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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행...

"잔대가리"와 "이 새끼" 국감, 또 파행

부르주아 국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경악한다.
허나 세상은 험한 법이다.

노동조합에서 이런 일을 대면하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싶을 것인가..

조합내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성이 내내 의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망가진 자들을 상대로 "진짜" 논쟁을 한다는 것도 난망하다..
(이래저래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운동판이 인격자가 모여 활동하는 동네가 아님을 안다. 허나 좌파라면 좌파다운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동료를 대면하는 곳으로서가 아니라 동료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이성적 존재로서 대우하며, 사물과 현상을 대면하는 곳..
상대를 불신, 음모, 가식, 속임, 강압 따위로서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 소통의 상대로서 대면하는 곳..
이런 것조차 정리안한 상태로 운동판에 발을 담기 시작하고, 현재 운둥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해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좌파로 오인받기 싫어한다..

그들은 왜 운동을 하는 걸까?
그들은 어떻게 운동이란 걸 하게 되는 걸까? (오히려 이게 더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
자신이 잘 살고 잘 먹고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을 것일 터인대 말이다...

결국 운동판도 하나의 사회에 다름아니다.. 다른 여타의 사회, 그리고 단체와 같이..
기독교를 신념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하나로 대하는 '진정한'(기독교가 위선을 행하는 곳이므로 그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있듯이...
운동사회를 사회로서 그리고 사회생활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의 일부로서 운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규정으로 잘 정리된 말로서 이러한 사람들을 일컬을 때 '기회주의자'라고들 한다.

헌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데 그것을 기회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적합할 수 있는가?...
(이것은 지나친 게 아닌가?)

그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다시 들어갈 때 조금 윤곽이 잡힐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따뜻한 사회를 원한다'
'인간미있는 사회를 원한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불신, 협잡, 음모, 사기, 경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유대, 연대, 소통으로 채우는 사회를 원한다'

사회주의자는 이러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에 대해 자기물음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칼은 현실을 해체하는 데 유용한 것이 좋다. 허나 그 칼은 아름다움을 조각해내는 칼이어야한다."

우리의 신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신념과 현실에서의 실행, 실천으로서 나타나는 양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다를 수 있다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념과 대립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좌파라....)

 

덧: 욕을 먹는 것이 두려운 것이라면 내부단속으로 자기정화로 자기규정을 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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