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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2000년 9월호

어떻게 제목을 이렇게 뽑냐.

16년전 쓴 글을 스크랩하는데 제목 되게 거슬리네.

(내가 제목 이렇게 뽑은 거 절대 아님!)

프리랜서의 비애라고나 할까...

 

2000년 9월 2일이 결혼식이었으니

결혼식을 2주 정도 앞두고 박그림 선생님을 만나러 속초에 가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라는 자리는 잊고서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을 많이 털어놓았던 것같다.

그래서 김순희선생님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말씀을 많이 해주신 듯.

박그림 선생님을 만난 후에 나는 잘 안씻게 되었다.

엄마는 늘 내가 게으르면서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댄다고 하시지만

아니다! 결혼 전에 나는 늘 하루에 두번 꼬박꼬박 샤워를 했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의 개운함과

오데코롱의 낭만을 나는 늘 즐겼었다.

하지만 그 날 그 만남 이후 나는 짐승처럼 산다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가능하면 인공적인 세제, 향수 등등을 멀리 하게 되었다.

진짠데 아무도 안믿는다.

오직 올케언니만 예전 기억을 상기시키며 내 말이 맞다고 편들어줄 뿐.

 

박그림 선생님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산골소녀 영자다.

사실 이 기사도 산골소녀 영자 기사를 찾다가 발견한 거다.

박그림 선생님 기사가 9월호였으면

영자 기사는 8월호였을 게다.

산골소녀 영자를 취재하기 위해 새벽 5시 쯤에 집을 나섰던 것같다.

영자의 책을 쓴 신풍미디어 출판사에서 차를 마련했다고 해서 

밤새 어디서 술마시다 왔다는 사진작가, 그리고 약속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온 나는

그 새벽에 승합차를 타고 삼척 외딴 산골까지 갔었다.

......

어쨌든 그날 나는 출판사사장과 싸웠고

출판사 사장은 나를 영자네 집에 버리고 가버렸다.

나는 산길을 걷다가 근처 도계 시멘트 공장을 드나드는 덤프트럭을 얻어타고

삼척터미널까지 갔는데 또 돈이 모잘라서(천 오백원 정도가 모자랐음)

터미널에 있는 사람들에게 앵벌이를 해서 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는데 어떤 남자가 차 한잔 하자고 그래서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그 사람의 명함을 보니 전기설비기사라고 찍혀있었던 기억.

(최근에 작업실 전기가 말썽이라서 남편에게

"그  때 그 남자랑 잘됐으면 이런 걱정 없었겠지?"

라고 말해서 남편이 어이없어하던 기억도 여기에 플러스)

나중에 영자 사건이 터진 후에 여성동아에서는 기사를 선임기자에게 맡기면서

내게는 섭외를 부탁했던 기억.(괘씸했지. 나중에 그 기자는 송일국 사건으로 감옥에....)

암튼 내가 취재를 하던 그 때에는 영자부녀가 방송으로 막 인기를 끌 때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그런데 내가 취재에서 돌아와서 담당기자에게 거기 이상한 것같다고,

출판사 사장도 이상하고 뭔가 있다고 하니

담당기자는 내게 화제의 인물 소개 코너니까

그런 의혹일랑 절대 기사에 싣지 말라고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영자와 영자의 아버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내가 출판사 사장과 싸웠던 이유는

사진기자가 먼저 가버린 후에 출판사 사장이

영자아버지한테 말을 함부로 하고

영자한테도 말을 함부로 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영자아버지한테 마당에 돌아다니는 닭을 잡아오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내 안에서 불편함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나중에 닭을 먹는데 출판사 사장이 술까지 취해서

폭언을 더 심하게 하길래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리다가

아마 참지 못하고 내가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겠지.

그러니 그 사장이 나를 그 첩첩산중에 버리고 가버린 거지.(나쁜놈)

그 사장이 왜 그토록 뻔뻔했는지 몇 년 후에 알게 되었다.

영자 아버지는 책을 내고 싶어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고

출판사 사장은 대필작가를 고용한 후 아버지 이름으로 책을 낸 거다.

아버지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기에 출판사 사장의 말에 절대 복종했고

그 복종을 즐기며 안하무인이 되어갔던 것.

 

날은 곧 어두워질 것같은데 길을 나서며

영자네 집은 전화가 없었고 휴대폰은 더더욱 없었기에

혹시 또 사장이 행패를 부리면 꼭 전화를 하라고 내 휴대픈을 주고 왔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는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사람 혹은

세상은 선의로만 가득찼다고 믿는 지나친 낙천주의자였던 거다.

인적 드문 산중에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서다가

영자네 집에서 인터뷰를 할 때 너무나 거슬렸던 돌깨는 소리를 향해

나아갔고 한참 후에 다행히 돌을 싣고 가는 덤프트럭을 만났고

그 때 그 덤프트럭 아저씨는 날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 보듯 놀랬었다.

다음 달에 만났던 박그림선생님은

"깊은 산중에서는 사람을 만날 때가 제일 무섭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아마 그 덤프트럭 아저씨가 그런 느낌이었을 듯.

 

취재에서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영자 이야기를 떠드는 나에게

푸른영상 선배는 영자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라고 했다.

나는 이미 방송에 나갔는데 뭘 더 할 게 있겠냐고 했고

선배는 방송관점 말고 미디어의 폐해,에 초점을 맞춰서 만들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영자네 집에 그토록 큰 사건이 일어날 줄은 몰랐던 거다.

선배의 감은 적중했지만 영자의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지는 않다.

다만 후회스러웠던 것은 내가 '곧 결혼하는데 어디 멀리 가는 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했던

나의 그 마음가짐, 내 생각이었다.

그 때 몸도 영혼도 자유로웠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나는 아이를 낳고 나면 정말 아무데도 못간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다.

영자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리로 만들 결심을 했다면

아마도 나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거다.

며칠 전 다른 일로 산골소녀 영자 기사를 찾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이다. 

 

산양에 미쳐 아예 설악산에서 

 

살고있는 '산양 지킴이' 박그림

●글·류미례<자유기고가> ●사진·박기용<프리랜서>


 

 

 

    설악산 자락에 사는 박그림씨(52)를 만나러 내려간 속초는 온통 피서객으로 들끓고 있었다. 회의 참석차 잠깐 시내에 나왔다는 박그림씨는 도로에 빽빽한 피서차량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도대체 이 난리들을 하며 이곳까지 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도시인들은 문명에 시달려서인지 자연 속을 찾아도 보복하듯 자연을 괴롭혀요. 설악산은 불과 몇 달 사이에도 느낌이 달라질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어요.”

‘산양의 동무 작은 뿔’ 대표 박그림. 그의 이름 앞엔 항상 ‘설악산 지킴이’ ‘설악산 귀신’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다. 서울 사람인 박씨는 설악산을 너무도 그리워해서 본래 이름인 상훈이를 버리고 72년 그림으로 개명했다. 그렇게 설악산을 사랑하며 오랫동안 산악회 활동을 하던 박씨는 지난 92년,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속초시 설악동으로 옮겨왔다. 30년 동안 수없이 설악산을 찾았고 ‘설악산에 사는 게 꿈’이었던 그에겐 아주 자연스런 이사였다.

“어느 순간부터 산이 어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강한 모습을 통해 제 삶을 풍요롭게 해주던 설악산은, 그러나 약해지고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 산을 위해 뭘 할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중 설악산의 세계 자연유산 등록이 추진되었고 외국인 현장조사단을 안내하던 박씨는 그들로부터 뼈아픈 말을 들어야 했다. “풍광은 아름다운데 어떻게 동물 한 마리 보이지 않느냐. 설악산은 동물이 없는 죽은 산이다”라는 그들의 말에 박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설악산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후반부터. 그로부터 반세기가 채 되지 않아 설악산은 죽은 산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보통 설악의 대표동물로 반달가슴곰을 꼽는다. 속초시도 설악산의 상징동물로 반달가슴곰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반달가슴곰은 83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설악산에 남아 있는 야생짐승은 10여 마리 안팎의 산양뿐이다. 산양은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될 만큼 희귀동물. 박씨는 ‘산양 지킴이’로 나섰다. 산양을 지키는 일은 바로 설악을 “하느님이 만드신 애초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즉시 산양에 대한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박씨의 산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박씨는 산양의 흔적을 찾아 1년이면 6개월을 설악산 절벽과 골짜기를 걷는다. 월요일 산에 들어가 금요일 설악동 집으로 내려오는 그런 생활을 5년째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박씨는 산에 가면 주민의 목격담을 듣고 산양이 살 만한 곳을 뒤져 산양이 남기고 간 배설물이며 자고 간 잠자리 등을 살핀다. 나무껍질이 긁혀 있는 곳도 산양이 사는 곳이다. 산양은 자기의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뿔로 껍질을 긁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꼼꼼히 살펴 슬라이드에 담고 산행일지에 적는다. 주말은 주로 이러한 조사결과를 정리하는 데 보낸다.

 

 

 

 

 

‘짐승처럼 사는 게(?)’ 가장 큰 환경운동

 

“산 속에서 짐승들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이 땅에 몇 마리밖에 남지 않은 산양의 자취를 따라 산을 타다 보면 사향노루나 표범, 산양 등 온갖 야생짐승들의 자취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그 흔적이 비록 똥무더기라도 비벼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때론 먹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산엔 반가운 것만이 있는 게 아니다. 야생동물이 지나는 길목엔 어김없이 올무나 덫 등의 밀렵도구가 설치되어 있다. 산양의 발자국을 쫓아다니는 수상한 장화 발자국들을 보면 박씨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씨는 산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육식동물이라도 이쪽에서 해할 마음이 없으면 서로 피하는 것이 정상인데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의 산생활로 짐승처럼 발달한 박씨의 감각은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경계하게 만든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많이 쓰죠? 하지만 전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전 차라리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박씨를 ‘설악산 귀신’으로 부르는 건 산생활에 탁월한 적응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설악산에 들어가면 그는 ‘나도 짐승이겠거니’ 하며 산다. 짐승처럼 산을 누비고, 먹고, 마른 나뭇잎 위에서 자다 보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자연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은 자연에 깃들여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다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박씨는 요즘 “짐승처럼 사는 것이 가장 큰 환경운동”이라는 이야기를 기회 닿을 때마다 자주 한다.

산양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바로 눈앞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몇날 며칠씩 산양의 발자국을 쫓아다니며 산양이 취했을 행동을 생각하며 슬며시 웃음을 짓기도 한다는 박씨는 냄새로 산양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보면 없어요. 산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그만큼 산양은 우리에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시켜줍니다. 사람은 자신들을 죽이는 무서운 동물이라는 것을요. 다가오지 않는 것이죠. 가까이서 보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산에 기대어 사는 산양. 그 산양은 사람을 피해 자꾸 달아나기만 한다. 도토리나 조릿대 잎, 바위에 낀 이끼를 뜯어먹고 낙엽이나 깔고 자면서 콩자반 같은 작고 귀여운 똥을 누는 산양. 박씨가 보여주는 슬라이드 중엔 커다란 눈에 작은 뿔이 앙증맞게 돋아 있는 그 순박한 산양이 올무에 걸려 죽어 있는 모습이 있다. 하늘같이 맑은 눈망울을 하고 살아 있는 듯 죽어 있는 새끼 산양을 보여주며 박씨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은 산양을 보며 돈을, 정력을, 보신을 떠올리는 잔인한 인간들을 생각합니다”라며 침통하게 말했다.

 

 

 

혼자서 하던 산양사랑에 응원군이 생기기 시작

 

이제 박씨는 누구나 인정하는 산양 전문가다. 환경부의 산양 조사사업도 그가 맡았다. 3년에 걸친 사업인데 박씨는 기초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조사사업을 3년 만에 완성하겠다는 발상이 안타깝다고 한다.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순환수렵제도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터뜨렸다.

“식구가 몇인지 알아야 밥을 짓지요. 마찬가지로 한 공간에 개체수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그것을 토대로 보호나 증식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텐데 그런 조사가 하나도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산에다 야생동물들을 더 풀어놓고 수렵을 허락해주겠다는 겁니다.”

산양을 매스컴에 소개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얼마 전엔 자연 다큐로 유명한 한 PD가 찾아와서 산양을 찍자고 하더란다. 열흘이면 다 훑을 수 있다면서.

“무슨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애정 없이 만드는 것엔 동의할 수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산짐승의 생태는 적어도 사철을 지켜보아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씨야말로 산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최근엔 디지털 카메라를 하나 마련했다. 산양을 한 번만 볼 수 있어도, 그리고 설악산의 속내를 조금만 알아도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박씨는 틈틈이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제대로 된 산양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독학을 하고 있다.

박씨의 산양 사랑은 조금씩 응원군을 얻고 있다. 95년 혼자 시작했던 ‘설악산 산양의 동무 작은 뿔’ 모임(전화 016-9228-8715)은 현재 2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 올 5월 양구의 ‘산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고성 ‘녹색사랑회’ 등과 함께 ‘산양을 위한 연대’라는 전국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이 모임에는 밀렵꾼을 했던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구체적 경험이 산양 보호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리없는 후원인들도 생겼다. 어떤 후원인은 환등기를 보내주었고 부산 지역에선 다섯 명의 후원인들이 매달 5만원씩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다.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 또한 후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관심이 그에겐 가장 큰 보람이다.

그에겐 작지만 의미있는 사건이 있다. 95년과 96년 당시 설악산 관리소장이 내설악에서 높이 3m 무게 5t에 이르는 자연석을 채취해 앞면엔 대청봉이라 쓰고 뒷면엔 자신의 자작시를 실어 대청봉 정상에 세우려 했다. 박씨는 개인공적비를 대청봉에 세우려는 이유를 묻고 반대를 해 결국 문제의 비석은 설악동의 청소년 야영장에 세워졌다. 박씨는 그 소장의 경우가 사람들이 설악산을 보는 가장 대표적인 시각이라고 말한다.

“오색에서 설악폭포를 지나 대청봉에 이르는 길은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입니다. 연휴 땐 세 줄로 올라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찾는 이유를 아십니까? 대청봉을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지요. 산은 꼭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정상제일주의 때문에 힘들여 올라가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다시는 설악산을 찾지 않지요.”

설악산을 제대로 맛보려는 사람이라면 박씨의 환경 생태 가이드를 받아볼 만하다. 박씨는 10명이 넘는 단체가 가이드를 청해오면 정중히 거절한다. 가이드는 짐꾼이나 단순한 길안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이드란 산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봄의 들풀꽃기행, 여름의 수목·생태기행, 가을의 환경훼손답사, 겨울의 자연과 인간을 생각하는 기행 등 테마를 가지고 가이드를 하는 그는, 산을 가슴으로 느끼고 밤이면 별자리를 찾아 전설을 얘기하는 소박하고도 정겨운 산행이 진짜라고 말한다.

이렇게 온통 산양 살리기에만 매달려 있는 그에겐 생계수단이랄 게 없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냥 살아집니다. 가족들 중 누구도 풍족하게 사는 걸 바라지 않아요. 여직껏 도시에서도 욕심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설악산 곁에 와선 전혀 그러지 못했다는 걸 느꼈어요. 열 개 쓸 것 두세 개만 쓰며 살아요.”

아이들도 다행히 적응을 잘 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던 둘째는 속초로 오고 나서 눈만 뜨면 학교에 가겠다고 할 정도로 변했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듣고만 있던 부인 김순희씨(49)는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들 키우기에는 중소도시가 좋아요. 두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자라나면서 도시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자연 속에서 자라난 영향으로 큰 아이 동민이(19)는 대안학교인 풀무농업학교로 진학해서 만족할 만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올해 대학에 진학했다. 고1인 딸 동호(16)도 오빠처럼 풀무농업학교로 진학해 즐거운 고교 생활을 보내고 있다.

물론 평탄하게 살아왔던 것만은 아니다. 한창 어려울 때 부인 김씨는 친정식구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지켜보는 게 괴로웠다고 한다. 부부는 가난하게 사는 데 익숙해져 있었지만 김씨의 언니들은 “박서방이 정말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며 동생의 고생을 가슴아파했다.

아이들 또한 머리가 커가며 가난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듯했다고 한다. 조용히 순종하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아버지는 왜 사준다는 약속을 안 지키세요?” 하며 항의를 했을 때 부인 김씨는 가슴이 저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뒤처지거나 소극적이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김씨는 말한다.

“아이들이 바라는 걸 오냐오냐하며 다 들어주면 귀한 것 모르고 살아요. 없어서 귀한 것을 알고 물건 하나도 얼마나 어렵게 마련하는가를 지켜보니 아이들이 세상 이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둘째 아이까지 풀무학교 기숙사로 들어가자 부인 김씨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다. 호스피스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가 일하는 곳이 서울이라 박씨 부부는 졸지에 주말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어머니, 집안을 잘 돌보는 아내’ 역할을 해왔던 부인의 새로운 출발을 박씨는 조용한 웃음으로 격려해주고 있다.

 

 

 

병석에 누운 어미를 섬기는 
마음으로 설악산을 살려야

 

박씨는 이제 설악산은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20평짜리 아파트에 매일 1백 명도 넘는 손님이 찾아온다면 그 집이 온전하겠느냐면서.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전거를 타고 전국 순회 강연을 나서는 것. 그동안 찍어놓은 5천여 컷의 슬라이드 중에서 설악산의 훼손 정도와 산양의 생태, 밀렵 실태 등을 호소할 수 있는 그림들을 모아 전국 37개 도시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알릴 생각이다.

“처음엔 걸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고, 차로 가면 너무 쉬워요. 산을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제가 하는 일도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씨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함께하기를 바란다. 또한 강연을 듣고 슬라이드를 본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생각을 바꿨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지금도 박씨는 가끔 꿈을 꾼다고 한다. 바위능선을 넘어가던 한 무리의 산양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젊은 시절의 추억을 꿈에서 보고 나면 다시는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설악산은 지치고 병들어 누웠습니다. 속살 깊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병든 모습을 알릴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것입니다. 어머니의 건강을 회복시킬 의사는 바로 우리 국민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다들 큰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양사랑에 삶을 바친 박그림, 그리고 그의 부인 김순희씨. 이들 부부의 눈은 산양처럼 맑았다. 박씨를 만나고 싶고 설악산을, 산양을 보고 싶은 이들은 앞으로 며칠 후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지나갈 박씨를 기다려보자. 그리고 그들 부부의 소원처럼 산양이 뛰노는 설악산을 함께 꿈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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