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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4일:밤은...

<밤은...>
노래한다.
아니 생각하게 만든다.

1. 이런 기분인 거구나 
몇몇 친구들이 "집에 돌아오니 택배가"
라는 말로 고구마 도착의 기쁨을 알려왔는데
나도 오늘 집에 돌아오니 택배가 와있어서 기뻤다.

고구마 농가의 일원으로서 올해 내 임무는 주소록 작성.
페북,문자,카톡으로 온 신청내용을 정리하고
기증자 주소록을 새로이 작성하는 것이었다.
작년보다 3분의 1 정도밖에 수확이 안되어서
올해에는 1년동안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 기증자를 한정했다.
서운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길.
푸른영상, 416연대미디어위원회
밀양, 청도,작은책, 주간기독교, 
KBS3R 함께하는세상만들기.

밀양미디어팀에서 일할 때 
처음으로 갔던 곳이 상동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상동에는 아는 분이 없었다.
내가 여기서 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아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 것.
부북의 정임출 님, 용회의 구미현 님을
나는 '안다'.
그리고 올해 '미행 in 밀양'덕분에
김영자 총무님을 '알게' 되었다.

밀양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후에
(떠나는 건 나의 마음 안에서의 일일 뿐이고 
내가 떠나겠다고, 아니 떠난다고 한들
그것을 인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치 가출했다 이틀만에 돌아왔는데
가족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몰라줘서
서운해했다던 친구 아들 용선의 경우처럼.하하)
미안하면서도 아쉬웠던 마음이
정리되던 터닝 포인트같은 순간이 있었다.
현나언니와 김영자 총무님과 같이 놀던 몇시간.
정독 도서관 나무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다가
거기 떡볶이집에서 떡볶기를 먹고
제과점에서 현나언니가 총무님 빵 사드리는 거
구경하고서 안녕, 인사하고 돌아나오던 때
그러고나니 거짓말같이 마음의 한 마디가 생겨났다.
그래, 여기까지, 이렇게 끝. 하고.

활동은 끝나도 사람은 남는 거니
총무님이든 구쌤이든
그렇게 가끔 만나 놀고
서울오시면 만나러가고
뭐 그렇게 지내면 되는 거지.

그래서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밀양에 고구마를 보내드리는데
총무님 주소는 내가 몰랐다.
원래 작년에는 사랑방마다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상동 주소는 잘 모르기도 했고
아는 분이 없으니 이름없는 고구마가 되어버릴것같아
못 보냈던 걸 올해엔 보내고 싶었던 거다.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은 곳을 정하면
병실에 누워 카톡이나 문자로 안부를 묻고
주소를 알아냈다.
근데 총무님은 절대 안알려주셨다.
그러면서 감을 보내주시겠다고 해서
나도 절대 주소를 안 알려드리겠다 했다.
그렇게 팽팽한 사양 끝에
총무님은, 
감을 보내게 해주면(그러니까 내 주소를 알게되면)
거기다가 총무님 주소를 적어주겠노라 하셨다.
반가운 감과 함께
드디어, 겨우, 총무님 주소를 얻었다.

2. 지금 시간 3시 23분.
비온다.
굼벵이가 너무 많이 먹어버려서
다른 이들에게는 보내지 못하고
우리만 먹을 수 있겠다, 하고 남겨둔 
"굼벵이도 좋아하는 고구마"와
너무 작아서 작년에 아이들과
이것을 어떻게 상품화시킬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강화 아이들의 속노란 한입고구마"라고
자체 브랜드를 붙이고서
우리 식구들과 토끼들만 먹었던
작은 고구마들이 가을비에 젖겠구나...

3. 왜 밤에는 더 아픈 걸까..
의사는 앉아있지 말라고 했다.
눕거나 천천히 걸으라고.
반다가 "고통에 포박당한"이라고 썼던 표현이
뭔지 조금 더 알것같다.

그날은 세월호 500일 이었다.
여의도에서 회의를 끝내고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다
광화문에 잠깐 들러 
종필감독이 책임편집한 영상만이라도 보고 가자
졸랐지만 잠깐 망설이다 들려줬던 이야기.
"아픈 몸을 나의 뇌는 인지하지 못해서
강철체력으로 살아왔던 시간 덕분에
집회의 에너지에 고양되어 
몸을 맘껏 쓰면서 함께 있다 보면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한다"

사고가 나기 전에 반다의 글을 읽었을 땐
'고통에 포박된다'라는 표현이
신체의 상태를 말하는 거라고 이해했는데
지금은, 세월호 500일에서의 대화와 함께
몸과 마음 모두를 포함하는 거라 이해되기 시작.

오늘은 엄마집 근처의 한방병원에 가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운동들을 하고
침을 맞았다.
한의학박사는 단순 근육통이라 했고
"고통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이유"를 물으니
단순근육통의 특징이라 설명했다.

보호자로 대동했던 남편은
"설명 들으니까 마음이 가벼워지지?"하고
기쁜 얼굴로 물었지만
사실 나는 실망한 상태였다.
X레이와 MRI로도 포착하지 못한
어떤 지도를 읽어내면서 설명해줄줄 알았다.
한의사니까.

어혈을 풀어준다는 탕약을 받고 나와서
"나는 맥도 짚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내가 누군지 몰라도 이미 다 약이 나와있어"
라고 신기해하며 말하니
남편은 한방도 이제 과학화되었다잖아
세팅이 완벽하네, 했다.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면 정말 좋았다.
그런데 한의원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법이 바뀌어서 진료는 일주일에 두 번만 가능하니
매일 물리치료가 필요하면
다른 병원을 다니라고 했다.
사실 이 이야기도
매일 물리치료 하라고 했다니까
"누가 그래요?"해서
입원했던 정형외과에서요.
했더니 그럼 거기 다니라고 그랬다.
그 대화에서의 느낌은
단골이 따로 있는
뜨내기손님을 맞는 식당주인의 자세랄까
그런 느낌.
강이네 병원의 물리치료사는 정말 좋았는데
부천은 너무 멀다.

4. 나는 늘 노력하며 살아왔다.
나의 한계가 이만큼이라고 생각되어도
거기서 한치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한별을 낳을 때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이라는 V-BAC을 시도하는
고위험군 산모라서
병원에 일찍 가 있었다.
나란히 누운 산모들이 여러번 바뀌는 동안
거기 대기실에 붙은 그림에
자궁이 열리는 정도가 1,2,3기로 표현되어있길래
"나는 몇 기예요?"물었더니 간호사는
"산모분은 지금 가진통이예요"라고 말해주었다.
회진돌던 의사는 내 아기는 이틀 후에나 
나올 것같다고 남편보고도 집에 가있으라 했고
하지만 V-BAC이라 위험하니 누워있으라해서
누워서 혼자 아팠다.

하지만 남편은
"아빠, 내일 아기가 와"라는,
그날 아침, 하은의 말을 믿고
내내 로비에 앉아있다가
새벽에 잠깐 들어와서 나를 보고
내가 너무 아파한다고 간호사를 부르니
간호사가 의사를 부르고 암튼 그렇게 난리끝에
아기가 나왔는데
간호사들이랑 의사가
그렇게 아팠는데 왜 안 불렀냐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가진통이라고 그래서 가진통인줄로만 알았다"

참으라면 참아지고 좋다면 좋아지고
그런 면에서는 좀 미련한(?)
좋게 말하면 강한(?)
사실은 나도 철인이었던 거다.
그런데 이젠 모드를 좀 바꿔야할 듯.

양의든 한의든 의사들은
별 이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나는 지금 엄살을 부리는 건가 싶다.
그리고 사실 늘 살아왔던대로
참으면 뭐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되나
그래도 되는지
내 몸은 나만 아껴줄 수 있는 건데
그래도 되나.
언니와 가족들의 공감과 염려는 정말 고마운데
현실의 의료인들은 사진만 보고 말한다.

그 와중에 멀리
캐나다에서 보내준 지은의 편지가 위로가 되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지은에게 지은의 의사는
다친 부위의 신경을 거미줄에 비유하며
거미줄이 완전히 끊어졌다가 물리치료, 침치료를 받으면서 
다시 거미줄을 제자리로 복귀 시키는거라 했다 한다.
근데 문제는 거미줄이 제자리로 온전히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서 후유증이 생기는 거라고.
참아버릴까 하다가도 지은의 문장들이 힘을 준다.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교통사고 환자로 일반화시키고
골절도 없고 MRI도 깨끗하니
"안 아파요" 라는 말을 해야할 것같은
의료인들의 태도들 속에서
(실제로 간호사는 이제 평상시처럼 생활하시면 된다고 했다.
평상시? 나 낮에는 촬영하고 밤에는 편집했는데
당신 책임질 수 있나?)
나는 지은의 문장들을 버팀목 삼아
나를 돌본다.

불행하게도 내가 만난 의사들은
양의든 한의든 그런 식으로 말해준 이는 없었다.
양의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3주면 완쾌된다고 했고
크게 기대했던 한의는 단순근육통이라 했다.

사고 후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기운은
의심이다, 엄살 아니냐는.
나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내가 당한 사고가 얼마나 컸는가를
나의 고통을, 내 고통의 정당성을,
좀더 세심한 관심을
호소한다.

어제 아침에 드디어 경찰조사를 받았는데
경찰은 '차가 뒷부분을 추돌하여 그 충격으로 택시를 받았다'
라고만 쓰길래
버스정류장 부분을 추가해달라고 말했다.
가장 강한 충격은 차가 튕겨져서 버스정류장 부스를 완파한 건데
그건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에 내가 피해를 입었고 
나의 차가 택시를 가해한 
그런 부분들만이 중요했던 거다.

언니는 세 번의 충격이 그대로 몸에 전해지며
몸에 무리가 갔을 거라고 말하고
나 또한 그런 걱정으로 
지금 내 몸을 돌보고 있다.
나는 지금의아픔, 이까짓거 다 참을 수 있다.
애도 셋이나 낳았는데 고통을 참는 데 나는 선수다.
나는 지금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
45년동안 쓴 내 몸,
앞으로도 45년은 더 써야해서
가만 멈춰선 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정비하려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의 고통을 잘 인지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런 말을 다 듣고도
"3주면 다 낫는다"라고 말한다.
"단순근육통이니 별 문제 없다"고 말한다.

양의에게
"나는 육체노동자라서 몸을 많이 써야하는데
계속 아플까봐 걱정입니다"라고 말하니
개인차가 있어서 1주일만에도 낫는데
좀 길어질 수도 있지만 3주면 낫습니다.
라고 답했다.
정말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가 나만큼 내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기에 
나는 조용히 그 사람과 선을 그었다.

나는 의사들한테 너무 많은 환상을 가졌던 것같다.
반다는 내게
자기가 만난 한의사들은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고 하던데
내가 만난 의사는
내가 어떻게 다쳤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그게 궁금하다.
진료에도 스토리텔링은 중요하지 않나?
모를 일이다.

5. 은별은 매일 공기를 열심히 한다.
오늘은 "엄마, 나 공기하는 거 봐봐"해서
나 침대에 누워서 찜질해야해,
라고 했더니 그럼 침대에서 할께, 하더니
공기를 한 번 던져보고 공기가 잘 안 흩어지니
딱딱한 방석을 깔고
열심히 공기를 했다.

하나씩 하나씩 성공할 때마다
탄성, 환호, 박수 같은 것으로 호응을 보내다가
이 상태에서 엄마집으로 떠나는 게 맞나 싶다.
별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의사.
딴 식당을 단골로 둔 뜨내기 손님 취급을 대놓고 하는 의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을 3개월 남겨둔 채
아이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남겨주기 위해
입원치료를 하면 하루에 27만원을 받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있는 남자를 생각했다.
일상을 포기한 댓가 하루 27만원.
나는 어떤가.
그 병원이 아이들과 나의 일상을 포기할만큼 의미있는가.
곰곰히 생각할 문제이다.
자생한방병원, 너무 천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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