활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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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가 잠재적 폭도? -촛불행진쪽 길 봉쇄는 군작전 때문이라함



△ 위 동영상 1분35초쯤에 어떤 경찰관계자가 촛불행진 근처 길 봉쇄는 군작전 때문이라는 고백을 들을수 있다.

 


△ 치안계의 촛불시위대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듯, 대규모 촛불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행진코스가 가능한 인근 도로 및 골목길도 차벽 등을 설치해 원천봉쇄로 일관하고 있다.


△ 한편 주민 항의를 의식해서인지 차량을 무적차량으로 둔갑시켜 통행을 차단시킨 경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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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지역위로 당을 옮기며...(구로지역위 인사의 글)

http://guro.kdlp.org/bbs/view.php?id=party_board&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60

구로지역위로 옮겨온 신만호 당원 인사올립니다.

 

안녕하세요~.

진보매체 시민기자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신만호 당원 인사 올립니다.
제가 본 민주노동당을 가입한때가 2004년쯤으로 기억되는데요, 2001~2005년 시기에 구로.가리봉동 내의 동포인권단체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당시 2003년쯤 금천지역위 최석희 위원장님이 동포 인권활동차 가리봉 동포마을을 순회 중, 그때 뵙게 되어 차후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지역위는 금천지역위 위원장님에게 첫 인도를 받았고, 오래 전 뵙던 동지들이 좀 있고 아는척도 하셔서, 사는 곳은 신길동이고 직장은 구로동이나 그냥 금천위로 정했습니다.

저는 따로 시민기자 활동이나 소수자 인권 연대활동 등이 있고 해서, 별로 당 활동에는 전념하지 못했는데요, 이곳 구로지역위에 와서도 좀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으니, 저도 당 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난봉에 봉착한 제가 사는 가까운 지역위로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이렇게 직장 근처인 구로지역위로 옮겨왔습니다.


진보정당의 요동치는 정세동향에 즈음해, 제 집안 내력사와 제 약력을 좀 쓰고자 합니다.
제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동으로 가난한 농가의 전쟁고아 집안입니다.
한국전쟁 때 저희 할아버지는 무장공비로 추정되는 괴한에 의해 의문의 죽음(피살)을 당하였다고 하며(당시 제 집안이 좀 부유하였다고 함), 할머니는 전쟁 후유증에 지병까지 겹쳐 끝내 일찍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하여 제 아버지는 어렸을때부터 옆 마을의 부자농가에 의해 자라났고, 후에 독립은 하셨으나 가난한 농가였습니다.

당시 시골 마을도 반공이 일반화되었는데, 제 집안은 6.25로 당한 것이 있어서 반공에 앞장서거나 하지는 않으셨고 반공,친공 이런 것은 관심 두지 않고 그냥 평범히 살아가는 농가입니다. 당시 반공합네 하는자들에게 정부는 ‘새마을운동’ 간부 등 소권력을 쥐어 주었고, 후엔 그것도 빽이나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어, 반공주의자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는 등의 본질이 변질된 상태이었습니다. 이성과 인정을 중히 여기는 시골 마을사람들은 정치 개입이나 인식에 있어서 회의적인게 일반이었고, 자세한 것은 모르나 그래서 저희 집안도 그렇게 조용하고 평범한 집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저는 어떤 열정적인 침례교인에 의해 군복무때(92년) 기독교 신앙을 가졌습니다. 후 94년에 북한선교에 관심이 있어, 2001년 봄부터~ 2003년 가을까지 두리하나선교회에서(북한선교.탈북자인권단체) 자원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원하든 원치않든 모퉁이돌선교회, 탈북자동지회, 청년우파연대, 이북오도민회, 재향군인회, 뉴라이트 인사 등, 별 반공.반북주의자들과 대면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진보단체에선 거의 탈북자 인권에 관심이 저조해 그런 촌극이 빚어지고 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중립의 입장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북한인권시민연합, 두리하나선교회 등이 건전한 북한인권의 파수꾼으로 역할을 해오고는 있으나, 반공.반북 보수주의자들의 공세적인 북한인권운동 활약으로 인해 이 몇 단체들마저 그 여파에 밀리거나 휩싸여 같이 반북주의로 약간 치우치는 등 시대적으로 함께 퇴보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편 저는 두리하나선교회 자원활동가였으나 북한에 있어서 반북이 아닌 상호우호적인 윈윈을 지향했습니다. 즉 1995년 문래동의 의성기어에서 직장생활시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가입해 활동했었고, 2001년도에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좌우를 넘나드는 중립 이념가였던 것입니다.

이후엔(2001년 여름) 동포인권활동을 겸한데 이어, 2005년부터는 이주노동자 인권 및 소수자 인권활동 참여 등 거의 투쟁현장 참여와 PD활동 등을 해왔습니다.
한편 최근까지 이주노동자인권 활동에 동참하다 적잖게 상처를 받은 것이 있어 마음은 있지만 심적으로 힘들어, 지금은 이주인권관련활동은 그만둔 상태입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아래주소의 민주노동당 금천위 자유게시판을 참조하시고요.
http://geumcheon.kdlp.org/index.php?main_act=board&menu=geumcheon_me_free&board_no=3425&page=2&jact=art_read&seq=3&art_no=596853&num=20&category=0 )

올 봄에 (심.노)비대위가 민주노동당이 종북주의라는 의혹과 (경제.민생 대안)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지요. 진보신당 출범전 심상정의원은 민주노동당이 딱히 종북주의라는 뜻이 아니고 곡해가 된거 같으니 이해하라고 진화에 나섰으나 이곳의 일부 동지들은 아직도 민주노동당에 종북 딱지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이것에 있어서 본인의 생각을 잠시 적고자 합니다.
어디가나 모래배가 있어서 문제이듯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나 일부 모래배에 의해 남탓으로 인한 상호 책임 존재로 인하여 그런 논란이 있다고 봅니다. 진보정당의 분열과 위기는 서로 단결, 화합하지 못하고 미리 단정짓어 이중잣대가 난무하는 등, 정의와 신의(믿음)를 저버림으로서 비롯됐듯이, 서로 자성하고 고쳐나가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본인은 성향으로 본다면 진보신당이나 노동자계급정당이 출범할 때 제일 먼저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그쪽으로 갔을 법한데, 차마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민주노동당도(경직된 패권당이라고 회자됨) 문제이지만, 또한 진보신당과(똑같은 패권,개량당이라고 회자됨), 군소 노동자계급정당도(주장만 난무하는 골방좌파라고 회자됨) 문제이고, 한국사회당과 창조한국당은 아예 사민주의화에 뷰띠부르조아식 기성정당으로 변질되가고 있는등, NL을 비롯해 PD 또한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쇄신을 꾀하여, 상호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일신우일신 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쪼록 민주노동당의 안녕을 바라오며, 당을 쇄신하고 살리는데 미력하나마 저도 함께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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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심상정의원께 백의종군을 호소-부산노동자들이

권영길 의원과 심상정 의원에게 호소합니다. -  [매일노동뉴스]

[기고] 정의헌 민주노총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지도위원

 
인수위를 앞세운 이명박 정권의 저돌적 반노동자적 행보가 무자비한 자본독재를 예감케 하는데 조직적 분열로 치닫고 있는 민주노동당 사태는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진전을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해온 민주노조운동 동지들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선투쟁에 앞장섰던 우리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조운동 동지들을 더욱 절망의 구렁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20년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또 함께 한 단병호 의원의 민주노동당 탈당 및 총선 불출마 선언을 아픈 가슴으로 지켜보면서 권영길, 심상정 두 분 의원님께 간곡히 호소하는 마음으로 촉구합니다.

민주노총 출신 의원 동지들은 노동자정치세력화 운동을 잘 못 이끌어 온데 대해 역사적 책임을 기꺼이 지셔야 합니다.

당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지난 8년간 특히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당의 진보정치가 빠르게 의회주의로 경도되어 온데서 기인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현 사태 원인을 우리 운동에 어른 즉 지도력이 없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도력은 역할을 맡아서 그 일에 성과를 냄으로써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물러갈 때를 알고 자신을 비우는 것을 잘 함으로써 더 크게 자라나게 됩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수차례에 걸쳐 지도력을 키워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왔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략적 책무를 지고 선두에서 당을 이끌어 온 세 분의 노동자 의원들에게 특별히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정치적 판단 오류와 잘못된 역할로 일을 그르쳤습니다. 그 책임은 막중합니다. 전체 당원 수의 절반에 이르는 민주노총 조합원 당원과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의 힘을 업고 있는 노동자 의원들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재작년 비정규악법 강행 통과시 당 비례대표 의원들은 국회의원직을 버림으로써 당의 정치적 생명을 확장 강화했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민주노총위원장 출신 비례대표 의원인 단의원은 노동자 국회의원답게 국회의원 뺏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의원은 그 상황에서도 어떠한 분연한 정치적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당은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향한 정치적 기개를 잃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당 창당주역으로서 권 의원은 대선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뒤로 물러나 당과 진보진영의 단결된 대선투쟁을 보장하고 대선 이후의 당의 전진을 뒷받침하는 향도로서 남았어야 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더라도 대선패배에 대해서 정치 생명을 걸고 책임을 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권 의원은 당 안팎의 조건이 바뀌었음을 보지 못하고 김대중과 룰라의 대권 3수를 말하며 허무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당원들의 단결된 대선투쟁을 가로막았습니다. 또 대선패배에 대하여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을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세 번째, 비대위 위원장으로서 심의원은 살얼음을 딛고 선 것처럼 조심스런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중립적 위치에서 낮은 곳에 있는 당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아래로부터의 수습책을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심의원은 위기 수습의 역할을 위해 주어진 권한을 일방적 정치기획을 세워 밀어부침으로써 당권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의 도구로 이용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결과 당은 위기의 수습이 아니라 위기의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마음으로 상식적 판단과 실천만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당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 의원은 노동자 정치인으로,
권 의원은 한국사회 진보정치의 상징으로,
심 의원은 젊고 유능한 새로운 지도자로,
자신들도 살고 당도 살리고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1천500만 노동자들에게도 힘을 주는 역할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 분이 정치인으로서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와 힘도 다 잃고 말았고 당도 분열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앞이 뻔히 내다보이는데도 이를 보지 못했거나 보았지만 자신을 비워 진보정치 성장과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앞당기는 역사적 역할을 결단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세 분 모두 올곧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당권장악과 정치적 출세욕에 찌든 386 전업 정치활동가들이 주축인 정파세력들의 패권주의적 준동에 맞서 과감하게 대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함께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선참패에도 당의 분열에도 지역구 승리와 신당 창당 운운하며 정말로 역사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분열하는 민주노동당도 문제지만 정말 문제는 민주노총입니다. 무엇보다 분열의 불길이 민주노총으로 옮겨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의원님들의 책임 있는 행동이 절실합니다.

현재와 같은 분열 상태에서(두개의 당으로) 총선에 임한다면 대선참패로 중병에 걸린 진보진영 모두가 죽고 맙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그 간의 노력은 완전히 유실될 것이고 민주노총도 더 이상 조직적 대오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는 87년 이후 20년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역사적 성과가 한 줌의 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두 세력이 총선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8년 전 민주노동당을 처음 만들면서 가슴 속에 함께 품었던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이상과는 전혀 무관한 권력정치만 남게 될 것입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끌어온 민주노총 의원님들이 역사적 책임을 지고 이를 막아야 합니다. 세 분 의원님들은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1천5백만 노동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여야 합니다. 특히 권 의원은 대선참패의 책임까지 함께 지고 정계 은퇴선언으로 책임을 다해야 하며 심 의원은 민주노총을 분열로 몰아가는 신당창당에 앞장설 것이 아니라 자숙하며 반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역사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하방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마음을 비우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토록 자주 말씀하셨던 870만 비정규직과 함께 하는 정치를 하겠다던 말씀들이 진실이라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아직 가지고 계신다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인 민주노총이 당의 분열과 혼란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 의원님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20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성과들을 노동자 정치인인 의원님들이 앞장서서 허물어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민주노총 의원 동지들은 조승수와 김창현 그리고 노회찬 의원, 이들과는 처신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분이 그렇게 처신하신다면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수많은 소박한 조합원들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지 않을까요? 이렇게 해서 우선 민주노총을 위기에서 구해놓읍시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총선이 가까이 오고 그에 따라 분열된 정치로부터 자기정립을 못하고 있는 우리 민주노총 내부는 더 갈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소박한 열정으로 함께 해왔던 민주노총의 많은 평당원과 조합원들은 진보정치로부터 노동자정치세력화로부터 멀어져 갈 것이고 그 결과는 민주노총의 정치적 무력화와 조직적 분열이기 때문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 두 분 의원님들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대중적 주체인 민주노조운동의 동료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총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갖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지역구 출마와 신당 창당에 연연하는 것은 당을 말아먹고 민주노총의 분열을 획책하면서까지 자신들의 권력연장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민주노동당 내의 적대적 경쟁을 이제 총선공간에서 전체 노동자 민중을 더욱 치명적인 적대적 경쟁으로 몰아가면서 진보정치를 ‘이기는 쪽이 적자’라는 허무의 정치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앞장서서 이끌어 온 민주노총 정치지도부로서 역할을 해왔던 의원 동지들의 역
사적 책임행위는 우리 노동운동의 동료로서 계속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정치행위입니다. 부디 민주노총을 분열로 몰아가는 역사의 죄인이 아닌 노동운동의 근본적 혁신과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다시 함께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의 성원으로 남아 주시기를 간곡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촉구합니다.


기사입력 : 2008-02-21 10:16:11
최종편집 : 2008-02-21 10:25:35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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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제대로 된 노동자정당 건설이다.

[기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새로운 노동자정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김석진(울산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  / 2008년02월18일 18시43분

 

민주노동당에서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2004년 총선에서의 첫 원내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그러나 2007년 대선참패까지 정치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민주노동당이 정치적으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대선참패 이후 무엇보다 얼마나 계급적 입장을 선명하게 내걸었는지, 대중의 정치적 각성과 지배계급의 반동성을 얼마나 폭로했는지 등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대책을 강구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몰락은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면 부정하는 수많은 사건들이 축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파와 평등파라는 양대 정파는 지난 4년간의 민주노동당 몰락과정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일체 하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권력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냉혹한 심판을 받은 2007년 대선의 참담한 결과에도 반성할 줄 모르는 민주노동당에서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007년 대선 전야의 객관적인 조건은 민주노동당에게는 오히려 유리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노동자, 민중의 삶의 파탄을 심화시키고 있는 정세였고, 민생파탄의 책임 때문에 집권세력인 열린우리당이 몰락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생파탄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이 자본주의 때문이며, 민생파탄의 책임이 신자유주의 자본가 정치세력에게 있음을 적극적으로 폭로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실천하는 대안세력으로 우뚝 섰다면,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성장제일주의, 시장제일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들을 규합해 약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반대로 스스로를 열우당 2중대 노선에 가둔 채 차별화에 실패하면서, 민생파탄 주범인 열린우리당과 함께 동반몰락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계급을 배신해왔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몰락과정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이었다. 2007년 대선결과는 3.0%라는 낮은 득표율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2002년 대선 때보다도 25만여 표나 줄어든 득표수였다. 이러한 득표수의 감소는 민주노동당의 핵심지지층이 이탈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노동자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된 노동자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2005년 현대차 불파투쟁 방기,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 합의, 2007년 권영길 대선후보의 친기업당 발언, 그리고 한국노총 사과사태 등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행태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현대자동차 130여개 사내 하청업체의 9000여명 비정규직이 정규직화 요구를 걸고 싸웠던 2005년 현대차 불파투쟁은, 비정규직 양산의 대표적인 수법인 위장도급의 문제와 근절을 사회적으로 호소하는 투쟁이자, 무엇보다 전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소중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노동부가 불법파견을 판정했고, 현대차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유리한 조건도 있었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가 연대투쟁을 방기했고, 무엇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정규직 노조의 눈치를 보며 사실상 이 투쟁을 방기하는 비겁한 행태를 보였다. 결국 이는 곧바로 2005년 10월 26일 울산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현대차 정규직 노조 위원장 출신 민주노동당 후보가 패배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에게 심판받았다. 이때 한나라당 쪽 플랜카드가 참담하게도 “비정규직 양산하는 민주노동당 심판하자”였다.


다음으로 2006년 12월 8일 국회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로드맵에 대한 열우당의 수정 제안에 합의했던 사건이 있었다. 원안은 물론이거니와 수정 제안 역시 반노동자적 성격이 분명함에도 이에 대해 반대 표결조차 하지 않고 합의해준 것은 사실상 노동자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이후 ‘노사관계 로드맵 관련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 설치’가 2007년 1차 중앙위원회에 안건으로 제안되었으나, 중앙위원들의 압도적인 거부로 부결되었다.


이어서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대선후보로 당선되자마자 현충원을 방문하며 우경화한 행보를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방문해 민주노동당은 반기업당이 아니라며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는 발언까지 했다. 중소기업 사장들과 동지이면 열악한 노동환경, 이주노동자 착취의 온상인 중소영세기업 현장의 노동자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겠다는 것인가? 노동자 정당의 대선 후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힘든 망언이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연이은 배신행위의 절정은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한국노총 사과 사태였다. 대선 정책연대 대상에 끼고 싶으면 자신들에게 했던 반노동자 집단이라는 비판을 사과하라는 한국노총의 협박에 민주노동당이 굴복했던 사건이었다. 표를 구걸하기 위해 운동의 원칙조차 팔아버린 것이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당이라고 더 이상 부를 수 없을 만큼 자기정체성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노동자 배신행위들을 자행해왔고, 이러한 잘못된 실천들이 누적된 결과 결국 2007년 대선에서 계급투표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이 이러한데 자주파는 어려울 때일수록 단결하자고만 외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자본가 정권의 탄압을 받아 대선에서 패배했다면 당연히 단결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노동자 배신행위 때문에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인데, 무조건적으로 단결하자는 것은 그러한 노동자 민중의 심판을 외면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노동자 배신행위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한다.


자주파는 자기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2004년 이후 당권을 장악한 자주파는 민족노선을 계급노선의 우위에 두는 자신들의 시대착오적인 민족민주 기조를 당에 강요해 정작 시급한 당면과제인 비정규직 철폐, 빈곤 문제의 해결에 소홀해왔다. 또한 자주파 지도부들의 북핵 자위권 발언이나 용산지구당 사태 등은 진보정당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주파가 대선참패에도 불구하고 진정어린 자기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어린 자기반성이라는 것은 대선참패를 야기한 자신들의 잘못된 기조와 노선을 반성한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자주파는 노선 반성은커녕 대선에 참패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지난 2월 3일 당대회에서 참패라고 표현된 대선평가안의 자구를 “실망스러운 결과”로 수정해버린 것이다.


신당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자신들을 혁신세력으로 포장하고 있는 신당파는 마치 자신들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몰락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양 말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주파의 함께 민주노동당 몰락에 기여한 핵심 축이다. 신당파는 민주노동당 창당 때부터 개량주의적 한계의 극복과 계급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들을 자주파와 함께 줄기차게 반대해왔다. 2005년 울산북구 재선거 패배, 2006년 로드맵 야합 등의 중요한 고비마다 당의 반자본주의 성격과 계급성 강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신당파는 이러한 시도에 한 번도 찬성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 일심회 사건, 북한 핵실험 사건이 터지자 이를 반북적으로 쟁점화시키면서 당권을 되찾기 위해 자주파에 대한 정치공세를 펼치는데 열중했다. 이러한 신당파의 행태는 대선참패 직후에는 아예 대선참패의 원인이 종북주의라고 왜곡시키면서 제대로 된 대선평가 논의조차 가로막고, 분당을 위한 명분쌓기용 종파투쟁에 몰두하는 모습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신당파 역시 자주파와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이 왜 정치적 몰락을 하게 됐는지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주파만 청산하면 무언가 될 것처럼 선동한다. 특히나 이들이 추진하는 신당의 상을 보면 민주노동당보다도 더 우경화한 당을 획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노총당’, ‘운동권정당’ 혁신을 운운하며 노동자 중심성, 투쟁하는 운동정당으로서의 성격이 탈각된 개량주의 정당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탈당과 함께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실천해나갈 제대로 된 노동자 중심의 정당 건설에 나서자!
민주노동당은 현장 노동자들의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열망을 안고서 창당됐고, 성장해왔다. 2004년에 첫 원내진출에 성공했을 때, 노동자들에게도 드디어 자신들을 진정으로 대변해주고 싸워줄 국회의원이 생겼다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민주노동당이 보여준 모습은 참담했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배신행위들이 반복될수록 민주노동당에 걸었던 기대와 희망을 점차 접어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 만든 당인가라며 민주노동당이 혁신될 수 있다는 희망만은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선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이 보여준 참담한 모습들은 이제는 이러한 희망을 완전히 접어야 함을 확인시켜주었다. 민주노동당을 이루고 있던 핵심세력들은 왜 대선에 참패했는지에 대한 진정어린 성찰과 반성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권력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 싸움에는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고민도, 현장 노동자와 평당원들에 대한 책임도 없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당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기에는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했다. 결국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노동자 정당의 건설이다.


그리고 새로이 건설될 노동자 정당은 민주노동당이 추구했으나 결국은 스스로 잃어버린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모순 심화의 정세에 개량주의의 한계에 갇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버린 민주노동당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명백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강령을 한번 보자.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과 해방의 새 세상으로 전진해나갈 것이다” ,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인류의 오랜 지혜와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


자주파와 신당파가 묵살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나간다”는 민주노동당 창당 정신으로 돌아가자.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제대로 실천할 노동자 중심의 새로운 정당을 건설하자. 노동자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원흉인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여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사회주의 가치만이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온전히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대의를 위해 현장에서 묵묵히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전국의 노동자 평당원 동지들! 이제는 민주노동당으로는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실천해나갈 제대로 된 노동자중심의 정당 건설이 우리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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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연대와 결집을 위한 정치방침>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연대와 결집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희망을 만들어 가자!


1.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참패하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지형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1) 민주노동당의 참패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 대중에게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민주노동당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고통 속에 절규하는 노동자 대중을 반자본주의 정치투쟁으로 이끌어 내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조합 관료들을 기반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에 철저히 매몰되면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의 2중대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분노를 모아내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노무현 정권과 한 묶음으로 심판당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2) 민주노동당의 참패는 그 본질과 실상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대선 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은 시끌벅적한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한 데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똑같이 배신해 온 이른바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에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만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3) 대선 참패와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도 마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희망인 듯 행세하였다. 그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6~97년 노동법 총파업을 거치며 성장해 온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민주노동당이 상당 부분 흡수해 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제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지를 거둬들이고 있다. 지난 10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대안처럼 행세해 왔던 시대가 마침내 끝나가고 있다.

 

 

2. 사회주의 노동자당만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대안이 될 수 있다.

(1)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의 길을 걸음으로써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해 온 것은 그동안 민주노동당을 주도해 온 자주파(민족주의)만의 책임이 아니다. 대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평등파(사회민주주의) 또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도해 온 또 하나의 주역일 뿐이다. 게다가 대선 참패 이후 평등파는 신당추진 세력이든 민주노동당 혁신 세력이든 더욱 노골적인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민족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다.

 

(2) 그동안 민주노동당과 경쟁하는 정치세력이었던 노동자의 힘과 한국사회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대안이 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압도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받침돌이 되었을 뿐이다. 노동자의 힘은 노동자 권력 투쟁으로 나아가는 일관된 강령적 입장을 세우지 않고 시류에 따라 “반신자유주의”와 “반자본주의”를 왔다 갔다 하며 전형적인 중도주의의 모습을 보여 왔다. 노동자의 힘은 모호함으로 가득 찬 중도주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림으로써 스스로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좌파 노조 관료들의 근거지로 타락해 왔을 뿐이다. 한국사회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변종에 다름 아닌 사회적 공화주의를 내세우면서 노동자 운동 자체로부터 사실상 이탈해 왔다.

 

(3)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온전히 받아 안고 올바로 이끌어 나갈 유일한 대안은 개량주의 환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회주의의 길이다. 자본주의 모순이 나날이 격화되는 정세 속에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도전하고 자본주의에 정면대결 하는 태세를 갖춘 사회주의 노동자당만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자통제권 도입, 재벌 몰수․국유화 등을 내걸고 노동자 대중을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조직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현장에서부터 계급투쟁을 조직해 나가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와 노동자 권력 수립을 뚜렷하게 추구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만이 벼랑 끝에서 절규하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진정으로 실현할 수 있다.

 

 

3.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연대와 결집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희망을 만들어 가자.

(1) 사회주의노동자연합(준)은 아직 정식 출범을 앞두고 있지만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추진하는 한 주체로 당당히 서려고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우리만의 힘과 노력으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건설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소중한 성과들을 쌓아가는 것 못지않게,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연대와 결집 또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앞당기기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한다. 우리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연대와 결집을 제안한다.

 

(2)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을 위해 연대하고 결집해야 할 세력은 그 범위를 분명하게 할 때에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희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개량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지향을 뚜렷이 세워야 할 것이다.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현장에서부터 계급투쟁을 조직하겠다는 실천방향을 확고하게 세워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주체가 도저히 될 수 없는 정치조직들에 더 이상 뒤섞여 있지 않고 단호히 결별하여 스스로 사상적·실천적 정체성을 분명히 세워야 할 것이다.

 

(3) 지금으로서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연대와 결집이 실현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우선 필요한 것은 연대하고 결집할 주체들이 자신의 지향을 분명히 세워내고 드러내며 소통하는 길에 과감하게 나서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여러 동지들에게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주체로 자신을 재정립하며 과감하게 떨쳐나설 것을 호소한다. 또한 현장의 계급투쟁 속에서 성장하는 현장 활동가 동지들이 정치적 도약과 결단을 통해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주체로 스스로 우뚝 설 것을 강력히 호소한다.

 

(4) 연대와 결집의 방안은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의 윤곽이 드러나고 소통이 진전되는 것을 바탕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추진 세력들과 긴밀히 소통할 것이며, 그 결과를 토대로 연대와 결집의 방안을 제안할 것이다.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지형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현 상황은 노동자 대중의 솟구치는 투쟁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추락에서 비롯된 만큼 많은 한계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나날이 벼랑 끝에 내몰리는 노동자 대중은 머지않아 거대한 폭발력으로 자신의 분노를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사태는 그 전주곡에 다름 아니며,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복판에 가차 없이 내던져질 것이다. 뜻과 힘을 하나로 모아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향해 연대하고 결집함으로써 비상한 역사의 부름에 온몸으로 응답해 내자.

2008년 2월 4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준)

 

 

 

 

 

<서울대 음미대 식당 찾아오시는 길>

1. 서울대입구역 서울대 방면으로 나오셔서 5512번을 탑니다. 그리고 서울대 안까지 차를 타고 들어와서 경영대 앞에서 내립니다.(방송을 잘 하지 않으므로 기사 분께 경영대 앞에서 말해달라고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2. 경영대에서 내려 경영대 58동을 지나, 동원생활관(113동), 박물관(70동)을 따라옵니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미술대학 건물들이 쭉 나옵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을 지나오면 황토색 건물 제2식당(언덕방, ‘74동’)이 있을 것입니다. 2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 경영대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길안내 표시(사노련 출범식 화살표)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주차료가 비쌉니다.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세요. 
* 문의 : 박준선 (016 92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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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기본권을 범죄로 처벌하는 나라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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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법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붙고 있다. 뉴코아-이랜드일반노조 공동투쟁본부는 해고와 외주화를 반대하며 지난달 30일부터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고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있다. 8일에는 전국 홈에버, 뉴코아 매장 16곳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정부와 이랜드그룹은 이번 매장 점거가 영업을 방해하는 불법 쟁의행위라며 즉각 중단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사측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노조 집행부 6명에게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매장 주위에 배치된 경찰은 명령만 떨어지면 침탈을 자행할 태세다.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의 투쟁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고사시키는 오래된 전략을 또다시 구사하고 있다.

사진설명매장을 점거중인 홈에버 노동자들에게 보낸 사측의 협박문자. 정당한 파업권 행사는 업무방해라는 죄목에 걸려있다.


이번 투쟁에 대한 정부와 사측의 대응은 한국사회 노동기본권의 남루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랜드 일반노조가 쟁의행위를 통보한 것은 지난달 9일이었다. 하지만 사측은 묵묵부답인 채 해고와 외주화를 착착 진행시켰다. 경영을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포장된 외주화는 노동조건에 대한 사용 사업주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동안 거듭 계약을 갱신해왔던 이들은 비정규법 시행을 앞두고 ‘계약기간 만료’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매장 계산대에서 밀려났다. 노동조합은 파업을 선언했지만 대체인력 투입으로 매장은 정상 운영됐다. 이런 상황을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마지막 방법으로 매장 점거를 선택한 것은 사측을 교섭 자리로 끌어내기 위한 정당한 파업권의 행사로 봐야 한다.

우리는 묻는다. 파업 중인 노동자가 자신의 작업 현장을 점거하는 것이 어찌 범죄가 될 수 있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 평화적인 점거 행위에 대해 왜 국가가 체포와 구속 등 형벌권을 행사하는가? 헌법은 작업 중단에 따른 사측의 손실이 예정되어 있는 파업을 노동자의 기본권으로 인정하는데, 왜 작업장을 점거한 노동자가 매출 감소에 대한 민사책임을 져야 하는가? 어떻게 자본의 ‘영업의 자유’가 노동자의 인간답게 살 권리 위에 설 수 있는가? 21세기 한국사회는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자유로운 거래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단결을 범죄로 규정하고, 노무제공 거부 등 단순한 계약 위반 행위를 형사범죄로 처벌했던 역사를 되풀이하는 꼴이다. 생사여탈권을 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노동자의 유일한 대항권인 파업에 국가가 나서 범죄라는 낙인을 찍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중립을 가장한 자본 편들기다.

노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국가와 자본이 설계한 현행 법제도에 갇힐 수 없다. 파업권은 노동조합이나 조합원만이 아닌 노동자 개인의 권리여야 한다. 파업의 대상에는 개별 사업장의 노동조건 개선뿐 아니라 정부의 노동정책도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파업 열기를 식히려는 목적으로 노동조합법 상에 설계된 단체교섭이나 찬반투표, 조정절차는, 이를 거치지 않았다고 불법으로 간주될 수 없다. 파업권의 행사가 폭력과 파괴를 수반하더라도 개별 행위에 대한 책임과는 별개로 그 행위가 파업 자체의 적법성을 따지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측은 이번 점거 투쟁을 기업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고 농성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사측이 이처럼 뻔뻔스럽게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경찰력이라는 합법적인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정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법원은 법 테두리를 벗어난 파업이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구성한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감옥 밖 노동자들을 위협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단결과 파업이 범죄일 수 없다. 정부는 체포영장을 취소하고 점거 농성장 주변에 배치된 경찰을 당장 철수시켜야 한다. 노동자의 단결을 범죄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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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방 박님 경찰조사에 빨리 응하시고 사건 해결을 보이십시오. (의견 덪붙임)

[ MEMO :이주노동자방송국 박경주 대표에게 migrantsinkorea@migrantsinkorea.net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는데, 반송이 되어 (참조 ->  http://chmanho.ivyro.net/other/MigrantsInKorea/other/이노방메일반송.jpg ) 부득이 제 블로그에 박대표님을 향한 글을 실어 놓는바입니다. ]

 

 

올해 1월16쯤 이주노동자방송국 박대표님에게‘이노방 박대표와의 문제에 붙여 결자해지 원합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저를 향한 고소건을 취하해주기를 바랬는데, 아무 답변도 없고 취하도 하지 않아 1월 23일쯤 법적 맞대응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감입니다.

 

1월 4일에 박대표 님이 고소한 것에 관한 출석요구서가 날라 왔고 경찰서에 전화해보니 박대표가 사건을 빨리 해결을 바란다더라고 하길래 어찌됐든 몇 주내인 1월 12일 출석하여 조사해 응했습니다.

반면 그후 제가 박대표님에게 법적 맞대응을 했습니다만, 박대표를 향해 경찰이 여러 차례 출석 요구를 했지만 바쁘다면서 미루고 있다던데, 그 빨리 해결을 바란다던 말은 공허한 메아리였습니까?

보아하니 생업 때문이면 이해가 가나 방송국 활동 때문이던데, 방송국 일이라면 이노방 사건에 대한 해결을 보고 혹은 해결을 봐가면서 그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따져보면 이노방 사태는 박대표님이 덤벌기자와 저를 기자회원에서 제명(강등) 조치한데 이어 저를 향한 속보.알림글 3개를 올린 것으로부터 불거진 님이 자처해 발생된 것이니 화해를 통한 수습도 박대표님이 해야 온전한 순서입니다.

 

지난번 2월 13일, 2월 25일 취재 장소에서 님을 발견하고 집회가 끝난 후 님과 잠시 예기를 나누려 했는데 먼저 가버려서 예기를 못하던 차였습니다.

님은 저에게 압박감?에 시달려 고소를 하고 그리했다느니 하는데, 지난 두 차례 님을 발견하고 님의 표정을 좀 보니, 무슨 피해에 의한 압박감이라기보다는 무슨 반격에 찬 고집이 있는듯한 모습이었고 그것을 통해서도 님의 연극의 본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MWTV 자유게시판에 2006·11·25 ‘이주연대동지’가 퍼올린 이주노동자방송국 한국인 리더의 전행을 고합니다. (펌) 글에 대해 님은 바로 26일 새벽에 첫 댓글로 ‘이주노동자방송국 긴급 성명서’를 올리더니 후 3번째 댓글 ‘만호사랑’이라고 하며 님이 아닌척 하고 올린 빙정대는 댓글을 보고 글 표현이나 시간이나 따져볼 때 님이라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말입니다.

(  http://www.mwtv.or.kr/zeroboard/zboard.php?id=migran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87&PHPSESSID=a979a66cff054aaa8d41aa463fc30132 MWTV )

 

한편 저는 이미 1월 16일에 책임 소재를 떠나서 님에게 결자해지를 바라는 글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또한 덤벌기자도 작년 겨울에 박대표와 방송국 멤버에게 사과하는 글을 내 비췄더군요.

자 이제는 박대표님의 차례입니다.

그런데 님은 이노방 구성원들에 대한 사과의 공식 표명이 아직도 없더군요. 이제라도 이노방 멤버에게 사과의 뜻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 2월 3일 토요일 동대문에 있는 외국인 카페에서 덤벌기자를 만나 확인해 알 수 있었는데,
님은 2006.11.20 속보란에 올려진 <이주노동자방송국 긴급 성명서>에 2006년 11월 30일 '덤벌 수바'기자도 가담해 올렸다 듯이 '신만호 기자는 이주노동자방송국 활동가들에게 즉각 사과하십시오!, 신만호 기자는 앞으로 제 이름을 거론 하지 마십시오. ' 등 글을 상당수 임의로 추가해 조작을 해 놨더군요.

( http://migrantsinkorea.net/webbs/view.php?board=mignews&id=458&page=5&category1=1 ) 아래 인터넷주소는 그 조작된 부분을 밑줄을 그어 캡쳐한 것이니 참조바랍니다.

( http://chmanho.ivyro.net/other/MigrantsInKorea/other/긴급성명서조작건.jpg )

이렇듯 덤벌기자와 만나 확인하였듯이 성명서와는 무관하게 즉 “방송국 멤버에게 사과의 의사였지 성명서에 가담하려는 의사도 아니고 내가 신만호 기자는 이주노동자방송국 활동가들에게 즉각 사과하십시오 라면서 그렇게 글을 올린 적도 없다. 오히려 신기자의 행동은 진실을 밝히려는 자세였고 잘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박대표가 성명서를 임으로 조작해 추가한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했습니다.

덤벌기자와 만나 나눈 예기를 증명할 수 있냐고요?

참 그전에 자칭‘만호사랑’이란 아이디로 댓글로 제게 뭐라 했었죠? 줄리아님과의 대화 내용 녹취록도 가지고 계실텐데 푸심이 어떤지 라고요? 녹취록 푸실때 주의할건 무삭제본 이어야 한다고요?? 참 누가 일방적인 요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상상도 가지가지이십니다.

님이 임의로 기자회원 제명(강등) 조치 하고 글쓰기 제약을 거는 등 전행을 잃삼은 님과 또 그에 부하뇌동한 편집국장을 중심으로(왜냐면 말의 신뢰성이 의심되었고 차후 고소라도 해오게되면 증거가 필요했고 그 예시는 유감스럽게도 발생해 적중했음) 대화나 통화 녹취를 했었습니다. 그 외의 어느 사람이나 취재가 아닌 이상 녹취하는 일은 없습니다.

한편 이제 편집국장의 경우 저와 상호간 약간의 화해라도 있었기에 분쟁과 녹취 대상에서 좀 예외로 두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박대표 님의 경우 저와 화해 상태도 아니고 분쟁 상태이니 상호 증거나 기록이 필요하겠기에 부득이 음성을 계속 기록할 수밖에 없음을 밝힙니다. 님도 저와 예기 나눌 일이 있거든 녹취하시기 바라며 저로선 대환영입니다.

 

님이 저를 향한 고소 내용을 보니, 11월 2일 이노방 일로 님과 저와 만나 나눈 예기를 녹취해 무슨 않좋은 예기를 한것만 편집해 인터넷에 공개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억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무삭제본으로 인터넷에 공개했다면 그 파장은 님에게 더욱 부매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 아니해보셨습니까? 뭔 소리냐고 하신다면 말만 하십시오.

공개 않한 내용 중 상당수가 님이 덤벌기자 예기를 한 내용이었는데 잠시 듣다 제가 분명 서로 오해가 있는거 아닌가 했지만 님은 그게 아니라 덤벌기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제가 있는 예기를 30분 이상 했었으니 말이죠.

11월 28일‘만호사랑’이라는 댓글이나 고소의 고소내용을 보나 너무 어처구니없어 한번 따져보라는조로 대화 내용 중 공개 않한 부분을 다 뽑아 덤벌기자를 만나 잠시 들려주어 보았더니 이내 님을 행한 분노가 폭발할 지경이더군요.

그때 상황을 증명할 수 있냐고요? 그때 카페에서 범라우티 공동대표를 비롯해 이주노조 네팔인들도 그 장면을 목격했고 이노방의 내막을 좀 느끼면서 저와 덤벌기자의 억울한 사연을 짐작했드랬습니다. 그 증명이라면 덤벌기자가 잘 해줄 것이고, 님은 저와 덤벌기자에게 무얼 따지기 전에 덤벌기자에게 먼저 사과나 해야할것입니다.

이처럼 오히려 제가 대화내용을 인터넷에 다 공개 않한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이노방에 대해선 아픈 기억이 되어 홈도 잘 들어가 보지 않던차 최근에 서핑 해보니 그 잠꼬대 같은 저를 향한 긴급성명서?가 아직도 있군요.

다시금 요청합니다만 그 이노방 긴급성명서와 저를 향한 알림 글을 지금이라도 삭제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님도 결자해지를 바라는 자세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저의 반박문이 먼저 삭제되면 고소를 취하한다느니 하는 앞뒤 않맞는 소리는 하지도 말고요. 

제가 님에게 먼저 합의를 요청한 것에 대해 시시비비를 포기하고 님에게 먼저 머리를 숙이려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면, 어처구니 없는것이고 부디 그리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누구든지 누구에게 무슨 사과할 부분이 있다면 순서를 떠나 일단 사과를 하는게 사람의 도리이고 군자라 생각하고 있고 그런 차원에 입각해서 먼저 사과를 한 것입니다.

시시비비는 그와는 별개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님에게 내가 먼저 삭제하면 님도 삭제하겠냐던 비굴한 흥정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님이 저를 고소해놓고 먼저 반박문을 삭제해 달라는 등 하는 그런 이질적인 흥정에 대해선 신경을 끄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님이 먼저 이상한 알림란.속보 글을 올렸었고 법적대응도 먼저 하셨으니 저는 맞대응을 통해서라도 진실을 밝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흥정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기에 법정을 통해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리길 원하고, 상호 게시글이 어떻게 삭제될 것인지도 법의 판가름에 맡기고 싶습니다.

님이 계속 결자해지에 대한 용단을 않하신다면 말입니다.

 

미리 밝히지만 저는 1월 상반기를 기해 님을 향한 반박글 중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듯한 격한 부분은 모두 삭제하거나 무난한 표현으로 수정하여 되도록 감정에 의지하지 않는 답변성 글로 대체해 놨습니다.

하지만 님은 알림란이나 긴급성명서에 저를 향한 님의 격한 표현을 표출한 것을 그대로 남겨둔체 저보고만 뭐라하는군요.

각설하고, 제가 박대표님에 정중히 요청합니다만 저에게 반박글 삭제를 요청할 것이 아니라 그래도 격하다싶은 글 표현이 있는지 찾아 저에게 정정을 요청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 반박글중 아니다 싶은 것은 댓글로나 연락을 통해 답변을 해주시고요.

그것을 오는 화요일 님의 고소건의 상호 대질 조사때는 님이 출석하신다고하니 그때 저에게 말하고 요청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이노방 박대표님 저의 맞고소건에 대한 경찰 조사에도 빨리 응하시고 결자해지로 사건 해결을 보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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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데모 & 공산주의- 동포의 눈

중국에 모택동이 말씀하였던가?

반란에 도리가 있다고 ... 이한마디에 우후죽순 처럼 생겨난 각종 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물론 도리가 없는 반란은 없겠지만... 하여간 그때문에 중국에서는 숱한 문물들을 때려 부수고 불사르고 ... 하였었다.

그때는 노래도 없었고 어쩌다 지은 노래들을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북경을 노래하지 않으면 모택동을 노래했고 ... 노래가사에 사랑이란 두글자가 들어갔다하면 무조건 독초로 분류되지 않으면 황색으로 시들어 버리군 했다.

그때 우리 반란파들이 즐겨 부른 노래 하나 있었는데...

혁명은 손님을 접대하거나 밥을 먹는 것이 아니며.
문장을 짓거나 수놓이를 하는것도 아니고.
혁명은 폭동이며 한계급이 다른 한계급을 뒤엎는 격렬한 행동이다.
라는 노래가사인데... 아마도 당시의 최고지시에 곡을 붙혀서 불렀는데... 이노래는 당시의 반란파들의 군가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 혁명은 폭동이며 ... 격렬한 행동이다.그렇다면 요즘 대한 항공사 아시아나 항공사의 파업은 무엇인가.
그래 격렬한 행동이 아니란 말인가.격렬한 행동은 폭동이며 다른 계급을 뒤엎자는 혁명이다.

난,오늘 항공사 노조들의 행동을 보고 이 노래가 생각났다.그리고 그당시 중국에 암탉이 해를 치던 당시 그 최고 지시가 떠올랐다.반란에 도리가 있다.
그렇다면 항공사 노조의 반란에는 무슨 도리가 있는가.더 쉽게 벌고 더많이 먹겠다는것이다.
그것이 바로 착취가 있는곳에는 투쟁이 있고 압박이 있는곳에는 반항이 있다는 모택동의 최고 지시가 千 眞 萬 確 천진만확 의 진리라는 것을 입증했다.

착취가 없다면 그들이 불만이 존재하지 않을테고 압박이 없었다면 반항이 생겼을가.천부당 만부당하다. 압박이 있고 착취가 있는곳에 파업은 불가피 한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사회는 ;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또 그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가하는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파업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그리고 파도식으로 하나가 일어나고 하나가 잦아들고 하나가 잦아들면 또새로운 파도가 일어나는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인생은 불만족의 계속으로 오늘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노조들도 ... 우리도 전철 카드를 발급하라 할것이요. 또다른 노조에서는 버스카드를 ... 항해사들은 항해권을...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파업과 요구가 제기 될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이다.자본주의 사회는 본래 이런것이고 또 이렇게 이런 모순을 해결하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그리고 또 새로운 모순이 생기고 ...

그렇다면 어느때 이런 파업이나 반란이 없어지는가?
그것은 간단하다.더이상 모순이 없을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이 서로 완화되여 한점의 모순도 없어진 바로 그때,그때는 이런 파업이나 반란이 없을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은 어느때 없어지는가?

그것도 간단하다.더이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란 계급이 없는 그때 ,계급이나 계급의 모순이 없는 그때, 전국민의 노고대중이 주인이 되는 그때, 바로 그때에 이런 파업은 영원히 영원히 다시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그사회가 바로 공산주의가 아닐가 싶다.

그렇다면 그어느날 공산주의란 이찬란한 꿈이 실현되지 않을가 ?!

'''''''''''''''''''''''

꿈이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미련이 남아

돌아선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멀어진 그대
..................

허공속에 묻힌 그날들

우리모두 결국 진짜로 그날을 위해 싸우고 있지 않는것인가 싶다.

주정배      200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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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계급투쟁을 절대로 잊지 말자 !&quot; -동포의 눈

<주정배 칼럼>  
 
 
 중국의 모택동 동지는 일찍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
"계급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은 일정한 계급적 지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매개인은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 계급사회에서는 계급이 존재하며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나 국가는 없다. 또 모든 국민은 크고 작은 일정한 계급적 지위가 있다.

모택동 동지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 "


중국에서는 1949년 해방되면서 부터 모든 인민들에게 계급적 낙인을 찍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성분이라는 것이다. 성분이란 다시 말하면 그 당시 해방될 때에 생활수준에 근거로 땅 갖고 있는 자는 지주, 잘살고 있는 자는 부농, 그다음 조금 잘살고 먹고 입는데 지장이 없는 자는 중농, 그다음 가난한자는 빈농, 그 아래 가난하고 말끔한 거지같은 자는 고농…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선량한 백성들이 모택동의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를 항상 입에 담고 다니면서 학습하고 토론시키고 실천하라고 하니 그들이 무슨 계급이 있어서 누구와 투쟁을 벌릴 수가 있으랴

그러니 계급도 없는 선량한 백성들이 계급의 적을 찾으니 당연히 저보다 잘살았던, 그것도 옛날에 지주 부농, 그리고 권력자들 밖에 없었다. 권력자들에게는 그저 생트집을 잡아서 때려 없고 지주 부농들은 아무 때나 심심하면 붙잡아서 비판하고 투쟁하고 이름패를 목에 걸어 거리에 내 세웠다.

이렇게 선량한 백성들이 계급투쟁을 부르짖으며 계급투쟁을 실천에 옮기려니 그대상자를 찾기 힘들어서 그저 이렇게 성분을 따져서 운동 때마다 지주, 부농을 불러 내였다. 솔직히 지주 부농들은 내가 집체호를 가서 보니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고,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고, 솔직히 그들에게 측은한 생각에 불쌍한 마음도 들었고 너무 한다는 생각마저 있었다.

권력가들의 이념론에 얼리어 자기의 친형제나 친부모들과도 서로 자신의 관점이 옳다고 우기고, 자기 이론이 맞다고 싸우던 시절, 이념이란 무엇인지 똑똑히 모르던 무식한 우리 부모들, 공산주의를 위하여 분투 합신다시고, 공산주의를 위하여 목숨도 바친답시고, 그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서 그들 정치가나 권력가들의 이념론에 얼리워서 " 죽어도 영광 살아도 영광" (이건 북한 구호임) 이라고 소리높이 웨치며 공산주의를 위하여 형제도 부모도 가족도 심지어 민족주의도 타도하고 남쪽을 향하여 친형제를 향하여 총뿌리를 돌렸던 적도 있었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썩 후에야 중국이 개방하고서야 알았다. 이념이란 그저 권력가들이 자신들의 권력 탈취를 위하여 군중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도달하기 위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또 웃었다. 우리 백성들에게 계급투쟁이란 그 무엇이며 계급투쟁도 존재할 수가 없다고 말이다. 그저 땅이나 뚜지며 열심히 땀을 흘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그들 선량한 백성들에게 계급투쟁이 어디에 있으며 계급투쟁이 어디에 존재하며 그것을 잊지 않은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또다시 그러나 , 오늘날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십여 년을 생활하면서 자본주의 제도를 알았고 자본주의 성질을 이해하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모택동의 " 계급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은 일정한 계급적 지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이론은 오늘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千眞萬 確한 진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사회에서 참답게 살아 나가거나 생존하여 나가려면 확실히 계급투쟁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아니, 인간뿐이 아니다. 모든 동물은 자리 때문에 다투고, 싸우고…하는데 그 자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편안함이 담기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인간은 동물 보다는 한 가지 더 명예도 걸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이것이 바로 모택동이 말씀하시는 계급투쟁이 아니란 말인가 ? 다시 말하면 높고 낮음의 투쟁, 인생 정글의 법칙이 아니란 말인가?


어릴 때는 학교서 자리를 다투고 시험성적을 위하여 서열을 다투고 사회에 나오면 승진이나 그 계급을 다투고, 일정한 계급적 지위가 생기고 부가 이뤄지면 큰 자리 국회위원 자리를 다 투고, 그 다음엔 모든 사내들이 탐을 내는 자리? 아니다! 요즘은 여자들도 많이 탐을 내니깐 모든 인간들이 탐내는 최고로 큰 자리 대통령 자리를 다툰다.

인간은 이렇게 동물과 똑 같이 그 자리 때문에 물고 뜯고 하는 것 같다. 하여간 이번에 또 대선을 하니 이런 제일 큰 계급투쟁이 또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동물의 자리다툼도 강육 약식이란 정글의 법칙과 주기성이 있듯이 인간도 이렇게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다툰다. 모든 사회에서 말이다. 정치판이나 회사에서나 공장에서도 말이다.

그런데 조선족들은 이런 자리다툼에 좀 서툴다고 말할까? 하여간 자본주의에서 태어나고, 그자본주의 라는 정글 속에서 자라고 성장한 분들보다는 못하다. 뭐,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말이다. 그래서 에둘러 말하며 그들은 우리를 웃곤 한다. 참 순진하다. 떼 묻지 않았다. 등 등. 이것은 못난 여자를 남자들에게 소개 할 때 마음 하나는 대단히 곱다 하는 것과 같다. 글쎄 못난데다 마음까지 나쁘면 뭬-야 ?

우리는 이렇게 순진하고 떼 묻지 않음은 우리가 자라온 환경 때문인 것 같다. 우리말 그대로 붉은 기 밑에서 태어나서 붉은 기의 아래서 자라온 우리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평등 자유만 보고 들었고 그것만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

중국에서 평등은, 순진했던 것 같다. 대혁명 때는 계급이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軍. 중국인민 해방군에서 조차 계급을 없애는 계급장을 취소하고 붉은 영장만 달랑 달았었으니…그러니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배우고 자라난 우리는 자연 그렇게 순진하고, 그들의 말대로 떼 묻지 않을 수밖엡

지금 한국에 계시는 고향친구들과 술 한 잔 하다보면 어떤 분들은 한잔 들어가면 욕설이 나오는데, 글쎄 이런 분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어디에 가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3개월을 넘겨본 적이 없다.

그들의 말대로 정말 나쁜 사장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도 무엇을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남들은 1,2,년 한 회사나, 일터에서 말없이 일하고 근무하고 하는데…

이런 분들에게 어디에 가나 마찬가지라고 충고하고 싶다. 즉 천하에 까마귀는 다 검다, 그 말이다. 어는 사장이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돈을 많이 주고, 일을 적게 쉽게 시키려고 하겠는가? 당신이라면 돈을 많이 주고, 일을 조금 시키겠는가? 사장과 직원, 주인과 하인, 상급과 하급, 고참과 신참…이것이 바로 모순이며 이것이 바로 계급적 모순이다. 계급이 존재하는 한 마찰이 존재한다. 모순에서 마찰이 생기며, 마찰은 처음은 따스하지만 오래되면 열이 나고  계급투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또 직원과 직원, 일꾼과 일꾼 사이도 마찬가지로 이런 모순과 마찰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우에서 말한 자리다툼과 비슷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질투라고도 한다. 학교 때 물리시간에 마찰을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 마찰이 없으면 우리인간도 존재하지 못하듯이 사회생활에도 마찬가지로 마찰이 없으면 모순이 없고 모순이 없으면 발전이란 없다. 모택동의 계급투쟁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다.

만물의 생장은 태양에 의거하듯 사회의 발전과 진보는 이렇게 모순에 의거하지 않는가 싶다. 모순을 잘 해결하면 발전하고 잘못 해결하면 퇴보하고 더 큰 마찰이 생기고 결국에는 파업하고, 한다. 모순이 없는 곳은 없다. 굳이 모순이 없는 곳을 찾으려면 딱 한곳이 있는 것 같다.

공동묘지~거기엔 모순이 없다. 거기는 죽은 사람뿐이니깐. 당신을 질투하거나 시기하거나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조선족들이여 ! 적응하라, 자본주의라는 이 무서운 계급의 투쟁, 이 피할 수 없는 정글의 법칙을…그리고 이기라. 정글에서 약자는 도태다. 도태란 바로 진다는 말, 먹힌다는 말, 잡힌다는 말, 그 말이다.

조선족들이여! "계급투쟁을 영원히 잊지 말자 ! "

 

그리고 잊지 말라, 자본주의 기본법칙-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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