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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 『옥중수고』의 레닌주의 정치사상: 제5강

한동백 |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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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사회 각계의 투쟁에서 기본 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적 블록〉의 발전 경향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작업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일반 법칙오직 구체적이기에 일반 법칙일 있는을 추려냄은 단순 이론적인 것으로써는 절대적으로 부적합하다. 우리가 이러한 부적합성에 대한 철두철미한 주의 없이 그것을 진행한다면 필경 비잔틴주의의 오류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블록의 운용을 매개하는 것은 항상 나라 계급과 민족적 실정과 필연적인 방식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람시가 수고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페라리1는 프랑스적인 것을 이탈리아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능력이 없었으며, 따라서 바로 그의 ‘날카로움’이 오히려 혼돈의 요소가 되었고 새로운 분파의 쓸데없는 학파는 조장했을지언정 실제의 운동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 보편적 연관으로서 역사적 발전 과정의 운동에서 “현실적 과정이 나라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나라마다 내부적 관계의 구성이 다르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일 아니라, 또한 나라마다 국제 관계에 차이가 있다는 데에서도 비롯된다.”3

 

즉, 그가 수고에서 제출한 역사적 분석은 당대 이탈리아의 역사 전개를 강력한 내용적 계기로 지니므로 우리는 그의 정치사상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때 그의 분석을 톺는 것에 무게를 과히 실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람시가 상당 부분 할애하여 다루는 특수한 형태 도시-농촌 문제는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역사적 특수성 속에서만 현존 수 있었다. 이 분야에서 그는 농촌 내부에서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까지 다룬다. 그가 이 부분에서 입체적으로 다루는 데 활용하는 재료는 오늘날의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정리가 충분히 되어 있지는 않지만) 구사한 개념을 이탈리아 현실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써 수고에서 등장한 개념이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정신적인 톱니로 있는지를 가늠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 아래에서, 그람시의 수고에서 제출된 〈사회적 블록〉과 〈패권〉을 그것과 매개된 개념들까지 정리하여 계급투쟁의 전략·전술적 보급품으로 가공해야만 한다. 이를 보다 완전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체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젠가 그가 구사한 각각의 개념이 그의 역사적 분석에서 어떠한 지위 차지하였는가가 밝혀져야만 것이다이는 다음의 과정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1. 아직 각각의 ‘개념’은 단지 주요 범주의 지위를 지닐 뿐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개념이 아니며, 그것은 (아직은 추상적인) 주어진 범주-논리적 연관의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2. 배열된 범주들을 그람시가 파악한 역사적 분석에 개별적 수준에서 연결한다; 3. 개별적으로 연결된 실에서 보편적 적용 지점을 찾고 이를 이어낸다. 이는 논리적 순서의 예비로 된다; 4. 논리적 순서를 잇는 범주는 이제 총체성 속에서 개념으로 되며, 이것들은 현실에의 적용이 가능한 인식 도구가 된다; 5. 이러한 정신적인 보편적 연관을 각국 공산주의자가 당면한 현실적 특수성에 결합 적용한다.

 

§ 30. “지배계급들의 역사적 통일성은 국가를 통해서 실현된다.”4 국가는 그것의 억압적 기능인 정치사회; 토대-상부구조의 완충지대이자 매개자인 시민사회 간 유기적인 관계이다.5 즉, 국가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유기적 결합정치사회 더하기 시민사회이다. 그람시가 그의 처형 타티아나 슈히트(Tatiana Schucht)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이 ‘국가’ 개념은 다음의 이론적 숙고를 거치고 제출되었다: “보통 국가는 정치사회─즉 군중들이 주어진 생산과 경제의 형태에 순응하게끔 통제하는 데 사용되는 독재 체제 또는 다른 강권적 기구─로서 생각되었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간 균형으로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균형을 나는 한 사회집단이 전체 국민에게 교회, 노동조합, 또는 학교와 같은 이른바 사적인 조직들을 통해 행사하는 패권이라고 봅니다.”6 그가 노동계급 정치 투쟁의 발전을 위한 전략·전술 수립이라는 목적 하에서 국가의 구체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을 때 국가 규정은 ‘균형’과의 상호 교체 속에서 더 풍부한 것으로 되어갔다.

 

수고에서 국가를 일컬을 때 그것의 억압적 기능으로서의 속성이 강조된다면, 정치사회는 빈번히 곧 국가로 파악되기도 한다. 정치사회의 고유한 기능의 방향성은 시민사회의 〈패권〉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파악에 스며 들어 있는 변증법은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투쟁과 연관되면 국가에 대한 다음의 청명한, 동시에 보다 진전된 과업 설정을 위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온다: α. 역사적 진보의 사명을 갖는 계급은 국가의 전반적 기능과 기구를 수중에 넣기 전에도 자신의 국가를 가진다. 이는 시민사회 내에서 이 계급의 활동이 매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β. 그러나 이때의 국가란 오로지 당대 지배 집단이 취한 국가 체제가 온존할 때라만 존립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진보적 계급의 국가는 오로지 이 국가의 유구한 기능의 현존 속에서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그것의 힘을 이용하는 것으로써만 발현하기 때문이다; γ. 그러므로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국가란 단순히 지배 집단이 취한 국가에 대해 외적으로 실존하여 그것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통일적 체제로서의 국가혁명 세력의 궁극적인 성취 목적으로 파악되는, 질적 비약으로서의 국가·체제가 아닌7, 역사적 진보 진영이 지양 또는 ‘파괴’하고자 하는 그 국가의 내부에서 발전하는 경향, 즉 (半)국가이다. 이를 〈통합국가(stato integrale)〉라고 한다.

 

이러한 유기적 관계가 피지배계급의 능동성에서 상승하는가, 아니면 지배계급의 역량에 의해 단지 피지배계급의 수동성으로서 발전하는가는 사회혁명의 성취에서 주요 문제이다. 각각은 추상적으로는 능동적인 혁명과 〈수동혁명(rivoluzione passiva)〉에 할당된다. 구체적으로는 비록 비율은 다르더라도 어느 시대에서나 혁명 세력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혼재하는 탓에 두 발전 경향은 다시 세분화한 경향으로 나눠진다.

 

§ 31. 국가는 〈하층 사회집단〉의 〈동의〉를 확보하고 그것을 일정한 선에서 유지하고 있을 때라야 사회에서 안정적인 보편성이 된다. 이때 〈하층 사회집단〉은 “경제생산에서 일어나는 발전과 변화에서  객관적으로 형성”8되는데, “이들은 기존 사회집단들 속에서 발생하며 속에서 양적으로 확산하고 기존 집단의 정서 이데올로기와 목표를 한동안 계속 보유한다.”5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내기 위해 이들 조직[지배적인 정치적 조직]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5 그러나 지배 집단은 “새로운 정당들을 만들어 내어 하위집단의 동의를 확보하고 그들을 계속 통제하려 [하며] 하위집단은 자신이 제한된 부분적 요구들을 관철하고자 자신들의 조직을 산출”11한다. 이 새로운 조직들은 “낡은 틀 내에서이긴 하지만 하위집단의 자율성을 주장”5하고 이내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한다.”5 한 사회에서 지배 집단으로 규정된 정당 및 조직체가 〈동의〉를 위한 전술적 실천의 주체로 될 때 그들의 운동 경향과 그 상대적인 시작점에서 여전히 정치적으로 종속적이며, 그러하기에 〈하층 사회집단〉인 “초보적인 단계에서 출발하여 완전한 자율성으로 나아가는 발전의 경로를 기록하고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5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nazionale) 연구가 이 요소들의 역사적 발생 및 발전 경로를 파악하는 수단이다. 이 시대에서 “혁신 세력들이 어떻게 하위집단에서 출발하여 지배 집단으로 발전하는가에 대한 연구는 1. 싸워 이겨야 할 적들과 비교하여 이들이 확보한 자율성; 2.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들을 지지한 집단들로부터 얻은 지원의 각 단계를 찾아내고 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15 이 전체의 과정은 종속적 집단에 불과했던 그들이 국가의 형태로 통일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것이었다. 역사적 진보 진영의 “역사적·정치적 의식의 수준은 바로 이 두 가지 척도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16

 

그람시는 이 척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리소르지멘토에서 온건당(Moderato)17 및 행동당(Partito d'Azione)18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정치적 삼각관계를 분석하였다:

 

첫째 “행동당은 자신의 특수한 역사적 계급 기반이 없었으며, 그 지도기관이 겪었던 동요는 온건당의 이익에 따라 해소”19되었는데, 이는 “행동당이 역사적으로 온건당에 의해 지도”5되었음을 보여준다. “온건당은 1870년과 1876년 이후에도 줄곧 행동당을 지도”21하였다. “‘변신(transformismo)’22이란 단지 지적·도덕적·정치적 패권 행동의 의회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23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당적 실천에서 기본 역량으로 되는 계급 기반의 존재와 온갖 잡음을 단일 목적으로 통일해 내는 역량 없이 〈패권〉을 행사할 수 없음을 파악할 수 있다. 온건당 내부의 이념적·실천적 지형에서 ‘카보우르 노선’의 강화연방주의와 가톨릭-군주제 지지 파벌의 쇠퇴 및 이들의 ‘카보우르 노선’으로의 편입는 “한층 더 광범위한 지배계급의 형성”24을 불러왔다. 즉, 온건당의 〈패권〉 기반은 “동맹집단이 산출한 적극적 분자와 심지어는 적대적인 집단으로부터 나온 도저히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분자들까지를 점진적이지만 지속 흡수하는 것”5에서 나왔다;

 

둘째로, 온건당은 “이탈리아반도 구석구석에 ‘분산되고’, ‘분자적인’ 상태로 존재하던 각 급 지식인 군중에게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긴 하나 교육과 행정에 대한 요구를 제공함으로써 강력한 흡인력을 ‘자연스럽게’ 발휘하였다.”26 이로써 발생한 〈유기적 지식인〉은 자신들이 운집한 온건당의 주변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행사하여 결국 다른 사회집단들의 지식인들을 흡수하여 버린다.”5 행동당은 이와 같은 흡인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온건당에 스스로 흡인되고 영향받았다. 이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온건당의 ‘자연스러운’ 흡인에 대해서,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저항과 역습으로 맞섰어야”28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셋째로, 행동당은 “농민의 본질적 요구를 반영하는 유기적인 정치강령을 제시”5하지 못했다. 당대 이탈리아의 시대적 국면에서 농민의 요구는 매우 중요하였음에도 마치니는 이탈리아의 전근대적인 ‘문화적 전통’을 내세우는 수사만을 동원하였다. “대다수 민중은 그러한 문화적 전통에는 낯설었고 설사 그러한 전통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30 이는 도시와 농촌의 문제를 유기적인 강령으로써 일체화하려 하였던 프랑스 자코뱅당의 행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었다. 행동당은 “외적인 ‘형식’이나 기질 면에서만 ‘자코뱅’일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내용을 지닌 자코뱅이었어야 했다.”31

 

오늘날에는 농민을 포함하여 많은 종류의 〈하층 사회집단〉이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분지를 이루는 요구들을 통일시킬 유기적 정치강령을 만들어 내는 일은 과거보다 더한 노력이 요구된다;

 

넷째는 선행 조건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고유한 기능을 기존의 지배적 사회집단과의 조심스러운 제휴로써 탈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취는 분명히 급성적인 변혁이 뒤따라 나오지 않는 한 그 한정성은 명확하나, 이는 역사적 진보 진영의 〈패권〉을 강화하는 매개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온건당은 “군주제와 제휴”하였고, “시칠리아의 대토지소유자들과 긴밀히 동맹”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전반적인 정책에서 프랑스에 대한 관세 전쟁과 보호무역주의 관세를 통하여 북부의 산업주의를 강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 [그들은] 지배적 사회집단의 기간요원들을 증대시켜 줄 수 있는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남부와 도서(島嶼) 지역을 심각한 상업공황에 빠뜨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 좌익은 우익의 편파적인 재정정책으로 야기된 민중의 증오심을 치유하고자 했으나,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안전판 역할 뿐이었다.”32 동일한 방향에서 이탈리아의 “남부 도시 세력들의 지도적 기능은 북부 도시 세력들의 보다 광범한 지도적 기능의 종속적 계기 이상일 수 없었다.”33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에서 피에몬테의 기능은 ‘지배계급’으로서의 기능이었다.”34 아직은 다소 전근대적이었던 군주국가 기구가 여기서는 산업자본주의 성장의 주요 도구로 되었고, 이는 의식적이고 단결된 산업 자본가계급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온건당의 주도 파벌의 정치적 목적은 근대적인 국민국가였으나, 이탈리아에서 그것을 이루게 하는 데서 필연적 매개·연관은 “군주의 기능”으로 발현하였다.35 동일하게, 프랑스 혁명사에서 “‘왕정복고’의 시대는 이러한 종류의 발전이 가장 풍부하게 전개된 시기”36였는데, “복고는 극적인 변동이나 프랑스적인 공포 장치 없이도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는 매우 탄력적인 사회적 투쟁의 틀로서 채택된 최초의 정책이었다.”5 이때 프랑스의 봉건지주들은 “지배적인 위치에서 ‘통치하는’ 위치로 그 지위가 낮아지지만 제거되지는 않았으며, … 그들은 하나의 계급이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심리적 특성을 지닌, 하지만 더는 지배적인 경제적 기능을 담당하지 않는 하나의 ‘신분(caste)’으로 되었다.”38

 

제휴의 역사에서 온건당의 조치가 보여주는 정치적 수준은 각이한데,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서 1861년 이후 통일 입헌군주국의 정치에서 이러한 모든 시도는 오로지 〈패권〉을 매개로 한 지배집단의 국가로써 전개되는 혁명, 즉 〈수동혁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개념은 초기 리소르지멘토에 강한 영감을 불어넣은 빈첸초 쿠오코(Vincenzo Cuoco)의 저서 『1799년 나폴리 공화국에 대한 역사적 논고(Saggio Storico sulla Rivoluzione Napoletana del 1799, 1801)』에서 제출되었는데, 그람시는 이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였다: “온건당의 정책을 보면, 권력을 잡기 전에도 지배 행위가 있을 수 있으며, 또 실상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제공하는 물리적인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이야말로 리소르지멘토를 그러한 형태(그리고 그 한계)‘혁명’ 없는 ‘혁명’, 혹은 쿠오코의 표현을 그가 의도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자면 ‘수동혁명’의 형태로 가능하게 만든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답이었다.”39 종국적으로 〈지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은 “여타의 집단들을 ‘지도’한 한 사회집단이 아니라 국가였고, 그 국가가 비록 권력으로서의 한계는 있었지만 ‘지도적’이었어야 할 집단을 ‘지도’했으며, 그 집단에 군대와 정치·외교적 힘을 부여했다는 사실”35을 파악함으로써 확장된다.

 

§ 32. 〈수동혁명〉의 특성을 체계화한다면, 이 개념에 대한 C. Buci-Glucksmann의 해석은 아무런 타당성도 없음을 알 수 있다.41

 

‘혁명’은 시대에서 명시적인 지배계급의 〈지도〉의 불모지 속에서 이루어지나, 이 ‘혁명’를 강제하는 주체의 지배적/피지배적 계급 특성은 변동되어 왔으며, 리소르지멘토 실증 연구에서 그것은 주제의 〈패권〉 양상에 대해 전혀 외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그것은 (아직은 지배적이지 않으므로) 지배적이어야 사회집단이 여타 하위 사회집단에 대한 〈패권〉을 재건해 나갈 의도로서 지배계급 블록을 국가에 결속게 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서 형의 〈동의〉와 〈강제〉를 ‘창조’, 군중의 수동성 활용하여 자기 계급의 이해를 보장하는 전술이다. 〈수동혁명〉은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군중 조직을 국가에 흡수할 계책을 세운다.

 

그러나 이는 대립물의 통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도로써 〈수동혁명〉이 수행되는 그 이면에는 낡은 국가기구필연적으로 통합적 국가와 한 몸을 이룰 수밖에 없는를 여전히 자기 계급의 이해를 보장하고 이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낡은 지배계급이들의 초조함 및 이것의 근원으로 되는 반대항의 ‘전술적 고려’도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은 Buci-Glucksmann의 해석〈수동혁명〉이 자본가가 가진 ‘순수’ 계급적 의도를 일방적으로 반영한다는과 정반대로, 그람시가 분석한 그대로의 지배적 사회집단의 광범한 지적·도덕적 질서의 창출을 역사적 전제조건으로 가진다.

 

그것의 프롤레타리아적 전유42는 (아직은 실천적으로 견고하지 못한) 〈사회적 블록〉이 구축한 진지가 확고히 국가의 전체 기구를 획득하기 위한 능동혁명적 포위 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택할 수 있는 혁명,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의 공백으로 인해) 압박받은 의도를 매개로 한 예비 혁명의 한 형태이다. 이 단계에서 역사적 진보 진영은 여전히 능동혁명의 전제조건을 전적으로 마련하지 못하였거나, (그보다는 약간 더 ‘높은’) 과도기적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이 특수한 수동성은 예컨대 성장하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역사적 좌익’인 지올리티가 〈수동혁명〉을 획책, 그 결과 일련의 개혁적 성과가 쌓여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정치적 지시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에 조응한다. 〈수동혁명〉은 1. 피지배계급의 기초 투쟁 역량이 전혀 서지 않은 속에서 지배계급 〈패권〉의 공백이 어떠한 우연적 계기로서 일어난 결과로서 야기될 수 있지만; 2. 그 공백이 그 반대항의 상승 작용동시에 여전히 능동혁명을 수행할 정도의 주체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에 의해 규정된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43 그러나 이 역시 지배계급의 국가기구를 필연적 매개로 하면서 지배집단의 변형된 의도와 결합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44 이러한 성격은 〈수동혁명〉을 본질적으로 개량 특수한 형태로 귀착하게 만든다. 공산주의자가 이를 매개로 하여, 그것을 ‘혁명’의 추동인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훈련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엄밀한 신중성을 요구한다. 혁명의 추진력에 있어서 그것의 성격을 논구하고자 한다면 더더욱 복잡한 미로에 빠질 것이다.

 

현시대 사회혁명을 수행하는 집단이, 후위에서 언제나 동원될 수 있는 가장 선호되는 정치적 예비군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면, 〈정치정당〉의 중간적인 요인〈유기적 지식인〉, 당 관료, 시민적 조직에 파견된 요원이 성숙하지 못했다면, 기본 동력에 대한 조직 핵심의 지도 역량이 확실한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면 〈수동혁명〉의 외양을 걸친 행동의 성과는 볼품없을 수 있으며, 역으로 적대 계급에 포위당할 수도 있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모든 종류의 반동으로부터, 대중과의 접촉을 상실하지 않고 ‘지하’(비합법) 활동을 수행하며 당을 지킬 수 있는 능력실제로 노동계급의 최대한 넓은 층위와 접촉하는 것이야말로 방어를 보장해 준다. … 이러한 각각의 지점은 주의 깊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들은 당의 취약성과 함께 달성해야 할 과정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동의 철권이 중앙과 지방 조직들을 연결하는 기구들을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아무리 막대하더라도더욱 약하게 만들 것으로 예상되는 한 이러한 지점들은 더욱 중요하다.”45 즉, 당노동계급이 〈패권〉적 〈통합국가〉의 를 확보함에서 선두로 되는의 취약성을 철저히 보완할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채 당을 적대 요인과 연결한다면, 이는 일시적인 정치적 수완을 얻는 것을 대가로 실재하는 취약성을 매개로 하는 잠재적 위험 요소를 대거 들이는 꼴이다. 이는 실천의 지침으로 되어야 노동계급의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분해, 분파주의와 당내 자유주의 현상을 심화한다.46 공산주의자에게는, 지배계급의 ‘마지못한’ 〈수동혁명〉을 강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의 상시화 속에서 낡은 사회경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러한 의도가 역관계 내부 구도로 인해 노동계급의 능동혁명과 전혀 매개되지 않은 채 오로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만이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수행되는 〈수동혁명〉을 불러온다면 그 기도를 분쇄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다. 카이사르주의가 진보와 반동, 두 측면으로 나뉘었듯, 〈수동혁명〉 역시 두 경향으로 나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두 양상 모두에서 공산주의자는 이 ‘혁명’의 기만성을 폭로해야 한다. 이처럼 공산주의자에게 〈수동혁명〉은 언제나 이중적 성격을 띤 통일물로서 나타난다. 이것의 강제분쇄 그리고 폭로 프롤레타리아에게 허용된 유일한 매개된 ‘수동 혁명’이다.​

 

§ 33. 지배계급은 그들이 비록 특수한 조건에서는 쇠퇴해 가는 처지이긴 할지라도 여전히 역사적 발전의 경로에서 〈수동혁명〉의 조건을 여전히 보유한 탓에 (이 혁명의 도정에서 활용되는 정치적 자원의 형태는 반대 세력의 정형과 크게 다를지라도) 역사적 진보 진영의 대항마로서의 〈수동혁명〉를 ‘기획’하고 그것을 실시할 수 있다. 그람시는 이 현상을 파시스트 운동의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 특징에서 찾아내었고, 크로체가 파시즘을 온갖 공허한 ‘헤겔’적·‘윤리학’적 수사로 옹호한 것의 내용적 맥이 다음에 있음을 간파하였다: “파시즘이 초창기에 구(舊) ‘역사적’ 우익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사실에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 [파시스트의 이념에서는] 국가의 법적 개입을 통하여 그리고 조합주의적 단체에 의하여 ‘생산 계획’의 요소를 강화하기 위한 비교적 광범한 수정이 일국의 경제 구조 속에 도입되는 것을 뜻하는 수동혁명이 진행된다. 다시 말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이윤의 사적 취득을 침해하지 않고도(또는 적어도 이에 대한 규제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도), 생산 영역에서의 사회화와 협업이 증대될 수 있음을 뜻하는 수동혁명이 진행된다.”47

 

파시스트 운동은 당시 인민당으로 대표되던 ‘그리스도교 민주주의’, 즉 가톨릭적 수사의 외피를 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진영과 달리, 온건당과 이탈리아 통일 후 ‘역사적 우익’이 그 정치적 행보에서 보여주었던 진지전의 요소를 ‘재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를 진지전의 의식적 전제조건‘지적 지도’와 결부하였을 때, 이들은 그 부르주아적 계급성의 한계로 인해 시대의 역사적 사회형태의 발전 법칙과 필연적 연관을 파악 속에서 그것을 전개하지 못하였고, 오로지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보조로써 충원되는 거짓 선동 요소에 의존하였다. 바로 점에서 낡은 지배계급의 〈수동혁명〉, 파시스트의 〈수동혁명〉은 혁명의 강력한 역행으로서 작용하였다. 즉, 이 특수한 ‘위로부터의 혁명’에서 제출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수사 전반이 이 수사의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돼 있음은 제한적으로만 보장될 수 있다. “실제로, 파시즘은 반동적 세력들의 통일 과정을 인식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언제나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해 왔던 보수와 반동의 강령을 변용한 것에 불과하다.”48 그런데 제한적이라는 것은 거꾸로 여전히 제한적인 부분 외의 영역이 있음을 부정적으로 규정한다. 이 영역에서, 파시스트는 그 한정되고, 현존하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억압하는 만큼이나 억압된 사고 체계의 진지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러한 도식이 실행되었는가, 그랬다면 어느 정도 실행되었는가는 상대적인 중요성만을 가진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파시즘의 도식이 특히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소부르주아와 같은 이탈리아의 특정 사회집단에 대해서는 기대와 희망의 시대를 창출할 수 있다는그리고 실제로 창출한다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도식은 전통적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는 패권 체계와 군사적·시민적 억압의 힘을 강화한다.”47 즉, 그것에는 〈수동혁명〉의 구조를 복구하고자 하는 전통적 자본가계급의 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50​ 관념론적 사관에 빠진 자유주의 역사철학자 크로체는 이러한 진실에 조금도 접근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초기에 파시스트 운동과 권력을 옹호하는 우를 범하였다.

 

§ 34. 능동혁명으로의 상승에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어떠한 정치·경제·문화적 요구의 형태로서 발현하는 하위집단의 자연발생성은 〈지식인〉을 거치고 되먹임을 받아 더 구체화한 요구로 전변한다. 이렇게 상승한 요구는 다시 〈지식인〉을 지적으로 자극한다. 그람시가 논구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 상태의 맥락에서 이는, “농민과 지식인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두 방향의 활동은 상호 변증법적인 관계”51를 가진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농민들이 ‘자연발생적인’ 추진력에 따라 움직이면 지식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또한 반대로 한 지식인 집단이 더 중요한 요소들을 도출해 냄을 알 수 있다.”5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추진력”의 발생에서 하위집단의 고립성과 분산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본적 사회집단이 견인해야 하는 하위집단은 대개 태초에 고립적이고 분산적이며, 그람시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대해) 역사적으로 실증한 바와 같이, 정치적 힘은 순전히 이러한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특질을 유기적이고 집체적인 것으로 조직해 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히려 그는 의식적 지도력이 오로지 이 자연발생성을 자기 매개로 지님으로써만 초보적인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이행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흩어진 것응집된 것이 상호 규정적임을 마주한다.

 

이러한 이행의 조건에서 다루어지는 요구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의 통일이다. 프랑스의 “자코뱅은 미래의 요구들, 다시 말해 특정 집단의 구체적인 개인들의 요구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기본적 집단에 동화되어야 모든 국민적 집단의 요구를 반영했다.”53 자코뱅의 이러한 정치 활동 형태는 “방데(Vendee) 식의 군대54를 소집할 수 있는 모든 수동성의 영역을 적들로부터 박탈하였다.”55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코뱅은 언제나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의 지반 위에 서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대단히 뚜렷하고 단단하게 주조된 정당으로서의 그들의 종말을 획한 사건들과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 의해 입증”56되었다. 예컨대 “그들은 르 샤플리에(Le Chapelier)법을 고수하면서 노동자의 단결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최고가격제 법안을 통과시켜야 했다.”5 즉, “혁명이 자신의 광범한 계급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5

 

§ 35. 〈수동혁명〉의 일반적인 형태즉, 지배계급이 자신을 둘러싼 외적인 경제적·문화적·정치적 요인과 한 나라에서 계급적 역관계를 ‘계산’한 속에서 전개하는 ‘혁명’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발전 연관 내부에서 재배치된 전체 정치적 요인은 상호 연관을 맺으며 특정한 기본적 사회집단에 대한 일련의 정치적 상승과 하강 작용을 규정한다. 운동에서 피지배계급의 전술이 일정한 반대 작용을 하며, 〈패권〉의 세분화한 전선, 즉 분화한 진지들이 구축된다. 진지들은 생산 부문·지역·기타 교육적인 것 등 대자적으로 자립하는 단위로 나뉠 수 있는데, 이렇게 자립성을 지닌 진지를 블록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그람시가 “도시 블록”, “농촌 블록”, “문화 블록” 등으로 칭한 개별적 정치 요새의 형태로 존립한다.

 

§ 36. 그람시가 지금까지 전개한 정치 전술은 오직 유물론적 방법의 역사주의 원리 인식 작용을 다루는 과학·인류 과학사이비 혁명적 공문구와 틀에 박힌 ‘정세 분석’의 장막에 숨은 좌경 맹동주의자들이 혁명 활동에서 애써 무시하며, 결단코 다루지 않으려는 학적 체계이 총체성의 사유 아래에 접목되었을 때라야 성립할 있다. 즉, 역사적 유물론에서 역사적 분석은 기원적으로는 철학의 어머니이지만, 역사의 더 세밀한 영역을 분석해 들어간다면, 현시점에서 축적된 역사적 분석의 결과로써 수립한 철학 원리가 역사적 분석의 학문적 토대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헤겔적 범(汎)논리주의에 명백하게 적대적이다.

 

혁명의 성취라는 목적 속에서 모든 공산주의자가 단지 유물론자라는 말은 공산주의자가 실천으로써 변동시키는 또는 그렇게  생동한 현실의 주체적  계기를 보여줄  없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공산주의자는 역사주의자이자 결정론자라는 입장이야말로 목적에 복무하는 데서 적합한 정식 형태이다. 그런데 역량의 척도 하나인 주체적 힘은 역사주의적 결정론과 어떻게 하여 합일될 있는가? 수고에 남아 있는 실천철학적 내용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기계론적 편향에 대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입증해 준다. 그는 문제의 해명을 위해 수고에서 속류 사회학이 다루는 ‘인간’과 ‘심리’를 역사적 유물론이 밝혀낸 역사 발전 원리라는 여과기를 도입, 내부 모순을 폭로하고, 인간과 인식 작용에 대한 혁명적인 개념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가 정립한 전술 원칙에서 군중의 세계관에 접근, 그것에 보편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 원리를 변혁하는 일과도 연결된다. 때문에 그의 철학은 정치학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의 문제, 세계에 대한 체계적(통일적이고도 논리적인) 개념에서 정치학이 차지하는 위치, 실천철학에서의 위치들에 관한 문제”59 그가 관심을 쏟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에서 제기되어야 하고 해결되어야 번째 문제”5이다.

 

2025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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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탈리아의 연방주의적 역사가·철학자 주세페 페라리(Giuseppe Ferrati, 1811-76).텍스트로 돌아가기
  2.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87.텍스트로 돌아가기
  3. 위의 책, 110-1.텍스트로 돌아가기
  4. 위의 책, 70.텍스트로 돌아가기
  5.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6. A. F. Gramsci, 『감옥에서 보낸 편지』, 양희정 역, 서울: 민음사, 2000, 280.텍스트로 돌아가기
  7. 그람시의 다음과 같은 고민은〈수동혁명〉이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확립과 분리될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대중 봉기를 통해 공산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사람들(그리고 실제로 공산주의자인 사람들)의 수중에 권력이 장악된다고 해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 우리는 이러한 역사 전개를 독일,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우크라이나, 그리고 헝가리에서 목도해 왔다. 혁명은 파괴적 행위에 머물고 말았으며, 공산주의 노선에 따른 재건 과정으로서의 혁명은 뒤따르지 못했다.” (「두 개의 혁명」, 『옥중수고 이전』, 2001, 219-20.)텍스트로 돌아가기
  8.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70.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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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위의 책, 71.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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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위의 책, 71-2.텍스트로 돌아가기
  16. 위의 책, 72.텍스트로 돌아가기
  17. 리소르지멘토 기간 온건 자유주의, 연방주의, 공화주의 및 신(新)구엘프 운동을 포함한 온건적인 가톨릭-군주제 지지 세력의 이탈리아 통일운동 연합체였다. 다첼리오(d'Azeglio)와 카보우르(Cavour) 지도기에 속하는 1849-59년에 당적 체계를 갖추면서 피에몬테 정치의 전면에서 주요하고 지배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온건당은 피에몬테 지역에서 막강한 패권을 행사하며 리소르지멘토 진행 수준에 상응하는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1861년 통일의 최대 수혜 집단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정치에서 ‘역사적 우익(Destra storica)’으로 이행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8. 1853년 3월에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탈리아의 급진주의 정당이다. 리소르지멘토 기간 좌익 공화주의자들을 흡수하여 우익인 온건당과 양대 세력을 구성하였다. 1859년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가 이 당에 합세하여 시칠리아에 군사집단을 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조직은 이탈리아 정치에서 ‘역사적 좌익(Sinistra storica)’이 계승한 집단이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9. 위의 책, 77.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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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위의 책, 78.텍스트로 돌아가기
  22.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1876년 이후 ‘역사적 좌익’에 속한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Agostino Depretis) 총리의 지도 아래에서 ‘역사적 좌익’과 ‘역사적 우익’의 정치적 견해 상 차이가 크게 해소된 경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현상은 같은 ‘역사적 좌익’인 조반니 지올리티(Giovanni Giolitti) 집권기에 더욱 심화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3. 위의 책, 78-9.텍스트로 돌아가기
  24. 위의 책, 79.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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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위의 책, 82.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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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위의 책, 98.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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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위의 책, 130.텍스트로 돌아가기
  34. 위의 책, 136.텍스트로 돌아가기
  35. 위의 책, 137.텍스트로 돌아가기
  36. 위의 책, 149.텍스트로 돌아가기
  37.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8. 위의 책, 149-50.텍스트로 돌아가기
  39. 위의 책, 79-80.텍스트로 돌아가기
  40. 위의 책, 137.텍스트로 돌아가기
  41. 자세한 내용은 C. Buci-Glucksmann, 「국가, 이행, 수동적 혁명」, 『국가·계급·헤게모니: 그람시 사상 연구』, 임영일 편, 서울: 풀빛, 1985, 287-316.을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42. 〈수동혁명〉은 용어의 측면에서 보자면, 국가기구의 지배 작용에 군중이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적지 않은 그람시 해석가는 프롤레타리아의 능동혁명을 이에 대비하면서, 〈수동혁명〉을 지배계급의 ‘혁명’ 방식으로만 다루고 그것의 프롤레타리아적 전유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의 제출은, 그가 혁명사에서 피지배계급 또는 여전히 정치적인 ‘물질적 힘’이 성숙하지 않은 제 계급의 정치적 도약 지점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를 고민한 지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3.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 그람시가 〈수동혁명〉의 구도에서 온건당의 지위를 어떻게 파악하였는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옥중 저술에서는 〈수동혁명〉의 주체가 모호하게 정리되어 있다. 예컨대, 앞서 살펴본 바처럼, 특정 사회집단이 권력을 확고히 잡았다고 하더라도 ‘지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870년과 1876년 이후에도 온건당이 행동당을 ‘지도’했음을 말한다. 이는 최소한 그가 온건당이 1870년 전(그보다 더 과거로 잡는다면 1860년대 초반)에는 권력을 잡기 전이었다고 파악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78.) 그러나 수고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서술은 〈수동혁명〉이 1850년대 초반부터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온건당이 이 ‘혁명’의 주체라면 온건당은 권력을 수중에 넣기도 전에 ‘혁명’을 주도한 것이다. 심지어 이를 둘러싼 온건당과 피에몬테 국가의 관계 또한 그의 수고에서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탓에 여러 혼란을 야기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4. 조희연은 한국의 ‘87년 체제’를 능동혁명의 잔재가 일정한 작용한 결과로서의 수동혁명이라고 취급하며, 이를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의 길”이라 명명하고 있다. (조희연, 「87년 이후의 ‘수동혁명’적 민주화와 시민운동의 구조적 성격: 맑스주의와 한국의 시민운동」, 『지구화시대 맑스의 현재성 2』, 서울: 문화과학사, 2003. 240 ff.)텍스트로 돌아가기
  45. 「이탈리아의 상황과 PCI의 과제 (리용 테제)」, 『옥중수고 이전』, 2001, 406-7.텍스트로 돌아가기
  46. 〈수동혁명〉에 대한 주된 연구는 이러한 기조 위에서 수행되고 있다. 예컨대 J. A. Davis, 「그람씨와 이탈리아의 수동적 혁명」, 『국가·계급·헤게모니: 그람시 사상 연구』, 1985, 277-9.은 공산당이 〈수동혁명〉을 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그람시가 “시민사회의 제도들”을 활용할 것을 권장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전술로서 〈수동혁명〉을 택하라고 주장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지적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7.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155.텍스트로 돌아가기
  48. 「이탈리아의 상황과 PCI의 과제 (리용 테제)」, 『옥중수고 이전』, 2001, 390.텍스트로 돌아가기
  49.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155.텍스트로 돌아가기
  50. J. A. Davis, 「그람씨와 이탈리아의 수동적 혁명」, 『국가·계급·헤게모니: 그람시 사상 연구』, 1985, 271.텍스트로 돌아가기
  51.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99.텍스트로 돌아가기
  5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53. 위의 책, 103.텍스트로 돌아가기
  54. 성직자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에 반발하여, 1793-6년 프랑스 서부의 방데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왕당파 대지주들과 사제들이 농민 군중에게 친위 쿠데타를 교사해 발발한 전쟁.텍스트로 돌아가기
  55. 위의 책, 104.텍스트로 돌아가기
  56. 위의 책, 105.텍스트로 돌아가기
  57.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58.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59.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148.텍스트로 돌아가기
  6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