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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들

 

말걸기[역사적인 날]에 관련된 글.

 

 

기분이 별로다. 10년 쯤 공들인 정당이 쪼개졌다. 이런 일은 피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될 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언짢다. 사람의 감정이란...

 

 

1.

 

96년 가을에 군대 제대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 보니 기존 정파들과는 다른 학생운동을 하고자 했던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잡지도 내고 이러저러한 활동도 했었다.

 

이들은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92년 대선 때는 경찰들 때문에 선거운동하기 힘들었지 교내에서의 선거운동 분위기는 좋았다. 반면 97년 대선에서 우파는 김대중 지지해야 한다고 하고 좌파는 후보전술도 없으면서 권영길은 민중후보가 아니라고 우겨서 힘들었다.

 

하루 죙일 힘들게 대형 플랭카드를 여러 개 만들어서 학교를 도배했더니 한 순간 바람에 다 찢겼던 일도 있었다. 신촌로터리에서 선거운동 하려고 상가를 돌아다니며 앰프에 사용할 전기를 끌어오려했더니 상가 주인들은 '우리는 이회창 지지한다. 못 준다' 해서 무안 당하며 신촌 한 바퀴 돈 적도 있었다. 결국 길가의 작은 구두닦이 아저씨가 전기를 빌려주셨다.

 

이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교내 좌우 정파들의 다굴에도 꿋꿋하게 권영길 선거 운동했다. 지난 대선 후보 경선에서 주사파-국민파 아니면서 권영길 지지한 사람들은 좌파들한테 욕먹는 걸 무지 싫어했는데 97년에 양쪽에서 다굴당하면서 선거운동 해 봤는지 모르겠다.

 

97년 대선에서 가장 쇼킹한 사건은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이었다. 선거 운동 기간 중 어느 날 집을 나오는데 동네마다 '일어나라, 코리아!'가 걸려 있었다. 숨 넘어가 뒈지는 줄 알았다. 권영길 선거운동을 함께했던 그들은 학교에 모여 이 말도 안되는 구호에 항의를 하기로 했다. 결국 하룬가 이틀만에 투쟁적인 구호로 바뀌었다. 전국에서 난리쳤으니까.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은 간첩 최기영이 깊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2.

 

98년에 말걸기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어 정치활동을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그 해를 거치면서, 학교에서 함께 권영길 후보 선거운동을 했던 이들은 국민승리 21을 통해 진보정당 지역 조직 건설을 주도했다. 말걸기는 이들과 함께 국승 21 회원이 되었고 진보정당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이들이 민주노동당 서대문/마포/은평 지부 건설을 주도했다.

 

1999년 여름 63빌딩에서 열린 창당발기인대회는 역동적이었는데 그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걸기는 '사회노동당'이라는 당명을 지지했는데 결국 결선에 오르지 못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기립 투표를 했었는데 당명 제정을 위해 네 번 씩인가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창당 과정에 함께 한 말걸기는 그후 지역조직에서 그 많은 당직 중 대의원이나 회계감사 따위의 당직을 수행했다. 나름의 인생 계획을 포기하고 2000년 6월 지자체 재보궐 선거를 지역에서 치른 후에 민주노동당 중앙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웃기는 조직이었다. 사실 운동권 조직이라는 게 그런 조직이었다. 책임과 권한은 분명하지 않았고 개인의 정치력과 끈에 따라 그가 추진하는 사업의 위상이 달라졌다. 내부의 꼬라지가 이런 것이었다면, 2002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민주노동당 명함 가지고 밖에 나가면 천대받기 일쑤였다.

 

 

3.

 

그래도 2002년 지방선거와 대선은 참으로 재미 있는 선거였다.

 

말걸기는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 선거사무실로 파견되었다. 이문옥 서울시장 후보 선거와 심재옥 의원을 당선시킨 광역비례의원 선거를 도왔다. 개봉동에서 보문동까지 출퇴근하는 건 참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도 때 되면 나오는 맛나는 밥을 먹으며 한 가지 한 가지 일을 해내는 건 보람찼다. 당시 사무총장이자 서울시지부장이었던 노회찬은 서울시 선거를 별로 챙기지 않아서 서거 사무실 분위기가 험악해진 일이 몇 번 있었지만 말이다.

 

이 당시 가장 기억나는 건 두 가지이다. 홍보담당자를 도와 공보물 운송 상황실 역할을 했었던 일이다. 인쇄소에서 출발한 공보물이 각 지역조직에 제대로 전달되어 선관위에 제시간에 제출이 되었는지 일일이 확인했었다.

 

또 하나는 선거차량이 돌아다니면 틀어대는 선거 방송 녹음이었다. 인맥으로 목소리 좋은 사람을 하나 섭외했는데 목감기가 걸려버린 것이었다. 파란꼬리가 긴급 출동해서 선거 방송 녹음을 했다. 파란꼬리는 그 후 몇 차례 공직선거에서 비전문 성우로서 민주노동당에서 사용한 차량용 선거 방송 녹음을 했다.

 

2002년 전반기에 노회찬은 말걸기가 일하던 부서에서 내버려지도록 방관했는데 이재영이 줏어갔다. 그래서 지방선거 후부터 정책위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해 대선 준비는 힘들었다. 여름부터 각자 맡은 분야의 정책/공약을 만들어내야 했다. 당과 친한 단체와 인맥을 바탕으로 정책/공약은 '조직'되었다. 해당 전문가들이 기초 자료를 제공해 주었고 초안을 작성해 준 경우도 많았다. 물론, 당의 핵심 공약들은 당 정책위 멤버들이 직접 관리해서 만들어냈다.

 

이런 작업도 힘들었지만 가을부터 날라오는 질문지는 책상에 쌓였다. 온갖 이익단체들의 질문을 가장한 뻔뻔스런 요구들이 가증스러웠다. 그때 종교계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일은 TV 토론회 준비였다. 방송국이 하루 이틀 전에 콘티를 확정해서 주기 때문에 이걸 바탕으로 질문-답변 자료를 만들고, 심지어는 후보 교육까지 하려면 세빠진다. 그러다가 11월 말 쯤 되니 국가가 주관하는 TV 토론회 준비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TV 토론회 이틀전부터를 제외하고는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할 때까지 자다가 오락하다 밥 먹다 수다 떨다 하며 놀았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는 팀플레이로, 스타크래프트는 혼자서 대놓고 했는데 당사를 들락거리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책위는 이 엄중한 시기에 논다'고 손가락질 해댔다. 그것들은 여름부터 밤 세워가며 일한 적 없는데 선거운동 기간에만 바쁜 것들이었다. 일도 안한 것들이 꼭 그런식으로 남 욕한다.

 

 

4.

 

2002년 대선 개표하는 날 득표가 많지 않아 기분이 좀 상했다. 그러다가 표 계산을 다시해 보니 노무현도 이회창도 과반을 넘지 못했고 각각 득표수에다 권영길 표를 더하니 50%가 넘었다. 그때 '캐스팅 보트'를 쥐었구나'라며 소수파에게는 이런 '포지셔닝'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날 개표 방송을 하는 TV 앞에서 많은 당 지도부들이 노무현 당선에 박수치면 환호하는 걸 보았다. 심상정도 밝게 웃으며 박수를 쳤는데 왜들 그러는지 의아했다.

 

 

5.

 

어쨌거나 2002년 지방선거 정당특표가 8.13%를 달성하면서 한국 사회가 놀랐다. 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밖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들의 태도는 2004년 총선이 다가올수록 공손해졌다. 심지어 2003년에 말걸기는 문화연대(사실 문화연대의 힘이 컸다)와 함께 문광부가 발의하고자 했던 법안도 기초부터 고쳐버렸다.

 

이런 변화는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희망만큼이나 불안이 엄습해왔다. 민주노동당의 외적 성장은 놀라왔고 그래서 당 밖의 주사파와 민주노총 제 정파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커가는 정당을 두고 정치집단들이 눈독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민주노동당은 다양한 이해를 가진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낼 수 있는 기본적인 룰을 갖추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떤 정파들도 권력의 상대적 우위를 추구했지 감시, 투명성, 민주적 절차는 부차적으로 다루었다.

 

2004년 의회진출을 이루던 날 10명의 국회의원들이 사고칠 것 생각하면서 아득해 했다. 이들은 성과이자 재난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런 불안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들은 터졌다.

 

2004년 국회의원 당선으로 돈이 생긴 민주노동당은 많은 정책 전문 인력을 선발했다. 이는 2003년부터 정책위에서 준비한 기획의 결과였다. 정책위의 각 구성원은 확대된 당 기구로 분산되었다. 그래서 말걸기가 45명이나 되는 정책연구원들 따깔이 역할을 그 해 여름까지 했다. 진짜 자기 똥도 못 닦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문제는 새 지도부가 똥 닦을 휴지도 안 주었다는 점이다. 치사하게스리. 어쨌거나, 이 인간들 중에는 낙하산과 잘못 집어온 쓰레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자기 분야에서는 훌륭한 능력을 지닌 인재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말걸기 따위처럼 당내 국회권력에 대항하기도 했다. 정책위의 적지 않은 구성원들이 당 소속의 국회의원들과 맞짱 뜨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걸 두고 좌우 제 정파 모두 '정책위라는 정파'의 자기 권력 확대를 위한 행동들로 낙인 찍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정파를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을 보위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민주노동당이 망한 진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종북주의'는 원인이 아니라 이 따위 것들의 결과일 뿐이다.

 

 

6.

 

2006년 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말걸기는 김정진 후보 선거 운동을 했다. 후보까지 3.5명 전국 선거를 치렀다. 그나마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선거를 했다.  재밌기는 했는데 좀 힘들었다. 8%의 득표로 낙방했다. 서울에서 김기수 전 최고를 이겼다는 것 하나는 기뻤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당직을 버렸다. 정책위 의장으로 이용대 당선이 확실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말걸기는 숙청당하기 전에 사직했다. 이용대는 정책연구원이 아닌 정책위 멤버를 모두 숙청했다.

 

두 번째 주사파-국민파 동맹 지도부는 하는 짓이 벌써부터 이상해서 퇴직금을 받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사직한 9명을 꼬셔서 퇴직금을 받아내기로 했다. 그러던 중 고발까지 가야할 지도 모른다는 말에 두 명이 빠졌다. 말걸기가 8명치 퇴직금을 받아내는 일을 주도했다. 수 개월 만에 전부 받아냈는데 고발장 접수 시한 1분 전에 통장에 입금되었다.

 

나중에 말걸기와 함께 퇴직금을 받은 이재기가 의정지원단장으로 발령을 받자 주사파들이 돈 없는 당에서 퇴직금까지 받아낸 놈이 당직을 수행해서는 안된다고 지랄을 했다. 그때 주모자가 말걸기라고 해주지 않아 기분 나빴다.

 

 

7.

 

2006년 당직이 없던 말걸기는 가을에 지역위원회 좌파테이블에서 이런 저런 일을 했다. 사실 '논의'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2007년 지역위원회 선거에서 좌파블럭 공동선본 선거본부장 역할을 해서 지역위원장, 부위원장 등을 당선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당시 지역위원회 구도는 참 우스웠는데 좌파는 지역위원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협상의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일산으로 이사를 하려고 했던 말걸기와 파란꼬리에게 그 선거는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한 지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정치활동이 되었다.

 

 

8.

 

2007년 봄에는 잠시 레디앙에서 민주노동당 출입기자로 있었다. 주로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두고 심상정을 취재했었다. 심상정 선본이 말걸기에게 어처구니 없는 짓을 여러 번 해서 심상정에 대한 감정이 더 안 좋아졌다. 제일 짜증나는 건 말걸기가 정책위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노회찬을 지지한다고 미리 정해놓고 상대하는 점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선 후보로 권영길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당원인 출입기자더러 심상정은 지지하지 말라는 심상정 선본의 메시지로 알고 안티-심상정이 되었다.

 

2007년 여름 일산으로 이사한 말걸기는 한 번도 고양시위원회 행사에 나간 적이 없었다.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만드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9.

 

2007년 대선 전부터 분당 얘기가 돌았다. 분당의 이유가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실제로 진행이 되면 적절한 수준에서 힘을 실어주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나 막상 대선 후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대두되자 실로 짜증이 났다. 그러던 중 권영길은 지역구 재선을 위해서 대선 후보가 되었다는 걸 스스로 고백했고 심상정이 지명한 비대위원들을 보고서는 적당한 때 탈당하기로 맘을 먹었다.

 

어느 날 이재영이 전화해서 집단 탈당하자고 했고 1월 21일부로 함께 탈당을 했다. 집단탈당하자고 꼬셨던 인간들 모두 말걸기에게 탈당 후 뭐 어떻게 하자는 얘기를 한 마디도 안 했다. 뭐냐, 이거. 신당 하자는 거야 그냥 해산하자는 거야 뭐야. 혼자 궁금해 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조현연에게 전화했더니 그제사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대충 분위기 파악했다.

 

 

10.

 

민주노동당은 말걸기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아주 값진 선물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민주노동당 지역 활동과 중앙당직 수행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말걸기는 이 만남에서 '신뢰'를 경험했다. 정치적인 신뢰이자 인간적 신뢰였다. 또한 이들과의 만남에서 입장차를 조정하는 방법과 협력을 경험했다. 실로 값진 날들이었다.

 

블로그에서 만날 수 있는 della, 다섯병, 행인, 간장공장, Tori, Neo 등 정보운동가들, 그리고 문화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당내의 훌륭한 정치활동가들도 많다. 이들은 활동의 무게에 따라 가까와지거나 멀어지곤 하지만 그래도 쉽게 신뢰가 침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11.

 

2008년 2월 3일, 민주노동당은 말걸기가 청춘을 바친 것 치고는 초라한 결말을 맞이했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말걸기와 진보정당의 길을 함께 걸어온 동지 파란꼬리도 2월 4일로 민주노동당과 완전히 인연을 끊기로 했다. 파란꼬리는 말걸기의 청춘을 진정 슬퍼해 주었다. 감사한다.

 

 

12.

 

지난날을 돌아보니 말걸기는 여전히 진보정치활동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조만간 신당파 쪽에서 연락이 올 것이다. 그들의 요구와 말걸기의 지향이 일치하는 지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물론 말걸기는 올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신당쪽 일을 해도 조금만 하게 될 것이다. 아예 하지도 말까 싶기도 하다. 어차피 이 신당도 10년 내에 내홍을 겪을 테니까. 스탈린주의자들과 신좌파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