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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걸었다.

11월 11일 오후

 

명동에서 청계천을 따라 버들다리, 을지로 지하도를 통하여 시청 남대문, 소공로 롯데 종각을 지나서 종로1가, 다시 청계 을지로를 지나서 명동으로.... 여섯시간은 넘게 걸린듯 하다. 오랜만에 많이 걷고 길에 서 있어서 허리가 뻐근하였다. 또한, 오랜만에 50이 넘는 많은 숫자가 끝까지 함께 하였다. 이 날만이 아니고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70년 11월 청년 전태일을 생각하면서 지난 일요일 오후에는 '소금꽃나무'의 김진숙 선생을 모셔다가 아직도 열악하고 처절한 노동현장의 이야기와 수 많은 노동열사들의 구체적인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들었다. 멀리 부산에 계시기에 선생을 모시기에 망설였지만, 이야기들 듣고 보니 잘 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로 걱정없이 살고 있는 중산층에 속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피상적으로만 알아 오던 오늘 노동현실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지난 3년전에 청계천을 개(dog)발하고는 버들다리에 전태일을 모시고, 전태일 거리도 만들고, 전태일을 기리는 글들을 적어 동판을 만들어서 붙여 놓게 되었고, 많은 단체나 람들이 참여를 하게 되었다. 우리도 그 때 함께 하게 되어서 그 첫해부터 우리가 참여한 동판을 확인하고, 전태일을 추모하는 거리기도회를 하게 되어 올해가 그 세번째이다.

 

작년에도 60여명이 모였는데... 올 해에도 그 비슷한 수가 모여서 추모의 노래 글 기도를 하면서 오늘 다시 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작년에는 대체로 연세드신 어른들께서 말씀들을 해 주셨는데.... 올해 다시 부탁을 드리기 부담스러워, 올 해에는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었다.(젊다고 해 봐야 30, 40 50대이지만)

 

대학 2학년때 평전을 읽었다. 분신전에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말을 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그 때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차이가 나고,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고 차라리 기업에서 경영진에 되어 가면서의 변화와 자기반성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동안 바보라는 덧이름을 사용하고는 했었는데... 전태일이 바보전태일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는 즐겨사용하던 바보라는 이름을 가볍게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때 평전을 읽었고, 아직도 젊지만 나의 삶은 어떤가?

 

그러면 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학생 친구가 없었다고 했으나, 분신후 많은 대학생 친구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은 노동자로 농민의 친구로 살아갔고 독재를 타도하고, 이제는 그들도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기독교도 회개하고 노동 농민들고 함께하는 선교를 하고, 산업선교를 하면서 빨갱이로 몰리고 이 나라에 민주화운동에 많이 기여한것도 사실이고, 민주화 이후 권력층에 많이 진출도 하였다. 척박하던 노동운동도 똥물을 뒤집어 쓰고 맞아죽고 분신하고 민주노조가 만들어지고 오늘의 민주노총 까지 만들어졌고, 농민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청년대학생으로 사회에 투신했고, 교회는 하느님의 선교를 표방하면서 사회민주화에 기여하고,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까지 있는 오늘의 우리들의 삶이 그 때와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고, 삶의 질이 나아졌는가? 단지, 대체로 배고프지 않은것 이외에 도대체 바뀐것이 무엇인가? 차라리 그 때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어도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어서 오늘 같이 각박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냥 1년에 한번 전태일을 기리며 한마디 하고 지나지 말고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겠고, 정신 차려야 하겠다. 특히나 지도층에 있는 자들이 크게 반성해야 하겠고...

우리 소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찾으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같이 삼성의 부정에 대해서 말을 하면은 뒤에서 욕만 하지 말고 삼성제품을 사지 말면 될것이고, 중소기업을 후려치고 비정규직 파견직으로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이랜드 홈에버 등 마트 같은곳은 가지 않고 동네가게를 이용하면 될것이고, 전업활동가가 되지 못하지만 사회단체에 함께 하는 방법들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면 멀지 않은 이웃에도 가슴아프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찾아가는 일들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것이나, 그냥 멀게만 느껴지는것이 문제이다.

 

본대회가 열리는 시청앞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을 받고 시청앞에 이르렀는데... 프레지던트 호텔쪽 출구에는 아예 출구문을 비닐를 붙여서 막아 놓았고, 가위표를 그려 놓았으며, 그 뒤에는 전경들이 쭈그리고 않아 있었다. 플라자호텔 옆으로 나가 거리롤 올라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연락을 거듭하여 함께해야 할 대오가 만나게 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수년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대열이 어디까지인지는 알수 없으나, 남대문 까지는 열결된것이 보였다.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행진을 한단다. 처음에는 남대문쪽으로 가는줄 알앗는데... 소공동 롯데 종각을 거쳐서 세종로로 향한다. 지난 봄에 한미FTA가 타결되기전 몇일간 시청에 모여서 집회를 하고, 한 반중에 청와대 까지 뛰어서 행진을 해 나가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 때 허세욱 선생도 옆에서 뵌듯 하고, 비오는날 내 신발도 한짝 잃어 버리고, 집에까지 한쪽 신발만 신고 비를 맞으면서 그냥 돌아온적도 있었지...

 

교보문고 앞에는 매번 하는대로 닭장차로 막아 놓았다. 옛날에는 적과 싸울때 흙으로 돌로 성을 쌓아서 진지를 삼았는데, 요즘은 닭장버스를 성 삼아서 황용하는듯 하다.

몇년전 언젠가 국회앞을 막아 놓은 버스가 워낙 많아서 한번 헤아려 보았는데.... 무려 100대가 넘는것을 보고는 그냥 웃을수 밖에 없었던 적이 있다.

 

좀 있으니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가지고 버스에 오르고, 밧줄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밧줄은 너무 굵고 무거워서 그 밧줄 자체 무게 때문에 애를 먹는다.  지난해 새만금에서는 돌망테기를 밧줄에 메어서 당기는데 워낙 돌이 무거워서 밧줄이 끊어졌는데 오늘은 밧줄은 너무 튼튼한데 그것을 들어 만지는것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얼마진 않아서 물대포가 나오고, 소화기가 나오고, 하늘에서는 헬리곱터로 위협하면서 고성 방송으로 시끄럽고, 군데 군데 모여서 각 단체별로 소집회가 이루어지고...어수선 한 광경이다. 함께한 50중반의 아저씨는 그들의 젊었던 70년대에는 긴박했고 어려웠던 시기이기에 비장한 마음으로 시위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너무 산만하고 가벼운것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어느정도 지나 우리도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발언들을 하고는 철수 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한미FTA중단하라"

 

그냥 갈 수가 없어, 처음 출발했던 명동 본거지로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오늘은 성황이었다. 뒷풀이 장소에만도 50이 되는 숫자가 왁자지껄하다. 어느정도 배를 채우니 사회자가 일어나서 각각 소개를 하고 노래를 시키곤 한다. 처음 행진을 시작할때 만난 인드라망 식구들이 준 소주를 마신것을 시작으로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신듯 한데 몸이나 정신은 짱짱하다.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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