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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사랑방의 활동가 강령.

  • 등록일
    2005/03/30 03:13
  • 수정일
    2005/03/30 03:13

"운동에서 나오는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나 명망에 의존하는 삶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한다. 운동을 나의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독립적'인 운동의 지속을 위해 어떤 고단함도 받아들인다"

 

인권운동 사랑방의 활동가들을 그 누구라도 언제나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활동가 강령을 신봉하는것에는 반대한다.

내가 보기에는 사랑방의 활동가 강령은 지사형 운동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 선배들의 대다수가 저런 고단한 삶을 살아왔으며, 우리가 그들을 역사라 부르고 존경해마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어있는 다른 속깊은 이야기들에게 까지 동의할 수는 없다.

그들의 겪어낸 고단함은. 자신만의 고단함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기 위해 남몰래, 이름없이 그들을 봉양해왔던 모든 사람에 덮어쓰여진 고단함이기 하거니와.

아주. 아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고난함이 그들의 삶 내내 지속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위 강령에서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운동을 나의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란 부분이다.

난 생계까지도 운동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계와 운동의 분리는 또 다른 왜곡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래와 같은 강령은 어떠한가?

"우리는 운동을 근거로 어떠한 영리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운동을 다른목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것도 운동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독립적'인 운동의 지속을 위해 모든 고난함도 받아들인다."

 



[류은숙]의 가방
'92년 8월부터 현재까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인권이야기는 이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말만큼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필자가 가리키는 인권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아직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은 인권의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싸가지'에 대하여
류은숙 
싹수(앞으로 잘 트일 만한 낌새나 징조)의 방언이라는 '싸가지'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쓴다. 자기 한 일에 대한 반성을 모르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를 볼 때 '싸가지 없다'란 말도 많이 쓴다. 요즘 들어 이 '싸가지'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았다.

한반도 주변 정세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각축장이 되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양극화와 민중의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 이때 기대해 볼 싹수는 그런 문제들에 대응하는 주체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재산 축적 등 불미스런 일이 터져 나왔다. 운동하면서 할 짓 다 해왔다는 비난이 몰아칠 때마다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고통을 느낀다.

운동이란 것이 뭘까. 왜 내가 그 현장에 있어야 하나. 내가 많이 들어왔고 좋아하는 말은 '운동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운동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처신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건 경로사상 얘기가 절대 아니다. 운동에는 역사가 있는 것이고, 그 역사 앞에 숙연함과 의무감을 느껴야 하기에 나의 행동이나 처신이 온전히 나의 것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운동을 하는 일이 퀴즈게임 식이 돼버린 듯하다. 골든벨이 울릴 때까지 가면 좋고, '삑' 소리가 울리면 언제라도 퇴장해 버리면 그만이다. 함께 돌을 굴리던 사람들의 기운이 빠지고 수렁에 빠져드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 중의 하나가 운동권 실업자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줬다는 말이 있다. 매머드급 단체들의 인사들이 운동을 경력 삼아 고급 공무원으로 탈바꿈하고 민간과 권력의 경계를 흐지부지 만들었다. 기업체 혹은 지자체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는 거대한 운동 이벤트가 개최되고, 운동을 표방하는 많은 단체가 생기고, 대학에서는 운동관련 조직에 대해 가르치는 강좌가 개설되고, 사람들은 운동을 강아지 이름 부르듯이 편하게 입에 올리는 세상이다. 운동을 해도 탄압 받을 염려가 없는 사람들이 차지한 운동사회는 그야말로 운동의 위기를 만들었다.

운동을 가지고 사교를 하는 사람, 운동을 가지고 눈 먼 돈 쓸어가겠다는 사람, 운동을 가지고 출세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대중의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활동가가 전문지식인의 심부름꾼으로 인식되고, 그런 전문지식인을 많이 거느린 단체들의 목소리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정작 주목받아야 할 취약집단과 소수자의 목소리는 주목받기 어렵다. 사회의 가장 구석에서 묵묵히 일하는 많은 조직과 활동가들이 오히려 주눅드는 상황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비리와 불평등과 패륜으로 가득한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진보'의 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최근 노숙인 당사자 조직이 활동하는 모습을 어느 소식에서 접했다. 우리의 희망은 가장 작은 자를 주인으로 세우는 운동,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는 활동가가 넘쳐나는 운동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운동이 기득권 세력에 가까운 자리를 절연하고 순수성과 명예를 지켜나가는 자기 노력에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튀는 것이고 비현실적이란 화살이 날아온다. 되묻고 싶다. 우리 자신을 향한 원칙은 어떤 칼보다 날 서고 시퍼런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삼장법사가 손오공의 머리에 씌운 링처럼 그 원칙을 벗어날 때마다 머리와 가슴을 아프게 조여오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그런 원칙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운동에서 나오는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나 명망에 의존하는 삶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한다. 운동을 나의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독립적'인 운동의 지속을 위해 어떤 고단함도 받아들인다" 이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내부 원칙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는 유혹이 있을 때마다 '운동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련다.

부끄러운 행동을 했을 때는 머리가 죄어드는 고통을 응당 받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론이나 불가피함을 운운하는 세력에게는 '분노'를 발산할 것이다. 분노는 정당한 감정이고 때로는 의무이기도 하다. '싸가지' 없는 것에는 '싸가지 없다'고 얘기해줘야지, 예의를 차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내부비판과 상호비판이라는 것이 죽은 언어가 돼버린 운동사회의 싸가지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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