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5년 11월 23일

"저는 진실이 묘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인 거죠. 다만 저들이 인정을 안 하고 있는 겁니다. 물증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증을 없애면서요. 유족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역사로 만들어야죠. 저들은 국가의 모든 기관과 힘을 동원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하겠죠. 거기에 저항해야 합니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되살리고, 남겨야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주체들이 싸우지 않으면 역사에 남지 않을 겁니다."

답답하고 암담해보일지라도 오늘도 기억투쟁.

Ban Da 의 글을 읽은 후
사고 전에 공감하며 읽었던 반다의 글이
사고 후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함을 느낌
토요일 부산 강의는 연초에 맡게 되었던 거다.
장애학회 선생님들과 함께 나도 일부를 맡았는데
내가 맡은 부분은 영화나 드라마의 일부 클립을 보며 진행하는 거라
청중의 호응도가 높고 재미있어 했다.

그 후로도 두 번 정도 더 기회가 있었으나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라는 이유로
죄송스런 거절을 드린 후
연초의 강의는 까맣게 잊고 있었고
뒤늦은 '리마인더' 메일을 본 후에 아차 싶었고
그래서 미처 거절을 못했고
일정도 조정을 못해서
토요일에 부산을 다녀왔다.

교통사고로 목 위만 움직일 수 있는 최중도 장애를 갖게 된 31세 남자.
CJ이재현회장과 같은 장애,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10살 때 아파오기 시작해 팔과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여성.
그 여성은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 이야기>를 소개하며
"장애여성과 결혼한 비장애 남성한테는 천사표가 붙기 때문에
부부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다"라는
내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길은, 가면 뒤에 있다>의 "결혼은 내 인생의 축제였다"는
인터뷰이의 말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분위기를 깨뜨린 노년의 남성이 너무 밉다.
평생을 비장애남성으로 살아오면서
한 번도 공감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것같은 그는,
역시 옆자리의 비슷한 연배의 남성과 함께
판을 깼다.
옆자리 비슷한 연배의 남성은 내게 이렇게 말을 했다.
"강의 내용이 이해가 안된다. 다른 사람한테 한 번 물어봐라"
그 순간 청중 중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갑자기 첫번째 남성이 깽판을 쳐서 끌려 나간 후
두번째 남성 또한 그 남성들을 말린다는 이유로 같이 나간 후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하면서
역시 60대 정도로 보이는
휠체어 장애 남성이 말했다.
"늘 그랬다. 우리는 더 듣고 싶은데 빨리 끝내달라고 그랬다"

더 소리치고 더 싸웠어야 했다는 생각을 그제서야 했다.
스무명이 함께 하는 강의실 안에서도
강의실 밖의 권력관계는 그대로 스며있다.
비장애인/ 남성/ 노인/들이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는지 수시로 만나니까.

봄날의 어느 날,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전철을 탔을 때
소풍이었는지 곱게 차려입은 여중생들이
발랄하게 재잘거리는데(시끄럽긴 했다)
그 자리에서도 비장애인 / 남성/ 노인/은\
"조용히 해! 이 놈의 가시나들이!"라고 소리쳤고
여중생들은 혀를 빼물고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욱해서 소리칠 뻔 했지만
당산에서 내려야해서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면서
혼자서 소리치는 상상만 하며 내려야했다.
당신이 뭔데 남의집 귀한 자식들한테 그딴 식으로 소리치냐.
"얘들아, 좀 조용히 해주면 안될까?"라고 해도
알아듣는 애들이야.

평생을 호령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곳이 지네 집 안방이든, 전철이든, 하다못해 강의실이든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나 없나 보고
저랑 비슷한 또래의 인간이 있으면 권력을 양분해가면서
호령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그 긴시간을 보낸 후
아침 6시부터 밤 11씨까지 긴 외출을 끝내고 돌아오니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남자가 있지.
두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명의 남자는 괜찮은 것같다.
어린 여자 은별이는 자주 농담으로 "싸나이가~"라는 말을 하는데 
그때마다 어린 남자 한별이는 "너는 왜 그렇게 편견에 사로잡혀있냐"
(한별은 정말 입말로 이런 표현을 했다) 라며 말리고
어떤 날은
"엄마 은별이가 저렇게 이상한 말 할 때에는 딱밤 주기 같은 거 하자,"
라는 제안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가을 어느 날엔 넷이서 산책을 하다가 근처 포도밭에서 포도를 샀는데
하은이가 집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오더니
자전거 뒷자리에 포도박스를 싣고 잘 갔다.
"와 너무너무 멋지다!"라고 했더니
은별이, 
"엄마, 여자한테는 예쁘다고 해야지 멋진 건 남자들한테나 하는 말이지"
라고 해서 또 한별이는 한숨과 함께 "너는 왜 그렇게 편견에..." 
라는 말을..... ^^

문제는 다른 큰 남자이다.
남자들을 적으로 돌리려는 게 아니다.
어제 녹색당 토론회를 보는데
한 후보자가 그런 얘기를 했다.
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는 권력자의 위치에 서는 경우가 있다.....
멋진 문장이었는데 제대로 옮기지는 못하겠고
나의 말로 옮기면 이런 거다.

끊임없이 나의 자리를 회의하는 것,
내가 가진 것들을 의심하는 것,
그것이 꼰대가 되지 않는 길이다.

다큐멘터리감독인 내가 꼰대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죽음을 의미한다.
더이상 다큐멘터리감독으로서의 자격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더 예민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해져야 한다.
어느 날,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독립다큐멘터리감독이다.
당신을 내 남편으로 소개할 때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
남편은 당황하는 듯했다.
그 때까지 남편은 
"내가 좀 보수적이긴 하지만"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나는 그날 얘기했었다.
보수적인 건 쪽팔린 거야.
그렇게 양해를 구하거나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니라구.
같이 다니기 싫은 상태는 되지 말기를 바래.
그렇게 서로 노력하는 중이다.

글이 딴 데로 샜는데
어제 전철원과 주고받은 얘기이기도 한데
열심히 강의를 준비해서 참여자들과 같이 나누려고 하면
몇몇 사람이 번번히 판을 깬다.
강의가 재미없어서 졸거나 그런 거라면 내 잘못이다.
하지만 출석체크를 위해
수료증을 따기 위해 
앉아있는 경우라는 걸 감지하는 순간이 있다.
심한 경우에는 내내 딴짓을 하다가 수업이 끝나고 나면
"자료 좀 공유해주세요"라고 USB를 내미는 경우이다.
내가 하는 강의라는 게 결국
나와 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문밖을 나서면 동종업계 종사자이다.
그러니 수업에 쓰이는 동영상이나 ppt는
그도 곧 다른 장에서 쓸 수 있는 자료라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노골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사고 직전에 잡힌 교사재교육양성과정에 참여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은 늘 혼재되어있다.
이제월의 말처럼
나의 의미를 믿고
나를 바라보는 신뢰의 눈동자들을 믿고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믿고
그 믿음을 딛고 가는 거다.
누군가의 어둠이 나한테 스미지 않게.

처음엔 아래 글을 링크하면서 쓰려던 글이 딴 데로 샜다.
세월호 도보행진이 진행된다는데
거길 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가
요즘 하루 쓸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있는데
사고 이전에 쓰던대로 뽑아쓰고 나면
다음날은 쉬어야하는 상황을 몇 번 반복하고나서
마음을 접는다.

"저들은 국가의 모든 기관과 힘을 동원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하겠죠. 거기에 저항해야 합니다."
네 저항하겠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정말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