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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hit 이벤트

1.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이벤트를 해보려고 해요.

매일매일 찾아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지금 99921이네요~~

블로그를 옮기느라 0부터 다시 시작하고

블로그를 개편하고 나서 다시 0부터 시작한 거니

이 10만은 참 대단한 10만이 아닌가 싶은데요 ^^

 

10만번째 분께

영화 예매권 2매를 선물로 드릴께요~^^

앞뒤로 두분께는

음....암튼 모종의 선물을 준비할께요.

아주 작은 선물이지만

즐겁지 않을까요?

10만을 바라보는 저도

무지 즐겁습니다. ^^

 

2. 사실은 글을 하나 올리려고 들른 건데

문득 방문객수가 99923인걸 보고

숫자가 신기해서 오랜만에 이벤트를 해요.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옮긴 분들이 많아서

불질이 예전같진 않지만

그래도 가끔 주저리고 싶을 때

찾아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내요.

뭔가를 쓰려고 앉으면 그 시간에 숙제를 해야지, 이런 생각에

얼른 볼일만 보고 나가는데

오랜만에 그냥 글을 올리고 싶어서요.

 

월요일 밤은 늘 적당한 우울에 빠져듭니다.

따뜻한 위로로 마감이 되는 경우가 많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주변에 상실의 슬픔을 겪은 이들이 많아요.

저희집만 해도 늘 졸졸 따라다니던 순돌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여전히 짜르르 하는 아픔을 가끔 느끼기도 하고

아이들은 어느날 문득 순돌이 이야기를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잘 살고 있겠지?

그렇게 물으며 우리와 함께 지냈던 어떤 존재에 대해서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상실, 이별은 늘 아픕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믿지 않으면

그 아픔이 늘 함께 할거라고 생각하면

웬지 좀 우울해지니까.

괜찮다고, 지금의 시간도 지나갈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영화이야기예요.

위로를 건네며.

 

조약돌만큼 작아진 슬픔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다. 내게는 아이들이다. 아이가 내게 온 후, 나는 먼 나라의 전쟁 소식에도 잠을 설쳤다. 불행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내 아이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래빗홀>은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불행을 만난 어떤 부부의 이야기이다. 8개월 전 사랑하는 아들 대니를 잃은 베카와 하위는 여전히 슬픔에 빠져 있다. 집 안에 남아있는 대니의 흔적을 지우려는 아내 베카와, 대니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미래로 나아가려는 하위는 서로 섞이지 않은 채 각자 슬프다. 상실감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카는 대니를 죽게한 소년 제이슨을 만나고, 하위는 비슷한 상처를 가진 여성 개비로부터 위로를 구한다.

 

영화의 제목 <래빗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그 래빗홀(토끼굴)이다. 토끼굴이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인도했던 것처럼, 베카와 하위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래빗홀을 찾는다. 대니를 죽게한 제이슨에게도 래빗홀은 절실하다. 그래서 제이슨이 그리는 만화의 제목 또한 ‘래빗홀’이다. 만화 ‘래빗홀’에 등장하는 평행우주이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평행우주이론은 확률적으로 이 우주에는 여러 명의 '나'가 있어서 곳곳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는 이론이다. 여기의 내가 슬퍼하고 있어도 그건 슬픈 버전의 나일 뿐이고 우주의 어느 시공간에는 행복한 버전의 내가 살고 있다는 가정은 슬픔을 조금은 묽게 만드는 듯하다. 그리고 나의 아이가 이 생애에서는 소멸하고 말았지만 우주의 저편에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상상은 위로를 주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전하는 한 사람이 있다. 서른 살에 죽은 아들 아서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베카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때론 신의 이름으로, 때론 아들을 잃은 엄마의 입장에서 베카를 위로한다. 하지만 베카는 두가지 위로 모두를 거부한다. 이런 고통을 주는 신은 새디스트일 뿐이라며 냉소를 날리고 “약에 쩔어 죽은 서른 살 아서와, 개를 쫓아가다 차에 치인 네 살 아이를 절대 비교하지 말라”며 차갑게 돌아선다. 베카와 하위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정원손질과 요리, 회사일에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다가도 일상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슬픔의 웅덩이에 빠져든다. 밀려드는 기억을 감당할 수 없어 대니의 짐을 모두 창고로 옮기던 날, 베카는 그토록 멀리하던 엄마에게 묻는다.

 

“사라지나요?”

“사라지지 않는 것같아. 하지만 견딜만 해진단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바위가, 언젠가부터는 빠져나올 만큼 되더니 지금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조약돌이 되었어. 좋아할 수는 없지만 아들 대신 있는 그 무엇.”

같은 고통을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외면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래빗홀을 찾던 베카와 하위는, 결국 받아들인다. 절대 잊혀지지 않겠지만 이 고통과 상실을 견뎌야 함을, 이 생애와 이 관계를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결국은 인정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동안 위로의 방법을 몰라 머뭇거리며 지켜보던 이들을 위해 파티를 연다. 대니와 동갑내기인 아이를 키우고 있어 슬픔을 상기시킬 것같아 전화조차 걸지 못하던 회사 친구, 언니의 슬픔 때문에 자신의 임신을 아껴가며 기뻐하던 여동생, 그리고 베카의 어머니.

"야외요리를 하는 거고…그들이 놀러오겠지. 다른 사람들도 초대하고. 너무 어색하지 않게. 그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애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고. 우리가 정말로 관심이 있는 척 해야지. 그리고 누군가 대니를 언급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애들이 노는 동안 그리고 그 얘기를 잠시 나누고 그게 끝나면 다들 집에 가겠지"

 

부드러운 웃음 속에서 파티는 끝나고 기울어가는 저녁 햇살, 삶의 비의를 담은 듯한 그 빛 안에서 부부는 나란히 앉아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겠어. 무언가 또 기다리고 있겠지."

다른 이가 보기에는 찻잔 속 태풍일지라도 찻잔 안 세상을 전부로 여기며 살아갈 평범한 시간. 그 시간들을 기다리는 동안 슬픔은 사위어갈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조약돌만큼 작아진 슬픔, 사랑했던 이의 기억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옛날을 기억할 것이다. 한때 슬펐던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 슬픈 이들에게 영화 <래빗홀>은 부드러운 위로를 건넨다. 견디고 기억하는 그 모든 시간을 거친 후 그때서야 위로는 값지게 온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주는 신의 눈길처럼 <래빗홀>은 부드럽게 우리를 위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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