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보유(補遺) 〔 上 〕」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가을호
한동백 | 집행위원
L✬ R
도입 보유(補遺)
§ 1 철학적 비평의 사회경제사적 본성 I || 백가쟁명식으로 출현하는 정신의 외화의 그 특유 현상형태를 띠는 각이한 철학적 비평에서 최종 심급은 무엇인가?
철학은 그 자체, 마음·정신의 한 고유한 양태이다. 본디 마음·정신은 동물 또한 지녔다. 즉, “진화의 비교적 늦은 어느 단계에서 활동은 내면화될 수 있다.”1 하지만 노동으로써 만색(萬色)의 생동하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만 이 내적인 것─마음·정신─은 자신을 철학적 사유로 정제할 참된 추동원(推動原)을 함유한다. 이 추동원은 영장류의 그 엄밀한 인간화가 진전된 이래 원시적인 노동부터 역사적인 최고 발전 형태의 노동에 도달하기까지 변화를 겪었는데, 그것은 노동으로써 갱신된 욕구를 다시 노동 자체의 변혁으로 어떻게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와 직접 관련된다. 즉, 부단히 갱신하는 욕구는 그 충족의 도정에서 전문화된 분업, 그리고 생산적 과업 자체의 분화─농업, 목축업, 후진적인 어업만이 아니라 광업, 임업, 야금업 등─, 무역의 물질적 발달을 가져왔다; 이는 인간 사이의 번잡해진 사회경제적 제 관계에의 의지적이고 도덕적인 척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척도는 그 자신에 당위를 주입할 특수한 형태의 정신적 고도화의 향도였다. 예컨대 크세노폰의 『가내 경제(Oikonomikos)』는 경영에 관한 소크라테스와 크리토불로스(Kritoboulus)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현명한 노예주는 훌륭한 노예를 기르며 재산을 효과적으로 불리는 반면, 그 반대는 노예를 혹사하여 “재산을 거덜[냄]”을 경고한다.2 이는 철학적·도덕학적 대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 노예제하 노예주가 가내 경제를 높은 수준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갱신된 욕구 및 그를 둘러싼 제 관계 속에서 정신의 피규정적 개진의 양상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이 양상은 추상적인 순수 사유로 증류되었고, 직접 생산자들과 정신적 지배자들은 그것을 물질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절대적으로 자립하는 것으로서 찬미하였다. 이 절대적 자립성은 순전한 가상3이나, “사변적 형이상학은 종교적 세계관의 세속화로서 형성되었으며, 과학적 탐구의 길을 열어 주었다.”4 엥겔스는 사회경제적 제 관계의 발전과 정신의 상호 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대마다 노동 자체는 달라졌으며, 그보다 완전하게 되고 보다 다양하게 되었다. 농업이 사냥과 가축 기르기에 추가되었으며, 다음에 실잣기, 옷짜기, 금속 작업, 도기 제조, 어로 등이 추가되었다. 교역과 산업에 따라, 마침내 예술과 과학이 나타났다. 부족들로부터 민족들과 국가들이 발전되었다. 법률과 정치가 발생했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정신에서 인간적인 것의 환상적인 반영이 종교가 발생했다. … 문명의 신속한 발전의 모든 장점은 정신, 두뇌의 발달과 활동으로 돌려졌다. 인간들은 그들의 활동을 그들의 필요─어쨌든 정신에 반영되며, 의식하게 되는 필요─대신에 그들의 사유로부터 설명하는 데 익숙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특히 고대 세계의 몰락 이래 인간 정신을 지배했던 관념론적 세계관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발생했다.”5
구 소련의 심리학자 A. N. 레온티예프(Leont’ev)는 “동물이 ‘도구’를 사용하는 활동은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코 사회적 과정의 성격을 갖지 않고, 집단적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그 활동 자체가 그것을 수행하는 개체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지배하지도 않”6는다고 하였다. 동물적 반사 작용의 이러한 물성 탓에 동물 욕구는 인간 활동이 개입되지 않는 한 갱신되지 않으며, 동물 군집을 지배하는 제 관계는 자연과 직접적 일치 속에서 고요하게, 자기 궤도의 조금의 이탈도 없이 회전할 뿐이다. 욕구가 극히 한정되어 끈의 분화를 추동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새로운 그 끈이 몰아치는 신비와 파열이 없다면, 관념을 자기의 자립화로 밀쳐낼 포텐츠는 존재할 수 없다. “정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 진화의 진정한 역사는 이전에는 단순했던 삶의 통일성 속에서 ‘분열(split)’이 일어나는 역사로 나타난다.”7 그러므로 동물은 쟁론하고 비평하지 않으나, 노동의 신체적 기체(基體)인 인간은 쟁론하고 비평한다. 즉, “이 분열의 시작은 동물의 원시 정신을 낳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적 삶에서 그것이 온전히 표현되었다.”8 헤겔에 의하면 동물의 욕구는 자연에 외적으로 마주하는 자립적인 대자적 의식으로서 있지 않고, 단지 자연과 직접적 일치를 이루며 비자립적인 즉자성을 띨 뿐이다.9
내적인 것 또한 외적인 것과 대립물의 통일이다─그 부정태(否定態)는 세밀한 탐구를 요하는 뇌신경의 생화학적 작용, 단순하고 복잡한 신체 활동─손짓·발짓·몸짓, 수다한 상징적 행위 등─, 말과 글까지를 아우른다. 정신은 이 신체적 힘의 총체로 형태 변화될 때만 개시된 규정력이고, 이 힘만이 활동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것의 활동성은 오로지 물적-감성적 매개·연관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정신은 또다른 이념적 타자를 자신의 무한한 거울로 삼아, 그 속에서 자기로 복귀함으로써 자신의 대자적인 ‘원상(原象)’─자기의식─을 빚는데, 타자의 이념 또한 오로지 역사적이고 감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확증한다. 선사시대에 이는 무리의 상과 완전히 일치했다. 무리의 상은 그것의 자연사(自然史)적인 원본으로서는 순전히 협동 속에 놓고 구해지며, 아무런 분란을 유발하지도 않는 채로 자족했다. 하지만 이 빚음은 이제 현실에서 생사를 건 지배와 예속을 거쳐 스스로를 관철한다: 가장 잠재적으로는 원시 공산제하에서의 씨족 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 동일한 형태로서 내려오는 것으로서는 적대적 계급으로 분열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의 계급투쟁이 그것이다. 두 질점에서, 인류와 자연의 투쟁은 보편사적 지위를 가진다.
인류는 자연과의 투쟁, 그리고 서로 적대적인 현존 계급 간 투쟁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리를 인식해 나가고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감성적 폭력으로서의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추진기관(推進機關)을 창조해 낸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다른 또 하나의 자기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펴나가는 운동”10, 즉 “일자의 행위(das Tun des Einen)”11가 “모름지기 자기의 행위이면서 또한 못지않게 타자의 행위라고 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11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이념은 타자에 규정 작용을 가하며, 또 타자로부터의 자기 인식─자기에 함유된 진리에 관한 더욱 확장된 이해를 꾀하고, 타자가 자기를 빚는다는 점에서는 이념과 그 타자의 이념의 동일성은 쌍방을 향한 힘이기 때문이다; 즉, “이 타자도 역시 자립적이며 동시에 그 자체의 결집력을 지닌 것이어서 그 속에서는 바로 그 타자 자체의 힘을 입지 않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13 헤겔에게 벌써, 인식주체로서 개인에의 데카르트적 세계상의 한정성은 극복된 것이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정점에 달하는 자기의식의 역사는 생사를 건 투쟁 속에서만 진리와 일치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투쟁은 개개인의 고립된 지성에서가 아니라 인류의 집체적인 상호 투쟁과 인정의 역사, (그의 관념론적 표현으로) 세계영혼(weltseele)의 차원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넘나드는 생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자연은 본디 자기 운동하는 〈총체성의 사유〉의 부정태이고, 그것이 이 사유의 부정태인 만큼, 자연은 이 사유를 담지하고 있는 “표면(oberfläche)”으로서 실존한다. 표면으로서 자연이 머금은 이 보편성이 세계영혼이며, 헤겔 학설에서는 이 세계성이 제 특수자의 개별적인 지향을 조정한다.
헤겔에게 그 여정의 출발은 〈자연의 첫 번째 포텐츠(Die erste Potenz der Natur)〉로 묘사된다. 피히테의 『자연법의 토대(Grundlage des Naturrechts, 1796)』에 대한 체계적인 비평인 『인륜성의 체계(System der Sittlichkeit14, 1803)』에서 그는 그것을 “직관으로서의 자연적 인륜성. 완전한 무차별성 또는 개념이 직관에 포섭되어 있는 것; 즉 본래의 자연”15이라 썼다. 이 단계에서 자연의 보편성은 “개별 안에 전적으로 함몰”되어 있는데, 이 함몰은 감정(gefühl)이고, 감정은 그에 의하면 “실천적 포텐츠(praktische Potenz)”이다.16 “분리의 감정은 욕구이며; 분리의 지양태인 감정은 향유이다(Das Gefühl der Trennung ist das Bedürfnis; das Gefühl als Aufgehobensein derselben der Genuß).”17 국가의 탄생, 인륜적 감정의 고양에서 추상적이고 시초적인 계기적 지위에 놓일 이 인간 욕구와 향유는 욕구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사적으로 인류가 자연에 가하는 주체적 포텐츠의 증대로써만 참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증대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지양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이를 위한 기초는 노동이다. “노동 속에서 욕구는 [욕구의 충족과 함께] 소멸되어야 할 대상을 연관에서 분리시키고, 그것을 욕구하는 것과 관계지어진 것으로 설정”18한다. “욕구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한, 양자[욕구와 그 대상]는 이 관계 속에 존속하며, 휴지(休止) 상태에 있으면서, 단지 관념적으로만 지양”8된다. 즉 노동은, 욕구가 그것 충족의 완료에 이르러 소멸하고, 머지않아 결핍 속에서 동일한 욕구가 재생하여 다시 이를 일회적으로 충족하고 또 그러한 부정을 끊임없이 요구·지향하는 이 동물적 욕구 특성의 지양태이다. 노동으로써 욕구는 자신이 미래에 다시 한번 그 충족을 요구할 사태를 관념적으로 대비(=지양)하여 욕구되는 것을 축적하는 능동성으로 이행한다. 이제 “욕구는 그 소멸 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며, 대상은 소멸됨 속에서도 존속한다.”20 “노동은 관계, 보편성, 양자의 일자존재(Einssein)로서의 이러한 실천적 의식”이며, “그것은 또한 그 안에서 양자가 대립적으로 관계를 맺고, 분리된 채로 존속하는 그러한 중심 존재(Mitte sein)여야 하는데, 이로써 노동 그 자체는 영속적인 실존을 지니며, 또 하나의 사물[로 된다].”8 노동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잇는 실천적 교량이다. 이 도정 없이는 인간 욕구는 단지 실재성 없는 관념성, 즉 더 높은 총체성 속에서 자기의 자립성을 잃고 계기로만 작용하는 상태로서만 서 있을 따름이다. 이는 비록 상호 적대적인 세계관 속에서지만, 레온티예프가 욕구와 관련하여, 동물적 행위 및 반사 작용과 인간 활동성의 본질적 차이를 해명한 것에 밀접해 있다.
이 지양의 도정에서 헤겔은 말(rede)이 가산(familiengut), 자식(kind), 도구(werkzeug) 순으로 정립됨을 체계적으로 해명한 바 있다. 이 연계 하에서 헤겔에게 감정은 데카르트적 전통에서─피히테까지 계승된 바로 그것─취급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순수 개인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특수자로서, 특수자로서의 자연 및 개인과의 대립적 교호 작용 속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에게 “주관성과 객관성의 분리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감정은 그 자체가 스스로를 총체성으로 드러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포텐츠들의 총체성이 되어야 한다.”22
말은 그 포텐츠의 전개에서 특수자들인 타자 사이를 연결한다. 말은 개별 혼을 에테르와 같은 객관적인 것으로서 물체성으로 표지해 주는데, 이는 “노동하는 주체의 권력 안에 있으며, 노동하는 주체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고, 마련되고 가공”23되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도구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이라는 표지는 “개념에 따르면 실제적이지만 또한 그 물체의 본질은 직접적인 소멸이고 그 현상은 나타남과 소멸함의 직접적인 얽힘인 그러한 관념성을 지닌”17 것이다. 그러므로 이 “중심은 지성적이고 주관적이며 지성적 개인들 안에 존재”하지만, “그 물체성에 있어서는 객관적이다.” 즉, 도구의 물질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개인의 주관성에 압도되어 특수한 개인의 지성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그러한 객체적 전달의 중심으로서 설 수 없다. 하지만, 말이란 개인의 지성을 표현하면서도 그 지성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성을 지닌 물체성으로서 현존한다. 말은 비로소 특수자 사이의 집체적이고 공동체적인 연계를 불러온다.
헤겔은 말의 총체성이 다음의 세 가지 “포텐츠의 형식들로 존재한다”25고 썼다: “ℵ. 자연 또는 내적 동일성(der Natur, oder der innern Identität)17 … ב. 개념 아래로 포섭된 말의 직관(Die Anschauung der Rede unter den Begriff subsumiert)27 … ג. 육체적 표시의 객관성과 표정의 주관성을 통합한 것인 발성어(Die tönende Rede vereinigt die Objektivität des körperlichen Zeichens und die Subjektivität der Gebärde)28”의 형식이다. 말의 첫째 형식은 “표정, 안색과 그 총체 그리고 눈의 자극”25인데, 이것들은 “자신이 지닌 객관적인 것의 관념성도 없고 … 자신의 고유한 물체성도 없다.”17 즉, 이 형식은 개별 혼을 매개로 한 이념의 자기 현현으로서의 사유의 담지자로서 물체성이 될 수 없고, 다만 “객관성의 형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17인 그러한 물체이다. 왜냐하면 이는 개인의 지성 또는 의지로 대표되는 주관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의 둘째 형식은 비로소 “관념적 본성[사유]이 개념 안에 정립”되어 있는 것으로서 출현한 것으로,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물체를 가진다.”17 그런데 이 “질료 자체”는 “그 실체적 내면성과 대자존재에서는 전적으로 무화되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관념적”인데, 헤겔은 그 대표적인 것을 기호(Zeichen)라고 한다.33 헤겔은 그것을 또한 육체적 징표(körperliches Zeichen)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신체 기관으로 직간접적으로 형상화되는, 그리고 그 기관의 힘으로 완성되는 객관적이며 고정적인 지시체(指示體)를 뜻한다. 기실, 기호는 자립적인 것으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띠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고유한 의미를 독자적으로 지니는 것으로서의 자신이 무화되어 있다는 점으로써, 즉 자신의 내적 무의미성으로써 그러한 결합[의미]을 표현”34하는 게 기호이다. 기호에서 각 형태소는 자립적인 의미를, 또는 비자립적인 의미를 띤다고 취급되지만, 실은 각각이 최소 단위의 단일 음절의 기호로 분해되었을 때, 그 분해의 산물은 오로지 자신의 무의미성을 전제한 속에서 타자와 부정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말의 포텐츠에서 그 마지막 형식은 발성어이다. “발성어는 육체적 징표의 객관성과 표정의 주관성을 통합한다.”35 하나의 의미있는 단위로서 형태소는 발성어와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성어의 현존은 규정적인 언어 일반의 개별적인 현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발성어는 모든 무규정성을 분절시키고 확립시키는 절대적 개별성의 육체성이고, 바로 이 육체성에 의해 직접 절대적이라고 할 승인이다.”17 내가 보건대, 발성어의 정립은 노동의 성립과 함께,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아주 강력한 요소의 하나이다. 헤겔에 의하면 “자연은 지성 속에서 절대적 고독에 잠기게 되는데, 이런 고독이 동물에게는 결여”해 있으며, “동물은 고독을 자기 안으로 환수하지 않고, 자신의 음성을 이러한 고독 속에 존재하는 총체성으로부터 내지 않으며, 그 음성은 공허하고 총체적이지 못하고 형식적인 것이다.”37 동물의 ‘말’(=동물적 음성)은 기껏해야 자신의 욕구, 자신의 ‘애절함’을 순전히 자연적 감각 지각의 형식에 따라 표현될 뿐이다. 헤겔은 그것에서 지성적 주관성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으로 〈죽음에 처할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동물의 울부짖음〉을 예로 드는데, 이는 동물의 ‘말’ 중 가장 발달한 것이다.38
도구에서 완성된 말로 이행하는 이 변증법은 헤겔의 체계 기획과 『엔치클로페디』 「정신철학」에서 점진적으로 언어(sprache) 일반으로 편제되어 나간다. 예나 시기 자신의 체계 기획에서 그는 언어를 동물 유기체에서 관념성이 자기 실재화를 펼쳐 나감에 있어 그 중심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의식의 현존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소멸한다. … 음성의 순수한 발성 요소인 모음은 발성기관이 그 자체의 분절을 그 차이로 드러내는 식으로 스스로를 구별한다. 이 순수한 발성적 요소는 약음(約音), 즉 단순 발성의 실제적 억제로써 중단되며, 그로 인해 각 발성은 무엇보다도 그 자체 의미를 지닌다. 노래에서 단순 발성 차이는 그 자체 규정된 차이가 아니라, 오직 앞과 뒤의 발성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소리로 구조화된 언어는 모든 소리가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즉 그 안에 이름이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의 관념성이 존재하며, 동일한 것의 직접적인 비존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목소리이다.”39
세 번째 체계 기획에서 언어는 “존재로의 복귀”로서 “이름을 부여하는 힘(Nahmengebende Kraft)”으로 취급된다. “언어는 내적인 것을 존재자로 정립하는 힘”으로, 예를 들어 사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사물을 자신의 정신에 내속시킨다.40 언어는 외적 사물에 정신의 내면성을 외적인 것으로서 부착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정신이 수행하는 최초의 창조력”41이다. 헤겔이 “개별적인 인간 존재로서 개인 안에서 절대적 사고를 통해 성취되는 자기 인식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어는 사고가 자기인식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는 요소들 속에서 외적 표현의 특권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42 “사고는 바로 언어 속에서, 언어를 통해서 자기 소외의 모든 순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다시 한번 본래의 상─타락하기 전의 상”43을 재수복한다. 이 점에서 헤겔에게 언어는 유한한 정신을 뛰어넘는 무한한 정신으로서 철학적 정신에 있어 활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그의 학설에서 감정, 의지 그리고 욕망을 뿌리로 지닌다.
『정신현상학』에서 언어는 벌써 감각적 확신에서 “보편적인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통찰된다. 예컨대 “[우리는] 감각적인 것을 표명할 때조차 이를 보편자라는 뜻으로 언표한다.”44 즉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이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다(es ist)라는 경우에도 존재 일반(das Sein überhaupt)을 말”45한다. “이때 우리는 비록 보편적인 이것, 혹은 존재 일반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보편자를 언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46 언어의 물체적 매체성은 『정신현상학』에서 자연적 의식(=감성적 의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언어는 현상학적 지의 전 도정을 매개하는 중심, 즉 “지성들 사이를 잇는 중심, 로고스이며 지성들을 이성적으로 묶는 끈(das vernünftige Band)이다.”47 “이런 점으로 볼 때 결국 언표될 수 없는 것(das Unaussprechliche)으로 불리는 것이란 오직 비진리이며 비이성적인 것”48일 따름이다. 『엔치클로페디』 「정신철학」에서 음절화된 소리(artikulierte Ton)인 낱말(Wort)은 “사상(思想)에 의해서 생명이 불어넣어진 현존재”인데, “이 현존재는 우리의 사상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49 “우리가 우리의 사상에 대해서 대상성, 따라서 외재성이라는 형식, 즉 우리의 내면성과 구별되어 있는 존재라는 형식을 부여할 때만, 더구나 동시에 최고 내면성의 각인을 지닌 그러한 외재성의 형태를 부여할 때만, 우리는 우리의 사상에 관하여 알게 되고, 또한 명확한 현실적 사상을 가진다.”8 철학은 순전히 머리의 내면이 아니라 외면적인 것, 즉 말과 글로써 내면적인 것이 외화되었을 때 실재적인 규정을 가진다. 철학은 그 사고 작용과 형식에 있어 언어에서 시작되고, 언어에서 죽는, 언어의 뒤범벅된 언어의 최고 산물이다. 언어는 도구로서, 의욕하는 것을 기호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취하고자 하며, 그 취함에서 전체와 부분이 복잡하게 엮여 있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본질적 사유가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은 언어에 스며 들어간 의욕을 잊어버릴 수 없다. 헤겔이 일생 동안 철학을, 실증과학의 제 문제에 관한 해소를 본유한 것으로서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함은 이와 관련된다.
헤겔 학설은 그 체계 형성에서 약 30년의 세월을 거쳤다. 그간 그의 학설에서 인간의 욕망, 감정, 주관 정신의 형식들─감각 및 오성·직관·표상·사유─그리고 말·글의 규정 순서가 변화를 겪었을지라도, 인간의 욕망이 심리적 작용과 언어의 필연적 계기임은 『엔치클로페디』의 「정신철학」에서도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 체계에 편제된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의 첫 번째 계기인 욕망(begierde)은 충동(trieb)으로서 출현한다. 욕망은 “사유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자신의 충족을 추구하고자 하는 외재적 객체”의 지향으로 되어 있는 한 충동이다.51 충동이란 “자신과 동일한 것이 자신 안에 모순을 지니고,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스스로와의 동일성의 감정에 의해서 충족되고, 마찬가지로 이와 반대되는 내적 모순의 감정에 의해 충족된 곳”, 즉 이 모순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모순을 지양하고자” 출현한다.8 충동으로써 충족되는 “욕망은 그 내용 측면에서 볼 때 이기적인 것처럼, 그 충족의 측면에서는 전적으로 파괴적”인데, 왜냐하면 “욕망 충족은 단지 개별적인 것 속에서만 행해지지만, 이 개별적인 것은 일시적이므로, 욕망은 충족되면서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53 이 내용은 악무한적 부정에 정체된 상태에 있는 인간 욕구의 단면에 관해 헤겔이 해명하였던 그 체계 기획의 내용과 맥이 닿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자기의식은 타자를 아직 독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힘이 없으므로, 욕망에 사로잡힌 자기의식의 충족에 의해 객체의 자립성은 파괴되고, 그로써 주관적인 것이라는 형식은 객체 속에서 결코 존립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객체의 자립성을 온전하게 살려놓지 못한 채 자신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정립하지 못한 이 욕망은 자신의 당최 목표를 이루지도 못한 채, 그 덧없는 “무한 진행만을 초래할 뿐”이다.8 “충족의 지루한 교체”55로부터의 자유는 “타자 속에서 자아로서의 나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다른 객체를 직관”56함에 있다. “이러한 모순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자기로서 나타내고, 타자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자기로서 여기에(da) 존재하고자 하는 충동을 [주는데] … 이것이 인정(Anerkennung)의 과정이다.”8
인정하는 자기의식(anerkennende Selbstbewußtsein)은 “열망(Beiger)에 사로잡힌 자기의식과 직접성이라는 규정을 공유하고” 있다. 헤겔은 “이 규정 속에는 다음과 같은 거대한 모순이 있다”고 한다: “자아는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절대적으로 관통하는 것·어떠한 제한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것·모든 인간에 공통적인 본질이기 때문에 … 여기서 서로 관계하는 양쪽의 자기는 하나의 동일성, 말하자면 하나의 빛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두 개의 자기인데, 이 두 개의 자기는 서로에 대해 완전히 완고함과 냉담함을 가지고, 각각이 자신 안으로 반성한 것·타자로부터 절대적으로 구별된 것·깨뜨릴 수 없는 것으로서 존립한다.”8 이는 감정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욕구하는 대상인, 규정된 특성을 띠는 사물 일반과 그에 맞서 있는 주관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본디 욕망의 대상은 그 가치를 욕망의 주체에 의해서가 아닌, 그 스스로로서 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가치는 자립적인 가치이며,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욕망 충족의 실현으로부터 배제된다. 먹고자 하는 음식, 착용하고자 하는 장신구, 나의 의견에 동의해야 할 존재로서 현재는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타인은 나의 주관적인 욕망에 대한 대상적 존재이자 흡수되는 객체로서 되면서도, 그 자체 가치를 스스로 마련한 주체로서, 누구에게나 본질적인 것으로서 취급되어야 한다. 〈욕망으로서 자기의식〉에서 〈인정하는 자기의식〉으로의 이행은 『정신현상학』에서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실제적인 상호 투쟁과 고차원적 일치를 야기한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계기이다. 이 절에서 욕망, 그리고 인정하는 관념은 자신의 주관성과의 동일성을 취하고자 지향하는 대상은 순전히 심리적인 양식으로서의 감정으로도, 그 감정의 객관적 표출태로서 객체로도 취급되고 있다.
인정하는 자기의식은 보편적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으로 고양되고, 이성은 이론적 정신(theoretische Geist)으로 이행한다. 이론적 정신에서 지성에 있어 그 동전의 양면이자 그 외적 형태인 언어가 논구된다. 철학 또는 예비적인 철학의 절대적인 수단인 말·글은 인간의 실제적인 욕망의 역사가 내려준 선물임은 우리는 헤겔 학설에서 그 맹아로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객관 정신인 욕구(bedürfnis)는 이미 그 “가능성[이] 보편적 자산인 사회적 연관 속에 놓여 있[는]” 것인데, “여기서 대상은 재산”이며, “대상의 획득은 한편으로 특수한 것으로서 다양하게 규정된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점유하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제약되고 매개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으로써 교환 가능한 수단을 항상 새로이 산출하는 것에 의해 제약되고 매개되어 있다.”59
헤겔 학설의 혁명성은 주관적 욕구에서 철학이 전제할 이론적·실천적 정신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계기를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데에 있다. 즉, 철학이 언어라는 도구로 구축되고, 직관·표상·사유 및 그보다 높은 개념적 경지를 요한다면, 철학-함은 또한 필연적으로 그 계기의 근거를 자기 내에 지양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욕구와 감정이다.
하지만 욕구와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마냥, 인간적이며 문명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은 욕구와 감정의 이 대립과 투쟁의 씨앗을 먹고 자라온 나무인 만큼, 그 계기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랫동안 이론적 인식의 ‘경이로움’에 덮어져 있던 철학의 본성에는 깨질 수 없는, 인간 삶의 욕구 증대의 법칙이 있음을─자신의 체계에서 욕구·욕망을 지성의 계기항으로 둠으로써 명료하게 총괄한 것은 헤겔이었다. 즉, 철학-함의 사회경제사적 본성에 관한 것은 벌써 헤겔 학설에서 표명되었다.
§ 2 철학적 비평의 사회경제사적 본성 II || 하지만 헤겔 학설에서 욕망은 철학 일반으로서 관념 형식의 세포의 하나이지만, 한편으로 신비적인 이념의 자기 소외로써 섭리화된 객관적 관념의 자기 현실화로서 존재한다. 주지하듯, 헤겔의 견지에서 물질적·감성적인 것은 이념의 외화일 따름이었다─정신은 물질적 생산과정과 그 자립화한 물질적 포텐츠의 강제 명령에서 생성되는 피규정적 교량 및 수단이 아니라 이것들의 조물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피조물이다. 예술철학에 관한 1826년 강의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정신과 자연을 나란히 두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이와 더불어 여기서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를 지닌다. 정신이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는 활동인 데 반해, 자연은 정신 속에서 이념적인 것으로서, 피정립태로서 현상한다. 정신과 구분되는 것으로 규정된 것은 즉자적으로는 전체 이념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정신의 참다움이 아니고, 정신의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의 진리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관념성, 부정성이다. 그리고 주관성조차 다른 것[정신]이 부여한 것이며, 사실 이러한 다른 것만이 주관으로서 감득될 수 있다. 정신은 그러니까 총체성, 이러한 최고의 진리이다.”60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Erfahrung des Bewußtseins)”은 최종적으로, 점진적이고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지성(intelligenz) 속에서, 물질적 생산·대사(代謝)가 아니라 순수-사변적인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의 산물로 ‘정화’된다. 헤겔에게 그것은 “자아의 본성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동시에 자신을 “타자”로부터 자신으로 귀환하는, 즉 개별적으로 규정되는 동시에 그 규정 안에서 순수하게 자기 관계하는 보편성이 되는 것”61이다. “헤겔이 “부정적 자기 관계” 내지 “절대적 부정성”으로 묘사하는 자아의 의미는 자아가 자기 다양성에 대한 관념성 내지 순수한 보편성이자 추상적인 단순한 개별성이라는 사실에 담겨 있다.”62 이로써 획득되는 정신의 현상은 절대자63로서 이념의 밖으로 뻗어 나온 줄기이다: 『엔치클로페디』에서 헤겔은 자연을 논리적 이념의 산물이라 하였다. 그의 인간학에서 인간지(人間知)로서 주관 정신(subjektive Geist)은 객관 정신(objektive Geist)의 예비인데, 주관 정신에서 첫 번째 계기인 혼(seele)은 “단지 대자적으로만 비물질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보편적 비물질성(die allgemeine Immaterialität)이다. 혼은 자연의 단순한 관념적 생명”64이며, “실체이고 정신의 모든 특수화와 개별화의 절대적 토대이다.”8 “정신은 우리에게는 자연(für uns die Natur)을 그 자신의 전제로 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연의 진리이므로 자연에서 절대적인 시초(absolut Erstes)는 바로 정신”66인데, 여기서 정신은 논리적 이념이다. “정신은 자연의 대자존재에 도달한 이념으로서 출현”8한다. 이 출현한 “이념의 객관도 개념이요 주관 또한 개념”8이며, “이 동일성이 절대적 부정성이다.”8 즉, 『엔치클로페디』 「정신철학」에 이르러서야 정신은 인류사에서 자신을 유기적으로, 총체적으로 그리고 완전성으로 개시함으로써 이념으로 복귀한다. 그 복귀는 물론 모든 대립과 외화의 무화가 아니라 “이원적인 상태로까지 확장된 자아의 현존재를 뒷받침하는 게 될뿐더러 또한 이 자아는 그의 이원적, 양의적(兩義的) 상태에서도 자기 동일자의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의 완전한 외화와 대립 속에서도 오직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것”70인 경지이다. 헤겔은, “이념은 국가와 세계의 지도자이고, 정신은 세계를 이끌며, 우리는 그 이끎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71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헤겔 학설에서 우리가 톺았던 모든 ‘구체적인 것’은 실상 추상적 이념이 자기 소외로써 자신을 인식해 나가는 전개상이다. 즉, 그의 ‘구체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 자체로 서 있지 않고 오로지 추상적 이념을 각주로 하여 응고된 겉모습일 뿐이었다. 이 점에서 예컨대, 인간의 의욕은 특수 과학으로써 발견될 물질적 구성 요소의 산물, 그 통합으로서의 참된 인간적 의욕이 아니라 자기 분화하는 보편으로서 이념─대자적인 것인 관념성이 자기의 소외를 실현하기 위해 수놓은 특수로서 이념이 그 자신이 특수인 한에서 강제한 규정된 실재성이다. 그래서 그의 학설에서 인간적 의욕의 본질이라고 할 그 구성 요소와 상호작용은 과학적으로 분석될 그것들의 물질적 존재 양식에서 끝을 맺는 게 아닌, 추상적 이념의 이야기에서 끝을 맺는다. “『엔치클로페디』 전체는 철학적 정신의 확대된 본질, 철학적 정신의 자기 대상화일 뿐”인데, 그것은 “자기 소외의 내부에서 사유하면서, 다시 말해서 추상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소외된 세계정신일 뿐이다.”72
그 귀결로 헤겔에게 있어 실재성의 변증법─‘자연철학’, 그리고 무수한 역사적 실존의 개입이 거론되는 그의 ‘역사철학’─은 그의 개념의 변증법에 비해 초라한 체계를 띠고 있다. W. R. 바이어(Beyer)에 의하면 “헤겔이 사실 실재성의 변증법을 너무도 불친절하게 다루어, 그것을 그의 개념의 변증법으로써 밀어 넘어뜨리고, 사물의 변증법 안에서 개념의 변증법의 ‘내재존재’를 결코 철학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오직 단순히─주장하였을 뿐이므로, 말하자면 “추량(推量)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73 물론 그의 학설에서 ‘합리적 핵심’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인 ‘신비적 외피’와 구별될 때, ‘외피’는 그의 개념의 변증법에서 필수적인 것인 〈개념적 파악〉을 지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이어가 지적한 그대로 “이 ‘개념의 노력’이야말로 ‘합리적 핵심’의 내용에 가산되는 것”74이다. “또 ‘이러한 개념적 파악’, 즉 헤겔 철학 및 본래의 과학에 대한 관심사를 위한 그 이용 가능성의 개념적 파악은 헤겔 철학의 ‘합리적 핵심’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75 우리가 제1의 자연을 관조하고 관찰할 때조차도 헤겔이 추구하였던 이성의 조각이 사유 형식으로서 발견되는 것은 그의 ‘신비적 외피’가 전제한 게 아니라, 과학 탐구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행로이다.
M. E. 오멜랴노프스키(Omel'yanovsky)는 “자연과학 중에서도 물리학은 항상 철학과 특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음]”을, 그리고 “우리 시대에 이 연결을 더욱 긴밀해졌으며, 이제는 물리학, 유물론, 변증법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수준에 도달하였[음]”76을 논하였다: “레닌주의 사상은 그것이 물리학 발전에 적용될 때, 비고전 물리학의 인지적 가치를 이해하고, 그 사고방식을 특징짓는 데 매우 중요하다. 비고전 이론의 출현과 발전 과정에서 ‘개념의 운동(Bewegung der Begriffe)’에 대한 연구는 어떠한 경우에서든 그 이론의 방법론에 관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론이 없다면, 물리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비고전 이론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77 예컨대 “고전 물리학은 자연발생적-유물론적 인식 이론을 지향하였다.”78 “경험적 자연과학”은 “개별적 지식 분야를 상호 옮게 연결시키는 과제도 역시 불가피한 것으로 되고 있”는데, 바로 “그에 의하여 자연과학은 이론 분야에 들어서”고, “여기에서는 경험적 방법이 무력하며, 오로지 이론적 사유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79 “그런데 이론적 사유가 타고난 속성인 것은 오질 소질로서만 그러할 뿐이다.”80 즉 그 소질은 “발전되고 완성되어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지금까지 종래의 모든 철학을 연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수단도 없다.”81 변증법에서 핵심이 개념적 파악인 한, 변증법이 물리학을 포괄하는 제반 자연과학의 사유 형식에 개입하는 한, 과학 분야에서 개념적 파악으로서 사유는 언제든지 재생된다 해야 한다.
헤겔 학설에서 ‘신비적 외피’에 관한 총괄은 마르크스가 1844년에 작성한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가장 명징한 형식으로 발견되는데, 이 문헌에서 헤겔 학설에 대한 비평은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제출된 그의 〈실천〉의 맹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초고에서 “대상적인 본질적 힘들의 주체성”으로서 “정립”82, 즉 정립의 주체를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자연에 두고 있다.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본질적 힘들을 자신의 외화로써 낯선 대상들로 정립한다면, 그 정립이 주체인 것이 아니”11라는 마르크스의 통찰도 이와 관련된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정립의 주체이지만, 인간적 활동을 정립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외적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의 근저에는 또다른 형태의 자연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는 자연의 뿌리가 비물질적인 규제 원리임을 내세우는 헤겔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고로 욕구·욕망·의욕으로서 〈인간에 내적인 자연력〉은 순전히 이질적인 형태의 자연력이자 보편으로서 자연의 자기 특수화일 따름이며, 논리적 이념의 규준의 현실적인 표현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초고에서, 자연에서 시작함을 구체라 하고, 관념에서 시작함을 추상이라 하는데, 이는 헤겔이 제공한 논리적 이념이 항상적으로 그 ‘순수한’ 시원점(始原點)부터─‘순수존재(reines Sein)’─감각적(감성적)이고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것을 두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순수한’ 시원은 단지 감각적 현실의 압축인 점에서 추상적인 것이고, 감각적 현실은 그 시원의 창조자, 그 시원의 필연적 참고점(參考點)이라는 데서 구체적인 것이다.
이는 포이어바흐의 헤겔 철학 비판에서 더욱더 정교한 해명의 내용과 형식을 띤다: “헤겔 철학은 순수존재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는 “특수한 시초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무규정적인 것, 즉 시초 자체로부터 출발”을 의미한다.84 하지만 포이어바흐는 “과연 그러한가?”11라고 의문을 표한다. 포이어바흐는 ‘순수존재’가 순전히 “특수한 시초”임을 여러 방식으로써 증명하지만, 그중 단연 빼어난 것은 ‘순수존재’를 “그 제시에 있어 시초의 것도 이제는 결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립된 것, 의존적인 것, 매개된 것”86임을 폭로한 것이다. 헤겔의 “최초의 것은 사상(事象) 규정들에 의해 규정되는바, 이 사상 규정들은 스스로에 의해 확실하며, 자신을 제시하고 시간적으로 개진하는 철학보다 먼저 있고 그로부터 독립적”87이다. 예를 들어, 헤겔의 말마따나 “존재는 직접적인 것, 규정되지 않은 것, 자기 자신과 동등한 것, 자기와 동일한 것, 구별이 없는 것”이나, 벌써 “여기에서 어쨌든 직접성과 무규정성이나 동일성과 같은 개념들이 전제”되어 있다.11 존재와 무의 통일인 생성(Werden)으로 전진해 가면서, 존재의 소멸을 전제하는데, “소멸이란 것도 개념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감각적 표상”이다. 그런가 하면, “생성은 동요(Unruhe)이며, 존재와 무의 불안정한 통일”이라고 할 때, 동요는 “고요(Ruhe)와 같은, 극히 의심스러운 표상이 전제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받아들여”진다.11 이로서 『논리의 학』은 『정신현상학』으로 전락한다. 일련의 비평은 헤겔의 철학 체계의 뿌리를 흔드는 매우 강력한 것으로 된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논구되는 사상이 표상 속에서 재현되는 한, 즉 그것이 표상과 필연적인 매개를 이루는 한 표상이 그 자체 즉자대자적인 것으로서, 사상을 불러오는가, 아니면 사상이 표상을 불러오는가에 관한 문제가 곧바로 청명한 해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유가 (원시적인 또는 고등한) 기호와 절대적인 결합력을 띠고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글에서 총명한 유물론과 마음-언어에 관해 논하는 각각의 장에서 해명하도록 하겠다.
구체적 현실과 추상적 관념의 끈을 유심론적으로 전도한 헤겔에게 있어 예컨대, “국가의 필연성(Die Notwendigkeit des Staates)”의 견지에서 “상이한 제 권력”은 “개념의 본성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90 이 권력들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낯선(fremd)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11 “낯선 본성”이란 이념의 “생활사”, “본성”인데, 헤겔에게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고 “그것 생활사의 한 고리마디(ein Glied)로서 등급을 배열하는 것”이 그에게 씌워진 “공공연한 신비화”이다.11 이 방법의 한정성은 포이어바흐가 비판한 그대로, 그 신비화의 시초나 본성─『논리의 학』의 전 체계, ‘순수존재’─이 이미 그 고리마디로서 규정되어야 할 것의 피규정태로서 현존함에 있다. 헤겔의 이념은 그의 전체 철학 체계에서 안류의 지성이나 사고 작용을 인류사와 인격의 조상으로서 절대자라는 고체로 응고·격상시킨 산물이다. 그래서 이념은, 정립의 본질을 자기 자신에 두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이 쌓은 건축물은 국가 목적과 국가의 보편성 및 필연성의 본성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학설은 이러한 한정성 하에 있었지만, 그가 성숙시킨 총체성의 사유는 학문에서 변증법이 없다면 그곳에서 그 명징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음을 예시(豫示)하였다. E. 랑게(Range)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헤겔은 진보적 독일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철학자로서 그들의 정치적 지배권 획득에 그 나름의 공헌을 하였다. 그와 동시에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의 시기였으며, 이 혁명에 대해서 헤겔은 일생에서 감격에 넘쳐 말했다. 이 혁명은 독일의 사회상태와 독일 고전철학의 대표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므로, 헤겔에게도 그러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독일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의 예비를 도왔다.”93
§ 3 철학적 비평의 사회경제사적 본성 III || 관념론 철학을 발원지로 하는 도식 및 방법은 어떻게 하여 막장 갱도에 치닫게 되는가? 관념론적 도식은 그것이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간에 과학적 탐구의 목표 정향인 특수 사물의 본질을 소여된 감각이나 사변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일치시킨다는 데 있다. 도식이 참으로 그러한 일치를 보증할 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 도식의 시원은 절대적으로 무규정적인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 시초는 근거 지어진 것이고, 근거 지은 것은 그것에 대해 외적인 필연성이고, 도식은 이 외적인 필연성이 자신의 시초를 규정하는 행정까지 진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주체에 내적인 것들, 순수 사변적, 또는 감각적 도식이 그 밖에 존재할 것인 필연성을 정초하려는 순간 그 도식이 천명한, 소여된 감각이나 사변과 사물, 즉 존재의 직접적인 일치는 붕락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 권위의 옹호자는 완고한 수학자 또는 헤겔적 도식에 자기를 내맡겨야 한다. 하지만 그 도식에서 점지한 시초는 구체적인 역사, 현실적인 것을 자기에게 부착하지 않고서는 시초일 수 없다는 낭떠러지에 봉착한다.
도식은 그것의 ‘창조주’들이 집착해 마지않는 순수함에 상응하는 대로 폐쇄적이고 고정된 일련의 섭리론적 사변 순서를─헤겔은 이를 ‘관념성(idealität)’이라 하여 철학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다─띠거나, 판단문과 추론문의 형식을 띤 자립화한 표상의 외면적 집적물로 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 형식 논리학에서도, 칸트의 ‘개혁적’인 초월론적 형식 논리학에서도,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도 관찰된다. 엥겔스는 뒤링에 대한 체계적인 비평인 『반뒤링론』을 저술하면서 학적 방법론에 관한 일반이론적인 글을 남겼다. 저작에서 엥겔스는 “사유 법칙의 이론은 속물적인 사고가 논리학이라는 말과 결부시키고 있는 그러한 것처럼 결코 종국적으로 확정된 그 어떠한 영원한 진리가 아[님]”94을, 그리고 “어느 과학 분야에서나─자연의 분야에서나 역사의 분야에서나─주어진 제반 사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따라서 자연과학에서는 물질의 각이한 대상적 형태와 각이한 운동 형태로부터 출발”95하여야 함을 철학적·과학적 탐구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머릿속에 주어진 연관을 사실에 기입하는 게 아니라, 사실에서 연관을 이끌고, “또 그것을 발견하면 가능한 한 경험적 방법으로 증명”11하는 것이다. 이를 총괄하면, 즉 〈사실〉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경험으로 보증된다. 이 경험적인 것은 또한 실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구해진 〈사실〉은 아직 경험적이고 감성적인 단계에만 달했을 뿐이며, 철학적 사유는 그것을 변증법적 시스템으로 주조해 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조만간 상대적으로 불변적이거나, 또는 가변적일 논리적 범주 순서를 형성한다. 엥겔스의 통찰은 우리에게 과학적 방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 시스템이 탐구하며 마주할 특수 사물의 운동 방식과 형태에 상응하는 만큼 무수함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로부터 철학은 논리적 사유의 개념적 탑을 쌓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자연계의 구조와 사회구성체의 내재적 변화 양식에 따라 온전히 보존될 수도, 또는 무너질 수도 있다. 일련의 순서가 상대적으로 고정된 채로 있는 논리적 시스템은, 그 존재 자체에 관한 이해만으로도 몇 가지 과학적 예측을 달성할 수 있는데, 가장 흔히 그런 것으로 알려진 것은 수학과 통계적 추이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조차 대상 사물의 특수한 층의 객관적 운동 연관을 반영한 것이라, 이 사유 시스템은 오직 그 층의 관계만을 식별하는 데 적합할 뿐이다.
실천이 산업적·경제적으로 반복되는 경험적 사실과 어떠한 연계를 가지며, 물질성과 사유 법칙의 관계에서 물질적인 것이 어떻게 특수한 관념을 생산하고 조직하는가는 총명한 유물론에 관한 장에서 자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비평과 여타 철학적 사유는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탄생한다면 그 역사의 대표자는 무엇인가? 엥겔스는 1890년 9월 21일, 그 대표자와 이데올로기의 상호작용에 관한 J. 블로흐(Bloch)의 물음에 답변하면서, 그 대표자를 경제적인 것에 두었다. 엥겔스는 먼저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지만,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놓는 것”임을 지적한다.97 그런데 이 “유일한”은 어떠한 의미로 쓰이는가? 그는 정치·법률·철학적 이론·종교도 하나의 외재적인 자립성을 띠며, 역사적 진행과 상호작용하나, “이 상호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을 …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나간다”고 한다.11 즉, “유일한”과 반대되는 ‘유일하지 않음’이란 경제적 운동이 역사의 진행을 지배적으로 규정해 나가는 데서 그 매개물인 우연들, 즉 상부구조의 작용을 뜻하는 것인데, 이 우연적인 항들은 상대적인 자립성을 띠고 하나의 원인자로서 작용하나, 그 원인자의 원인, 즉 다시 경제적인 계기에 종속되어 있다. “경제적 전제들과 조건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최종 심급]들”이다.99
엥겔스는 주데텐에서 타우누스에 이르는 산맥에 의해 형성된 지리상의 차이가 유발한 고지 독일어의 자음 추이의 기원을 “경제적으로 해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임은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둘째로, 최종 결과는 언제나 수많은 개별 의지가 충돌에서 생기며 또 이 각각의 개별 의지는 많은 특수한 생활 조건에 의해 지금과 같은 개별 의지로 다시 형성되는바”, 즉 “따라서 서로 교차하는 무수한 힘들, 무한한 힘의 평행 사변형들의 집합이 존재하며, 여기에서 결과─역사적 사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최종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동일한 운동 법칙 아래에 놓여 있[는데]”11, 그 “개별 의지의 소유자는 자신의 체질과 외적인, [즉] 종국적으로 경제적인 사정들(개인적인 수도 있고, 혹은 일반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는)로 말미암아 어떠한 것을 원[한다.]”101 이 개별 의지는 비록 경제적 총체성의 운동 여하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하나의 전체적 평균에, 하나의 공동 결과에 융합”될 수 있으나, “이로부터 개별 의지=0으로 놓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102 왜냐하면 “반대로 개별 의지 각각은 결과에 기여하는 그러한 한에서 그 결과에 함유되어 있는 것”11
우리는 이로써 철학적 비평의 근본 목적, 본질에 관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 수많은 철학자가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하며, 또 세련된 문장과 수사를 구사함은, 그리고 스스로에게 초역사적인 가치를 부여함의 근원은 자신의 개별적인 욕구로 표현되는 각 의지에 따른 것이다. 예컨대, 기호의 선별·배치, 문장의 문법적 구조의 조작 등으로 완성되는 이 세련됨은 자신의 글이 더 많은 당위를 얻게 하기 위함이며, 그 당위를 거머쥐어야 함은 순전히 금전적인 목표일 수 있으며, 당장에 금전은 뒷전에 있더라도, 자신의 개별 의지를 실현코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별 의지의 실현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어떠한 의지는 외견상 너무나도 숭고해 보여서 그곳에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경제성”이 낄 데가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것은 어느 데까지 나아가더라도 결국은 개별적인 이해관계의 실현과 관련된다. 이 이해관계의 추구에서 실현의 완성까지는 그 의지의 주체가 딛고 선 이 땅의 생산과 분배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승려가 수행하기 위해서는 절이 있어야 하는데, 절은 생산의 산물이다. 그것이 생산의 산물인 한 그는 그 생산의 교류 양태의 진흙탕에 발을 담가야 한다. 전근대부터 칭송받는 고승이 또한 당대의 경제적 권력과 밀착한 관계임은 이로써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생산된 종교적 교설은 그 작용에 의해 지배계급의 설교로 변화한다.
경제적 계기는 오늘날 “점점 더 대규모화되어 마침내 세계시장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104 것만이 아닌, 이 시대의 산업적 생산 수준에서 원시 공산제의 수렵과 채집, 초기 형태의 농업까지 관통하는 동일자이다. 하지만 절박함은 오늘날 더 극심해졌다.
철학-함이든, 철학적 비평이든, 그것이 무언가를 지향하는 사유인 한, 그 진술에서 현시대의 사회구성체의 조건에 조응하는 일반적인 경제적 의도를 은폐하는 것은 진리를 위해 투쟁하며, 민중 철학을 지향하는 모든 자가 경멸해야 할 태도이다. 철학의 뿌리에 경제적 개별 의지가 지지대로 있는 한, 철학의 진실성은 언제나 그 경제적 의지에 상응하는 경제적 체계,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에 철학을 하는 자를 이끌어 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더욱 정교한 과학적 방법론의 연구, 진보적 방법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한 창조는 아주 흔히 생산적인 것과 연계되기 일쑤이다. 그 성과는 또한 (부분적인 예를 들자면) 천체우주에 관한 첨단 연구, 첨단 기기의 국가적 발명과 연관되고, 그것은 빈번히 지구와 환경과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것과 관련되는데, 자본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팽창한 현대에 이른 시점에서 연구는 그 자체로 잉여가치의 분배(자본 투자)에 직결되고, 수많은 연구 노동자의 경제적 생활과 직결된다. 근래 인공지능 연구에서 자연어 처리 방식에 관한 수많은 철학적 논의가 제국주의 국가 학술상에서 변함없이 중대사로 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인공지능을 통한 자동화 설비, 첨단 침략 무기 및 첨단화된 파시스트 통치 수법 개발 등 각종 조야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것이지만, 이것 또한 종국적으로는 경제적 의지이다.
철학-함의 목적에 개별적인 경제적 의지가 요지부동한 채 있으므로, 현상적인 세태가 어떠하든, 철학-함의 최고 영광은 방법론 연구이다. 왜냐하면, 실증과학에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는 오로지 특수 과학과 상호작용하여 얻어낸 특수 과학 방법론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전히 통속적인 비유 덩어리로 되어 있는 문헌에서 특수 사물을 대하는 현실적인 방법론을 도출해 낼 수 없다. 이는 문예에서도 하등 다를 바 없는데, 다만 문예는 그 문예 창작의 방법론적 대상이 주관성인 탓에 체계화와 이론적 규준을 입히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철학을 격언의 모음집으로 취급하며, 거기에 만족하는 자들의 작태만큼이나 자신의 사회경제적 본성을 망각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그러한 망각을 자신의 경제적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하나의 새로운 욕구로서 대한다. 그 조야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그들은 가상적인 철학-함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학문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는 자들의 ‘특권’이다. 한편으로 기왕에 그러한 망각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 또한 얼마나 흔한가!
2025년 9월 9일
- A. N. Leont'ev,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Mind,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81, 271.

- Xenophon, 「경영론」, 『경영론·향연』, 오유석 역, 서울: 부북스, 2015, 제I/22절.

-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Mind, 1981, 271-2.

- 『철학의 근본문제』, 1990, 244.

- F. Engels, 「원숭이의 인간으로의 진화에서 노동의 역할」, 『자연의 변증법』, 황태호 역, 서울: 전진, 1989, 167-8.

-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Mind, 1981, 208.

- Ibid., 272.

- Ibid.

- 남기호, 「헤겔의 욕망 개념」, 『헤겔연구』, 26, 2009: 42.

- G. W. F. Hegel, 『정신현상학 I』, 임석진 역, 서울: 지식산업사, 1988, 257.

- 같은 책.

- 같은 책.

- 같은 책, 257-8.

- 이는 헤겔의 비평이 편집되는 과정에서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붙여진 제목이다.

- G. W. F. Hegel, System Der Sittlichkeit: Critik Des Fichteschen Naturrechts, Hamburg: Felix Meiner Verlag, 2001, 5.; 『인륜성의 체계』, 김준수 역, 서울: 울력, 2007, 14.

- Ibid.; 같은 책, 15.

- Ibid.; 같은 책.

- G. W. F. Hegel, Jenaer Systementwürfe I: Das System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6, 210.

- Ibid.

- Ibid., 211.

- Ibid.

- System Der Sittlichkeit: Critik Des Fichteschen Naturrechts, 2001, 5.; 『인륜성의 체계』, 2007, 15.

- Ibid., 16.; 같은 책, 33.

- Ibid.; 같은 책.

- Ibid., 17.; 같은 책, 34.

- Ibid.; 같은 책.

- Ibid.; 같은 책, 35.

- Ibid., 18 .; 같은 책, 37.

- Ibid., 17.; 같은 책, 34.

- Ibid.; 같은 책.

- Ibid.; 같은 책.

- Ibid.; 같은 책.

- Ibid., 18.; 같은 책, 36.

- Ibid., 17.; 같은 책.

- Ibid., 18.; 같은 책, 37.

- Ibid.; 같은 책.

- Ibid., 19.; 같은 책, 38.

- Ibid., 18.; 같은 책, 37-8.

- Jenaer Systementwürfe I: Das System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1986, 201-2.

- G. W. F. Hegel, Jenaer Systementwürfe III: Naturphilosophie und Philosophie des Geistes,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7, 174.

- Ibid., 175.

- E. V. Il'enkov, “Hegel and Hermeneutics: the Problem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Thinking in Hegel”,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ed. E. V. Pavlov, Leiden & Boston: Brill, 2018, 98.

- Ibid., 98-9.

- 『정신현상학 I』, 1988, 163.

- 같은 책, 163-4.

- 같은 책, 164.

- System Der Sittlichkeit: Critik Des Fichteschen Naturrechts, 2001, 18.; 『인륜성의 체계』, 2007, 37.

- 『정신현상학 I』, 1988, 173-4.

- G. W. F. Hegel, „Enzyklopädie III“, Werke, Bd. 10, Erste Auflage, Berlin: Suhrkamp Verlag, 1986, § 462.

- Ibid.

- Ibid., § 426.

- Ibid.

- Ibid., § 428.

- Ibid.

- Ibid., § 429.

- Ibid., § 430.

- Ibid.

- Ibid.

- Ibid., § 524.

- G. W. F. Hegel, 『헤겔 예술철학 1826년 강의』, 권정임 역, 서울: 세창출판사, 2023, 87-8.

- M. Greene, 『헤겔의 영혼론: 사변적 인간학』, 신우승 역, 서울: b, 2003, 250.

- 같은 책, 251.

- 『정신현상학』의 서론은 이를 철학사에서 고구(考究)된 바의 “사물 자체”, 즉 인식이 취하고자 하는 “즉자적인 사물”(=“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사실 자체로서 진리”)로 취급하였을 때 학문상에 근본적인 한계가 노정됨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칸트는 “사물 자체”와 인식을 추상적으로 자립화하여 서로를 절대적으로 분리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헤겔에게 “촉발된” 인식 작용이란 절대자의 활동적이고 내재적인 생산물이자 자기-외화의 전체이므로 인식 작용에는 그러한 생산적 계기가 담겨 있다. 진리는 이 주체-객체의 일치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 … 이 두 경우에서 똑같이 우리는 원래 수단이나 방편이 목적으로 여겨진 바와는 반대되는 것을 산출하는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되었으니, 여기서 무엇보다도 역겹게 생각되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어떤 도구를 이용하려 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러한 도구의 활용 방법을 제대로 습득함으로써 이상과 같이 빗나간 상태를 모면할 수 있을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도구 사용[인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이 도구를 방편으로 하여 절대자에 관하여 획득한 표상 내용 가운데서 오직 그 도구적 역할에 힘입었다고 여겨지는 부분만을 고이 도려내고 나면 결국 순수한 형태의 진리가 포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만약 어떠한 형상화된 사물로부터 이른바 인식의 도구가 작용한 만큼의 영향력이나 결과를 배제해 버린다면 결국 이 사물은─여기서는 절대자가 되겠지만─우리에게는 마치 그 모든 불필요한 도구적 작용이 가해지기 이전의 단초적인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정신현상학 I』, 1988, 138.)

- „Enzyklopädie III“, Werke, Bd. 10, Erste Auflage, 1986, § 389.

- Ibid.

- Ibid., § 381.

- Ibid.

- Ibid.

- Ibid.

- G. W. F. Hegel, 『정신현상학 II』, 서울: 지식산업사, 1988, 809.

- G. W. F. Hegel, „VPdG: Nachschriften zu dem Kolleg des Wintersemesters 1822/23“, Gesammelte Werke, Bd. 27.1, Hamburg: Felix Meiner Verlag, 2015, 14.

- K. Marx, 『경제학-철학 수고』, 강유원 역, 서울: 이론과실천, 2006, 188.

- W. R. Beyer, 「헤겔의 이중성」, 『헤겔과 현대: 현대세계의 본질규명을 위한 헤겔철학의 재조명』, 신민우 역, 서울: 풀빛, 1985, 259.

- 같은 책, 260.

- 같은 책, 262.

- M. E. Omel'yanovsky, „Lenin und die Dialektik in der modernen Physik“,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8 (1), 1979: 6.

- Ibid., 16.

- Ibid., 6.

- F. Engels, 「변증법에 대하여」, 『반뒤링론』, 한철 역, 서울: 이성과현실, 1989, 417.

- 같은 책, 417-8.

- 같은 책, 418.

- 『경제학-철학 수고』, 2006, 197.

- 같은 책.

- A. N. Feuerbach,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차인석 역, 서울: 민음사, 1986, 179.

- 같은 책.

- 같은 책, 188-9.

- 같은 책, 189.

- 같은 책.

- 같은 책.

-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울: 아침, 1989, 23.

- 같은 책.

- 같은 책.

- E. Range, 「『정신현상학』─헤겔철학 탄생의 진정한 근원과 비밀」, 『헤겔과 현대: 현대세계의 본질규명을 위한 헤겔철학의 재조명』, 1985, 14.

- 「변증법에 대하여」, 『반뒤링론』, 1989, 418.

- 같은 책, 422.

- 같은 책.

- F. Engels,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런던)」,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6권, 최인호 역, 서울: 박종철출판사, 1997, 508.

- 같은 책.

- 같은 책, 509.

- 같은 책.

- 같은 책, 509-10.

- 같은 책, 510.

- 같은 책.

- MEW, Bd. 3, 47.; 『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2019, 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