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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수보트니크와 재건

인간과 계획: 제3장 (1)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겨울


3장. 소비에트 계획에서 노동자들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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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트니크와 재건

 

1940년 1월 20일에 윈스턴 처칠 씨는 대중집회에서의 즉흥적인 연설이 아니라 신중하게 준비된 방송 담화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수많은 발언 중 하나를 내놓았다. 처칠 씨는 “공산주의가 한 나라의 영혼을 어떻게 썩게 만드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평시에 한 나라를 어떻게 비참하고 굶주리게 만드는지, 그리고 전시에 그 나라가 얼마나 비열하고 혐오스러운가를 드러내는지 누구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1년 전, 처칠  주도로 당시 러시아 땅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던 침략전쟁의 와중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라우다 1919년 6월 28일 호에 이렇게 썼다:

“사회적 노동의 공산주의적 조직화그에 이르는 첫걸음이 사회주의이다는 지주·자본가의 멍에를 벗어던진 바로 그 노동 대중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규율 위에 서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규율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졌거나, 신앙심 깊은 소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서, 오직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나왔다. 새로운 규율은 바로 이러한 물질적 조건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들의 담지자이자 매개 통로는 대규모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됐고, 조직됐으며, 공고화됐고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단련된 확고한 역사적 계급이다. 이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창조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중적 과제 혹은 두가지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 첫째로, 자본에 대한 혁명적 투쟁에서 보여주는 헌신적인 영웅주의를 통해 피착취 생산자 대중 전체를 자기 뒤로 끌어당겨 함께 전진하게 하고,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그 저항을 완전히 분쇄하기 위한 투쟁에서 이들을 조직·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체 피착취 노동 대중과 전체 소부르주아 분자들을 새로운 경제건설의 길로, 새로운 사회적 유대의 창출을 향한 길로, 새로운 노동규율의 길로, 그리고 노동의 새로운 조직화라는 길로 이끌어야 한다. 이 새로운 조직화는 자본주의적 과학기술의 최신성과를 광범위한 사회주의적 생산에 종사하는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연계와 결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과제는 단발적인 영웅주의 행동만으로 결코 완수할 수 없으므로 첫 번째 과제보다 더욱 어렵다. 그것은 가장 장기적이고, 끈질기며 가장 어려운 대중적 영웅주의와 단조롭고 일상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1

처칠 씨는 공산주의가 국가의 심장부를 썩게 한다고 여긴다. 레닌은 반대로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이 새로운 류의 대중적 영웅주의를 국가적 차원에서 창출했다고 여긴다. 누구의 말이 맞았는가? 처칠 씨의 견해는 실로 가혹한 평가였고, 특히 세대에 걸친 러시아 혁명가들의 사회주의적 계획을 겨냥한 것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러시아 혁명가들의 정치적 논의에 드문드문 개입하면서, 1877년에 조국 연대기(Otechestvennye Zapiski)지의 편집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회주의의 목표가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최대한의 확장과 함께, 인간의 가장 완전한 발전을 보장하는 경제형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썼다.2 이러한 판단은 이후  번도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의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

 

처칠이 옳았는지, 레닌이 옳았는지에 대한 답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사에 그치는 것도, 오로지 당파적 정치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소련 사회의 가장 강력한 단일 요소인 소비에트 노동계급의 지배적인 이해관계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5개년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했던 물질적 곤경과, 그러한 계획이 실행됐던 방식이 소련의 외교정책을 책임졌던 이들로 하여금 평화정책을 펼치도록 강요했다면, 그 계획들이 그들의 노동에 똑같이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노동계급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련의 경험은 새로운 노동태도의 출현에 관한 레닌의 신념을 입증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태도는 소련 외교정책의 이해관계와 동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문제에 관한 신중한 검토는 레닌의 발언에 계기가 된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1919년 5월 7일에 모스크바-카잔 철도에서 일했던 공산주의적 철도원들과 비당원 지지자들의 총회가 다가오는 토요일에 여분의 시간을 내서 무급으로 철도기관차 및 여객용 화차의 수리와 같은 긴급한 작업과, 조차장에서의 화물적재와 같은 작업에 하루를 더 근무하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이었다. 노동력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작업은 긴급성이 요구됐다. 붉은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콜차크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고, 데니킨이 남쪽에서 “의용군”과 함께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공격의 준비를 상당히 진척시키고 있었던 상황에서 연료는 부족했고, 먹을 것도 거의 없었다.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당일에 지명된 205명의 노동자와 사무원은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기관차 4대와 객차 16량의 수리를 완료했고, 150톤의 화물을 싣거나 내렸다. 그들의 생산량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생산량보다 거의 3배나 높았으며, 7일에서 길게는 3개월이나 지연됐던 작업들이 마침내 완수되었다.

 

소식이 프라우다 5월 17일 호에 실렸을 이미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전개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전국적인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모스크바-카잔 철도의 노동자들이 콜차크가 패배할 때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이러한 모범을 계속해서 보이겠다고 결의했던 데에 있었다. 모스크바-카잔 철도 노동자들의 사례는 불과 몇 주 만에 다른 수많은 철도로 확산됐으며,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앞장섰고 수백여 비공산주의자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운동은 “공산주의 수보트니크” 운동(토요일을 뜻하는 러시아어 ‘수보타’에서 따왔다)으로 명명됐다. 추가로, 그것은 동지적 경쟁의 형태로 즉각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레닌은 일찍이 소비에트 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경쟁이 출현할 가능성에 대해 고찰했다. 1918년 1월에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는 경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을 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에서 폭넓고 대중적인 규모로 적용할 가능성을 창출한다. 사회주의는 압도적 다수의 노동 대중을 새로운 노동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재능을 키우며, 자본주의가 무수히 짓밟고 억압해 온 인민들 속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부가 정권을 잡은 현재 상황에서 우리의 임무는 경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창의적 주도성과 선의의 경쟁, 그리고 대담한 선도적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광범위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적 가능성이 방금 막 나타났다. 수세기 동안 타인을 위해, 착취자들을 위해 속박된 노동을 해온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의 가능성더 나아가, 현대적인 기술과 문화의 제반 성과들을 접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출현했다.”3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들이 창출한 선례가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산업 부문에서 수천수만의 추종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적어도 사실이었다. 1919년 5월부터 9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수보트니크 운동에 참여하는 숫자는 781명에서 6,773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 소비에트 러시아가 적의 침략을 사방으로부터 받았던 절체절명의 한 달 동안에는 [잠시] 주춤했다가, 1919년 12월의 15,928명에서 1920년 2월에 41,587명으로 다시 늘어났다. 그러자 봄과 여름 내내 지속된 폴란드의 공격이라는 새로운 부담이 닥쳐왔다. 그러나 평화의 복구와 함께, 1920년 12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수보트니크 운동에 참여한 숫자는 다시 95,743명에서 101,348명으로 증가했다.4 모스크바와 마찬가지로, 적들의 강점하에 놓이지 않았던 다른 모든 산업 중심지도 비슷한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9월 중순 무렵에는 페트로그라드는 모스크바보다 수보트니크 운동에 관여하는 숫자가 더욱 많았다. 소련-폴란드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공산당은 1920년 노동절을 노동계급의 오랜 전통이던 시위로써가 아니라, 각종 긴급 작업을 수행하는 수보트니크로 기념할 것을 호소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16만 5천 명이 호소에 응답했고, 보로네시에서는 2만 5천 명이 선로와 냉동창고, 파손된 상수도 시설의 보수작업에 돌입했다. 니즈니 노보고로드 주에서는 도시와 농촌에서 60만 명이 참여했고, 소련 전역에서 참가자들의 숫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5 외세의 침략과 내전의 종결이 소련 경제에 안겨준 엄청난 파괴는 이와 같은 운동을 위한 폭넓은 기회들을 제공해주었다. 7천 개의 다리가 폭파됐고, 수많은 탄광이 침수됐으며, 용광로들은 파괴됐고, 철도차량은 거의 온전히 가동할 수 없는 상태에 처했다. 제1차 영국 노동자 대표단의 증언은 특히나 충격적이었다. 이 대표단은 영국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T.U.C.)가 1920년 봄에 파견했고, 주로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건을 목적으로 토요일 오후마다 행하는 자발적 무급노동(소위 ‘수보트니크’)은사실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수행하며 부분적으로는 대중 교육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하나이제 도시 생활의 일상적인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를 위한 재건 사업에 모든 시민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고취되고 있다.”6

이러한 노력의 전통은 소련의 생활방식 중 일부로 남았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 노동자들은 공장들을 보수하기 위해 토요노동을 조직했다. 돈바스의 광부들은 허리까지 차오른 물속에 서서 굶주리고 얼어붙은 채로 백군에 의해 침수된 갱도에서 물을 바깥으로 빼냈다.”7 이후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하르코프에서 거대한 트랙터 공장의 건설 당시 수천 명이 넘는 도시 주민은 건설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직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유시간을 내서 엄청난 양의 쓰레기 더미를 청소했다. 그리고 이후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이루어진 모스크바 지하철의 건설은 이러한 종류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규율”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9달 동안 20만 명의 남성과 여성들, 사무원들, 육체노동자들은 지하철 건설장에서의 자발적인 노동을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했고, 정규적으로 일했던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을 보조했다. “온 모스크바가 지하를 건설하고 있다”는 구호는 소련의 수도 방방곳곳에서 이 당시에 볼 수 있었다. 보다 구체적인 예시들과 다른 사례들은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의 공저인 『소비에트 공산주의(Soviet Communism)』 제2권에서 (753쪽부터)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전에, 새로운 사회를 위한 경제적 토대의 의식적인 건설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역할에 관한 문제는 이미 이러한 비상시의, 혹은 몇몇 소수만이 하는 수준의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숨 쉴만한 공간이 아주 작게나마 보장되자마자 계획의 문제가 즉시 논의에 부쳐졌고8, 어떠한 계획이 노동계급과 농민들1917년 이전에 국가의 경제적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배제됐던의 열정을 일깨우는 데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실천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1920년 1월에 소련의 기술자이자 고참 볼셰비키인 G. M. 크르쥐자노프스키는 산업의 진보를 위한 지름길로서 러시아의 산업을 전기화하는 문제에 관해 짧은 논문을 썼고, 레닌의 의견을 구하고자 글을 보냈다. 1920년 1월 23일에 그는 레닌으로부터 열광적인 답변을 받았는데, 레닌은 그에게 동일한 실천적인 성격의 글을 두세 편 더 써서 나중에 소책자로 출판할 것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기술적 계획(물론, 이는 수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할 일이고 당장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다)이 아니라, 정치적 계획이나 국가계획, 즉 노동계급을 위한 목표를 추가할 수 없는가? 예를 들면 이렇다: 10년(5년) 안에 20개에서 30개의(혹은 30개에서 50개의) 발전소를 건설하여 토탄과 수력, 혈암, 석탄, 그리고 석유(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곳을 통과하는)로 가동되는 반경 400베르스타(만약 여의치 않다면 200베르스타라도)의 중앙발전소들로 전국을 뒤덮으라. 우리는 필수적인 기계와 모형들을 즉시 구매하기 시작할 것이다. 10년(20년?) 안에 우리는 러시아를 ‘전기화’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러한 ‘계획’, 혹은 계획 초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기술적 계획이 아니라 국가계획을 말이다. 이 계획은 지체없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에게 그림처럼 생생하게, 쉽게 다가가 명확하고 선명한 전망(그 기초는 전적으로 과학적인 전망이어야 한다)으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노동에 즉시 착수하자. 10년에서 20년 안에 우리는 온 러시아를 공업과 농업 모두를 전기화한 나라로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수천 혹은 수백만 마력이든, 킬로와트이든, 그 무엇이 되었던 간에) 기계로 가동되는 수없이 많은 충복을 만들어 낼 것이다. 러시아의 개략적인 지도 한 장에 중심지와 원을 그려 넣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아직 그건 불가능한가? 다시 말하건대, 우리는 10년에서 20년에 걸친 위대한 계획으로 노동자 대중과 공동체적 정신을 가진 농민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 서한9으로 인한 결론의 하나는 1920년 2월에 있었던 국가전기화위원회의 형성이었는데, 이 위원회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훗날 소련 계획경제체제의 중핵으로 발돋음하는 기반이 됐다.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국가전기화위원회의 창설과 함께 러시아의 전기화 문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며, 내전이 끝나가는 듯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역사상 최초로 보다 계획적인 경제건설을 시작하고, 전체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계획을 과학적으로 수립하며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10 1920년 12월에 크르쥐쟈노프스키가 제출한 전기화 계획을 채택했던 바로 그 제8차 소비에트 대회는 “모든 노동자와 농촌의 생산자가 어떠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전기화를 위한 계획을 어떻게 해서든지 수행하기 위해 희생을 불사하더라도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대회는 노동 적기 훈장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보여준 헌신과 주도성, 근면성과 자각적 규율”을 치하하기 위한 특별한 훈장인 노동적기훈장을 도입했다. 러시아의 노동 대중을 향한 특별선언11에서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축하하며 대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의 노동 대중이여! 여러분은 엄청난 고난과 피비린내 나는 희생을 감내한 3년 동안의 시간을 통해 평화로운 노동을 시작할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였다. 이제 우리의 모든 힘을 그 일에 쏟아부으라. 우리 소비에트 땅에서 노동능력이 있는 자로서 일하지 않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게 하라. 쉬고 있는 기계가 단 하나도 없게 하라. 쟁기질 되지 않은 농지가 단 한 데샤티냐12도 남지 않게 하라. 이제 러시아에서는 단 하나의 공유재산, 즉 노동자와 농민의 소유만이 존재한다는 점을 명심하며 인민의 재산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라. 우리의 노동력을 배가시키면, 그 보상은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한 해만 더 힘을 모은다면 우리는 불 꺼진 집에서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을 것이다. 또 두세 해가 더 지나면, 우리는 철도를 복구하고 나라의 모든 공장을 가동하게 할 것이다. 또 서너 해가 더 지나면, 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남루한 차림과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질 것이다. 또 5년이 더 지나면 우리는 전쟁이 우리나라 경제에 입힌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할 것이다. 그러니 일하라!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러시아여! 공화국으로부터 최초의 노동적기훈장을 수훈받은 공장과 마을 공동체, 개별 노동자에게 영광과 영예가 있으라! 콜차크와 데니킨, 유데니치, 브랑겔의 정복자들이여!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인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여러분을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승리로 부르고 있다. 노동 전선에서의 우리의 승리에 영광이 있으라!”

따라서 노동영웅주의와 공공재산의 생각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국가의 계획적 재건과 발전에 대한 생각과, 또 평화로운 노동 속에서의 사회주의적 경쟁이라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었다. 논문들과 서한들 속에서 레닌에 의해 표현된 사상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공공 정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인민적 과업과 같은 무언가의 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대회의 2,500명 대표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거의 20개 민족을 대표했고, 그들 중 3분의 2는 러시아 인구의 일하는 수백만 명을 대표하는 산업 노동자들이거나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뒤에는 오직, 유럽의 다른 어떤 민족의 심장이라도 깨뜨렸을지 모를 3년의 어려움 동안 공업과 농업을 작동하게 만든 짧은 경험, 그리고 공장 작업대와 쟁기로부터 직접 나온 수만 명의 남녀가 순전한 필요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당하게 되었던, 지역적, 지방적 또는 국가적 수준에서의 공공 업무의 관리에 대한, 짧은 경험만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수보트니크들의 모범이 있었고, 또 목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무기에서는 열세였던 붉은 군대가, 장비 면에서는 훨씬 우월하지만 정치적 이해 면에서는 절망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국내외의 다른 군대들에 비해 가졌던 이점의 사례도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소비에트 국가의 경제 사업들을 수행하는 문제는 인민의 의식적인 노력을 먼저 자극하고 그 다음 적절하게 활용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었다. 국가 계획의 이론적 장점들 또는 단점들에 관한 어떠한 논설도, 하물며 “소비에트 실험”을 설명하거나, 격찬하거나, 혹은 비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만약 그것들이 공공사업과 사회적 노력 사이의 소련 내에서의 이러한 상호연관성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간에 아무런 가치도 갖지 않는다.

 

사실, 초기 몇 년 동안 공산당과 노동조합의 생산선전은 대체로 그러한 사회적 노력의 형태를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산업을 전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한편, 그동안 대량의 실업자들을 부양하고, 공산품에 대한 농민층의 수요를 충분히 낮은 가격으로 충족시키며, 농산물생산량의 증산을 자극하고, 통화를 안정화하고 국내외 무역을 개선하는 일련의 과제들은 중앙과 지방의 집행 책임을 맡았던 간부들의 정력과 수완을 쥐어짜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24년이 시작될 무렵 가장 심각했던 문제들은 해결되어 가기 시작했다.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5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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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대한 시작(A Great Beginning)』(출판일자 알 수 없음) 영문판은 소련 대외 일군 협동출판협회(Co-operative Publishing Society of Foreign Workers in the U.S.S.R.)가 소책자로 인쇄했다. 본문의 인용문은 소책자 9쪽과 12-3쪽에서 가져온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K. Marx & F. Engels, Correspondence, English edition, 1934, 354.텍스트로 돌아가기
  3. V. I. Lenin, „Kak Organizovat Sorevnovanie“, Works, 3rd Russian edition, Vol. 22, 158, 161.텍스트로 돌아가기
  4. 관련 수치들은 V. I. Lenin, Selected Works, Vol. 13, 432.; Mosk. Gub. Konferentzia VKP(b), 1921, 79.에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Kommunisticheski Internatzional, September, 1919, 670.; May, 1920, 1691.텍스트로 돌아가기
  6. Report of British Labour Delegation to Russia, 1920, 9.텍스트로 돌아가기
  7. Socialist Industry in the U.S.S.R. Victorious, Moscow, 1931, 22.텍스트로 돌아가기
  8. 관련 내용은 1919년 3월의 〈러시아 공산당 제8차 대회〉에서 채택된 러시아 공산당 강령에 실려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Krzhizhanovski, Gorev & Yesin, Chetyre Goda Elektrifikatsii SSSR, 1925, 7-8.텍스트로 돌아가기
  10. Ibid., 8.텍스트로 돌아가기
  11. Vosmoi Vserossiiski Syezd Sovetov, 1921, 265, 272, 276.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역자 주〕 데샤티나는 러시아의 옛 면적 단위로, 1 데샤티나는 약 1.092 헥타르 또는 3,025 평에 해당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