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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_트로츠키_1910

  • 분류
    트로츠키
  • 등록일
    2010/10/10 09:00
  • 수정일
    2010/10/20 03:39
  • 글쓴이
    얼치기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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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

트로츠키

1910년

 

10년 전, 혹은 6-7년 전에만 해도, 러시아의 주관적 사회학풍을 방어하던 자들('사회주의 혁명가 당')이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막스 아들러1)의 최근 팜플렛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5-6년 동안, 우리는 너무도 철저한 객관적 '사회학풍'을 겪어 왔고, 그것의 교훈들이 우리의 몸뚱아리들에 너무도 분명한 상채기들로 쓰여져 있어서, 가장 신성시되는 고귀한 지식인, 심지어 아들러의 '마르크스주의' 문사(文士) 조차도 러시아의 주관주의에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러시아 주관주의자들의 운명은 막스 아들러의 주장들과 견론들에 반대되는 가장 중대한 논거이다.

 

이 팜플렛의 주제는 지식인과 사회주의 사이의 관계이다. 아들러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단지 이론적 분석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확신시키고 싶어 한다. 학생 사회주의자들 청중에 대한 연설에 기초하고 있는 아들러의 팜플렛은 열정적인 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움을 자처하지 않는 사상들에 대한 특별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 작은 작업은 변절의 영감으로 충만하다. 그의 팜플렛에서는 자신의 이상으로 인텔리겐챠를 획득하고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는 이 정치적 열망이 사회분석을 완전히 압도하는데, 이 정치적 열망이 팜플렛이 가지고 있는 기이한 색조를 보여주며, 그것의 약점을 증명하고 있다.

 

인텔리겐챠는 무엇인가? 물론 아들러는 이 개념에 윤리적인 정의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부여한다: 인텔리겐챠는 역사적 서약에 의해 함께 묶여 있는 계층이 아니라 각종 '두뇌 노동'의 직업을 포괄하는 사회계층이다. 비록 '손'노동과 '두뇌'노동 사이의 경계선을 그리는 것이 힘들지는 몰라도, 인텔리겐챠의 일반적인 사회적 성격들은 더 이상 상세하게 나아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분명하다. 인텔리겐챠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틀 내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온전한 계급이다. 아들러는 인텔리겐챠를 계급간 그룹으로 부르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없다. 그리고 아들러에게 있어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도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이 계급의 영혼에게 보다 나은 권리를 부여하는가? 무슨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바로 그 성격의 결과로서, 내적으로 이들에게 필수적인가? 아들러는 집산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대답한다.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이 집산주의 사상에 직접적으로 적대적이지는 않은 한에는, 이들이 노동 대중들의 삶과 투쟁으로부터 열정적이지도 않고, 냉담하지도 않은 채 멀리 떨어져 서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아들러는 이 사실에 눈을 감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충분히 객관적인 지점들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아들러는 사회주의를 향한 인텔리겐챠의 대중운동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적 조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는 자신의 머리말에서 '비록 순수하게 경제적인 영역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심지어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삶의 상황과는 별도로, 그들이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에 참여하도록 할 충분한 동기들로서 전체 인텔리겐챠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있는 충분한 요인들이 존재한다. 인텔리겐챠들이 이 운동의 본질적인 성격과 그들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관하여 알고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전부이다.'고 선언한다. 이들 요인들은 무엇인가? 아들러는 '영적 관심의 자유로운 발전의 신성불가침성과 무엇보다도 그 가능성이 인텔리겐챠의 삶의 본질적인 조건들 중의 것들이기 때문에, 이론적 관심은 인텔리겐챠들이 염려하는 경제적 이해와 완전히 동렬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약 사회주의 운동에 합류하는 인텔리겐챠의 기초들이 원칙적으로 경제적 영역의 바깥 쪽에서 찾아진다면, 이것은 사회주의의 경제적 내용에 의해서 만큼이나 정신노동의 존재라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7쪽). 전체 운동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독립적으로(결국, 이것은 단지 길일 뿐이다!), 매일매일의 당의 정치적 이미지로부터 독립적으로(결국 이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하나의 일반적인 사회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그것의 본질에서 사회-역사적인 족쇄와 한계로부터 모든 형태의 정신노동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와 이러한 전망이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이 사회민주주의 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이론적 다리를 제공해 준다.2)

 

이것이아들러의전체팜플렛이정렬을쏟고있는것을전개시키는것에대한그의기본적인입장이다. 바로 눈에 띄는 이것의 근본적인 오류는 이것의 비-역사적인 성격이다. 아들러가 기대고 있는 인텔리겐챠의 집산주의 진영으로의 진입을 위한 사회적 기초들은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인텔리겐챠에 의한 어떠한 대중적인 움직임의 흔적이 단 하나의 유럽 국가에서도 없다. 물론 아들러도 우리 만큼이나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인텔리겐챠가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노동계급 운동으로부터 인텔리겐챠의 소외를 위한 이유를 찾는다.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많은 다른 극도로 복잡한 사물들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동시에 존재하는 이러한 한결 같은 이해의 부족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분명히, 이것은 그들의 이론적 논리의 취약함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 심리학에 있는 불합리적인 요인들의 힘이다. 자신의 팜플렛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장의 하나인 '[사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부르주아지의 한계'라는 장에서 아들러 그 자신이 이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인텔리겐챠들과 자신과의 관계라는 논리를 재수립하는 경우에만 유럽 사회민주주의는 두뇌 노동자들의 정신세계의 비합리적인 요인들을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럴 것이라고 희망하며,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텔리겐챠들은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인텔리겐챠들에게 사회주의가 나날이 그것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다른 여러가지 정당들, 다른 정당들과 그냥 똑같은 정치적 정당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회주의가 전세계적인 문화적 운동으로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텔리겐챠들에게 보여준다면, 인텔리겐챠들은 사회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희망과 열망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들러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까지 우리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에 관련되는 한, 순수한 문화적 필요조건들(기술, 과학, 예술의 발전)이 가족, 학교, 교회, 그리고 국가로부터 나오는 계급적인 시사들이나 혹은 물질적 이해의 목소리 보다 실제로 더욱 강력한지 여부에 관하여 조사하지 않은 채로 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논쟁을 위하여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무엇 보다도 부르주아지 사회와의 사회주의적 단절이 문화의 이해에 복무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단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인 문화의 사도의 집단을 인텔리겐챠 속에서 찾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인텔리겐챠들에게 이론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그들에게 제공해왔던 것보다 더 강력한 확신과 더 강력한 매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여전히 강력하게 남는다.

 

집산주의는 이미 수십년 동안 자신의 투쟁의 목소리로 세상을 채워오고 있다.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이 기간 동안에 정치 조직, 노동조합, 협동조합, 교육 및 기타 조직으로 단결해왔다. 전체 계급이 스스로를 삶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스스로를 끌어올렸고, 지금까지는 재산 소유 계급의 사적인 보유물로서 여겨졌던 정치라는 가장 신성한 곳으로 자신의 길을 강제해왔다. 매일 매일 사회주의 신문이 부르주아지의 가치들을 크고 작게 새로운 세상의 관점으로부터 재평가한다. 여기에 사회주의가 부르주아지 사회의 관점에 대하여 자신의 관점을 대비시켜오지 않았던 사회적, 문화적 삶에 관한 문제(혼인, 가족, 가정교육, 학교, 교회, 군대, 애국주의, 위생, 성매매)는 하나도 없다. 그들은 전적으로 문명화된 인류의 언어들로 말한다. 서로 다른 성향과 다양한 기질의 서로 다른 과거, 사회적 연관들과 삶의 습관들을 가진 사회주의 운동 인민들의 대오 속에는 활동과 투쟁이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리겐챠들이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그들이 이 세계적 운동의 문화-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그들을 강제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면, 이러한 치명적인 이해의 부족의 원인들이 매우 심오하며, 문헌적 이론적 방법으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은 애초부터 희망이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러한 사상은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더 충격적으로 드러난다. 지식인들의 사회주의 운동으로의 가장 커다란 유입은 당이 아직 유아기에 있을 때인 첫번째 기간에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 적용된다. 이 첫번째 물결이 인터내셔널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과 정치인들을 동반했다. 유럽의 사회민주당이 성장할수록, 당 주변으로 단결되었던 노동자 대중의 규모가 더 커질수록, 인텔리겐챠 출신의 새로운 인자들의 유입은 (상대적으로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더욱 약해지게 되었다. Leipziger Volkszeitung3)은 오랫동안 신문 광고를 통해서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편집국 활동가를 구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여기서 아들러와는 완전하게 반대되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가 자신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면 낼수록, 사회주의의 역사 속에서의 임무를 모든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될 수록, 인텔리겐챠들은 보다 단호하게 사회주의로부터 물러나 왔다. 이것이 인텔리겐챠들이 사회주의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대학인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친화를 방해해 왔으며, 동시에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인입을 촉진해왔던 것으로서의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가 발생해왔음에 틀림없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것들은 무슨 종류의 변화들이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지적인 개인들, 그룹들 그리고 계층들이 사회민주당에 합류해왔으며, 합류하고 있다. 산업과 운송의 성장과 집중은 그저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키고 있을 뿐이다. 완전히 다른 형태의 과정이 인텔리겐챠와 관련된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의 거대한 자본주의 발전이 이 계급으로부터 크림을 의문의 여지없이 걷어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주도력과 사고의 도약을 확보한 지식인 세력들이 조직적 활동에 대하여 환상적인 급여를 지불하는 자본주의 산업에 의해, 기업집단들, 철도회사 은행들에 의해 흡수되어 왔다. 오로지 2류들만이 국가 서비스와 정부 사무소들에 남아 있으며, 모든 경향들의 신문 편집국에도 마찬가지이며, '사람' 부족에 대하여 불평한다. 자신들의 종속적이고 물질적으로 불안정한 삶의 길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의 메카니즘에서 파편적이고, 2류에 해당하는 기능을 하며, 큰 매력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전에 없이 증가하고 있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 인텔리겐챠의 대표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들러가 호소하는 문화적 관심들이 독립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호의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돌리는데에는 충분할 수가 없다.

 

집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어떠한 유럽의 인텔리겐챠도 실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들의 대오 내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개인적 영향력의 지위를 획득할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환경이 여기에 추가된다. 그리고 이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노동자는 자신의 계급을 따라서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사회주의로 다가오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망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심지어 대중들과 자신의 윤리적인 통합의 느낌에 기뻐하기까지 하며, 이것이 그를 더욱 확신에 차고 강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식인은 자신의 계급적 탯줄과 단절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고 개별 인자로서 사회주의에 다가오며, 필연적으로 개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장애물들에 직면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물들은 더욱 커진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때에는, 비록 평균보다 위에 있지 않았더라도, 합류했던 모든 지식인들이 노동계급 운동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지위를 획득했다.

 

오늘날 서유럽 나라들에서는 모든 신참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구조를 발견한다. 자신들의 계급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동기유발된 수천명의 노동자 지도자들이 굳건한 기구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기구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명예로운 고참들이, 인정받는 권위의 앞자리에는 이미 역사가 되어 있는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오로지 예외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도적인 지위를 획득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생소한 진영 속으로 심연을 가로질러 도약하는 대신에, 최소저항의 노선을 따라서 산업이나 국가업무의 영역 속으로 이끌린다. 이렇게 해서 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 마치 분수령 처럼 사회민주당의 기구 조직이 놓여있다. 당 기구 조직이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텔리겐챠 성원들 사이에서 불만을 일으키고, 당 기구는 (가끔은 그들의 '기회주의'와 관련하여 그리고 가끔은 반대로 그들의 지나친 '급진주의'와 관련하여) 이들로부터 규율과 자기 절제를 요구하며, 그들이 무정부주의와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호감들 속에서 동요하는 불평을 늘어놓는 구경꾼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Simplicissimus4)가 그들의 최고의 이론적 기치이다. 여러가지 변화와 함께 다양한 정도로 이 현상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반복된다. 이 사람들은 가장 심금을 울리는 자신들의 영혼을 장악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문화적 의의에 대하여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더 무감하고, 소위 냉소적이다. 오로지 지극히 소수의 '이론가들'만[이 단어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자 모두로 사용하자면]이 자신들의 출발지점으로서의 순수한 이론적 사유의 자극 하에서, 혹은 안톤 멩거5)의 경우에서 처럼, 법칙에 대한 요구들을 통해서, 혹은 아틀린티쿠스6)의 경우에서 처럼, 기능에 대한 요구를 통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 조차도 대개는 실질적인 사회민주주의 운동으로까지 다다르지 못하며, 그들에게 사회주의와의 내적 연관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7개의 봉인으로 밀봉된 책으로 남아 있다.

 

 

즉각적인 물질적 획득이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텔리겐챠를 집산주의로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고려함에 있어서 아들러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인텔리겐챠를 획득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며, 즉각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들과 계급적 속박들이 사회주의에 의해 제공되는 모든 문화-역사적 전망들 보다 더 설득력있게 인텔리겐챠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노동자의 의사들, 변호사들 등등과 같은 직접적으로 노동 대중들에게 복무하는 인텔리겐챠의 층(일반적으로 이들 직업에서 덜 재능을 가진 자들의 층)을 제외한다면, 인텔리겐챠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부위가 자신의 생계를 산업적 이윤으로부터의 지불, 토지 임대, 국가예산에 의존하며, 그래서 이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자본가계급이나 자본주의 국가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물질적 의존성은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계급과 관련하여 단지 반(反)자본주의 대오에 있는 전투적인 정치적 실천만을 배제시킬 뿐, 정신적 해방은 배제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인텔리겐차가 하는 활동의 '정신적' 성격이 그들과 소유계급들 사이의 정신적 동맹을 형성하게 한다. 노동자들에 맞서서 자본의 이해를 더 받들어야 하는 관리의 책임을 맡는 공장 매니저와 기능공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노동자들과 항상적인 적대관계에 있음을 안다. 결국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이 그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그들의 의견들을 그것 자체에 적응시켜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의사와 변호사들은 그들의 활동의 보다 독립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그들의 고객들과 심리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전기공은 매일 매일 장관들, 은행가들, 그리고 그들의 여주인들의 사무실에 전기배선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반면, 이들 인간들의 느낌과 취미에 부합할 자신의 마음과 표현 속에 있는 음악을 찾아야만 하는 의사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더욱이 이런 종류의 접촉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사회의 최고 꼭대기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런던의 여성참정권론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참정권을 지지하는 변호사를 고용한다. 베를린에 있는 거물들의 마누라들이나 비엔나에 있는 '기독교-상류사회의' 상점주인들의 마누라를 치료하는 의사나 그들의 아버지, 형제, 그리고 남편들의 일을 처리하는 변호사는 집산주의에 대한 문화적 전망에 대한 열정이라는 사치를 그 스스로에게 거의 허용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이 작가, 예술가, 조각가, 예능인들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덜 냉혹하지도 않게 적용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나 개성을 공중(公衆)에 제공하며, 공중의 찬성과 자금에 의존하며, 그래서 공개적이건 혹은 감추어진 방식으로건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적 성취를 그들이 부르주아지 강도라고 그렇게도 경멸적으로 부르는 '거대한 괴물'에게 종속시킨다. 여담이지만, 현재 이미 꼭대기에서 그 층이 보다 얇아지고 있는 독일 '청년' 작가 그룹의 운명은 다른 어떤 것 만큼이나 이것의 진실을 보여준다. 그가 성장했던 시대의 조건들에 의해 설명되는 고리키의 예는 단지 법칙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외일 뿐이다. 인텔리겐챠의 반혁명적 퇴행에 그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기'를 급속하게 잃었다.

 

여기에서 두뇌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조건들 사이의 심오한 사회적 차이가 한번 더 폭로된다. 비록 공장노동이 근육을 노예화시키고 몸뚱아리를 소진시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동자의 마음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노동자의 마음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시도되었던 모든 방책들이 공히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두뇌노동자는 육체적 점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자유롭다. 작가는 경적 소리가 울릴 때 일어날 필요가 없고, 의사의 뒤에는 감독이 서 있지 않으며, 변호사가 법정을 떠날 때 그의 호주머니를 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단지 노동력이나 자신의 근육의 긴장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든 인간성을 팔며, 이것은 두려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을 통해서이다. 그 결과, 이들 인간들은 자신들의 훌륭한 예복이 평범한 것보다 잘 만들어진 죄수복이라는 것을 보려하지 않으며 볼 수도 없다.

 

결국 아들러 그 자신이 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자신의 추상적이고 본질적으로 이상주의적인 정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의 선전물에서, 실제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는 두뇌 노동자들의 계급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의 역할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을 뿐인 두뇌 노동자들의 젊은 세대,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비엔나 자유 학생 조합'에 대한 헌사에서 뿐만 아니라 이 팜플렛 연설의 성격 그 자체, 그것의 열정적인 선동적이고 설교하는 톤으로도 드러난다. 교수, 작가, 변호사, 의사들로 이루어진 청중들 앞에서 이러한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연설은 처음 몇 마디 만에 말하기 거북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들러 자신이 그 스스로가 같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인적 자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자신의 임무를 제한한다. 정치인들은 이론가들의 정식을 바로잡는다. 결국 이것은 학생들에 대한 영향력을 위한 투쟁의 문제이다.

 

대학이 소유계급과 지배계급의 자식들에 대한 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교육의 마지막 단계인 것 처럼, 병영은 노동자와 농민의 젊은 세대를 위한 마지막 교육 기관이다. 병영들은 이후 계속해서 수행되어져야 할 종속적인 사회적 기능들에 적당한 복종과 규율이라는 심리적 습관들을 조장한다. 원칙적으로 대학은 운영, 지도력, 정부를 위해 훈련한다. 이러한 각도에서는, 독일의 학생 계층이 부모의 자식 세대를 통합하며 민족적 존엄을 강화하며 부르주아지를 위한 환경에 필요한 기질들을 심어주며, 결국 어떤 사람이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각인으로서 복무하게 될 코나 귀 밑에 있는 자국을 공급하기 때문에, 독일의 학생들은 유용한 계급기구들이다. 물론 아들러의 당에게는 대학을 나오는 인적 자원보다 병영을 경험하고 나오는 인정자원이 비교할 수 없도록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서는, 즉 독일의 경우에서 처럼, 급속한 산업의 발전과 함께 군대가 그 구성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일 때에는, 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애써 병영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시작 때까지 청년 노동자들을 보고, 그가 다시 나오면 그를 만나는 것[주요한 것]으로 나에게는 충분하다. 그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7)그러나 대학에 관한 한, 만약 당이 인텔리겐챠에 대한 영향력을 위한 독립적인 투쟁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당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거꾸로 말해야만 한다. '청년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운 때인, 그가 아직은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의 포로가 되지 않은 때인, 오로지 여기, 그리고 현재에만, 나는 우리의 대오로 그를 끌어당길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나이일 뿐이다. 인텔리겐챠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단지 나이의 차이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이기도 하다. 청년 노동자들과  그 자신의 아버지와는 반대로 학생은 아무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며, 자본이나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의존성을 느끼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에 의해서도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주체적으로가 아니라면 적어도 객관적으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그의 판단에서 자유롭다. 이 기간에는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들끓고 있으며, 그의 계급적 선입견들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관심들 만큼이나 무정형이며, 의식의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하며, 위대한 과학적 일반화들에 처음으로 그의 마음이 열리고 있으며, 그에게는 항상 예외적인 것이 심리학적으로 필요하다. 만약 집산주의가 그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이 그 순간이며, 단조로운 '밥 먹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그 기초의 고결한 과학적 성격과, 그 목적들의 포괄적인 문화적 내용을 통해서 집산주의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마지막 지점에서 아들러는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앞에서 잠시 멈출 수 밖에 없다. 전체로서의 유럽의 인텔리겐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인 학생들도 또한 사회주의에 어떠한 이끌림도 단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노동자 당과 학생 대중들 사이에는 벽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단지 올바른 각도에서 인텔리겐챠에 접근할 수 없었던 불충분한 선동 작업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것이 아들러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방식이데, 학생과 '인민' 사이의 관계의 전체 역사를 간과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학생에게서 사회 역사의 산물보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카데고리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사실, 학생들의 부르주아지 사회에 대한 물질적 의존성은 그들의 가족들을 통해서 단지 불명료하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뿐이며, 그래서 약화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반대로서, 학생들이 충원되는 계급들의 일반적인 사회적 이해관계들과 필요성은 비록 공명기 속에서 이기는 하지만 학생들의 감정들과 의견들에서 완전하게 반영된다. 그들 역사 전체를 통해서, 완전한 윤리적 붕괴의 시기에서와 같은 가장 극적인 순간들에 기껏해야, 유럽의 학생들은 부르주아지 계급들의 민감한 지표에 불과했다. 부르주아지 사회가 혁명 이외에는 출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을 때, 학생들은 인민들과 진지하고 영광스럽게 친교를 맺으면서 초(超)혁명적이 되었다. 1848년 비엔나에서 벌어졌던 일 처럼, 학생들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세력들의 정치적 무능함이 그들로 하여금 혁명의 혁명의 선두에 서는 것을 막았을 때 사실상 이들 세력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같은 해 6월 파리에서,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있음을 발견했을 때,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의 전쟁이 독일을 통일 시키고, 부르주아지 계급들에게 유화 정책을 쓴 후에, 독일 학생들은 빠르게 항상 맥주를 먹어 똥배가 나온 거만한 모습으로 프러시아의 군인들과 함께 풍자적인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이 나라의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쟁이 날카로와 지는 것에 비례하여 학생들이 민족적 배타성과 전투적인 배외주의의 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이 모든, 심지어 가장 불쾌한, 역사적 변형들을 통해서, 학생들은 정치적 예리함과 기꺼운 자기희생, 그리고 전투적인 이상주의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들러는 그 양에 너무도 많이 의존한다. 비록 30이나 40의 평범한 속물은 '명예'에 관한 어떠한 가설적 범주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아들은 열정적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르포프 대학에 있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학생들은 최근 민족적, 혹은 정치적 경향을 어떻게 끝까지 수행할 것인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권총의 총구에 자신들의 가슴을 들이댈 것인지도 자신들이 알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작년에, 프라하의 독일 학생들은 독일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거리에서 보여주기 위하여 폭도들의 모든 폭력에 기꺼이 맞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계급이나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연령그룹의 성격인, 종종 싸움 닭의 그것과 같은, 전투적 이상주의를 확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이상주의의 정치적 내용은 학생들의 출신 게급과 학생들이 복귀할 계급들의 역사적 영감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다.

 

결국, 모든 소유 계급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만약 대학에 있는 동안의 학생들이 사회주의가 자신의 메세지를 적을 수 있는 백지상태라면, 계급적 유산은 무엇이 되며, 가엾은 낡은 역사적 결정주의는 무엇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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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들러를 지지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는 문제의 다른 측면을 분명히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

 

아들러에 의하면, 인텔리겐챠를 사회주의로 끌어 당기기 위한 유일한 길은 운동의 궁극적 목적을 전면적으로 전면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아들러는 산업의 집중의 진전,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그리고 계급적대의 격화에 비례하여 이러한 궁극적 목적이 더욱 분명하게, 더욱 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와 국가의 전술에서의 차이와는 독립적으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에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한 명료함과 즉각성을 가지면서 '궁극적인 목적'이 전면에 서 있다. 그러나, 이 매우 똑같은 사회적 과정, 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의 격화가 인텔리겐챠로 하여금 노동자의 당 진영으로 넘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계급들 사이의 가교들은 끊어져 있고, 그것을 건너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깊어지는 심연을 가로질러 건너뛰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객관적으로 인텔리겐챠가 집산주의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가 보다 수월해지도록 만드는 조건들과 나란히, 인텔리겐챠의 사회주의 군대로의 정치적 합류의 길에서의 사회적 장애물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회적 삶이 존재하는 어떠한 선진국에서라도 사회주의 운동에 합류하는 것은 투기적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며, 여기서는 사회적인 것이 이론을 세우는 이유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과거보다 현재에 인텔리겐챠를 획득하는 것이 더 힘들며, 오늘보다는 내일 이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또한 '점진성의 파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 그 자체에 따라서 증가하는 소외로서 표현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인텔리겐챠의 태도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회세력의 균형이 이동하게 될 객관적인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서 결정적으로 바뀔수 있으며 바뀔수 밖에 없다. 아들러의 주장들 중에서, 인텔리겐챠는 그들이 부르주아지 계급들에 물질적으로 의존하는 한, 직접적으로 혹은 무조건적으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 계급들을 통해서 단지 불명료하게만 자본주의적 착취의 유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만큼까지는 진실이다. 집산주의의 즉각적인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 보여질 이유가 주어진다면, 만약 집산주의가 인텔리겐챠들 앞에 다른, 동떨어진, 그리고 친숙하지 않은 계급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가까운 실체적인 현실로서 떠오른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덜 중요한 것은 아닌데, 만약 부르주아지와의 정치적 결별이 별도로 검소한 물질과 윤리적 결과를 감수한 개별 두뇌 노동자들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인텔리겐챠는 집산주의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을 위한 이러한 조건들은 오로지 새로운 사회계급의 정치적 지배에 의해서만, 어느 정도까지는 이러한 지배를 위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투쟁의 기간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대중들로부터의 유럽 인텔리겐챠의 소외가 무엇이었건 간에, 그리고 이러한 소외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발칸 국가들과 같은 특히 보다 젊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더욱 증가할 것인데, 위대한 사회 재건의 시대에 인텔리겐챠는 아마도 또 다른 중간계급보다는 새로운 사회를 지키는 세력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문화적 부문들과의 직접적인 연계, 이론적 일반화의 능력, 사고의 유연성과 기동성, 간단히 말해서 인텔리겐챠의 지적인 능력과 관련하여, 상업 소부르주아지, 산업 소부르주아지, 그리고 농민과 구별되는 인텐리겐챠의 사회적 특질들로 인해 인텔리겐챠는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다. 전체 사회기구의 새로운 세력으로의 이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여,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은 조성된 조건들이 자신들을 심연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며, 반대로 기술적, 조직적, 그리고 과학적 힘의 응용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을 그들 앞에 펼쳐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정권이 거대한 기술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어려움들을 극복해야만 할 첫번째,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서 조차 자신들의 대오로부터 이러한 힘들을 전면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제 사회기구의 장악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당으로의 인텔리겐챠의 사전 유입에 의존한다면, 집산주의의 전망들은 참으로 불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기 위하여 애썼듯이, 부르주아지 정권의 틀 내에서 사회민주당으로의 인텔리겐챠의 유입은 막스 아들러의 모든 기대와는 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 끝 –

 

 

-주-

1)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기관인 'Wiener Arbeitraeitung'의 편집인 - 번역

2) 이 시기에, 사회민주당은 1차 세계대전 동안과 이후에 배신의 길을 택했던 자들을 의미하는 것없이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대하여 언급한다.

3) 독일사회민주당 신문

4) 뮌헨에서 발행되었던 풍자 신문 - 번역

5) 오스트리아 법학자 - 번역

6) 라트비아-독일게 경제학자 칼 발로드[Karl Ballod]의 필명 – 번역

7) 이 태도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였으며, 물론 혁명적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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