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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9일

1. 위로

늘 위로는 뜻밖의 곳에서 온다.
김창한 형이 유일한 방문객이었는데
단양에서 올라온 형이 근처에 있다 해서
병원을 알려주었다.
진심으로 면회사절이었던 이유는
사고 초반에는 너무 아파서 누군가를 만나고 응대할 상황이 아니었고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는 씻지를 못해서 
가족 이외의 누군가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
나는 안 씻는 걸 잘하는 사람인데
그런 나도 일주일이 지나니 견딜 수가 없었고
또 주변 사람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미안해서
수건을 쓰고 지냈다...떡진 머리를 숨기기 위해.

짐승이형이 근처에 와있을 때에는
강이엄마의 배려로 1인실에 머물 때였고
나는 모처럼 씻었기 때문에 좀괜찮았다.
짐승이형이 상냥한 사람은 아닌데 형한테 의외의 위로를 받았다.
사고 이후 오랫동안 나는 좀 억울한 상태였다.
편집에 들어가기 전
극도의 몰입감과 의욕으로 콘티까지 짜가면서 촬영을 진행중이었는데
사고가 난 후부터 모든 게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가버렸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생각만으로도 화가 난 상태였는데
완전 뒤를 받힌 게 아니라서 과실이 9:1 정도일 거라는 말을 듣고
또 화가 났다.
그 아저씨가 앞을 안 봐서
내 차가 부서지고 내 몸이 아픈 건데
왜 내가 10%의 잘못을 한 거라고 말하는건지 
이해도 안되고 화가 난 상태였는데
그때 짐승형이 그랬다.
"운전한 게 잘못인 거야"
아, 그래?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억울함이 쌱 사라짐.

2. 또 위로
조석님의 만화를 보며 깔깔깔 웃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그 당시 나에게는 시간을 견디고 자꾸 우울해지는 기분을 추스리는 게
큰 일이었다.
집은 추수로 너무 바빴고 그래서 방문이나 위로를 구하는 게
미안한 상태였고 나는 혼자서 아픔도 지루함도 우울함도 견뎌야했으니까.

3. 그리고 다시 위로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참 많이도, 빨리도 쓰는 사람)
의 소설을 보며 트릭을 발견해내고 범인을 추측하는 일이
그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다.
이제 거의 다 읽어가는 듯.
최근에 발견한 놀라운 문장.

2014년에 나온 <몽환화>
노란 나팔꽃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소설인데
주인공이 흥미롭다.
주인공 소타는 원자력공학 박사과정에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에서 원자력을 '미래의 에너지'로 생각하고 
청춘의 시간을 바친 소타의 상실감이 등장한다.
다른 주인공 리노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수영선수였지만
지금은 수영을 포기한 채 부유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어느 날 리노는 말한다.
"우리, 어딘가 닮았어요. 열심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했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마지막에 둘은 다시 그 길로 돌아온다.
소타의 말을 옮긴다.

"2030년에 가동하는 원자력발전소가 제로가 된다고 해도
원자력발전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폐로 문제(수명이 다한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력을 처분하는 것)는
그대로 남아. 
게다가 오십 기 이상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대량의 핵연료봉이 
보관되어있는 상태겠지.

일반적인 집은 방치하면 폐가가 돼.
하지만 원자력발전은 달라.
방치한다고 저절로 폐로가 되는 건 아니야.
이를테면 발전을 중지해도 엄중하게 관리하고 
신중하게 폐로절차를 밟아야해.
게다가 폐로 때는 방대한 양의 방사성 폐기물이 발생해.
그것을 처리하는 장소 또한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아.
그런 장소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분명하고.

가령 처리장이 생겨 거기에 묻어도 방사능 수준이 안전한 수치로
내려갈 때까지는 수만년이 걸리지.
실질적으로 이 나라는 이제 원자력발전에서 도망칠 수 없어.
그런 무서운 선택을 수십 년 전에 이미 내려버린 거야"

소타는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문제에 직면할 것을 각오하면서
다시 그 길을 선택한다.
친구가 걱정한다.
너 엄청 배고플거다.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시선도 받아야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게 돼.

소타가 말한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대중소설 안에 이렇게 원자력에 대한 입장
잘못된 선택에 대한 빚
그리고 책임에 대해서 담담하게 새겨넣을 만큼
일본인들의 인식은 나아가 있는 건가.

핵마피아들의 뻔뻔함과
공권력의 오염과 부패에
숨이 막히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때문에 살짝 놀랐다.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어있는 건가.
아니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선 자리가 그러한 건가.
궁금하다.

4. 나의 타임라인
한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눈에 보이는 몸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똑같은 몸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그 몸이 균형이 깨져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치료는 그 균형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자꾸 안 아픈 데가 아파오는 건
그동안 안눌려있던 다른 쪽이 균형있게 눌리느라 그런거다.
몸의 균형이 바로 잡히느라 그렇게 아픈 거다"

매일 목욕탕에 간다.
예전에 내 친구는 사우나에서 
여성들이 모여서 목욕하다 수다떨다 뭐 먹다 그러는 거 보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해주었다.
저 사람들 시간의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콸콸콸 쏟아져서
철철 넘치는데 그렇게 쏟아져서 넘쳐흘러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그랬었다.

37도~40도의 탕에서 15분간 반신욕을 하고
사우나에 들어가서 3분을 견디고
씻고 나온다.
그 와중에 쉼없이 듣게 되는 대화들.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마을에도 수도꼭지를 활짝 열어서
시간이 콸콸 흐르는 여성들은 있어서
그녀들은 얼굴에 뭐를 발라서 그렇게 기미가 없어졌는가
어제밤 노래방에서 소희는 왜 기본안주가 아닌 비싼 안주를 시켰는가
앞으로 걔는 데려가지 말자.
그런 비싼 안주는 부킹할 때 남자들이 시켜주는 거다
그런 얘기들을 주고 받는다.
그러다 나가서 얼음이 동동 뜬 커피나 식혜를 사서 먹으며
미국에 나가있는 딸 자랑을 하고
들고있는 마사지기가 편백나무인가 느릅나무인가를 놓고 언쟁을 한다.

내가 살아왔고 내가 인식하고 내가 보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또다른 세상이 거기 있다.
나의 타임라인만 보면 세상이 곧 바뀔 것같고
이토록 부조리한 현실은 곧 끝날 것같지만
링크를 타고 갔다가 포털의 댓글들을 보면
거기에 또다른 세상이 펼쳐져있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가 정녕 동시대인인가
이토록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을 인식할 때면
멍해진다.
부질없다는 생각이.....든다.
그래서 빨리 나는 돌아가야 한다.

5. 구원의 동아줄
Seokpil Kang ,선배님께 감사를.
몇 년 전, 무척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말과 행동으로
튼튼한 밧줄을 내려주어서
나는 상처를 입긴 했지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편집작업을 앞두고 다 날아가버린 상태에서
황망해하고 있는 나에게
또 튼튼한 밧줄을 내려주셨다.

들판을 걷다가 다 베어진 벼의 밑둥을 보면
내 의욕도 그렇게 싹둑 베어내진 것같아 속상하기도 했었다.
사고 직전 강화의 들판은 황금물결로 넘실거리고 있었고
세상은 예뻤다.
그리고 지금 강화의 들판은 황량하다.
나는 빛나는 순간들을 다 놓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하나.
날아가버린 나의 에너지는 과연 다시 채워질 것인가.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그 생각의 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의미있는 작업이고 필요한 작업이니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몸을 돌봐야하는 시간은 충분히 가지셔야 한다.

울컥 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감사의 말을 했다.
나는 1년의 시간을 더 갖게 되었고
그 시간만큼 책임은 무거워졌을지라도
최소한 날아가버린 에너지
흩어져버린 시간
변해버린 풍경 때문에
눈물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 몸을 찾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서 다섯번째 영화를 만들 것이다.
나는 독립다큐멘터리감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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