툰베리의 결기, 그리고 인류의 희망?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이상은 참으로 존중할만하다. 그리고 올곧게 자신의 가치관을 지켜오는 그 삶에도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다만 그는 아나키적 환경주의자로서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 그 사상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존중하고 있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이번에 기후위기행동과 관련한 한겨레 칼럼 같은 것이 그렇다.
김종철은 툰베리가 옷도 사입지 않을 것이며 비행기도 타지 않으리라 결연히 선언하는 툰베리를 칭송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 놀라운 집중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래,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예를 들어, 종이를 만들기 위하여 베어져 나가는 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녹색평론의 종이출판을 중단하고 전자책으로만 출판한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한국사회의 일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녹색평론을 전자출판한다고 한들 그로 인해 살아남는 나무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시발로 해서, 모든 매체들의 종이출판이 중단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지구의 환경은 좋아졌을까?
기실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저 '결기'에 대한 궁극적 '반응'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인류에게 최소 철기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면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반응'이 되겠으나, 그게 가능한 것일까? 하다못해 석유자원을 사용하기 직전으로만이라도 돌아가자고 한들 그건 또 인류가 받아들여줄 것인가?
자원의 착취를 어느 정도까지 제한할 때, 툰베리의 결기에 부응하는 '반응'이 될 수 있을지 김종철은 고민하지 않는다. 경제구조 자체를 완전히 뒤집고, 자연자원의 최소이용에 한정한 자급자족 시스템을 만드는 것만이 그가 원하는 제대로 된 '반응'의 결과일텐데, 그렇게 된다고 하면 인류가 행성 판도라의 나비족처럼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자연과의 소통능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 되어야 하늘을 날거나 SNS를 하는 등의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혜택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기에.
현재의 상태에서 머물기만 한다고 해도 여전히 어떤 '결기'에 대한 충분한 '반응'은 불가능하다. 라이프사이크를 마친 스마트폰을 버리고 더 이상 스마트폰을 쓰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최소한 현재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될만큼의 스마트폰은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것이 과연 '반응'일 수 있을까? 지금은 갖고 있지 않지만 스마트폰을 갖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럼 이제 스마트폰을 가지지 못하게 막을 것인가?
김종철의 칼럼 말미에 보면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종철은 이를 우려한다. 그 우려의 핵심은 "파국적인 기후변화로 멸망하기 전에 인류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이 사라지거나 병들어버린 결과로 속절없이 붕괴할 가능성"이다. 즉,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은 사라지고 혼탁하고 더럽고 불결한 영혼들만 남게 된 지구가 전쟁같은 것으로 멸망할지 모른다는 우려다.
난 이러한 우려가 사형수에게 총살을 당할지 교수형을 당할지 선택하라는 것과 뭣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이 몸부림 치다가 결국 기후변화로 멸망하는 것과, 그런 사람들이 없이 난장판이 벌어진 후 결국 다 죽는 것과의 차이는 뭘까? 물론 김종철은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이 끝까지 움직여 다른 이들을 감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인류가 공멸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이겠으나, 원시반본하는 것 외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의 고통만 커지게 된다.
난 이러한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의 고통에 바로 김종철 같은 사람들이 기여하는 바가 없지 않다고 보는데,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하는 건 당연히 해야겠지만, 툰베리의 '결기'를 찬양하면서 그에 부응하는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달리 이야기하면 지금의 삶의 형태 자체를 완전히 포기할 것을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인데 이러한 극단적 요청이 한편으로은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의 정신상태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 외의 사람들에게 반동적 의식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김종철 등은 좀 더 깊이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김종철이 그저 이론가라면 그럴 수도 있다. 이론가의 의무는 오로지 날카로운 칼날로 환부를 끊임없이 파헤치는 것이기에. 하지만 그가 이론가를 넘어 조직가이자 활동가라면, 조금 더 넓게, 본인의 지향하는 목적의식과 관련된 다른 상황들에 대하여도 검토를 좀 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환경보호를 위해선 지금 당장 중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면, 그리고 그 네트워크가 그렇게 단순하다면 아마도 기후위기 따위는 애초에 벌어지지도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이 체제의 어느 구멍을 뚫어야 지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하는 거지만, 그냥 인류는 절멸이 답이고,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의 극단적 발상들이 보편적 발상으로 전환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이 먼저 절멸하고 가진 자들만 남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던데, 뭐가 부당한가? 그 가진 것만 가지고 끝내 살아남아 진정한 지옥을 지구에서 맛보게 될 터인데.
암튼 뭐 그렇고, 난 김종철 선생의 이러한 발상이 매우 유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생각들이라고 보기에 그의 의견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