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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 많이 순해졌다.

  • 등록일
    2006/07/11 02:53
  • 수정일
    2006/07/11 02:53

소주가 많이 순해졌다.

한 오륙년 전쯤. 가끔 방구석에서 홀짝홀짝 소주병을 붙잡고 있으면 소주잔으로 쳐서 한 석 잔 쯤이면 전신이 불타오르고. 말그대로 '거나하게' 취한 듯한 그런 기분이 났었는데. 한 잔 마시고 잠깐 있다가 에이 또 마시자 이러면서. 딱 석 잔을 들이키고 나선 뚜껑을 닫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젠. 은근히 취하기는 하는데 석 잔으로는 너무 부족하구나. 결국 한 병을 다 비우고야 말았다.

아마도 알콜 도수가 많이 낮아졌기 때문이겠지. 티브이 광고에서, 지하철역 광고에서 한 연예인이 올챙이 한 마리~ 두꺼비 한 마리~ 어쩌구 하면서 율동을 하는 걸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때리고 있으니깐.

25도라는 숫자는 6-7년 새에 20도니 20.1도니 이렇게 낮아졌다.

 

전엔 석잔만 먹어도 취했는데 왜이리 안 취해? 이런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면서 티브이에서 하는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보면서 엄정화씨의 천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몇 달 전의 기억들. 몇 년 전의 추억들? 등등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옛날 일을 괜시리 곱씹어 보곤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 2년 동안. 문득. 오래된 기억들을 담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뒤적이다가.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오기는 한 것인지. 새로운 의문이 돋아나고. 나는 진짜 "치열"하게 살기나 한 것인지. 오체투지한다는 마음으로 "올인"을 한 것이기나 한지 되짚어보는 의문들. 이것은 어찌보면 인텔리 출신의 원죄인지도 모르는 것인지마는 문득 다가오는 무력감과 허탈함은 혀만 끌끌 차게 만든다.

 

차라리 그 동지처럼, 괴팍스러울지라도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야 했건만 이건 도통 사람 붙잡기 위해서 뒤만 쫓다가 죽도 밥도 안되는 그런 상황을 만든 느낌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여튼. 내가 느끼는 것은. 소주가 많이 순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세월과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소주 시장의 절대강자 참이슬을 만드는 회사인 진로의 전문경영자가 두산으로 스카우트 되어 처음처럼이라는 소주를 만들어서 참이슬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참 대단하다. 별 거 아닌. 위스키나, 포도주나, 복분자술이나 하여튼 순하고도 은근히 취하며 운치있는 전통적인 술보다도 솔직히 말해 역하고 맛도 없고 별 거 아닌 소주 한 잔 하면서 철학이니 인생이나 하는 것들을 한 번쯤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처럼". 수년 전부터 내 책 유리판 밑에 깔려 있는 문구다.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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