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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2일:내가 잃은 것들

골절이 없어 진단2주
그래서 사고당시와 같은 아픔을 그대로 몸에 지닌 채 퇴원해서
차도 없고
차가 있어도 운전은 힘들 것같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있었는데
모든 차들의 속도감이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다시 입원을 해야하나 알아보는데
그건 안된다 하고(골절이 없으면 진단은 2주!!)
그래서 여럿이서 머리를 맞댄 후 내린 결론은
일산 엄마 집에 머물면서 대중교통으로 근처 한방병원을 다니는 것.
우리집은 너무 외딴 곳에 있어서 어디든 운전해서 차를 타고 가야하고
남편은 직장인이니 나를 데려다줄 수 없으니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오랜만에 보는 천장은 그대로인데
모든 게 변해버렸다.
사고 직전까지 나는 가편집이 진행중이던 하드가 망가져서
원본을 다시 백업받으며 다시 편집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편집을 도와줄 조연출과의 미팅을 앞두고 있었다.
입원기간동안 장애인영화제심사회의, 416연대 미디어위원회회의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준비회의, 서울시청자미디어센터 교육
학교수업엘 못 갔고
kbs 라디오 방송은 출연 대신 전화로 녹음했다. 
아, 추수풍경은 정말 중요해서 
황금색으로 넘실거리는 들판은 미리 찍어둔 상태였다.
모내기를 했던 분과 같은 밭에서
추수풍경을 찍기 위해 스케줄 조정중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단숨에 날아가버렸다.

우울한 기분으로 찜질을 하다 잠이 들었는데
복잡하고 산만한 꿈을 꾸다 깼고
그런데 그 우울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 덕분에 다행히 날아갔다.
은별은 공기가 얼마나 늘었는지를 시범 보이느라
끊임없이 종알종알거리고
한별은 오랜만에 셋이서 원카드를 해보자고
토토로 카드를 꺼내서 판을 펼쳤다.

씻는 동안 봐달라던 은별이는
"엄마 이제 어디 안가지?" 그랬다가
치료때문에 다시 외가집에 가야할 것같다니
"뱃살 못 만져서 잠을 잘 못잤는데 또 어디 가?" 하며 시무룩.
늦게 돌아오는 하은과 남편을 기다리며
양팔을 베고 누운 한별과 은별의 하루를 듣는 시간.

은별:우리 반에서는 민주가 공기를 제일 잘해
애들이 나보고 공기를 너무 세게 잡는다고 손 안아프녜.
한별:선생님이 채점을 잘못해서 영어시험 백점 맞았는데
내가 양심적으로 고백해서 85점이야.
우리반 지호는 favorite을 페브리즈라고 읽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다가 말다가

근데 너네 왜 나한테 전화 안했어? 나 안보고 싶든?
내가 목소리 듣고싶어서 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묻고말이지

한별:왜전화했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그래도 아빠한테 엄마 언제 퇴원하냐고 매일 물어보긴 했어

궁금증이 추궁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린 매일밤 그렇게 서로의 일상을 나눴던 거다.
나는 이 일상을 보름동안 잃었고
앞으로 또 얼마간 잃을지 모른다.

입원기간 내내 외면하고싶었던 한 사람.
2인실에 있을 때 함께 있던 아주머니가 말해준 사연.
43세 남자. 시한부 5개월 판정받고 지금 2개월 경과.
아줌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니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이제 아네요"라고 했다던 남자.
나는 그 사람하고만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나란히 로비소파에 앉아있을 때
"보고 싶은 거 보세요"
라고 리모콘을 건네주었을 때에도
"괜찮아요" 사양하고 일어났던 건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에 나오던 사연을
현실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공감능력이 지나치게 발달한 내가
그 사람을 내 세계에 들이면
휘청거릴 것같아 외면해오던 사람.

간호사실 앞에 앉아있길래 그 사람에게 인사했다.
저 오늘 퇴원해요. 빨리 나으세요.

느릿느릿 돌아오는 대답.

저는 언제 퇴원할지 몰라요.
치료도 안되고 수술도 안되거든요.
몸 전체에 암이 퍼졌대요.
그래도 병원에 있어야해요.
입원해있으면 하루에 27만원씩 보상이 나오거든요.
하루라도 더 입원해서
한푼이라도 더 받아야
애들한테 남겨줄 수 있거든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잠깐 열린 엘리베이터 안을 가리키며
"저기 아저씨 있네요" 해서 얼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퇴원수속이 다 끝나고
떠나오며 인사를 했다.

여기는 길어야 2주일이라 얼굴들이 빨리빨리 바뀌지요.
다음에 다시 올지 모르는데 그때 봐요.

그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다시 오지 마요.
다시 보지 마요.

나도 웃으며 또 만나요 하고 돌아나왔다.
그렇게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다가
그래도 다시 돌아갈 수는 있으니,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다가
보험사 직원과의 대화가 생각나서 불쾌해하다가
아이들 생각에 빙그레 웃다가
결국 생각한 건
이 시간이 아이들에게 결핍으로 작용하지 않기를.

토토로 카드로 원카드하고 놀다가
고양이버스타고 엄마 만나러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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