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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의 노동자 투쟁들

국제공산주의동맹 기관지 노동자 전위 964호와 965호로부터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의 노동자 투쟁들

제국주의,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라!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을 위하여!

 

1부

 

지난 봄, 중국은 일본, 그리고 다른 외국자본과 연안의 중국 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공장들에 주로 고용되어 있는 젊은 이주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대규모 파업의 물결을 경험했다. 이 파업 물결은 수출을 위한 경공업 제품 생산의 중심지역인 남해안의 광동성에 집중되었다.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고양은 다른 산업 지역들에까지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상하이 근처의 대만 소유 고무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충돌했고, 50여명의 노동자들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파업들은 임금인상과 기타 노동자들을 위한 성취들과 함께 신속하게 안정되었다. 이들 발전[양상]의 중요성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 금융자본을 위한 잡지인 이코노미스트(7월 31일)는 "중국 노동자의 증가되고 있는 힘"을 한 사설의 머리기사로 올렸다.

 

파업 물결은 중국에 있는 혼다의 4개의 자동차 조립 공장을 위하여 트랜스미션을 생산하는 포샨에 있는 혼다 공장에서 5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거의 지난 3주간 지속되었던 생산 중단의 결과, 이들 공장들 모두에서의 생산이 정지되었다. 평균 30%의 임금인상으로 끝이 났던 파업은 노동자들을 위한 중대한 승리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파업들이 흔한 일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업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짧게 끝나고, 신속하게 정리되거나 신속하게 진압 당한다. 그리고 파업들은 정부가 통제하는 미디어에는 대부분 보도되지 않는데, 그것은 이들이 파업들에 관한 보도가 다른 노동자들로 하여금 비슷한 행동들을 하도록 고무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중국 노동자들과 일본 거대 자동차 기업 사이의 분쟁이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관심의 촛점이 되면서, 포샨 혼다 파업의 경우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다. 결국, 당국은 노동분규에 대한 뉴스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되돌아 갔다.

 

파업 조직과 지도부는 지배 공산당(CCP)과 연계되어 있는 공식적인 노동조합 연맹인 전중국노동조합연맹(ACFTU)의 관료구조의 밖에 있는 노동자 활동가들로부터 배출되었다. 파업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20세의 혼다 포샨 공장의 여성노동자 리 샤오주안은 협상위원회를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공개 서한을 썼다.

 

"우리는 반드시 고도의 단결을 유지해야만 하며, 자본의 대표자들이 우리를 분열시키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 공장의 이윤은 우리의 피땀어린 노동의 과실이다.... 이 투쟁은 단지 우리 1800명의 노동자들의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전체 중국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해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런던) 6월 10일자로부터 인용함

 

중국 산업 경제의 자본주의 부문에서의 파업 물결은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로서의 중국의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들을 뒷받침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혁명적 맑스주의자들)로서, 우리는 파업들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중국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해관계는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수준에서도 계급투쟁의 종합적인 강령을 가진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들로부터 가능한 많이 쟁취하기 위하여 그들의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계급투쟁적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 국가소유 산업의 노동자들 또한 자신들의 삶의 질을 보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관료적 폐해에 맞서 투쟁하기 위하여 그러한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

-"중국에서의 전투적 파업물결", 노동자 전위 961호, 7월 2일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 중국을 괴롭히고 있는 모순들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의 길을 여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에 의해서, 혹은 자본주의 반혁명과 제국주의적 재식민지화에 의해서 해결(?-해석자의 첨가)될 것이다.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혁명으로부터 출현했다.(1949년 중국 혁명은 - 해석자의 첨가) 모택동의 공산당이 지도했던 농민에 기초한 세력들이 장개석의 국민당이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던 꼭두각시 정권을 물리쳤던 세계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사회혁명이었다. 수 억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들의 조상 대대로 착취당했던 토지를 장악했다. 그 결과 수립된 중앙 계획적이고 집산화된 경제는 도시 노동자들과 지방의 노동인민들 모두를 위한 거대한 사회적 성취의 기초를 놓았다. 혁명은 여성들이 과거의 유교적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강제결혼과 전족 같은 관습으로 유명했던 그들의 과거의 비참한 상태를 넘어 중대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했다. 외국 열강들에 의해 파괴되고 분열되었던 나라가 통일되었고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혁명에 의해 시작되었던 노동자 국가는 노동자 국가의 최상층에 있는 특권화된 관료 계층의 정치기구였던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 정권의 지배하에서 시작부터 기형화되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국제주의에 의해 지도되었던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수행되었던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과는 달리, 중국혁명은 스탈린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에 의해 지도되었던 농민 게릴라 전쟁의 결과였다. 소련에서 1923-24년에 시작되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정치권력 찬탈을 모방하여, 모택동 정권과 현재의 후진타오를 포함한 그의 후계자들의 정권은 물질적 풍요에 기초한 무계급의 평등사회인 사회주의가 단일 국가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뿌리 깊게 반맑스주의적인 관념을 설교해왔다. 실천적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화해와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위하여 핵심적인 국제노동자혁명의 전망에 대한 반대를 의미했다.

 

1976년 모택동의 사망에 뒤이은 잠깐 동안의 공백기 후에, 모택동의 후계자 등소평이 중앙화되었던 경제계획을 허물고, 시장 친화적인 일련의 정책들과 실행들을 이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강택민과 주룽지가 수장이었던 정권은 많은 수의 중소규모 국가소유 기업들(SOEs)을 사유화했다. "시장 사회주의" 하에서, 중국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노동계약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주로 제조업에서, 서구와 일본 기업들, 대만과 홍콩 등지의 연안의 중국 부르주아지로부터의 대규모 투자를 끌어들었다. 본토에서도 또한 그 다수가 중국 공산당 관료들과 가족관계로 재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당한 정도의 토착 자본주의 기업가 계급이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 전개의 한 결과가, 비록 여전히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부르는 정당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본주의가 되었다고 하는 정치적 색조를 가로질러 뻗치고 있는 서구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는 믿음이다. 철강과 비철금속, 중전기 장비, 통신, 원유 시추와 정제, 석유화학 등 산업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국가소유 기업에 기반하고 있다. 외국과 연안의 중국 자본주의 부문 외부의 거의 모든 생산적 투자가 정부와 국가가 통제하는 은행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7월 10일자)는 비록 중국의 대교모 은행들이 "돈을 만들고 공기업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있지만, 국가가 주요한 부분을 소유하고 있고 공산당이 고위직을 지명한다"고 지적했다.

 

중국 경제의 비(非)자본주의적 성격은 세계 경제가 첫번째로 급격하게 후퇴했던 2008년 가을에 이루어졌던 정부의 거의 6천억 달러에 달하는 부양 프로그램(대부분 사회간접사본에 대한 투자와 은행 대출의 확대)의 효과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북미와 서유럽이라는 중국의 수출시장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중국 경제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국내 총생산 증가율이 2007년 거의 13%에서 2008년 4/4분기에 7%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자본주의 세계는 깊은 침체에서 여전히 허덕였던 반면, 중국에서의 경제성장은 올해 2/4분기에 약간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1/4분기에는 거의 12%에 다다르면서 급속하게 회복해왔다. 국가가 통제하는 기업들에 의한 하늘을 찌를듯한 수준의 투자의 한 가지 중요한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뉴욕타임즈(8월 29일자)는 "작년에 중국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기업의 산업생산에서의 비중이 느리지만 불가피하게 보이던 후퇴를 막으면서 조금씩 올라갔다."고 보도했다.

 

북경의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무리 세계 자본주의와 화해하려고 해도, 미국과 다른 주요 자본주의 열강들은 중국에 대한 반(半)식민지적 지배를 재확립하고, 중국 경제를 자본주의 열강들의 설탕 가게로 전락시키는 가운데 1949년 혁명을 되돌리고자하는 데 있어서 단호하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경제적인 침투를 활용하고 있으며,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압박과 내부에서의 정치적 파괴(예를 들면 티벳에서의 반동적 불교 세력들에 의한)를 강화했다. 미국은 그 자신이 중앙아시아와 중국 근처의 다른 지역들에서 자신의 군사적 힘을 확대하는 한편으로, 자본주의 대만에 선진 무기를 계속해서 공급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로서, 우리는 제국주의와 내부의 반혁명에 맞서는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지지한다.

 

민주적 권리와 노동자와 지방 노동인민들의 필요와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를 위한 중국 노동자들과 지방 노동인민들의 열망에 답하여,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를 타도하고, 노동자 농민위원회에 의해 선출되고, 혁명적 국제주의에 헌신하는 정부로 대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을 지지한다. 그러한 정부는 관료적 전횡과 부패에 맞서 투쟁할 것이다. 이 정부는 새로운 국내 자본가 기업 계급을 몰수할 것이며, 노동인민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외국투자 조건을 재협상할 것이다. 이 정부는 "평등주의"가 빈곤의 평준화를 의미했던 모택동 시대의 전제적이고 관료적인 명령주의가 아닌,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조건하에서 중앙집중적으로 계획되고 운영되는 경제를 건설할 것이다. 진정한 공산주의 지도부는 전체 인민을 위하여 적어도 기본적인 수준의 경제적 안전보장을 제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한편으로, 물질적 풍요의 성취가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지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달려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혼다 파업들

 

중국의 자본가 소유 공장들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은 생존할 수 있는 수준을 겨우 상회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일주일에 60-70시간 씩의 노동을 종종 강요받는다. 그들이 견디는 잔혹한 조건들은 광동에 있는 30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팩스콘 거대 산업단지 노동자들의 자살들이 넓게 공개됨으로써 지난 봄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그 해 시작 이후 적어도 12명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만 기업 소유인 팩스콘은 애플, 델, 휴렛 패커드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전자부품 제조 하청 업체이다. 현장을 견학했던 홍콩에 기반을 둔 기업인은 공장 현장의 조건들에 대하여 "거의 군사적이고 거의 공포에 가깝다"고 서술했다(파이낸셜 타임즈, 6월 11일자). 팩스콘에서의 자살들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혼다와 기타 자본가 소유 기업들에서의 파업에 대한 광범위한 호의와 지지에 기여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샨에 있는 혼다 트랜스미션 공장에서의 파업은 이주 노동력의 주요한 공급지인 하남성(河南省) 내륙 출신의 탄지큉이라는 24세의 노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반역의 정신이 모택동의 출생지인 하남의 대중 문화로서 유명하다. 물가인상으로 자신의 실질 소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탄은 혼다를 그만두고 더 높은 보수를 위하여 다른 곳을 찾기로 결심했다. 일찌기 그는 임금 인상을 위하여 경영진을 압박하는 것에 관하여 지역의 ACFTU 관료들에게 접근했었지만, 그들로부터는 어떠한 답변도 얻지 못했다. 4월 하순에, 그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친구인 지아오 지아오와 함께 표준적인 1개월 전 퇴사 의사 통지를 제출했다. 탄은 "어쨋거나 나는 그만둘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내 동료 노동자들의 혜택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챠이나 뉴스 위클리(7월 2일자) 리포터에게 말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와 지아오는 작업 중단을 계획하기 위한 소수의 동료 노동자들과의 비밀 회합을 조직했다. 5월 17일에, 탄은 자신이 일하고 있던 조립 라인을 멈추면서 비상버튼을 눌렀고, 50여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에서 이탈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파업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했다. 경영진이 다른 부서들에서 선출되었던 노동자 대표자들과 협상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일시적으로 생산이 다시 시작되었다. 5월 21-22일에 회사가 노동자들이 요구하고 있었던 10%의 임금인상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인상을 제안하고 탄과 지아오를 해고했을 때 분기점이 왔다. 이제는 훨씬 더 큰 지지와 결의를 가지고 파업이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파업 대오는 기계적으로 국가(國家)를 불렀고, "단결은 강하다"라는 공식 중국 군가 또한 병사들 대신에 노동자들을 넣어서 불렀다.

 

파업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경영진의 다른 정책들 또한 반격을 받았다. 노동력의 많은 부분이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낮은 임금을 받던 기술학교 출신의 10대 훈련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5월 하순에, 회사는 훈련원들에게 "태업이나 작업 중단 혹은 파업을 주도하거나 이끌거나 이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챠이나 뉴스 위클리(6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훈련원들은 대부분이 서명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철두철미한 파업 지지자였다."

 

처음부터 지역 ACFTU는 파업 내내 한 발 빼고 서 있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들 중의 하나가 "지역 노동조합의 재조직화: 노동조합 위원장과 다른 대표자들을 위한 재선거가 열려야 한다."였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양쪽 사이를 "중재하려는" 의도로 협상장에 참관했다. 일부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눈에 띄는 권위상실에 분명하게 속앓이를 했다. 5월 31일에, 대규모의 ACFTU 구사대 부대가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다음 날, 노동조합 관료들은 사건을 의미축소하고 사건이 "상호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공개사과를 했다. 6월 중순에, 광동성 ACFTU 위원장이 포샨 혼다 공장은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 위원장을 진정하게 선출하는 것이 허용되는" "시험적인 현장"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포샨 파업이 끝나고 몇 일이 지나지 않아, 2개의 다른 혼다 부품 공장들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 중에서 하나는 신속하게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혼다 잠금장치에서의 파업은 치열한 분쟁으로 화했고, 그것의 결과는 포샨에서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데스크탑 켬퓨터를 활용하면서, 활동가들은 경비들이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비디오를 업로드했다. 이번 경우에는, 혼다 경영진과 중국 공산당 당국자들 모두가, 적어도 지역 수준에서는, 강경노선을 택했다. 회사는 "대체 노동자들"(파업 파괴자들)을 모집했고, 제안된 임금인상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해고 위협을 했다. 파업에 관하여 보도하려고 하는 기자들이 지방 경찰에 의해 공장으로부터 쫓겨났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파업들에 대한 대응

 

포샨 혼다 파업에 대한 국내 언론의 최초의 평소와는 다른 대폭적인 기사화는 나라의 점증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평소와는 다른 솔직함과 함께 나왔다. ACFTU 지도자를 인용하면서, 공식 영자신문 챠이나 데일리(5월 13일자)는 노동자 임금으로 가는 나라의 국내총생산의 몫이 1983년 57%에서 2005년 37%로 하락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일보의 자회사인 글로벌 타임즈(6월 2일자)의 사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수긍할 수 있게도, 30년간의 개방 속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은 경제적 번영의 가장 작은 몫을 받아왔던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일제 자동차에 대한 시장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때의 4개의 혼다 공장들에서의 생산라인의 일시적인 중단이 중국 공장들에서 조직화된 노동 보호의 필요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더욱 최근에, ACFTU 대변인은 "풀뿌리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선거"를 촉진하는 공식적인 정책을 내 놓았다.(인민일보 온라인판 8월 31일자)

 

분명하게 관료 내부의 영향력있는 인자들은 사적 부문에서 증가하는 노동 불안정의 (자신들에 대한) 위험에 관하여 염려한다. 파업 물결 이전에 조차, 일련의 성(省)과 시 정부들은 일부의 경우 20%까지 법적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부문의 이주자들을 포함하여 중국의 노동자들은 수십년 동안의 "개혁" 시대 동안에 실질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을 일반적으로 경험해왔다. 수년 동안의 많은 국가 소유 기업의 폐쇄와 사유화가 과거에는 보장되었던 사회보장들이 줄어드는 것을 목격해왔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한 교육과 기술이 부족한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불확실성을 만들어 왔음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수출부문의 호조와 함께,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이주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한달 평균임금이 40%까지 증가했다. 혼다의 노동자들이 다른 공장들에서의 파업을 조율하기 위하여 핸드폰과 인터넷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모택동 시대의 지방 공동체에 있던 그들의 조부모드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부모들의 경험과는 다른 세계인 현대 기술에 접근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파업들이 자본주의 기업들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들 파업들은 강철 생산, 석유 시추와 철도 시스템을 멈추게 되는 국유화된 경제의 전략적 부문들에서의 파업이나 기타 노동 분규와 같은 지배관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과 같은 것을 구성하지는 않았다. 일정 부분까지는, 중국 공산당 정권은 일본, 한국, 그리고 연안의 중국 자본가들에 의한 난폭한 착취에 맞서는 중국 노동자들에게 온정을 가지는 방어자인 척 할 수 있었다. 6월 중순에, 중국 총리 원자바오는 "정부와 모든 사회부문들이 이주 노동자들을 마치 자신의 자식들인 것 처럼 대해야 한다"고 읊조렸다.

 

혼다가 일본 기업이라는 사실이 파업에 대한 당국자들의 최초의 관대함과 강도높은 국내 언론 기사화의 중요한 요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의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1949년 혁명 이전에 있었던 나라의 반식민지적 굴욕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중국 민족주의에 호소함으로써 대중적 정당성을 얻으려고 한다. 1930년대-40년대에 있었던 일본의 중국 침략과 점령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농민대중들이 힘을 발휘했던 것이 중국 공산당 역사 당국의 중요한 자료였다. 심지어 오늘날 미국보다도 일본이 인민과 정부 모두로부터 지원을 받는 중국 민족주의의 주요 타겟이다.

 

동해[원문에는 일본해]의 다른 쪽에 있는, 지도적인 부르주아지 신문 니케이는 "혼다 공급 기업에서의 파업에서, 당국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립적인 보폭을 유지했다"고 불평했다. 이 측면에서, 중국에서의 파업은 남아시아에 있는 반식민지 나라들에 있는 일본 기업들에 대한 노동 투쟁에 대한 국가의 잔혹한 탄압과 날카롭게 대비된다. 예를 들면, 최근 인도네시아에서는 도시바 공장의 노동자들을 군인과 경찰이 공격했다. 필리핀에서는, 일본 기업 타카타의 노동조합 지도자가 6월 초에 노동조합 인정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중국 혼다와 도요다에서의 파업들은 중국과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들 사이의 단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중국의 스탈린주의 잘못된 지도자들의 민족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완전히 바깥에 있는 전망이다. 만약 이들 두 거대 공장에 있는 일본 노동자들이 그들의 중국의 계급형제들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면, 이것은 그들의 교섭력을 강화시켰을 것이고, 베이징 정권에 의해 조장되던 반(反)일본 민족주의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동시에, 포샨 혼다 파업 동안에 보였던 서로 다른 층의 노동자들(기술학교 출신의 훈련원들과 정규직 피고용자들) 사이의 단결은 대교모 기업들의 정규직 피고용자들과 다수의 임시직 노동자들 사이의 계층적 분열을 가진 일본 노동운동을 위한 긍정적이고 강력한 모범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일본의 노동조합 최고 지도부에 있는 부르주아지의 똘마니들에 대한 정치적 투쟁의 필요성을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예를 들면, 자동차와 전기와 같은 전략적 산업의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들은 단지 정규직 피고용자들만 가입이 허용된다.

 

팩스콘에서의 노동자들의 자살들과 기타 일련의 대만 소유 기업들에서의 파업들은 본토 산업 경제에 연안의 중국 자본이 상당한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1940년대 후반에 장개석의 패잔 세력이 도망갔던 대만 섬에 있는 세력은 중국 대부르주아지의 몸통의 기초이다. 본토의 자본가 기업들과는 달리, 대만의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반혁명적 정치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대만에 기반한 부르주아지는 미국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군사적 보호 하에서 활동한다.

 

베이징의 스탈린주의자들은 1997년에 (과거 영국 식민지) 홍콩의 자본주의 세력권을 합병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과 같은 "하나의 국가, 두개의 체제"라는 정식하에 대만과의 재통일을 오랫동안 추진해왔다. 이러한 구호 하에서의 대만의 인민공화국으로의 합병은 즉각적인 역사적 일정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개양상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홍콩의 경우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 복귀 사회세력들을 강화시킬 것이다. 대만에 기초한 중국 부르주아지와의 화해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노력들에 반대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재통일[본토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로 귀결되는 대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사회혁명]을 지지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노동시장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세대

 

봄에시작되었던파업물결은중국경제의자본주의부문들에서벌어졌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 투쟁들에 대한 우호적인 조건들이 경제의 핵심적인 집산화된 부문의 작업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2008년 가을에 세계 자본주의 시장이 홍역을 치렀을 때, 2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노동자들이 중국 해안에 있는 수출생산 공장들로부터 해고되었다.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라 내에서의 고용기회의 상당한 정도의 확대가 정부의 부양 프로그램의 주요한 효과들 중의 하나였다. 지난 여름을 시작으로 수출 생산이 되살났을 때, 중국 해안에서의 직업을 찾아 유입되는 이주자들은 과거보다 적었다. 프랑스 은행 Societe Generale의 아시아 수석 경제학자인 글렌 맥과이어는 이러한 전개 양상은 "부양 패키지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놀랄만큼 성공적임을 의미한다"고 했다(로이터 6월 1일자). 노동부의 한 조사에서는 광동에 있는 주강유역의 제조업 중심지역에서는 그해 1/4분기에 빈 일자리가 지원자보다 9%가 높았다고 추산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노동시장은 개인적 수준과 집합적 수준에서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높여주었다. 광동에 기반을 둔 전기 회사의 경영자는 변화된 상황을 "만약 뭐라도 말한다면 해고가 된다면, 노동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해도 감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번 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움직임에 일부 반대하며, 나의 회사는 이것에 맞출 것이다."(파이낸셜 타임즈, 6월 4일).

 

정세적인 요인들에 더하여, 장기 인구통계학적 경향이 노동시장에 충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인구 증가세를 꺾고자 하던 중국 공산당 정권은 도시 가족들에게는 1자녀로 지방의 가족들에게는 2자녀로 제한해왔다. 그 결과, 15-24세 사이의 인구(거의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이 이 부위에 속한다)가 지난 5년 동안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는 채로 있었으며, 향후 10년 동안에는 거의 3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많은 부르주아지 의견 개진자들이 중국에서 "저가 노동"의 종말의 시작을 예견한다.

 

그러나 중국 노동자들의 증가된 단호함과 사회적 힘이 단지 객관적인 정세적 요인이나 인구통계학적 요인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파업 물결은 그들의 부모들과는 의미심장하게 다른 전망과 태도를 가진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세대의 사회 무대로의 진출을 의미한다.

 

1980년대와 90년대 도시로 유입되었던 젊은 남녀 농민들은 매우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원시적인 상태 출신이었다. 아무리 엄혹한 조건에서라도,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들 대부분에게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 새 집을 짓고, 가족 농장을 위한 장비를 구입하거나 소규모 사업을 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현재의 이주자 세대는 시골에서 조차 훨씬 더 발전된, 그러나 훨씬 더 불평등한 공동체에 있던 세대 출신이다. 그들의 열망과 기대는 이에 따라서 다르다. 광동의 쉔젠이라는 도시에 있는 총노동조합이 실시했던 2세대 이주 노동자 5000명에 대한 조사에서, 거의 대부분이 자신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광동에 기반을 둔 노동 운동가로 설명되는 차진화는 "우리는 우리 부모 세대와는 다르다. 그들의 바램은 돈을 좀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단순했다. 우리는 도시에 남아서 이 곳에서의 삶을 향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존중해줄 것을 요구한다"(파이낸셜 타임즈, 6월 1일자).

 

하지만, 도시에서 자신들을 위한 훌륭한 삶을 건설하고자 하는 젊은 이주 노동자들의 열망은 법에 기초한 주민 등록 혹은 호구 제도에 직접적으로 직면한다. 도시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는 소부르주아지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지방 호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부되는 사회보장혜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방 호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지방 호구의 성원으로 등록된 이주자들의 성장한 자식들을 포함한다. 도시 호구를 가진 사람들은 주택 보조와 더 좋은 직업 보장과 같은 보다 좋은 사회적 혜택들을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국가 소유 기업에 대한 피고용에서 우선권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이주자들은 하급 의료 보호와 자녀들을 위한 공공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여성 노동자들과 오늘날 중국의 모순들"(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 61호, 2009년 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주 인구는 그 자체로 법적 지위를 가지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분열되어 있다. 공장과 월마트와 같은 기타 대규모 기업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은 일시적인 도시 거주 허가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적인 노동자로서, 가정부와 가사 도우미, 길거리 행상 등등으로 삶을 꾸려가는 아무도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는 수백 만의 '불법' 이주자들이 있다."

 

 

광동에서의 노동 투쟁들: 어제와 오늘

 

최근 파업 물결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의 부모와 더 나이가 많은 형제 자매들 또한 중국 해안의 자본가 소유 공장들과 건설 현장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투쟁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대간의 분리를 가로지르는 차이들 만큼이나 중요한 연속성의 요인들이 있다.

 

몇 년 전에, 좌익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학자인 칭관리는 2000년대 초 중국의 매우 다른 두 지역들에서의 그녀의 현지조사에 기초한 '법에 대항하여: 중국의 러스트 벨트[사양화된 산업지역-해석자의 첨가]과 선 벨트[번영하는 산업지역-해석자의 첨가](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 2007년)'라는 책 한 권을 출판했다. 부제에 있는 "러스트 벨트"는 1990년대 후반에 많은 대규모 국가소유 기업들이 규모를 줄이고, 더 작은 기업들은 사유화되거나 완전히 문을 닫았던 때에 경제적 피폐함과 대량 실업으로 고통을 겪었던 북동쪽의 요녕성(省)이다. "선벨트"는 광동을 의미한다.

 

"선벨트" 지역에 관하여, 리는 노동법의 중요성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정하는데 있어서 그 법들이 집행되지 않음을 강조했다. 고용주들이 임금(체불이나 법적 최저 임금보다 낮은), 연장근무, 사회보장 혹은 안전에 관하여 법을 위반했다는 것을 지방 관료들에게 항의하는 것이 거의 모든 파업들과 기타 산업 행동들에 앞서 발생했다. 그녀는 작은 수의 노동자 대표자들의 노동 사무국에 대한 항의가 반복적으로 무시되었던 사례를 인용했다. 오직 공장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을 때에만, 사무국은 조정을 위해 개입했다.

 

리는 "국가 소유 기업 노동자들에게는 가능한 사회주의적인 사회적 계약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이주 노동자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고용주들과 지역 관료들에 맞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유일한 제도적 장치로서 노동법을 바라본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 여성 노동자는 "우리가 노동법의 조항들을 보았을 때, 우리가 괴로움과 불운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법적 권리와 이해관계들에 대한 위반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한 건설 노동자는 노동자들에게 노동계약서에 대한 서명을 강요하면서 노동자들이 계약의 조항들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던 고용주에 맞선 투쟁을 설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2주 동안, 우리는 하루에 한 끼만을 먹으면서, 서점에서 노동법과 노동분쟁조정에 관한 모든 것을 읽었다. 이 보다 전에는, 우리는 우리 이주 노동자들에 관하여 법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수 년 동안, 우리는 노동계약에 관하여 듣기만 했지, 그들이 사본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거부했을 때 회사를 충분히 강력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우리가 회사와의 이번 투쟁을 시작한 이후, 많은 노동자들이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일부는 기숙사에서 회람을 위하여 노동분쟁 기사들을 오려 내기도 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전반적인 태도는, 만약 집행만 된다면 노동법이 그들의 삶의 조건들을 본질적으로 향상시켜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부패해 있고, 공개적으로 고용주들과 결탁되어 있는 지역 관료들은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 작업 중 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보상을 받도록 하는 것이 전문인 한 변호사는 판사가 그에게 "조우(Zhou) 변호사, 만약 법원이 노동법과 성(省)정부의 모든 규약들을 고수한다면, 이들 공장 전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이고, 지역 경제는 붕괴할 것입니다. 누가 이 책임을 질 것입니까? 당신이?"라고 말했던 것을 다시 이야기했다.

 

노동법에 대한 지식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북돋우고 형성할 것이라는 2000년대 초 리의 의견은 어느 정도까지 최근의 파업물결에 적용될 수 있을까? 멀리서 여기에 분명히 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견 개진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고용주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공식적인 권리들을 강화했던 2008년에 채택된 신노동법이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고양시키는데 기여한 중요한 한 요인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명백하게 이러한 입법이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것 보다는 자본가 기업들이 노동 불안정을 최소화히기 위하여 착취의 조건들을 개선하도록 압박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동자 투쟁들과 노동법 사이의 관계는 모순적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법적으로 인정된 권리들을 지키기 위하여 파업과 다른 실천들을 할 수 있게 대담해졌다. 동시에, 법은 좋지만 지역 관료들은 나쁘다는 믿음은 중앙 정부/당 지도부의 자비로움에 대한 환상을 일으킬 수 있다. 중국의 수상[원자바오]은 동네 아저씨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가운데 "원씨 아저씨"라고 불리우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대중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쉽게 희생시킬 수 있는 낮은 직급의 관리들에게 향해 있다면, 이것은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1부 끝

 

 

 

2부 시작

노동자 전위 965호로부터

 

중국 노동자들이 나라의 노동법에 대하여 아무리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관료가 노동 쟁의를 억제하고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최근의 파업 물결은 주요기관인 전중국노동조합연맹(ACFTU)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몇 년 전에, 연맹 지도부는 서구, 일본, 그리고 연안의 중국 기업들에 의해 소유된 기업들에 고용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했다. 2004년에, 반(反)노동조합으로 악명이 높은 미국 기업 월마트는 자신의 소매 매장들에서 ACFTU 조합원과 대표자들을 허용할 것 대하여 합의를 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위한 중요한 성과로서 중국 미디어에 보도되었다. 우리는 당시의 한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ACFTU를 모순적인 것으로서 서술했다.

 

"중국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노동조합 기관으로서 ACFTU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특권과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한 쪽 팔이다. 동시에, 공식 노동조합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종종 관료들의 '시장개혁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 중국 노동자들이 실행했던 대규모 노동 투쟁들에 참여해왔다."

-"노동자들: 월마트를 조직하라!" 노동자 전위 851호, 2005년 7월 8일자

 

그때 이후, 일반적으로 ACFTU 관리들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에 의한 효과적인 실천들을 억제함으로써 노동 평화를 유지하고자 해왔다. 혼다 트랜스미션 공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관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특히 자신들의 이해를 위하여 경영진과 협상하는데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자 조합비를 내는 것에 대하여 불평했다. 우리는 파업에서의 요구사항들 중의 하나가 지역 노동조합 위원장과 기타 대표자들에 대한 새로운 선거였던 것을 언급했다. 혼다 잠금장치 공장에서의 파업에서 노동자들은 더 나아갔다. 그 중에서 익명을 요구한 한 노동자는 서양 기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우리의 관점을 대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대변할 우리 자신의 노동조합을 원한다"(뉴욕 타임즈, 6월 10일자)로 말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종샨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반복해서 구호로 외치며서 항의 시위를 조직했는데, 그 구호 중에는 독립적인 노동조합 건설의 권리가 있었다.

 

우리는 항상 관료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독립적인 노동계급의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그리고 기타 경제조직들이 중국과 다른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을 위한 이행의 강령에서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을 승인해왔다.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노동자 국가에서조차 국가 행정기관으로부터 (비록 반대하지는 않지만)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이 있을 수 있는 침해와 남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생산과 노동 방책들을 계획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필요하다. 초기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에서 노동조합 문제에 관하여 말하면서,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국가를 위한 그들의 강령과 실천에 기초하여 노동조합들 지도부 획득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국가 당국자들에 의해서 지명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 의해서 선출되어야만 한다.

 

 

구 소비에트 지역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의 교훈들

 

관료적통제로부터자유로운노동조합들을위한투쟁은제국주의에맞섰던1949년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에 대한 방어와 자본주의 복귀에 맞서는 투쟁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구 소비에트 지역, 특히 폴란드의 경험은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들이 지배 관료 계층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반(反)공산주의 지도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스크는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1980년대 동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을 위한 공세의 손봉에 섰다.

 

부르주아지 미디어, 특히 미국의 부르주아지 미디어 부문들은 일부 중국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독립 노동조합 요구들을 잠재적인 솔리다르노스크 형태로의 발전에 비유해왔다. 중국 공산당 정권도 또한 그들대로 자신들의 지배에 맞서는 어떠한 조직화도 친자본주의일 수 밖에 없으며 반혁명적이라는 거짓 주장을 하면서 솔리다르노스크의 망령을 불러낸다. 홍콩의 중국 대학 교수인 윌리 램의 월스트리트 저널(6월 14일자) 기사는 최근의 노동쟁의에 관하여 비공개 대화에서 중국 대통령 후진타오와 다른 중국 공산당 정치국 성원들은 "그들의 수장인 고(故) 등소평의 어떻게 폴란드 연대운동이 구 동유럽 블럭 전반에 걸쳐 공산당들을 잠식했었는가에 대한 경고들을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솔리다르노스크를 반혁명적 운동으로 탄생시켰던 요인들과 비슷한 것들이 중국에는 없다. 이 "자유" 노조가 공산당 정부와 체제에 대한 폴란드 노동자 대중의 즉각적인 반대파로서 등장했던 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왜곡이다. 1980년 여름 총파업의 와중에서 조직되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솔리다르노스크의 정치적 조직적 기반은 자섹 쿠론의 사회적 자기방어 위원회[KOR]라는 우익 사민주의 소그룹과 연계되어 있던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

 

블라디슬라브 고멀카[Wladyslaw Gomulka]와 에드바르드 기에레크[Edward Gierek]라는 자유주의적 스탈린주의 정권들 하에서, 카톨릭 교회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소비에트가 지원하던 공산당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대중적인 정치적 야당으로서 기능해 왔다. 교회는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짜르 제국의 일부로서 폴란드를 정복했던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전통적인 적의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교회 성직자에 중심을 둔 강력한 성직자적 민족주의는 공산주의를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새로운 형식의 정복으로 묘사했다.

 

1970년대 후반에, 제국주의(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인권" 공세)의 압력 하에, 기에레크 정권 또한 교회 성직자들과 협조하면서 그들에 의해 보호 받던 사회민주주의적 "이교도들" 패거리의 활동가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1978년,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었던 폴란드 고위 성직자의 교황으로의 추대가 스탈린주의 정권에 대한 교회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바로 이 시기에 레흐 발레사[바웬사-핵석자의 주]와 기타 솔리다르노스크의 미래 지도자들이 교회 성직자들과 KOR에 의해 조직되었던 반(反)공산주의 반대파 써클들에서 정치적 훈련을 받았다.

 

발레사 주변의 솔리다르노스크 지도부의 성직자적 민족주의 정치들의 반동성을 인식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합법화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단기적이고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개방 상태라는 정세가 소비에트 지역 전반에서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경향이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의 강령으로 노동자들을 발전시키고 획득할 수 있었던 공간을 일정 부분 제공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의 민족주의, 경제적인 오경영, 그리고 폴란드의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적 의지가 강한 프롤레타리아트 세대의 상당수를 반동의 품으로 밀어 넣었던 카톨릭 교회와 기타 친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수 십 년간의 굴종에 대하여 비난했다.

 

하지만, 1981년 9월 첫번째 대회에서 솔리다르노스크가 공개적인 반혁명의 강령을 공고히 했을 때, 우리는 이번 "위협은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필요한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분쇄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했고, 1981년 12월 스탈린 정부의 솔리다르노스크에 대한 억압에 지지를 표했다. 솔리다르노스크는 다(多)계급의 반(反)공산주의 운동이 되었었다. 당시 우리는 "솔리다르노스크는 더 이상 노동조합이 아니라 인텔리겐챠, 하찮은 직급의 관료들, 목사들 등등의 상당한 부위를 포함하게 되었다."("연대(Solidarity)의 반혁명을 중단하라!", 스파르타시스트 팜플렛 '솔리다르노스크: CIA와 은행가들을 위한 폴란드 기업노동조합[1981년 10월]에서 재출판) 라고 썼다.

 

중국에서의 잠재적인 상황 전개들은 폴란드 보다는 1989-91년 스탈린주의 지배의 최종적인 위기 동안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험에 훨씬 더 관련되어 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 하에서의 관료의 붕괴와 함께, 대부분이 정부/당 관리들, 지식인들, 그리고 소자본 운영자들로부터 유입되었던 반혁명 세력들은 소위 "민주"진영의 보리스 옐친(과거 크레믈린의 최고 지도자) 주변으로 결합했다. 이들 세력들은 노동자 조직들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1991년 초에, 시베리아에 있는 석탄 탄광노동자의 주요 조직이 경제적, 정치적 요구들이 융합되었던 파업에 돌입했다. 정치적 요구들은 포위되어 있던 고르바쵸프 크리믈린 정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한편으로 옐친이 이끌던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동시에, 많은 러시아 광산 노동자들과 기타 노동자들은 서구형의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단기간 내에 러시아를 서구 수준의 경제적 생산력과 생활 수준으로 끌어올려 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는, 1990년대 옐친 정부 하에서의 자본주의 복구는 러시아 노동 인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붕괴 이후, 선진 산업 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었던 강도의 사회적, 경제적 붕괴의 고통을 겪었다. 우리는 1999년에 이 붕괴에 관련된 지수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생산은 1991년 이후 적어도 50% 떨어졌고, 자본투자는 90%까지 떨어졌다. 현재 러시아에서 도시 노동력의 3분의 1이 실제로 실업상태이다: 인구의 75%가 최저생계비 이하이거나 겨우 조금 넘긴 상태로 살고 있고 1500만 명이 실질적인 기아상태에 있다. 수명은 극적으로 낮아졌다.

 

"생산을 위한 기반시설, 기술, 과학, 운송, 난방과 하수시설 등이 붕괴되었다. 영양실조가 학교 학생들에게는 표준이 되었다. 200여만 명의 어린이들이 그들을 더 이상 보살필 수 없는 가족들에 의해 버려졌다.... 과거 국가운영의 전국민 의료보장 시스템의 붕괴와 함께, 결핵과 같은 질병이 번성하고 있다."

-"'신계급' 이론의 파산", 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 55호, 1999년 가을

 

소련보다 산업적으로 덜 발전했고, 특히 시골 지역의 후진성이 뚜렷한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은 제국주의의 지배가 야기하는 경제적 붕괴와 함께 훨씬 더 큰 재앙적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한동팡: "민주적" 반혁명의 앞잡이

 

고르바쵸프 하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조건과는 달리, 오늘날 중국 노동자들은 즉각적인 중대한 정치적 변화의 전망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정세에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혼다 등의 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개선된 사회복지와 노동조건을 넘어서는 어떠한 것을 목표로 한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ACFTU 지부에서 자기 자신들의 대표자들을 선출하거나, 기껏해야 이러한 경제적 목적들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분리된 공장에 기초한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한다.

 

노동자 활동가들이 외부의 지원을 추구하는 한, 그 지원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호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관료의 학자 구성원을 포함하는 관료 인자들로부터 였다. 그래서 포샨 혼다 파업의 젊은 여성 지도자 리 샤오주안은 베이징의 렌핀 대학에 있는 노동관계연구소의 소장을 접촉했고, 그에게 협상위원회에 조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동의했다. 예상대로, 그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함에 있어서 유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전개가 될 때,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반(反)공산주의 세력들은 분명히, 부활하는 노동자 운동에 개입할 것이다. 그러한 역할에 열망을 가진 후보의 하나가 중국 공산당이 정치조직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지 못한 홍콩에 기초를 둔 중국노동소식지(China Labour Bulletin) 주변에 중심을 둔 재정적으로 든든한 활동을 운영하는 한동팡이다. 한동팡은 악명높은 CIA의 명목상 조직인 '전국 민주주의를 위한 기부'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단체인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운동'의 부의장이다.

 

2008년에, 한동팡은 미국 의회의 중국에 대한 위원회의 한 청문회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무슨 목적으로? 구 소련 권의 "인권"을 이용한 이교도들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그는 중국 공산당 정권이 자신의 단체의 활동을, 특히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활동을 허용해 주도록 미국 제국주의가 압력을 행사해줄 것을 호소했다. 한동팡은 월스트리트 은행과 포츈 500 기업들의 정치적 대변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에 대한 시민권(市民權) 그룹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개입이 중국에서 기능하고 있는 시민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동자 권리의 방어"라는 이름으로, 한동팡과 그의 동료들은 실제로는 중국 프롤레타리아트를 잔혹한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노예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

 

과거 한동팡의 단체는 중국에서 "독립" 노동조합을 주창했다. 하지만, 2008년 노동법에 대한 부분적인 대응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전술을 변경했다. 2009년 3월, 중국노동소식지의 보도는 "ACFTU 내부에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풀뿌리 노동조합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 "중국에서 독립노동조합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들 풀뿌리 노동조합들은 ACFTU에 가입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강조는 원문].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인 변화가 결코 그들의 반혁명적 목적을 바꾸지는 않았다. 같은 중국노동소식지의 보도는 "중국은 이제 어느 점으로 보나 시장경제이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시장 경제"라는 용어는 자본주의를 위한 완곡한 단어로 사용된다.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이미 복구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동팡 일당은 자신들의 노동자 국가에 대한 반혁명적 파괴라는 강령을 "민주적 권리"의 확대와 "기능하는 시민사회"의 건설로 위장한다.

 

중국노동소식지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링크를 걸어놓은 AFL-CIO라는 친 자본주의 미국 노동관료들의 것과 매우 조화를 이루는 노동조합주의를 중국에서 주창한다.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쇠퇴에 대응하여, 중국노동소식지는 진정한 단체협약이라는 조건하에서, "피고용자들은, 예를 들면, 일시적 임금삭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ACFTU 관료들 조차 자신들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하지는 않았다. 미국 노동운동의 최고위직에 있는 자들이 중국노동소식지를 칭송해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십년 동안의 반(反)소비에트 냉전 동안에, "AFL-CIO"는 유럽,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다른 지역의 공산주의 정당들 및 기타 좌익 조직들과 연계되어 있는 노동조합들을 파괴하기 위한 캠페인에서 "자유노조"라는 기치를 휘날렸다.

 

트로츠키주의의 권위가 자기들 것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는 일부 그룹들은 중국에서의 "민주적인" 반혁명 세력을 위한 "좌익"스러운 응원 대장들로 행동하고 있다. 이들 중 유명한 것이 피터 타페가 지도하는 영국에 지도부를 둔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위한 위원회'[CWI/C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이다. CWI 웹사이트(www.socialistworld.net)의 최근 파업 물결에 관한 6월 12일자 기사는 사회민주주의적 반(反)공산주의의 언어로 쓰여졌다. 중국은 "세계의 설탕가게"로, 중국 공산당 정권은 "지배 '공산주의' 독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장광설의 저자인 빈센트 콜로는 CWI의 지도적인 중국 "전문가"이다. 몇 년 전에 그는 또한 "중국의 자본주의 반혁명"(Socialism Today, 2007년 12월-2008년 1월)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구 모택동주의 관료들의 일부가 '개혁의 과정'을 거쳐 재산을 소유한 계급으로 스스로를 변형시켰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자본주의로 묘사하려고 하는 CWI의 시도는 단지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와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정책을 위한 "이론적" 근거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CWI가 기원을 두고 있던 투사[Militant] 경향은 1980년대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와 같은 제국주의의 지원들 받던 반(反)공산주의 세력들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들의 동지들은 보리스 옐친과 소자본 운영자들과 그들의 범죄적인 똘마니들을 포함하는 그의 반혁명적 오합지졸들과 같은 바리케이드에 서 있었다. 이들 나라들이 관료적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의해 통치되던 노동자 국가들이었다는 것을 그들이 공식적으로 고수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 타페주의자들의 강령이 노동자 국가의 방어에 반대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모택동 시대에 대한 이상화

 

한동팡과그의단체와같은"민주적인" 반혁명 납품업자들이 오늘날 중국에 있는 정치적 반대파의 유일한 경향은 아니다. 신모택동주의적 성격의 관료와 인텔리겐챠 인자들 사이에도 또한 비슷한 반대파 경향이 있다. 게다가, 모택동 시대의 상대적인 평등주의와 경제적 안정("철밥통")에 대한 일정한 향수가 국가 소유의 기업에 고용된, 그리고 특히 더 오래 전에 고용되었던, 나이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다.

 

2000년대 초 노동 쟁의에 대한 연구인 '법에 대항하여: 중국의 러스트 벨트와 선 벨트(2007년)'에서, 칭관리는 요녕성(省)의 "러스트 벨트"에서 이러한 태도를 자주 목격했다. 이 지역은 체불임금, 실업 급여, 연금, 그리고 보조금 등을 두고 벌어졌던, 해고되고 강제로 퇴직당한 노동자들에 의한 수 많은, 종종 전투적인, 항의들이 있었던 장소였다. 2002년 3월에, 그들에 대한 경제적 혜택과, 또한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전(前)시장인 지역 입법부 수장의 축출을 요구하면서 수 만명이 요녕의 거리를 행진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이러한 투쟁들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와 1949년 혁명과 생산수단에 대한 공공소유를 동일시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전위로 여겼으나, 친 모택동 중국 공산당 정권들에 의해 혹사 당하고 매도 당했다. 한 사람은 리에게 몹시 신랄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훌륭한 시민이고, 노동자이고, 기업에서 앞서가는 생산자이다. 내 배경에는 어떠한 흠도 없다. 나는 항상 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우리의 문제들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나는 혁명 이후 지금까지 모택독에 충성해 왔다..... 자식과 부양가족이 있는 삼십 수 년을 일해 온 53살의 나이의 나를 당신들이 해고 노동자로 만든다."

 

한때, 모범 노동자로 상을 받기도 했던 50대의 한 기능공은 모택동 시대에 경험했었던 노동계급의 경제적 안정과 공공의 번영에 관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일을 잘 하는 한, 나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노동 단위에서 내 집, 자식들의 일자리, 그리고 연급을 챙겨 주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지도계급이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 나는 사회와 회사에서의 우리의 지위 때문에 그것을 믿었고, 우리의 임금은 낮지 않았다.... 우리의 생활수준이 지금과 비교해서 높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걱정은 없었다."

 

같은 시기에 해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현장 조사를 했던 미국 지식인 윌리암 허스트는 비슷한 정치적 태도들을 보고했다. "장기 휴가" 중에 있는 탄광노동자는 그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서북쪽 지역은 죽어가고 있고, 공산당은 더 이상 사회주의에 신경쓰지 않는다. 계획경제가 있었던 동안에는 우리는 모두 가난했다. 그러나 모두 같이 가난했다.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우리는 모두 공동의 그릇에서 나온 음식을 먹었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는데 반해,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된다."

-사회주의 이후의 중국 노동자(2009년)

 

모택동 시대에 대한 향수에 대한 이들 표현들은 경제의 현대화는 불가피하게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를 수반한다는 모택동 이후의 스탈린주의 정권들과 똑같은 (그러나 잘못된) 전제를 암묵적으로 공유한다. "일부는 먼저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다"가 등소평의 가장 잘 알려진 경구들 중의 하나였다.

 

오늘날의 신 모택동주의 정치 경향은 당과 정부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제출되었던, 6월 1일의 "중국의 현재 노동자 행동의 분출에 관한 고참 혁명가들의 입장 선언"을 통해서 최근의 파업 물결 동안에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 2명의 국가 관료, 1명의 과거 ACFTU관료, 그리고 2명의 베이징 대학교 교수들이 5명의 서명자들이다. 베이징 대학교 교수 2명 중에서 공샨탼은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몇 해 전 사적 소유권를 강화하는 새로운 법을 반대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선언은 "사회주의적 공공소유 경제보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경제가 지배하는 한, 노동계급은 착취의 구조 하에서 자신들의 허약한 지위, 불공평한 분배 제도,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불균형을 바꿀수 없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노동계급의 우리 나라 지도계급으로의 복귀와 우리 민족 경제의 대들보로서 사회주의 공공소유 제도의 재수립"을 요구한다. 선언 작성자들이 중국이 모택동 이후 중국 공산당 정권들 하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했다고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또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현 정권이 중국을 나라의 헌법 제1조에 따라서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되돌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칭 "고참 혁명가들"이 볼 때,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법을 매우 잘 지키는 모양이다.

 

미국에 있는 '사회주의와 해방을 위한 당(PSL)은 이들 감정들을 되풀이하면서 자신의 웹 사이트에 오늘날의 파업 물결은 "중국 공산당을 위한 갈림길"이며, "중국 공산당의 노동계급을 향한 방침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중국에서의 계급 투쟁이 격화되다", 6월 11일). PSL은 관료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한 양보"의 "방침을 바꾸"고,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자신의 역사적인 지지 기반의 충성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재조정 할"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비판적"이라고 하더라도, 중국 공산당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는 PSL의 정치적 DNA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조직의 모(母)조직인 '노동자 세계당'(WWP)은 '사회주의 노동자 당'에 있던 동안, 1956년 헝가리 노동자 봉기에 대한 이 정치혁명이 잔혹하게 끝나게 만들었던 모스크바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압을 지지했던 샘 마시 등에 의해 창립되었다. 1989년, WWP는 마찬가지로 천안문 광장에 중심을 두었던 1989년 투쟁에 대한 베이징 정부의 진압을 환영했고, 이 시작 단계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반혁명으로 비난했다.

 

구 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1949년 혁명에 뒤이어 중국에 수립되었던 계획되고 집산화된 경제가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한 거대한 사회적 성과들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러시아에서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모택동의 중국 역시 보여주었 듯이, 계획되고 집산화된 경제는 관료적 명령주의라는 스탈린주의 정권하에서는 지속적인 사회적 진보와 인민들의 생활 수준의 향상을 위한 보증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재앙으로 끝난 광기어린 경제적 모험주의 운동이었던 1950년대 후반의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을 상기해보라. 2천에서 3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대부분 지방 공동체의 인민들이 계속되던 기근으로 죽었다.

 

신 모택동주의자의 선언은 중국의 세계 자본주의 시장으로의 통합에 대하여 비난은 아니더라도 비판적이기는 하며, "우리의 수출 지향적 경제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며, "나라 안에서 인민들의 물질적, 문화적 필요들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모택동 시대보다 훨씬 큰) 현재 규모의 중국 산업 경제는 화석연료(특히 석유)와 금속 광물( 예를 들면 철)에 대한 대규모 수입이 객관적인 필요성으로서 요구된다. 경제적 "자립"(자급자족)을 향한 움직임은 생산의 축소로 귀결될 것이고, 이것은 실업 증가와 노동자와 지방 노동인민들 모두의 생활 수준의 하락을 야기할 것이다.

 

"맑스주의-레닌주의-모택동주의 사상"의 안내자임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모택동주의적 자급자족 경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고참 혁명가들"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화해가 그 논리적 귀결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스탈린주의 교조에 동의한다. 1970년대 초, 모택동 정권이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항하여 미국 제국주의와 전략적 동맹을 맺었던 것을 상기해보라. 이 동맹은 등소평 하에서 계속 되었고 깊어 졌다. 워싱턴에 의해 주도되던 신 냉전 공세에 대한 베이징 스탈린주의자들의 참여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세계 역사적 패배였던 소련의 반혁명적 파괴에 일조했으며, 또한 중국 자신에 대한 대규모 외국의 자본주의적 투자의 시작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제공했다.

 

 

평등주의와 현대화: 잘못된 대치

 

평등주의와현대화사이에서감지되는적대는중국노동자국가의관료적기형화에서,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의 중국의 지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배해 했던 노동자 국가들에서는, 중앙집중화된 경제 계획의 잇점들이 널리 퍼진 관료적 기생주의와 오경영에 의해 제한되고 파괴된다. 생산 목표는 양적으로는 달성되지만, 상품의 질은 좋지 않고 엉망이다. 에너지, 원료, 노동력이 낭비된다. 국가소유의 물자들과 장비들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이것이 사회화된 경제를 침해한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쵸프 정권이 시장 지향적인 "개혁들"을 위하여 중앙화된 계획을 폐기했을 때, 우리는 1988년 스파르타시스트 팜플렛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스탈린주의라는 틀 내에서는, 중앙화된 계획과 경영을 시장 메카니즘들로 대체하려는 고유한 경향이 있다.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노동자 위원회들)의 규율에 복종할 수 없기 때문에, 관료는 경제적인 불효율성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경제 행위자들을 시장 경쟁의 규율에 점점 더 많이 복종시키고자 한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통한 중앙계획을 위하여", 동유럽에서의 "시장 사회주의"에서

 

부가적으로, 시장 메카니즘에 대한 의지는 엘리트 관료들의 개인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와 기호에서 비롯된다. 신모택동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노동계급 지도력"은 등소평이 포기했던 것이며, 그의 후계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중국의 자본가 계급의 핵심이 모택동 시대의 중국 공산당 중핵들과 그들의 정치적 (그리고 많은 경우 생물학적인) 자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작은(그리고 중간) 규모의 국가소유 기업들의 경영과 기능직의 다수가 1990년대 후반 이들 기업들이 사유화될 때 (이들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했다.

 

모택동 시대 동안 뿐만 아니라 모택동 이후의 "개혁" 시대 동안에도, 노동계급은 재앙적 결과들을 초래했던 갑작스런 변화들을 포함하여 경제 정책들에 대한 어떠한 통제권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관점에서 "대약진 운동"에 대하여 지적해 왔다. 또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모택동 보다 더욱 실용주의적이었던 반대파들에 맞서 모택동에 의해 시작되었던 폭력적인 공세였던,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문화혁명"의 결과들도 엄청나게 파괴적이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30년대 중반 스탈린의 러시아에 대한 그의 계급적 분석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관료적 명령주의가 기술적 혁신과 활력을 방해했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갈수록, 경제는 더욱 그림자 처럼 관료들을 피해가는 질이라는 문제와 충돌한다. 소비에트 생산품들은 마치 무관심이라는 잿빛 상표를 부착한 것과도 같다. 국유화된 경제 하에서 그 질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주의, 비판의 자유, 그리고 창의력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조건들은 공포, 거짓, 그리고 아첨이라는 전체주의 정권과는 양립할 수 없다.

 

"질의 문제의 이면에 있는 이 보다 더 복잡하고 거대한, 독립적, 기술적, 그리고 문화적 창조성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문제들이 제기된다."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은 미국, 유럽과 일본 기업들에 의한 대규모 투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선진화된 기술을 획득하고자 해 왔다. 이러한 정책은 중국의 경제적 생산성 수준을 모택동 시대의 그것 보다 훨씬 더 높게 끌어올리는데 분명히 기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도시들과 양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후진성이라는 늪에 빠져있는 시골 양쪽 모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엄청나게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다. 현 정권의 경제부양 프로그램에 의해 최근 일정정도 상쇄되기는 했지만, "시장 개혁들"은 지역적 불균형을 엄청나게 악화시켜왔다. 더욱이, 대규모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수출 지역은 중국을 반식민지적 종속과 경제의 붕괴로 떨어뜨리게 될 내부적인 자본주의 반혁명을 위한 세력들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중국이 외국 자본주의 투자를 통하는 것 이외에 어떻게 전방위적인 경제발전의 전제조건인 북미, 서유럽, 그리고 일본에서 가능한 선진 기술을 획득하는가? 대안은 없는가? 해답은 국제적으로 계획화된 사회주의 경제를 위한 기초를 놓을 제국주의의 중심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다. 이러한 혁명적 맑스주의 강령과 전망은 모택동주의와 "시장 사회주의" 변종들 모두에 있는 중국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 위원회의 정부를 위하여!

 

민주정부를보통, 평등선거에 기초한 선거와 같은 서구형의 의회주의 체제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한동팡과 같은 반(反)공산주의 반(反)혁명가들만이 아니다. 중국 스탈린주의자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무계급적(부르주아적) 개념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조장한다. 오랫 동안, 중국에 있는 시골에서는 (비록 다수 정당은 아니지만) 다수의 후보가 있는 마을 위원회 선거들이 있어 왔다. 물론,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 당원이 아닌 후보들을 비롯하여 모든 후보가, 누가 선거에서 이기는 바와 상관없이 엄격한 정치적 통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방 당 기구에 의해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이런 형식의 선거는 가난한 차지농(借地農)의 표가 부유한 기업가의 표와 똑같은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것으로 보이는 부르주아지 의회주의를 반영한다.

 

실제로 의회정부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의 정치적 형식이다. 그러한 체제에서, 노동계급은 무력한 개인들로 축소된다.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미디어, 교육제도, 그리고 다른 여론을 형성하는 기관들에 대한 통제력을 통하여 유권자들을 효과적으로 속일 수 있다. 모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들"에서, 은행과 거대 기업들은 선출직, 비선출직 정부 관료들을 사고 그들에게 지불한다.

 

레닌은 1918년 사회민주당에 대한 그의 고전적 논박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심지어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지 국가에서조차, 피억압 인민들은 자본가들의 '민주주의'가 선포한 형식적인 평등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임금노예들로 만드는 수 천 가지의 실제의 제약들과 속임수들 사이의 심각한 모순과 끊임없이 맞닥뜨린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하에서, 자본가들은 수 천 가지의 속임수들로 인민들을 행정적 업무,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으로부터 떠밀어내는데, 민주주의가 더욱 '순수할'수록 이러한 속임수는 더욱 교묘하고 효과적이다.... 노동인민들은 부르주아지 의회 참여를 수 천 가지의 장애물들에 의해서 방해받는다(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하에서 노동인민들은 결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며, 이런 것들은 주식시장과 은행에 의해서 결정된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하에서는, 노동자는 단지 정부에 대한 통제와 권력이라는 환상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에서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문제가 추상이나 환상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이다. 중국과 같은 노동자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스탈린주의자들의 잘못된 지배에 의해 기형화되었다.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권력을 빼앗겼고, 그 대신 권력은 반(反)노동계급적 관료계층에 의해 독점되며, 관료들의 정책들은 궁극적으로 노동자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이것은 모택동 시절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진실이다. 노동계급과 시골의 노동인민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기초한 통치 기구들인, 노동자 국가의 집산화된 기초들을 방어하는 모든 정당들에게 열려 있게 될 소비에트 (위원회의 러시아 용어)에 의해 지배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서만 오직 진정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저작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인민과 피착취 인민 자신들의 직접적 기관이며,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 속에서는 노동인민과 피착취 인민의 전위인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단위 기업에 의해 가장 잘 단결되어 있는 잇점을 향유한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선출하는 것과 선출된 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다른 모든 세력들보다 더 쉽다. 소비에트라는 형식의 기관은 자동적으로 모든 노동인민과 피착취 인민들을 그들의 전위인 프롤레타리아트 주위로 단결시키는 것을 돕는다. 소비에트 형식의 기관 하에서는 관료, 부(副), 부르주아지 교육, 사회적 연결망이라는 특권(이들 실제의 특권들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록 더욱 다양해진다) 등의 과거의 부르주아지 기구들은 모두 사라진다."[강조는 원문]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위하여!

 

1989년 5월과 6월의 천안문 격변이 노동자들의 친사회주의적 봉기를 위한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정권의 시장 방책들, 특히 높은 물가인상의 충격에 대한 자기 자신들의 반감에 의해 실천에 나섰던 중국 노동자 대중들이 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를 원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시작된 항의에 합류했다. 노동자들의 집회와 오토바이 기동대들이 등장했고, 이것은 진정한 노동자, 병사, 그리고 농민 위원회의 등장을 위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1989년 5월, 6월의 투쟁이 맹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특징을 갖게 했던 것은 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참여였다. 깜깍 놀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마침내 강력한 진압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군대 장교들을 포함하여 관료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충격 속에서 분열하기 시작했다. 투쟁에 대한 베이징 노동인민들 사이에서의 엄청난 대중적 지지에 직면하여 처음으로 동원되었던 군 부대들은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이들 보다 정권에 더욱 충성적인 군 부대들이 1989년 6월의 유혈진압을 위하여 호출되어야 했고, 유혈진압은 압도적으로 학생보다는 노동자들을 목표로 했다.(더 자세한 것은 "오늘날 중국의 천안문과 노동계급 투쟁의 유령" [노동자 전위 836, 837호, 2004년 11월 12일, 26일자]를 보시오.)

 

천안문 사태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결정적으로 없었던 요소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국제주의의 기치로 노동 대중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진정한 볼셰비키(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정당이었다. 국가소유와 사유 부문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주창하고 한(漢)[민족-해석자의 첨가] 배외주의에 맞서 민족적, 인종적 소수들을 방어하는 그런 정당은 붕괴되고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로부터 등장하는 경향들, 그리고 또한 서구형 "민주주의"를 위한 반(反)공산주의 납품업자들에 대항한 정치적 전투 속에서 건설되게 될 것이다.

 

중국 혁명적 성과의 생존과 전진은 일본, 북미, 그리고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달려 있다. 이들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국제적인 계획경제의 일부로서의 중국의 전방위적 현대화를 향한 유일한 길이다. 노동자, 농민 위원회의 중국을 창출해 내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은 구 소련과 동유럽의 유린된 대중들과 제국주의 심장부에 있는 노동자들을 새로운 10월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일깨우는 한편으로, 아시아와 전세계의 피억압 노동대중들을 위한 요새가 될 것이다. 국제공산주의 동맹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세계정당인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이러한 목표를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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