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비정규직인 시간강사와 정규직 교수 사이의 관계는 다른 부문, 이를테면 다른 노동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 노동자들 간의 관계와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건 국내에서 학위를 받았건 자신이 강의하는 대학 학과의 정규직 교수가 비정규직인 강사에게는 스승이라는 지위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스승의 입장에 있는 정규직 교수가 시간강사라는 입장에 처한 제자에게 전통적인 사제 관계를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스승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체제의 온갖 모순이 대학사회에 빌붙어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대학 비정규 교수인 대학강사의 교원지위회복과 관련해서 대학 측 입장을 대변하는 박승철 교수(전국 교무처장 협의회 부회장, 성균관대 교무처장)가 "대학교수를 한 명 쓰려면 연간 2억이 들어가 7만명을 고용할 경우 대학에 돈이 없다. 대학강사들은 연구를 안 하고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분명 박승철 교수도 자신의 학과에서 비정규 교수로 있는 제자들이 있을 것이다. 박승철 교수는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도 자신의 제자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한 셈이다. 그의 사제관이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다.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 이야기이다. 여러 가지 문제를 언제나 논의하곤 했던 학과의 교수님 연구실을 찾았을 때, 평소와 달리 책상 위 화병에 아름다운 꽃이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연구실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예쁜 꽃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궁금히 여겨 여쭤보니 대학원 학생이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석사 학위논문 심사를 앞두고 나름대로 지도교수에게 점수를 따고 싶었던 것일 게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종의 낭만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로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특정한 학과에서 주로 목격되는 현상인데,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마치 주종관계처럼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후배 연구자로서 강의와 연구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관계를 요구한다면 이건 심각한 정신장애를 겪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한국의 대학에서 이런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교수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지난 2월 25일 자신이 학위를 받은 미국으로 건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한경선 씨의 유서는 대학 비정규 교수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故 한경선 비정규 교수의 유서

이 글을 받으실 때, 저는 이곳 오스틴에서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휴식을 비로소 얻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2004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 후 정신없이 일하며 보냈던 처음 1년을 제외하고는, 제정신을 갖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떤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넘으려 발버둥 거리며 만 4년을 보낸 후 이곳 오스틴에서 비로소 갈망하던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귀국 초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러한 연구업적과 강의경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뜻 맞는(이해가 맞는) 몇몇 학교들끼리 연합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특정인의 학교임용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경쟁에서 도태되어 결국엔 그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양가족을 지닌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하고, 강의교수로 지내면서 임용에 필요한 정도의 논문을 쓰기는 사실상 거의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규모가 비교적 적은 이곳에서 기업체의 불공정 단합처럼 몇몇 학교들의 이해단합이 더욱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공정한 경쟁에 기초한 상생발전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개인과 학교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본인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공시한 2005년 1학기 교원임용에 원서를 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2005년 3월말에 가서야 1차 심사에 대한 연락을 통보 받고 다시 해당학기 중반까지 임용과정이 지지부진하게 흐르다가, 5월말 경에 이의 결과를 학교 측으로부터 통보 받는 기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또한 이와는 다르게, 2006년 2학기 중앙대학교와 인하대학교에 응시한 교원임용과정에서는 1차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연구나 강의 경력 면에서 납득되기 어려운)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 이러한 일들이 몇몇 학교들이 (즉, 건국대, 한양대, 성균관대) 주도한 협력 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이곳에선 원하던 연구활동을 하기 힘듬을 감지하여 미국대학에도 원서를 내었으나 일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저의 미국 비자사본(첨부1)을 보시면 어떻게 그러한 결정들이 이루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서 강의전담교수로 있는 동안에는 그 신분상 약자인 점으로 인한 유형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비정규직이란 점을 악용한 고용자 측에 유리한 조건을 담은 2006년도와 2007년도 계약서(첨부 2)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2007년도 계약서에 굵은체로 쓰여져 있는 책임학점은 이전 계약서에서 변경된 것으로, (주당 12학점(시간)에서 주당 12학점으로 변경) 현재 모든 교양영어과목 2시간 1학점제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자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변경된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임시수를 책임학점제로 변경하면서 초과강사료를 주지 않으려 했던 부서장이 외국인교수에게 출퇴근 시 사고에 대한 보상을 직접 모색하던 모습에 더욱 참담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둘째, 1년 단위로 3년까지 계약이 갱신될 수 있는 상황 하에서 주임교수의(원칙과 기준이 모호한) 재임용 추천조항은 그의 부당한 처우에 무방비로 놓이게 될 소지를 야기할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재변경 등의 이유로 부서장의 방에 한 사람씩 불러 부서장과 과목주관교수 합동의 심문식 면담이라든지, 외부출강금지건과 관련한 동료교수 파면, 그리고 2006년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영어수준 평가도구인 모의 토익 시험지의 공개거부 등 이곳에서 지낸 만 2년이 마치20년같이 느껴지던 일련의 사례들이었습니다. 현 체제에서 최고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 행하는 모순과 불공정한 처사는 같이 일하던 동료교수의 파면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첨부 3-탄원서). 그의 파면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학교 측의 주장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이의 행정적, 법적 절차를 위해 그들이 제시한 서류들과 주장들을 보고 전해 들으면서, 이 기관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했습니다. 그 동안 겪은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란 초기의 순수한 열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애초의 희망과 비전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저와 같은 이가 있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기원을 위해 두서없이 이 글을 써서 전해 드립니다.

2008년 2월 25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한경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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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29 2012/01/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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