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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비처럼

  • 등록일
    2005/01/28 03:49
  • 수정일
    2005/01/28 03:49

벌써 김진균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년이 다돼간다.

정말 시간이 후딱 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이 든다.

 

김진균 선생님은 생전에 마지막 즈음까지 진보넷에 '불나비처럼'이라는 칼럼을 연재하셨다. 그중 「황달 : 노란색, 노란 스쿨버스, 황건적」이라는 글이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병세를 빗대어 -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얼마전부터는 심한 황달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 쓰신 글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고는 맘이 무척 아팠고, 새삼 선생님의 넉넉하지만 강고한 내공에 머리를 끄덕였었다.

문제의 죄책감은 지난해 진보넷 리뉴얼작업의 일환이었던 '미디어 참세상' 개편과 '공동체/블로그' 개편 와중에 진보넷이 이 칼럼이 어디에 쳐박혀 있었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까맣게 잊고 지내고 있었다. 물론 개편와중에 사라진 김규항칼럼 같은 것도 있지만, 그건 완전히 경우가 다르다, 오로지 맘을 쓰지 못한 것이 죄스러울 뿐인것이다.

 

얼마전에 김진균 선생님 추모사업회가 발족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야, 아차! 하고 뒤져보니 완전 개판인 체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김진균 선생님은 진보넷 초기 대표를 역임하셨고, 진보넷이 세상에 나올수 있도록 산파역을 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런탓에,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지고, 곧(2월 14일) 기일이 다가오는지라, 애써 '그럼 홈페이지를 저희가 만들겠다'고 자청했다. 적어도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늘 그렇듯, 이래저래 어르신들께 여쭙는 형식을 갖추기는 했으나 우리 맘대로 '불나비처럼'이라는 제목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며칠전 추모사업에 실무를 담당하시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홈페이지 제목도 바뀌고 메뉴도 바뀔 것 같다는 것이고, 가족분과 면담을 좀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사실 그려려니 하고, - 우리 자원활동가이신 디자이너가 몹시 부담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억지로 갈궈서~ 같이 ^^ - 수요일에 가족분들 뵙고 왔다.



가족분들이 내게 보여준 것은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과천에 만드신 연구소가 하나 있는데, 정년 퇴임후 지난 자료 정리나 정리하시던 것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선생님과, 그 자제분과 한 1년동안 준비를 하고 계신 연구소 홈페이지가 있었는데, 그 규모나 기획이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히 자료나 모아놓은 홈페이지가 아니라 새로운 이론이 토론되는 공간으로 기획을 하고 계셨고, 상당히 구체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홈페이지는 세상에 나오는 도중 주인을 잃었다.

 

그 홈페이지의 타이틀은 '너른 마당'이라고 선생님의 학교 홈페이지의 이름이었다.

 

즉, 김진균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이름이 바뀌게 된것은, 이렇게 세상에 나오다 만 홈페이지를 일부나마 세상에 내밀자는 가족분들의 의사와, 그 제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때문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되었지만.

솔직히 말하지만 그리 맘이 따뜻하지만도 못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일이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좀 '거시기'해서 말을 하지 않겠지만 생전에 좌파진영에서 논의되다 결국 지금은 흐릿해져가는 사업이 하나 있다.

 

이 두가지는 선생님의 두가지 모습이다.

학자로서의 넉넉한 모습과, 투사로서/운동진영의 큰 스승으로서의 두가지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선생님으로써는 통일된 삶을 사셨겠지만.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불나비처럼'이라는 투사로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의 제자나 가족은 '너른마당'이라는 지극히 교수로서의 모습만을 좀더 기억하는듯 하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교수 김진균의 추모 사업회의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외주 업체로 전락해 버렸다.

 

난 선생님의 제자들이 좀 탐탁치 않다. 어떤분은 한때 친분이 있기도 했고 강의를 받기도 했던 분들이지만, 다들 이제 나이를 먹어 교수가 되고 난 뒤로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 퇴임기념식에서였다.

누구보다 먼저가서 음향 확인하고 영상물 상영을 준비한 사람은 우리 활동가들이다. 근데, 뒤늦게 나타나서. '이거 확인했나? 저거 했나?' 자기 제자 다루 듯 반말로 이리저리 간섭하면서 생색내는 꼴이 어찌 내가 싫어하는 교수들을 닮았던지. 기분이 거시기 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축사가 길어진탓에 시간이 없다며, 우리가 준비한 영상물을 건너뛸땐 뒤통수 맞은 기분이랄까? 뭐 물론 우리 대표가 길길이 뛰는 사람에 밥먹는 중간에 상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불나비처럼'이 '너른마당'에 밀린 일이 내게는 그렇게 간단케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제제기할 만한 학력도 경력도 없는 나로서는 결국 '예..예..' 만 하고 말았다.

아마 이종회가 외국에 있지만 않았어도, 괜실히 거기에다 투덜댔을 것이다. - 그 양반은 정말 기가 막히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늘 없어진다. ^^

물론, 홈페이지 제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퀄러티가 무척 떨어질 것 같은 예감은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하는 일의 80% 이상이 죽은 자식 뭐 만지기식의 뒤치닥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전망도 비전도, 무엇하나 없으면서 이렇게 죽치고 뒤치닥거리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김진균 선생님은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난 이 즈음. 점점 운동이 고착화되고 우경화가 가속화되어가는 이 즈음. 난 선생님 무덤앞에 서 있을 이유를 어떻게 찾아나갈 수 있을까.

 

ps. 디자이너~~~(누군지 안밝히겠다) 미안타

 

ps2. 개인적으로 '불나비처럼'의 칼럼중 가장 감동받았던 글은 '뽕뽕, 해방이다'이다. 이 글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그 내공에 정말 뒤집어질 글이다. 아는 사람만 말이다. ^^ (기회가 되면 이 예기도 해봅시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트랙백을 달아주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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