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 속의 우물

지난 금요일에 이사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7분? ㅎㅎ

이번 이사는 내 이사 인생 최악의 레전드라고나 할까?

  

물건을 원래 정한 위치에 두고 써야 편안해 하는 성격 때문에 십수년간

그 물건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 이사한 이후의 짐정리가 꽤 빠른 편이다.

가구 위치 잡은 후 두어시간이면 짐정리 끝나므로 이사 당일에 거의 모든 정리가 끝나곤 했다.

그러나 이 집은 범우주 최강 수준의 더러움을 유지하고 있는지라 도저히 대충 청소하고

짐풀기를 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깨끗한 척해서가 아니다..

이사짐센터 일꾼들도 인정했다. 수도 없이 이사했는데 이집처럼 지저분한 집은 처음이라고..

흑흑..

 

지금까지의 집들은 한 군데를 제외하고 왠만하면 오래오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집은 계약할 때부터 딱 2년만 살다 빨리 떠나야지라는 생각 뿐이다..

 

 

1. 난 엘리사가 아니고.. 넌 쐐기풀이 아닐 뿐이고

첫 단계 먼지제거..

이사 나간 집에 먼지가 없을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청소해도 손이 닿기 힘든 곳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 집 사는 사람들은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 막론하고 켜켜히 먼지를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이었나보다..

새까만 먼지들이 집안 구석구석.. 심지어 매일 여닫는 문짝과 벽에도 치렁치렁..

먼지들을 보면서 생뚱맞게 얼마만큼의 세월을 쌓여야 저렇게 시꺼멓 존재들이 될까?

문짝에 켜켜히 쌓인 먼지들에게 절로 물어본다..

"저기요.. 연세가 얼마나 되세요???"

먼지 걷어내다 '우와~ 이거 다 걷어내면 원피스 한 벌은 족히 짤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다가

생뚱맞게 백조왕자의 엘리사 공주가 생각났다.

마법에 걸려 백조가 오빠들을 다시 인간으로 돌리기 위해 쐐기풀을 뜯어다 옷을 짜던..

'그래 나는 이 먼지를 걷어 내어 옷을 짜야하는거야.. 누군가의 마법을 풀기 위해.. 으허허허..'

먼지 제거 마친 후의 나는 굴뚝 청소부 꼴이 되었지만.. 뭐 어차피 할 청소라면..

이 때까지는 그래도 청소를 즐길 여유가 있었다지

 

2. 여기는 '조의 아파트'가 아니거든

 2단계는 씽크대 청소..

바꾼지 얼마 안된지라 상당히 깨끗한 편.. 소독만 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하며 씽크대 문을 연 순간..

나는 보아버렸다..

족히 백마리는 넘어 보이는 바퀴벌레들의 무덤을..

영화 '조의 아파트'에 나오는 바퀴벌레 수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갈만큼 많은 바퀴벌레..

다행인 건 살아 숨쉬는 것들은 없으셨다는..

후다닥.. 바깥으로 탈출..

켁켁.. 오 마이 갓!!! 이건 아니잖아~~~~~~~~~~~~~~~~~~~~~~~~~~~~~~

이번 이사가 레전드가 되는 순간...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시체들을 제거하고 소독하고 또 소독하고 또 소독하고...

그리고 거금 24,000원 어치 퇴치약을 사왔다..

 

3. 쓸데없는 돈의 낭비

벽지를 바를 생각은 없었다. 전세집 치장을 위해 돈을 들이는 것은 바보같은 짓 따위는 졸업한지 오래이다..

비용 저렴하게 페인트 칠을 할 생각이었는데..(5만원 미만의 예산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바퀴무덤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뭔가 나에게 하나쯤은 보상이 필요해..

씽크대 청소 마치고 후다닥 도배 계약하고 왔다..

아주 유치찬란한 도배지를 골랐다..

토요일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도배완료!!!

1차 화장실 청소 완료.

 

4. 미싱은 잘도 돌아가지만....

 쐐기풀 숲처럼 먼지를 키우고  '조의 아파트' 수준으로 바퀴벌레들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바닥이라고 평범할리가 없겠죠? 당근!!!

도배완료된 방부터 미싱질 돌입.

(미싱질이란? 청소전문용어다.. 온갖 세재를 배합하여 바닥을 닦고 또 닦는 것을 말한다.)

세 번 미싱질을 했으나 별 소득 없이 끝났다..

호텔에서 고생하시는 태양군을 찾으러 갈 시간이다..

태양군 모시고 와서 또 미싱질..

다음날도 아침 7시부터

온갖 세재를 배합해서 열심히 열심히 바닥을 닦았으나 역시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미싱질이 힘든 건 미싱질 자체가 아니라 그 후이다..

세재 제거 작업..

왠만큼 해서는 닦고 또 닦아도 세재를 말끔히 없애기는 어렵다..;;

걸레질을 대략 다섯번쯤 한다음.. 스팀 청소기로 일곱번 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재는 남아있을 것이다.;;

벌써 저녁 7시가 되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먹어서 배고파 죽겠다..

일단 시장 가서 밥 먹고 와서 스팀 청소기 몇 번 더 돌리고 비로소 짐풀기 시작했다.

다 마친 시각이 새벽 한 시쯤..

 

5. 그럼에도

정붙이고 살아야지..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퇴근해서 계속 청소 중이나 별로 깨끗해보이지 않는다..

가구 두 개를 버리고 왔더니 그 속에 있던 물건들이 갈피를 못찾고 두리번 거리고..

종종 지름신 강림하고 있으나.. 꾹꾹 눌러담는다.. 가구에 맞게 짐을 줄여야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아직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으나 살면서 천천히 하지뭐..

 

그나저나 못난 주인 만난 덕분에

새 집에 적응 못하고 끙끙대는 태양이가 불쌍하다..

남아있는 세재 냄새 때문에 괴로울텐데..

미안해 태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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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5 19:13 2009/03/25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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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식 2009/03/26 16:26 URL EDIT REPLY
그 모든걸 혼자 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으음 태양이는 못난 주인이 아니라 참 굳센 주인이라 생각하고 있을 터이지요. 입주를 축하드립니다.
디첼라 2009/03/26 16:32 URL EDIT REPLY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나는 온전히 혼자서 이사를 한 적이 없더라구.. 가족들.. 사무실 사람들.. 친구들 등등이 솔선수범해서 도와줬더라구.. 이번엔 정말 혼자 해보고 싶었어..ㅎㅎ 그래도 완전 혼자 이사하기는 실패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