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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과 서독의 연속성, 그리고 그 중심으로서 미국

나치 독일과 서독의 연속성, 그리고 그 중심으로서 미국 총명한 유물론 2 여름


김의진 | 사무위원

    머리말

     1. 나치의 집권에서 미국 독점자본의 보조

    2. 미흡한 전후청산

    결론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머리말

 

서독은 ‘과거사 청산’에 있어 일본과 비교되며 모범적인 사례로 지목된다. 그러나 ‘청산’의 실질적인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는 지배의 연속성을 보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포드와 제너럴포터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기업들은 독일의 부가 소련으로 유출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서독을 전략적 요충지로서 활용하고자 했다. 비록 나치당의 몇몇 인물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다수의 관료와 미국 독점자본의 자회사에서 일했던 적국자산관리인들은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1. 나치의 집권에서 미국

독점자본의 보조

 

독일에서 파시즘의 부상은 흔히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민족적 반감으로 설명된다. 수많은 학자와 논평가들은 ‘파시즘’을 이야기할 때 삼권분립과 민주주의의 말살 등을 열거하며, ‘자유민주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각국의 독점자본이 공황과 각종 경제위기로 인해 폭발 직전에 있었던 노동계급의 불만을 찍어 누르고, 정치와 경제에 대한 통제를 유지 내지 강화하기 위해 고안됐다. ‘자유민주주의’는 점증하는 사회모순을 방치한 채, 파시스트들의 극단주의에 그 어떠한 한정을 가하지 않는 식으로 그들에게 정치적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파시즘이 부르주아 계급에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로 됐던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정치체제의 특성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무솔리니 집권 이전 이탈리아 왕국은 최소한 형식적 민주주의라도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봉기가 당국에 의해 진압당했다고 해도 의회 혹은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지배계급에게 자신의 계급적 의사를 일정하게 관철시킬 수 있었다. 1929년 말 대공황 이후 경제위기에 봉착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공산당에 투표하는 비중이 이전보다 비교적 높아졌고, 노동계급 전체가 단일한 전선, 단일한 대오로 뭉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회경제제도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움직임이 '사회주의화' 혹은 모종의 '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해야 할 필요가 독점자본과 부르주아 정객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됐다. 독점자본가들과 프란츠 파펜과 같은 기성 우익 정당의 정치인들이 히틀러의 집권에 일조한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 따른 것이었다.1 불가리아의 반파시스트 운동가였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파시즘을 가리켜 자본에 의한 노골적인 테러독재라고 말했던 것은 따라서 괜한 것이 아니었다.

 

1933년에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할 무렵,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각국의 독점자본은 사회주의보다 파시즘을 훨씬 더 선호했다. 이들은 소련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에 따른 공업화가 각국에서 혁명을 향한 군중적 열기를 고조시킬 것이라고 우려했고, 반면에 파시즘에 대해서는 “자유와 개인주의의 토템폴(Totem-poles)과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최적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정치적으로, 물리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한 노골적인 반볼셰비키주의자였으며, 파시즘은 점차 모든 나라의 지배계급에게 있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헨리 루스(Henry Luce)가 간행한 타임지는 “나치즘은 … 볼셰비즘에 대한 해독제”라고 표현했으며, 루즈벨트의 전임자였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도 독일의 힘을 소련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겼다.2 결과적으로, 전후 독일에서 군국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고자 했던 자본의 의사가 십분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노동조합과 공산당 등을 탄압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인건비’를 삭감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나치 집권 이후 독점자본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구가했다. 미국 독점자본 역시 나치 독일과의 긴밀한 유착 하에서 연간소득과 총자산을 증대시켰다. 일례로, 1930년대에 심각한 적자를 기록했던 포드의 독일 자회사 포드-베르케는 히틀러 정권의 후원 하에서 연간소득이 1935년의 6만 3,000라이히스마르크에서 1939년에 무려 128만 7,800라이히스마르크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3 이러한 성공은 단순히 독일에서 재무장 강화에 따른 수익성 좋은 계약 때문만이 아니라, 히틀러가 노동조합 등을 제거함으로써 1933년 거래액의 15%였던 인건비를 1938년에는 11%로 삭감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포드-베르케의 총자산도 또한 1933년에서 1939년 사이에 2,58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6,04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 당시 공식적인 환율은 1달러에 2.5라이히스마르크였고, 1930년대 말에 달러 가치는 거의 지금의 7배에 달했다.4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자회사인 오펠 공장 역시 제3제국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보다 더 큰 발전을 거두었다. 1933년에 35%였던 오펠의 독일 내 자동차 점유율은 1935년에 50% 이상으로 상승했으며, 히틀러의 재무장 정책에 따른 영향으로 막대한 수익성을 올렸다. 오펠은 1938년에는 3,500만 라이히스마르크(약 1,4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1년 후인 1939년에 오펠의 총가치는 8,670만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제너럴모터스가 10년 전에 투자했던 양보다(3,330만 달러)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였다. 1939년 무렵 제너럴모터스와 포드는 독일 자동차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했으며,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무기와 장비들을 국방군(Wehrmacht)에게 충분히 공급할 정도로 성장했다.5

 

그러나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최고의 호황을 누린 미국 기업은 IBM이었다. “IBM과 홀로코스트”의 저자 에드윈 블랙에 따르면, IBM의 자회사였던 데호마그는 유대인의 사유재산을 압류하고 최종적으로 몰살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해낸 펀치 카드 기술(컴퓨터의 전신)을 제공했다. 데호마그는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벌써 1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히틀러 정권 초기에 독일 자회사 공장은 미국 IBM에 배당금으로 약 450만 달러를 송금했다. 에드윈 블랙에 따르면, 1938년 말까지 데호마그의 순자산은 기본적으로 1934년 총 투자액 77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2배 가까운 1,400만 라이히스마르크가 됐고, 연간 순자산수익율 16%에 해당하는 23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수익을 올렸다. 데호마그의 수익은 1939년에 다시 한 번 눈에 띄게 증가했고, 그 규모는 4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이르렀다.6

 

나치 독일 시기 미국 독점자본의 투자액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외국기업이 거둔 수익을 더 이상 본국에 송환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들은 독일 자회사들에게 로열티를 비롯한 각종 수수료들을 챙겨갔고, 그로부터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기존 공장들을 현대화하고, 새 공장들을 구매하거나 건설하고, 독일의 채권을 사고 부동산을 취득하는 등 재투자에 나섰다. 일례로, IBM은 베를린-리히터펠데에 새 공장을 건설하고, 슈트트가르트 인근 진델핑 엔에 있는 공장을 확장하고, 독일 전역에 수없이 많은 지점을 설치하고, 베를린의 임대자산과 부동산 등 유형자산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수익의 상당부분을 재투자했다. 독일과 관련된 미국 기업들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히틀러 치하에도 계속해서 확장됐고, 진주만 공습 전까지 미국이 히틀러의 제3제국에 투자한 전체 규모는 약 4억 7,500만 달러로 추산됐다.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은 적국자산관리인을 두었지만, 실제로는 미국 독점자본이 스위스와 같은 제3국을 통해서 관리자들과 임원들을 파견하도록 사실상 방치했다.8 전쟁 기간 중 IBM의 유럽 총책임자이던 네덜란드인 유리안 W. 쇼테(Jurriaan W. Sdwcte)는 사실상 뉴욕 본사에 머물며 네덜란드와 벨기에 같은 나치 점령지의 IBM 자회사들과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에드윈 블랙에 따르면, IBM은 "중립국의 자회사들”, 특히 "독일 및 점령지와 중립국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스위스인이 관리하는 스위스 제네바의 자회사를 통해 유럽을 감시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9 나치 독일은 미국 소유주들의 독일 자회사들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주었고, 더 나아가 오펠과 포드-베르케에 대한 간섭도 최소화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나치 독일은 독일에 진출한 미국 기업 자회사들의 활동을 사실상 용인했으며, 이들의 자산을 보호하는 데에 총력을 바쳤다.10

 

나치 독일과 미국의 밀월은 1941년에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한 이후에도 지속됐다. 비록 미국인 직원들은 일선에서 사라졌지만, 미국에 있는 상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독일인 경영진은 자리를 지키며 계속해서 미국 본사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사업을 이어갔다. 오펠의 경우, 제너럴모터스의 미국 본사가 경영권을 사실상 완전히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기업들이 만들어 낸 전설과 다르게, 나치는 독재적으로 신탁 관리 업무를 제한하지 않았고, 관리인은 외부의 독재정권이 아니라, 1935년에 미국인들 자신이 이사회의 이사로 선택해 고위 관리직으로 임명한 사람들로 구성됐다. 그리고 이들 ‘관리인’들은 이사회의 결정에 사실상 종속되었고, 권한에 있어서 총경영자의 지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적국자산관리인”의 존재는 미국 독점자본이 나치 독일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데서 유용한 장치였다. 포드-베르케와 이게베르펜을 비롯한 독일 자회사들은 전쟁 당시 나치 독일 당국에게 압수당했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직속 기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 독점자본은 이를 빌미로 나치 독일의 불법적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 있었다. 적국자산관리인들은 실제로 외국기업의 재산을 열심히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에드윈 블랙의 말처럼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이윤을 증가시켰기” 때문에 미국 기업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도 헤르만 펠링거(IBM의 자회사 데호마그의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수많은 관리자들과 경영진들이 제자리를 지킨 것은 따라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쟁 당시 포드-베르케의 총경영자로서 나치와 미국 양측을 모두 만족시켰던 로베르트 슈미트 역시 전쟁이 끝난 이후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950년에 다시 제자리로 복귀했고, 196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11

 

나치는 기업 소유주의 국적이나 관리자의 정체성 같은 것들보다 생산성에 더 관심이 많았다. 소련에서 전격전 전략이 실패한 이후로, 포드-베르케 등이 대량으로 생산하는 항공기와 트럭이 점점 더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가 조립라인을 비롯한 포드주의적 생산기법을 도입한 이후로 미국의 기업들은 대량생산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제너럴모터스의 오펠을 포함한 자회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괴링과 슈페어 등 나치 수뇌부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오펠 경영에 급진적인 변화를 주면 생산성이 하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오펠의 생산량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담당 관리자가 계속 일하게 해야 했다. 그들이 미국의 효율적인 생산방법에 가장 익숙했기 때문이다.

 

제너럴모터스와 포드의 경영진과 소유주들에게 누가 독일 자회사에서 관리자로 일하는지, 그리고 조립라인에서 어떤 상품이 생산되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독일 자회사들의 활동이 전쟁을 연장시키고 있을 가능성에도 별로 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과 주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결국 이윤뿐이었다. 미국 기업의 독일 자회사들은 전쟁 중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고, 일례로 디어본의 독일 자회사가 올린 수익은 1939년 12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1940년 170만, 1941년 180만, 1943년에는 21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했다.12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 점령지의 포드 자회사들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가령 포드-프랑스의 경우 1941년에 5,800만 프랑의 수익을 기록했다.13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 독점자본은 독일에서 변함없이 막대한 이윤을 거뒀다. 미국은 드레스덴 등 독일의 유서깊은 역사적 도시들을 폭격하는 와중에도 자국 기업들이 운영하는 공장들에 대해서는 예외로 놓았다. 슈트트가르트 인근의 데호마그 공장에 처음으로 들어간 미군 병사 중 ‘IBM 병사’, 즉 군복무 때문에 일시적으로 회사를 떠난 자들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이 “100% 그대로” 유지됐고, “모든 도구와 기계가 잘 보존되어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을”만큼 “아주 좋은 상태”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위급 고문을 지낸 버나드 바루크(Bernard Baruch)는 심지어 독일의 ‘특정 공장’들을 폭격하지 말거나 아주 가볍게 폭격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14 나치 독일은 1945년에 패망하기 전까지 미국 독점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했으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무수히 희생당한 것은 다름아닌 민중들이었다.

 

2. 미흡한 전후청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독점자본과 나치 독일이 협력했다는 사실은 은폐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의 형성에 맞서, 서독지역을 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가장 무엇보다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는데, 공업화 수준이 높았던 루르 지방과 부유한 자르 지역, 바이에른, 북해 항구도시들에 미국 기업들의 자회사가 진출하여 있었던 것과 관련됐다.

 

나치 독일과 협력했던 제너럴모터스 등 미국 기업들은 단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폭격으로 독일 자회사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받기까지 했다. 제너럴모터스는 1941년에 자회사인 오펠에 투자한 금액 전체에 대한 연방세를 탕감받았고, 그 절세액은 약 2,270만 달러에 달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제너럴모터스는 1948년에 기존에 받은 세금우대보다 2,100만 달러나 적은 18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납부한 채 독일 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었다. 포드-베르케 역시 1943년에 입은 약 800만 달러의 손실을 공제받았고, 1954년에는 적절한 금액인 55만 7,000달러에 공식적으로 회사를 되찾았다.15

 

전후 나치 독일의 파시스트적 유산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던 것은 본질적으로 계급관계의 반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약진과 함께, 서독지역에서는 반파시스트 분위기뿐만 아니라 반자본주의적 풍토까지 형성되었다. 헤센 주 선거에서 보듯 노동조합과 사회주의당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부활했고, 나치에 대한 독점자본의 부역행위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사협의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의 운영이 각지에서 나타났다. 노사협의회의 일원 중 상당수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오펠의 노동자 협의체에서는 제너럴모터스가 1948년에 공식적으로 오펠 경영을 재개하기 전까지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과 서독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공장운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후 서독지역에 생겨난 ‘노사협의회’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노동자-병사 평의회와,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에서 형성된 ‘노사협의회’를 떠올리게 했다. 미국 국무부 소속 ‘노사문제 전문가’ 루이스 와이즈너는 상관에게 “독일의 노사협의회는 지난번 전쟁[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혁명적 변화를 시도했던 기관”이라고 경고하며, “쓸데없이 독일 노동자들에게 도입하면 그들의 혁명적 전통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리라고 주장했다.1617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서독지역에서 군정사령관까지 지냈던 루시어스 클레이(Lucius Clay)18 역시 경제부서의 국장인 윌리엄 드레이퍼와 당시 독일 OSS 책임자로 있었던 앨런 덜레스의 조언에 입각하여 독일의 보수적인 자본가들이 노사문제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19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과 제1차 세계대전이 각각 파리코뮌과 10월 혁명을 가져왔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사회주의 혁명에 생명을 불어넣어줄까봐 두려워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베를린에서 미국은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소련이 베를린 서부에서 철수하기 전에 노동조합의 설립을 보장하고 떠난 이후 도시 전역에서는 노동자들의 의사기구들이 우후죽순으로 탄생했으며, 1945년 여름 무렵에 이러한 기구들은 ‘독일자유노동조합연맹(FDGB)’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FDGB는 경제투쟁뿐만 아니라 정치투쟁 영역까지 담당했고,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조직이었다. 미국·소련·영국·프랑스 4개국의 점령구역에서 FDGB는 나치에 부역했던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했고, 작업장평의회에 경영권한을 부여하며 노동자들의 생산경영을 가일층 촉진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는 소련이 관할하던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서베를린에서도 공장의 세포조직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조직화했고,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20

 

노동운동의 통일을 향한 요구는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1946년 여름 무렵, 4개국 점령지역에서 모인 노동자들은 최초로 노동운동의 통일에 관한 회동을 가졌고, 비록 미국의 압력으로 공식적인 결정서를 발표하지 못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정기회의를 가지며 통합조건을 조율했다. 미국 정부와 어용노조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규모의 통일적 노동조합을 만들고 국제노동운동과 연대할 것을 촉구했던 조합원들의 요구는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미국은 결국 1947년 5월에 세계노동조합총연맹(WFTU) 집행부가 4개국 점령지와 베를린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에게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참석할 것을 초청했을 때 이를 수락해야 했다. 세계노총은 대회에서 독일의 회원자격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정기적인 업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지만, 동시에 전국적인 노동조합 본부를 설립해야만 가입을 실질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독일 전역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은 세계노총의 결정에 환영하며 1948년에 열릴 전국적인 회의를 위해 준비위원회를 만들 것을 결의했다.21

 

이러한 상황에서 서독의 노동계급과 미국 사이에서 계급투쟁은 한층 더 심화됐다. 서독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인 루르 일대와 미국 점령지의 주요 산업도시인 만하임, 비스바덴, 칼스뤼헤, 뉘른베르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크게 불어났고, 조업 중단과 파업이 도처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노동조합들은 지방정부에게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진하고, 노동문제에 관해 공동으로 법안을 낼 것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심지어 미국 점령지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온건한 성향의 노동조합원들까지도 헤센과 바덴-뷔르템부르크, 브레멘 주 정부를 몰아세우며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현지의 어용인사들을 통해 노동운동을 ‘관리’하려던 책략은 유효한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미국은 결과적으로 세계노동조합총연맹 내부에서 영향력을 가하려는 기존의 기만적인 술책을 버려야 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소련 점령지에서의 노동운동이 뚫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독일 전역에서 노동운동의 통일이 미국의 영향력을 앗아갈 것이라고 여겼던 데에서 기인했다.

 

1947년 말과 1948년에 이르자, 독일 내부의 노동문제에 관한 미국 당국의 정책은 근본적인 전환을 겪었다.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미국-소련 협력’이라는 틀 하에서 급진적인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소련의 입지가 서방권에서 개선되고 있었다는 측면을 우려했다. 노동운동의 급진화를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소련과 독일 동부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서독지역에서 어용노조의 비중을 강화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미국은 베를린에서 UGO(독립노동자반대파)를 지원하며 기존의 FDGB와 대립구도를 형성했고, 온건한 성향의 조합원들 사이에 형성된 사회주의통일당(SED)에 대한 반감을 활용하여 노동운동을 성공적으로 분열시켰다.22

 

미국 독점자본은 서독지역에서 노동계급의 역량 증대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주요 산업체에 대한 국유화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개혁이 가속화될수록, 통일된 독일이 ‘소비에트화’될 것이라고 인식했다.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도 그 당시 독일 북서쪽의 점령구역에서 노동조합, 노동자사회민주당 등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국유화를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이 하나로 통일될 경우 미국 기업의 독일 자회사들까지도 국유화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됐다. 서독지역에서 민중민주 제 세력의 부상을 막기 위해 미국은 반파시스트들과 마지못해 협력하는 시늉을 하면서, 새로운 노동조합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노사협의회가 공장에서 발언권을 내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노사협의회의 압력으로 쫒겨났던 많은 나치 시절의 경영자들은 미국 독점자본과 점령지 당국 덕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독일의 분단이 공고화될수록, 나치 청산은 요원해졌다. 미국 독점자본은 스스로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사수하기 위해 기층 군중으로부터 제기됐던 각종 개선 조치를 빈번히 막아섰다. 통일된 독일 하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성장이 용인되고, 자유시장의 가치에 반하게 될수록 독일에서 자국의 헤게모니가 악화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미국은 분단을 선호했다. 그리고 독일의 분단을 선택할 경우 미국은 진보세력과 반파시스트, 즉 어떤 식으로든 반자본주의적인 독일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실제로 1940년대 말 독일의 분단이 기정사실화된 이후 기존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일했던 관료들이 복귀하여 행정기관의 요직을 차지했고, 민중민주 제 세력의 일련의 요구는 묵살당했다.

 

전후 서독의 ‘과거청산’이 불완전했다는 것은 주요 정치인들의 이력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종전 이후 ‘경제기적’의 설계자로 알려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이미 나치 독일 때부터 국가의 개입을 반대하며 기업의 이익을 옹호했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며 기존 경제질서의 연속성을 옹호했다. 서독의 초대 수상인 콘라트 아데나워 역시 나치에 투옥된 전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독일의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에 해당됐다. 서독의 재무장관과 총리를 역임하면서 아데나워는 나치 독일에 부역했던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을 보호했고, 악명높은 전쟁범죄자들을 포함한 모든 나치 잔당을 보호해주었다. 미국은 반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아데나워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인들을 지원했고, 서독의 기본법에는 가톨릭교회가 1933년에 히틀러가 맺은 협약으로 얻은 특권들이 상당수 유지됐다.

 

 결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독의 과거사 청산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미국 독점자본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미국-소련 양국 간 냉전 구도라는 복잡한 배경 때문이었다. 나치 정권에 협력해 막대한 이윤을 얻었던 포드, 제너럴모터스, IBM 같은 미국 기업들은 처벌은커녕 오히려 전쟁 피해를 보상받고 세금 감면 혜택까지 누렸다. 이들 기업은 나치 시절의 경영진을 그대로 유지하며 서독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서독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고자 했고, 나치에 협력했던 세력을 척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경험과 능력을 활용해 안정적인 반공주의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 사회에서 개혁 요구를 억누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전후 서독에서는 반파시즘과 함께 반자본주의적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노동자들은 공장의 운영에 참여하는 등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독점자본과 서독의 자본가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사회주의 혁명을 낳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미국은 독일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선택을 함으로써, 나치 시절의 관료와 경영진들이 핵심 요직에 복귀하는 것을 방조했다. 결과적으로, 서독의 '과거사 청산'은 군중의 개혁 요구를 억누르고, 자본의 이윤을 보호하며,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미흡하게 마무리됐다.<>

 

2025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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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히틀러의 집권 과정을 논함에 있어서는 독점자본의 역할뿐만 아니라, 당시 공산당이 범했던 전략전술적 오류도 마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노경덕(2024)의 주장처럼, 스탈린이 '사회파시즘'에 동의했고, 따라서 독일 공산당을 모험주의로 내몰았다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지만(스탈린은 이미 1930년부터 이미 소련의 경제학자인 예브게니 바르가의 연구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임박한 '파국'이 도래했다는 부하린 등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독일 공산당이 상층통일전선과 하층통일전선의 유기적 결합을 꾀하지 못했던 측면은 분명히 존재했다. 독일 공산당은 하층통일전선을 일면적으로 내세우며 사민당 지도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공동대오를 조직할 수 없게 됐다. 독일 독점자본은 이미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히틀러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합의가 되어있던 상황이었으며, 이는 나치당이 집권 이후 빠른 속도로 공산당과 노동운동 일반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있어 중요한 배경이 됐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찰스 하이엄에 따르면 후버는 “공산주의 혁명이 이루어지는 동안 러시아의 광활한 유전을” 상실했고, 따라서 소련에 대해 “어떻게든 부숴버려야만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S. H. Lindner, Das Reichskommissariatfur die Behandlungfeindliches Vermogensim Zweiten Weltkrieg: Eine Studie zur Verwaltungs-, Rechts- and Wirtschaftsgeschichte des nationalsozialistischen Deutschlands, Stuttgart: Franz Steiner Verlag, 1991, 121.텍스트로 돌아가기
  4. J. R. Pauwels,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서울: 오월의봄, 2017, 41.텍스트로 돌아가기
  5. R. Billstein et al, Working for the Enemy: Ford, General Motors, and Forced Labor during the Second World War, NYC & Oxford: Berghahn Books, 2004, 24.; E. Black, IBM and the Holocaust: The Strategic Alliance between Nazi Germany and Americas Most Powerful Corporation, London: Dialog Press, 2009, 101-2.; S. H. Lindner, 1991, 121.텍스트로 돌아가기
  6. E. Black, 2009, 76-7, 86-7, 98, 119, 120-1, 164, 198, 222.; R. Billstein et al, 2004, 17.텍스트로 돌아가기
  7. C. Higham, Trading with the Enemy: An Expose of The Nazi-American Money Plot, 1933-1949, Bloomington: iUniverse, 1983, xvi.텍스트로 돌아가기
  8. 헨리 포드의 아들인 에드셀 포드는 최신 통신장비를 통해 포드사의 독일 자회사인 포드-베르케와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ITT는 미국의 기업인 트랜스라디오와 RCA, 그리고 독일의 기업인 지멘스, 텔레푼켄과 협력하여 포드사에게 최신의 통신장비를 제공했으며, 에드셀 포드는 그 덕택으로 쾰른의 포드-베르케와 프랑스에 있는 포드 공장들에 대해 실질적인 운영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E. Black, 2009, 339, 376, 392-5.텍스트로 돌아가기
  10. 독일의 역사학자 한스 헬름스(Hans G. Helms)가 말한 것처럼, 나치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집권기 내내 포드나 오펠의 소유권에 미세한 변호를 주려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포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쾰른에 소재한 포드-베르케의 주식 52%를 보유했고, 제네럴모터스는 오펠의 단독 소유주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1. J. R. Pauwels, 2017, 311-2.텍스트로 돌아가기
  12. K. Silverstein, “Ford and the Fuhrer”, The Nation, January 24, 2000, 12, 14; S. Reich, The Fruits of Fascism: Postwar Prosperity in Historical Perspective, NYC: Ithaca, 1990, 121, 123; S. H. Lindner, 1991, 124-7.텍스트로 돌아가기
  13. R. Billstein et al, 2004, 116; K. Silverstein, 2000, 15-6.텍스트로 돌아가기
  14. J. R. Pauwels, 2017, 329.텍스트로 돌아가기
  15. 같은 책, 331.텍스트로 돌아가기
  16. C. Eisenberg, "Working-Class Politics and the Cold War: American Intervention in the German Labor Movement, 1945-49", Diplomatic History, 7 (4), 1983: 286.텍스트로 돌아가기
  17. 이 당시 서독의 노동문제를 관장했던 미국 당국자들은 크게 두 가지의 경향으로 나뉘었다. 모티머 울프(Mortimer Wolf)가 ‘상향식’ 접근을 옹호하며 선거를 통해 노동자들을 회유하고 독일 공산당(KPD)으로부터 우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루이스 와이스너는 정반대였다. 와이스너는 선거가 노동자들의 공장운영을 보장함으로써 자본의 근본적 이익을 침해한다는 입장을 피력했고,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에게 막대한 정치적 기회를 안겨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울프와 와이스너로 대표되는 두 가지 경향 중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후자였으며, 울프는 소위 ‘민주적 선거’에 대한 청사진이 실현되지 않자 1946년에 일선에서 물러났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8. 루시어스 클레이는 냉전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을 설계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조지 캐넌(George Kennan)을 1946년에 독일에 초청한 장본인이기도 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9. C. Eisenberg, 1983, 288.텍스트로 돌아가기
  20. Ibid., 293-4.텍스트로 돌아가기
  21. Ibid., 295.텍스트로 돌아가기
  22. UGO에 대한 미국 군정의 지원은 전직 광고업자였던 조지 매클러스키(베를린 인력부 국장)와 전직 FBI 요원이었던 테드 가디너(베를린 노동관계부 국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의 행보에 관해, 루이스 와이즈너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두 사람 모두 독일어를 몰랐고 노동조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노동자반대파(UGO)가 선거에서 이기거나 FDGB에서 분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UGO를 돕기 위해 밤낮으로 전념했다.” 가디너와 매클러스키는 UGO의 지도부에게 노동운동의 분열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하달했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1948년 4월에 열린 선거에서 UGO는 베를린 시에서 수많은 노동조합들을 장악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