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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천만시대, 그 문화사회학적인 의미는?

 

14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실미도>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전국 관객수 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개봉 39일만이며 <실미도>보다 무려 19일이나 빨리 천만 명을 넘어선 전대미문의 기록이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불과 한달여만에 <실미도>에 이어 또 다시 관객 수 천만을 넘어 1천3백만 명 돌파도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치가 나오고, 경제 전문가들은 경제 파급 효과가 무려 5000억원에 달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아 영화계 전반이 고무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이미 <실미도>의 천만관객 돌파 이후 각계의 많은 전문가들과 일반 관객들은 이런 초유의 한국영화의 흥행 폭발에 대해 놀라움과 동시에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환경적’ 혹은 ‘산업적’인 영화 외적 요인을 들어, 최근 몇 년 사이 급속도로 증가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영향’과 ‘다양한 관객층의 변화와 확산’, ‘와이드 릴리즈 방식에 따른 독점에 가까운 스크린 장악’ 등을 그 흥행 요인으로 분석해 내고 있다. 또한 그에 대한 조속한 대안 마련과 인식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 요즘 영화계의 전반에 걸친 목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nkino에서는 이러한 환경적, 산업적인 영화 외적 요인들의 분석에서 벗어나, 문화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천만 관객시대의 의미를 진단해 보았다. 다음은 문화연구가 조흡 교수의 구술을 토대로 재구성된 글임을 밝혀둔다(편집자).



산업적 인식의 변화 시작
전 세계의 추세는 제조 산업 위주에서 정보, 통신, 문화 산업으로의 전이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대중 정권 이후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구축되었다. 이것은 선거 전략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문화도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의식들이 자연스럽게 형성 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김대중 정부 이전, IMF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대기업들의 문화, 영화 산업에 대한 개입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대기업 참여의 긍정적인 면은 자금동원과 투자 방법 등 바로 그들이 구축해 놓은 선진적인 제도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잔재들은 당시 문화정책과 맞물렸다. 선진적 영화 제작 시스템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이다. 이후 몇몇 영화들이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동시에 일어났는데, 바로 기업들의 인식 변화를 들소 있다. 즉 기업들에게 있어 영화에 투자를 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의식 변화가 생긴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케이블/위성 시장의 확대에 따른 방송사들의 케이블 시장 진입도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 소프트웨어 확보를 위한 해결 방안 중 하나가 영화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방송사들이 하나 둘씩 영화에 직접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영화라는 산업을 둘러쌓고 영화 외적인 분야에서 영화에 주목하기 시작함으로써 영화 산업은 자연스럽게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천만이란 상징적 소비에 따른 영화의 파급 효과
지금까지 한국의 산업 구조를 지탱해온 제조업, 그 중 대표 격인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 먼저 현대 자동차에서 한 대의 차를 완성하는 과정에는 수백 개 혹은 수천 개의 하청 업체에서 생산된 부품들이 쓰인다. 그것은 곧 현대 자동차는 조립만 담당할 뿐이지, 거기에는 수많은 하청 업체와 제조업자들이 속해 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제조 산업은 사회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지금까지도 이 산업이 붕괴하면 한국 경제도 따라서 무너진다는 의식이 팽배해져 있다.

그러나 문화 산업의 경우 제조 산업과는 조금 다르게 인식되어 왔다. 단적인 예로 벤처 기업의 경우 뛰어난 엘리트 몇 명에 의해 소위 대박을 터트리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영화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제조업과 비슷한 산업적 구조를 지닌다는 이야기.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자동차 완성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딸려 있는 식구들이 많다. 즉 투자에서부터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력들이 동원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제조업의 사이클과 비슷하다. 고용 효과적인 측면을 놓고 보자면 자동차 산업의 효과 못지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구체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에서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대규모 폭파 장면을 위해서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할 줄 알았던 기술력이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했다는 강제규 감독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는 영화와 전혀 상관이 없던 분야의 업체 혹은 사람들이 이 한 편의 영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영화 산업의 우산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예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하청업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이제 자체 기술력으로 세계에 도전하고 있는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제 문화, 특히 영화 산업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산업적 파워를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산업, 텍스트, 관객의 3대 요소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여준 오늘날의 현상들은 산업과 텍스트(영화), 그리고 관객의 세 가지 변수가 상호작용을 하여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영화계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장르의 획일화’였다. 물론 그 코드가 변종을 거듭했지만 ‘조폭 영화’들이 1년 넘게 지속된 것이 단적인 예다. 이 시기 많은 제작자들은 거시적이고 산업적인 사명감을 떠나 일차적으로 다른 영화와 ‘차별화’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 봉착한 했다. <바람난 가족>, <싱글즈>에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일련의 흥행작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산물로 볼 수 있는데,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차별화’는 제작자들의 위기감에서 나온 단순한 상품 전략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바람난 가족>

 

이러한 영화들의 성공 요인이 그렇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상품 전략만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바람난 가족>의 경우,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위 환경의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명필름에서는 제작을 강행했다. 영화란 자본과 인력만 갖춰진다면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제작된다는 의미는 단순히 산업적인 영역에 불과한 것이다. 성공 여부는 앞서 이야기한 텍스트와 관객의 문제로 봉착될 수밖에 없다. 즉 산업적 측면은 3분 1의 영역이다. 살아남기 위한 3분 1의 영역이 더 낳은 텍스트의 문제로 옮겨질 때 비소로 어느 정도 영화의 ‘질’의 측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문제는 관객이다. 모든 전문가들의 흥행을 점쳤던 영화들이 실패한다거나, 반대로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못 박았던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는 경우를 주목해야 한다. 산업이 차별화를 원한다면 관객도 차별화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시장에서는 다양한 상품들을 제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상품이 다양해지면 소비자(관객)들은 자기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관객은 시장 원리에 끼워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만은 않다.

산업과 텍스트 그리고 관객이 어우러질 수 있는 정점은 돈을 벌기 위해 시작된 차별화 전략이 결국 관객의 성향과 닿아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때로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로 등장했다. 페미니즘의 문제, 전쟁의 문제, 독재정권 치하에서의 문제 등 영화에서는 차별화를 위해 이러한 사회적인 아젠다(Agenda)를 끄집어 들였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번지점프를 하다>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영화들이 그 문제들의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그 뉘앙스만 풍겼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질의 접근을 시도하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되고, 그러면 당연히 관객을 불러 모으기 힘들기 때문. 따라서 제작자들은 사회적으로 위험한 이슈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 무거운 입장들을 ‘공론화’ 시키되, 변죽만 울릴 뿐 본질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최근 한국영화의 트렌드라 볼 수 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의 도입
관객들은 이런 차별화 전략에 의해 나온 영화들에 쉽게 매료될 수밖에 없다. 첫째는 이 영화들이 그 동안 목말라 있던 관객들의 취사선택의 다양함을 채워주었고, 무엇보다 로맨스나 폭력, 코미디 등 다양한 코드로 변형되어 재미를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 봐야 할 점은 그 동안 매스 미디어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줄로 인식되어 오던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the Public Sphere)’의 개념이 영화에도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개념은 <살인의 추억>과 <실미도>를 통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해 진다. <살인의 추억>의 경우 영화 개봉 후 관객들이 나름대로 모두 탐정이나 형사가 되어 갔다. 인터넷에서 공론화가 일어나고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네티즌) 마저 참여를 유도하게 되었다.

 


<실미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영화, 특히 한국영화가 사회적인 역할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이슈가 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살인의 추억> 이즈음에 가서 영화 한 편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과 공론을 불러일으키느냐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결국 인터넷의 발달은 영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공론의 기능을 수행하게끔 했다. 영화를 만든 사람은 그 표피만 들춰내 변죽만을 울릴 뿐이지만, 관객은 공론의 입장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또한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실미도>의 경우에도 똑같은 논리의 적용이 가능해 진다. 강우석 감독이 “내가 만든 영화 한 편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고 했듯이, <실미도> 또한 관객들에게 ‘공론화’를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기의 없는 기표’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는 <실미도>의 경우와는 조금 달리 해석해 볼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폭발적인 흥행에는 물론 <실미도>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중장년층 관객의 증가도 큰 몫을 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요인들은 <태극기 휘날리며> 흥행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볼 수는 없다. 여전히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요 관객층은 젊은 층이다. 익히 알려졌듯이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모티브로 해서 제작되었다.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가장 비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영화는 노근리 학살이나, 4.3 사건 등 중요한 많은 사건들에 본질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조금 더 영화화가 가능한 소재거리, 형재애와 사랑 등의 보편적인 소재거리를 끄집어 들였다. 따라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한국 전쟁에 관한 영화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아니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업적인 논리로 볼 때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한계일 뿐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문제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살인의 추억>이나 <실미도>와 같이 아무런 ‘공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흔히 대다수 사회학자들을 ‘잃어버린 집단 메모리’의 이론을 들어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의 폐해를 간접적으로 경험 시켜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영화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본질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젊은이들이 <태극기 휘날리며>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위 인터넷, 게임 세대들인 요즘 젊은이들은 게임, 특히 작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만 한국 전쟁이나 기타 전쟁을 경험했을 뿐이다.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에서 전쟁의 스펙타클을 극장에서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가장 큰 흥행 요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측면으로 설명해 본다면 보드리야르의 ‘기의 없는 기표’의 전형적인 예로 설명이 가능할 듯싶다. 즉 의미는 없는데, 과다할 정도의 스펙타클이라고 하는 폭발 장면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세대들에게는 이러한 폭발 자체가 매력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현상은 영화의 스타일의 문제와도 결부되는데, 스타일은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신의 본질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바로 그러한 세대들의 감성과 맞아 떨어진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산업적 자만 우려, 위기 대처할 때
천만 관객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로컬리즘(Localism)과 글로벌리즘(Globalism) 간의 대립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단순히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영화계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지금의 국가적인 상황에서 문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영향력 안에 놓여질 수 있다. 공교롭게도 지금 상황을 보면 신문이나 방송 보다는 영화가 ‘공론’의 역할을 더욱 잘 수행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지금이 바로 로컬의 저항(Resistance)이 문화적으로 표출되는 시점이다. 이것을 몇몇 학자들은 민족주의(Nationalism)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촛불 시위와 같은 일종의 글로벌 포스(Global Force)에 대항하는 지역사회의 나름대로의 방어 메커니즘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방어 메커니즘이 영화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살인의 추억>

 

비평가의 입장에서 <살인의 추억>이 ‘천만’을 돌파했다고 한다면 영화적으로는 찬성을 할지도 모르겠으나,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영화적으로 ‘천만’의 대우를 받을만한 작품들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텍스트적인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다. 즉 컨텍스트적(Context)적인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의 컨텍스트적인 문제는 엄밀하게 텍스트와 어우러진 기묘한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의 영화 제작자들이 자칫 이것을 텍스트만의 승리로 착각할 가능성 있다. 그러다 보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가 더욱 중요할 때다. 제작자나 감독의 개인적인 자만이 아니라 산업적인 오기와 자만이 우려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홍콩이나 멕시코 영화의 예를 들어 미래를 우려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지금까지 영화 제작자들이 다양성 측면에서 노력했듯이, 그 조시(肇始)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천만이 든 한 편의 영화보다는 300만의 관객이 든 영화 3편과 100만이 든 영화 1편이 지금 우리 영화계에는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천만의 시대를 맞이하였을 때, 위기를 대처하는 것이 한국영화 산업의 장기적인 헤게모니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지금이 그 위기를 대처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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