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08/20 08:57

2022/08/20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

44쪽.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79쪽. 식당을 나와 숙소를 향해 걷는 동안 나는 얼마간 흥분 상태였던 것같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수많은 인파가 눈앞에서 활짝 갈라지며 자, 이제 넌 앞으로만 걸어, 라고 말해주는 것같았어.

93쪽.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120쪽.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122쪽.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음 마비되어, 그 낯선 할머니와 작별한 일이 어느 사이 멀어진다.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밖으로 빠져나간다.

136쪽.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155쪽. 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 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134쪽.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168쪽.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311쪽.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 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4쪽.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 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 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316쪽.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떠렁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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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0 08:57 2022/08/2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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