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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엄마가 그랬다

-애가 왜 그렇게 애살이 없냐

애살, 이란 말은 경상도 사투리인데

오기+승부욕+의욕+의지+기타 등등...으로 해석하면 되려나

특히 애살이 부족했던 건 체육과목이었는데

철봉도 뜀틀도 달리기도 피구도 너무 못해서

국민학교 1학년 때 전교에서 딱 한 사람, 나 혼자

체육에서 미'를 받았던 전설(?)을 남겨서 엄마를 속상하게 했다

나는...누구와 경쟁하거나 눈 앞에서 바로 바로 점수를 따야하는 일에서

늘...너무 느리고 너무 자신없어 한다

해보기도 전에 포기한다

천천히 공부해서 찬찬히 이해하는 일은 느릿느릿 해내는데

곧바로 움직여야 하는 일에는 젬병이다

 

다큐멘터리 한 편을 완성했다

이렇게 아프고 외롭고 허탈하고 부끄러운 일이 될 줄 몰랐다

시작하기 전에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일이다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애살이 없었기 때문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70분짜리 영화 한 편을 마쳤다는 것 만으로도 기특한데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를 격려해주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없는 작업, 이를테면 음악이라든가 컴퓨터 그래픽이라든가

편집시스템을 구축하는 일 등을 옆에서 척척 해결해준 사람들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감독으로서 부족한 게 너무 많은 모양이다

마스터 테잎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질책과 항의와 비난을 받았다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아팠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그동안 시간은 그냥 흘러만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 많은 사건 사고들이 그저 스쳐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 머리에서 가슴에서

옹이도 만들고 뿌리로도 뻗어가서

나중에 뭔가 조금 더 푸릇푸릇한 것으로 바뀌지 않을까

새 이파리 같은 것이 돋아나게 되지 않을까

 

87년 대통령 선거 당일

구로구청에서 모여 2박3일동안 열심히 부정선거 항의농성에 참여했던

이름모를 많은 시민들과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준 사람들과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 분들 덕분에 이 어리숙한 한 사람이

감독이 되었고

감독이 되느라 열병을 앓으면서 삶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다시 배웠고

결국 혼자서 다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아직 못났고

앞으로도 못난 인생을 엮어갈 테지만

그래서 기대했다가 실망한 분들께는 너무 너무 죄송하지만

그래도 저, 천천히 이 길을 가겠습니다

한꺼번에 실망하지 말고 조금씩 나눠서 천천히 실망하세요

이 길에서는 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을께요

 

하여간

드디어 한 편 완성했습니다

모든 것 다 접고, 그냥

축하해주세요

 

 

 

 

2004/10/18 10:25 2004/10/18 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