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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평론]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1)

오늘(3월 1일)로 1898일째를 맞은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이하 재능지부)의 투쟁.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는 조합원들의 천막 농성장이, 길 건너편에 위치한 혜화동 성당 15m 높이의 종탑 위에는 두 조합원이 24일째 고공농성이 진행 중이다.      

재능교육을 상대로 한 재능지부의 당면 투쟁요구는 ‘단체협약 체결’과 ‘해고자 전원 원직 복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사용자(자영업자)로 분류돼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인 200만 국내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 쟁취를 위해 당국을 상대로 법제도를 바꿔내야 하는 지난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투쟁들과 차이가 있다.  
       
필자는 최근 재능지부와 관련된 페북 소식과 집회 참여를 통해 조합원들이 또 다른 힘든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게 됐다. 페북에서는 동지들 사이에서 무거운 기류가 감지됐고, 투쟁현장에서는 평소와 달리 조합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상황을 고루 들어보니 조합 내부의 문제로 견해차가 존재했다. 

발단은 종탑 고공농성 직전 이를 둘러싼 이견의 충돌이었다. 한쪽에는 비정규직 최장기 투쟁사업장으로서 속히 투쟁의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며 고공농성을 지지하는 다수의 조합원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안 그래도 장기투쟁의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에서 극한의 고공농성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회의하며 대안을 모색하던 소수의 조합원이 있었다. 

문제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견해 차이가 조율되지 않은 채 고공농성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불거졌다. 그러나 다수는 이런저런 소통의 장애로 인해 합의가 어렵게 되자 고공농성을 시작했고, 이후 농성투쟁을 담보하기 위해 조직을 재편해 집행부의 새 주체로 등장했다. 여기서 소수에 해당하는, 지난 5년간 투쟁을 이끌어 온 전임 집행부와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다수안과 소수안은 모두 나름 일리가 있어 심층적으로 논의할만한 내용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간 함께 해 온 조합원들 사이의 신뢰와 인화(人和)였지만 이 부분이 미흡했다. 사실 노동자들이 장기투쟁을 하다보면 조합원들 사이의 해묵은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조합원 모두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분위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위기를 해소해야 하는 게 그런 이유다. 

어쨌든 투쟁방식에 치중한 결과 틈이 생겼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정파싸움이 아닌가 하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조합원 개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미루어 보건데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새 집행부가 구성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투쟁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지만, 재능지부의 경우 순서가 뒤바뀌는 바람에 더욱 오해의 소지가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87년 체제를 모태로 한 그간의 민주노조운동은 명백히 한계에 봉착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황기 자본주의 하의 전환기 운동에서, 재능지부가 비정규직인 특수고용에서 투쟁의 선두에 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제 재능지부는 특수고용에 대해 ‘노동자성 인정’을 기치로 내걸고 단사인 재능자본을 넘어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는 거대한 싸움으로 확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만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진보단체들의 연대와 헌신적인 집행부의 선도투쟁, 그리고 조합원들의 노력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종종 어려움은 선도투쟁에 몰두하다 조직 내 인화가 소홀해지는 데에서 발생하기 쉽다. 이 경우 집행부는 조합원들에게 좀 더 겸허한 자세로 다가가고, 조합원들은 선도투쟁한 이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게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투쟁은 서로를 배려한 총체성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다. 

다섯 번의 겨울을 이겨낸 재능투쟁은 이미 재능지부만의 것을 넘어선 진보운동의 사랑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곧 화사한 봄날, 이 땅의 노동자들과 연대동지들은 재능동지들 모두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보고 싶다. 자본주의 기독교의 패션 십자가 아닌, 모처럼 허름한 종탑 십자가에 스민 노동자민중의 벗 예수가 두 동지를 보듬어 안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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