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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신용과 노동: 화폐적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와 노동의 이중화(조정환)

출처 : http://km9540.cafe24.com/bbs/board.php?bo_table=special&wr_id=572

진보평론 54호(2012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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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과 노동: 화폐적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와 노동의 이중화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1. 화폐적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

 

자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신용은 상품의 순환과 가치의 이전에서 상품화폐를 대체함으로써 자본의 회전을 가속화한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혹은 정치경제학이 생각하는 신용이다. 또 분산되어 있던 개개의 신용은, 자본주의적 기업들을 위해 신용을 집중시키는 은행의 발전으로 인해, 은행의 신용으로 대체된다. 이것이 대부자본의 형성과정이다. 이 양자는 은행의 업무에서 밀접하게 결합하여 일정한 이자율을 형성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이자율이 일정하게 고정됨과 더불어 가공[의제]자본이 형성된다. 신용의 이 모든 발전은 미래의 노동에 대한, 혹은 미래의 잉여가치에 대한 청구권의 축적을 의미한다. 즉 대부자본은 기업에 대부되어 고용된 노동을 착취하는 데 사용되고 그로부터 나오는 잉여가치의 일부가 대부자본에 의해 청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점은 엄밀하게 말하면 상업자본이나 산업자본의 관점에서 본 신용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가 상업신용 혹은 은행신용이라는 이름으로 상세히 분석한 것도 바로 이 신용흐름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신용체제는 인간의 자기실현과정인 노동을 임금노동, 소외된 노동, 강제노동으로 바꾸는 장치로 기능했다. 그런데

〈자본론〉3권 5편에 서술된 신용에 대한 분석에서 맑스가 제외시켰던 국가신용과,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에 대한 논평」(1844)에서 그가 정상이 아니라 예외라고 파악했던 노동자신용(오늘날의 가계부채, 소비자신용)도 미래의 노동, 미래의 잉여가치에 대한 청구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선 국가신용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신용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노동(의 일부)에 대한 청구권이 아니라 조세(의 일부)에 대한 청구권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맑스는 이 문제를 경제적 교환에 입각한 착취관계의 진화라는 맥락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착취관계의 조건을 준비한 시초축적의 장에서, 즉 수탈의 맥락에서 다룬다. 비록 상세한 분석은 아니지만 국가신용 문제는 〈자본론〉(1권) 제8편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 예컨대 농촌주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근대적 식민이론 등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형성하는 시초축적의 요소들 중의 하나를 구성한다.

널리 알려진 시초축적의 요소는 농촌주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 이른바 ‘엔클로저’이다. 이것은 생산수단에서 유리된 자유노동자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왕권, 의회, 영주, 교회 등에 의한 국유지의 사유화, 공유지 횡령, 봉건적 및 씨족적 소유의 약탈, 교회재산의 약탈 등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자신의 환경에서 분리된 농민들, 해체된 봉건적 가신집단들, 어민들 등은 도시와 농어촌의 노동시장에 투입되었다. 대규모 차지농장의 확대로 자영농들도 해체되어 노동시장에 투입되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였고 토지를 자본에 결합시켰으며 도시의 산업을 위해 그것에 필요한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을 공급했다.노동시장에 흡수되지 못한 사람들은 대량으로 거지, 도둑, 부랑자로 되었는데 15세기말-16세기 사이의 피의 입법 기간에 이들은 범죄자로 취급되어 강제노동에 처해지거나 태형 심지어 처형 등의 처벌을 받았다. 이들 중의 일부는, 그를 게으름뱅이라고 고발하는 자의 노예로 되고 도주하면 종신노예의 선고를 받아 S자의 낙인이 찍혔다. 여러 번 도주한 경우에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맑스는 이것을 시초축적의 국내적계기라고 부른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국가권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시초축적의 하나의 본질적 계기이다.국가는, 노동자를 자본에 종속시키고, 임금을 규제하고 노동일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위해 폭력을 행사해 주는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 맑스가 다루지 않은 또 하나의 국내적 계기를 추가해야 한다. 마녀사냥과 그것을 통한 여성의 예속화가 그것이다.실비아 페데리치는 시초축적을 성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추상적 사회적 주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맑스의 시초축적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노동의 위계와 차별의 여러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계급관계의 규제에서 매우 중요한 조건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노동의 위계와 차별의 문제에서 고려해야할 중요한 요소들로 페데리치는

여성의 노동과 재생산 기능을 노동력 재생산에 종속시킨 새로운 성적 분업의 발달 2)임금노동에 대한 여성배제와 남성에 대한 종속에 기초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의 구축 3)프롤레타리아트 신체의 기계화와, 여성신체의 노동자 생산기계화등을 들고, 이것들이 16세기와 17세기의 마녀사냥에 의해 촉진되었다고 말한다. 마녀의 악행에 대한 선동, 마녀로 지목된 여성들에 대한 체포, 고문, 자백강요, 재판, 화형으로 이어지는 여성에 대한 엄청난 테러전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것은 단지 노동체제에서 여성의 지위하락만을 가져온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을 무력화시켰고, 남성들에게 여성들의 힘에 대해 공포를 느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남녀간의 골을 깊게 팠으며, 자본주의적 노동규율과 양립할 수 없는 관습, 신념, 사회적 주체들을 파괴했고, 이로써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의 사회적 재생산의 핵심요소를 형성했다.마녀재판은 종교재판에서 시작되어 점점 민간법정으로까지 확대되는데, 이를 통해 교회만이 아니라 국가가 여성을 예속시키는 권력주체로 부상한다. 그래서 페데리치는

“마녀사냥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란 이후 유럽 통합의 첫 사례이자, 새로운 유럽 국민국가의 정치에서 최초의 통합의 장이었다”고 진술한다.

이 두 가지의 엔클로저, 즉 토지에 대한 엔클로저와 여성신체에 대한 엔클로저가 시초축적의 국내적 계기를 구성한다면, 식민주의와 무역전쟁, 그리고 노예사냥은 그것의 국제적계기를 구성한다. 맑스는

“아메리카에서의 금은발견, 원주민의 섬멸과 노예화 및 광산에서의 생매장,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의 상업적 흑인수렵장으로의 전환”이 생산의 자본주의적 시대를 고하는 새벽의 특징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노예사냥을 포함하는 식민주의가 시초축적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지구를 무대로 하는 유럽 국민들의 무역전쟁도 시초축적의 계기가 되는데, 스페인에 대항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영국의 반쟈코뱅 전쟁, 중국에 대한 아편전쟁 등이 그 예이다.

맑스는, 시초축적의 목적은 국내적 계기건 국제적 계기건, 그것의 봉건적 생산양식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전환과정을 온실 속에서처럼 촉진하여 그 과도기를 단축시키는 것이고 그 방법은 사회의 집중적이며 조직적인 힘인 국가권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에는 여지없이 바로 이 국가의 폭력이 산파가 된다고 말하면서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잠재력”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시초축적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맑스가 상업신용, 은행신용과 구별되는 다른 신용 차원인 국가신용을 이 시초축적의 일부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국가신용을 배치하는 장소는 식민제도의 곁이다. 그는 “국채제도, 근대적 조세제도, 보호무역제도”등이 농민으로부터 토지의 수탈(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마녀사냥)과 동일하게 폭력을 수단으로 발전해온 시초축적의 요소들로서 식민제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현대 신용체제의 원천이 되는, 조세와 국채에 대한 맑스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중세에 제노바와 베니스에서 기원한 공공신용제도(국채제도)는 매뉴팩처시기에 유럽 전체에 전파된다. 그것은 식민제도, 해상무역 및 무역전쟁을 온실로 삼아 성장한다. 전제국가이든, 입헌국가이든, 공화제국가이든 국가의 양도를 의미하는 국채는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지으며 국부 중에서 근대적 국민전체가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부분이다.맑스는, 공공신용이 자본의 신앙이며 자본주의에서는 성령에 대한 모독보다 국채에 대한 불신이 더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로 되었다고 풍자한다. 그러한 국채는, 무엇보다도 시초축적의 강력한 지렛대의 하나로 되는데, 그것이 비생산적인 화폐에 생산적인 힘을 부여하여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마술지팡이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국채에 대부하는 채권자들은 그 금액을 공채증서로 전환하여 현금처럼 양도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번잡함도 겪지 않고 이자율에 상응하는 만큼의 조세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유한 금리생활자 계급을 형성하며 금융업자들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제공하고, 징세청부인, 상인, 사적 공장주들은 이것을 하늘에서 떨어진 자본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또 국채는 주식회사, 온갖 유가증권거래, 투기업, 요컨대 증권투기와 근대적 은행지배를 발생시킨다.

맑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처음에는 사적 투기업자들의 회사에 불과했던 은행들이 국립이라는 칭호를 얻어 대은행으로 바뀌면서 특권적으로 정부에 화폐를 대부한다. 이들의 부의 증가는 국채누적의 증가의 징표이다. 한 나라의 국채는 국내은행에서만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국제신용제도는 시초축적의 은폐된 원천의 하나이다. 네덜란드에 대한 베니스의 대부, 영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대부, 미국에 대한 영국의 대부 등이 그 예이다. 맑스는 이러한 국제대부를 염두에 두면서, “오늘날 미국에 나타나고 있는 출처불명의 많은 자본은 어제 영국에서 자본화된, 아동들의 생생한 피”(1권, 951)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세와 국채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국채는 국가세입에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채를 발행한 국가는 세입을 가지고 해마다의 이자지불을 충당해야 한다. 맑스는 근대적 조세제도가 국채제도의 필수적 보완물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채는 당장은 납세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이지만 결국에는 조세증액의 필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제도이다. 세금증액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지출은 새로운 국채발행으로 충당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다시 더 큰 세수증대의 필요를 가져온다. 이 때문에 맑스는, “가장 필수적인 생활수단에 대한 과세(따라서 그 가격등귀)를 축으로 하는 근대적 재정은 그 자체 내에 조세의 자동적인 누진적 증대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 과중한 과세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세의 원칙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과중한 과세의 필연성을 내적 원리로 삼는 근대적 조세제도는 임금노동자들을 순종하도록 만들고, 절제와 근면의 도덕을 내면화하도록 만들며, 강제되는 과도한 노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또 그것은 임노동자만이 아니라 농민, 수공업자 등 하층 중간계급의 모든 구성부분을 폭력적으로 수탈하는 장치가 된다. 보호무역제도는 이 제도의 수탈 작용을 강화하는 장치로 근대적 조세제도에 덧붙여지는데, 그것은 제조업자들을 만들어내고 독립적 노동자를 수탈하며 국민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자본화하고 낡은 생산방식으로부터 근대적 생산방식으로의 이행을 폭력적으로 단축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장치로 기능한다.이 제도는 보호관세장벽의 설치, 수출장려금의 지급, 주변종속국 산업의 폭력적 절멸 등을 통해 이윤추구자들에게 봉사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시초축적의 메커니즘과 이 속에서 국가권력이 수행하는 역할을 고려해 보면, 국가신용은 상품교환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세는 등가적이고 대칭적인 교환의 파생물이 아니라 부등가적이고 비대칭적인 폭력의 파생물이다.그것은 착취의 현상형태가 아니라 수탈의 현상형태이다. 조세가 궁극적으로 한 사회의 잉여가치가 분배되는 한 형태라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가는 조세의 강제적 채집자일 뿐만 아니라 조세를 담보로 하여 국채를 발행하는, 즉 국가신용을 창출하는 주체이다. 이 국가양도(국가채무)를 기초로 막대한 신용화폐가 창출되어 자본 쪽에 거대한 부를 집적한다.

오늘날의 순수법정불환지폐제도하의 달러를 예로 들어보자. 1971년 금과 미국달러의 태환이 중단된 이후 부분지급준비금 제도가 화폐영역을 독점한다. 이제 은행은 차용인이 대금상환을 약속할 때(IOU) 화폐를 발행한다. 즉 은행은 개인과 은행채무의 화폐화를 통해 돈을 만들어낸다. 신용화폐인 지폐달러는 상품화폐와는 달리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주화달러는 일정한 내재적 가치가 있지만 통상 액면가치보다 낮다. 달러는 그냥 종이이거나 금속일 뿐이며 은행예금은 장부에 기록하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수표, 지폐, 금속화폐로 된 달러가 거래, 지불 등에서 그 액면 가치를 인정받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폭력과 그것에 대한 믿음이다. 달러의 액면 가치는 채무가 반드시 상환되도록 만드는 외부의 힘, 즉 국가강제력에 의해 보장되며 그것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달러는 유통된다.

이것은 달러의 발행과 유통 메커니즘에 대한 검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국정부에게는 화폐발행권이 없고 채무발행권만 있다. 미국 정부는 연방준비은행에 국채로 담보를 제공하며 연방준비은행이 이를 근거로 화폐를 발행한다. 즉 달러의 근원은 국채이다. 이것은 다시 미국 정부가 미래에 받아들일 세금을 담보로 한다. 쑹홍빙에 따르면, 이 채무의 달러화는 몇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먼저 의회가 국채발행규모를 승인하면 재무부가 국채를 다양한 종류의 채권(만기에 따라 T-Bills, T-Notes, T-Bonds 등으로 구분된다)으로 설계한다. 이 채권은 공개시장에서 경매로 팔리고 남는 것은 연방준비은행이 액면가로 전량 매입한다. 이러한 국채는 연방준비은행 장부의 증권자산 항목에 기재된다. 연방준비은행은 이 자산을 획득한 후, 이를 이용해 자신의 부채인 연방준비은행 수표를 발행하고 이것을 채무항목에 기재한다. 이제 정부는 민간은행에 거액의 이자를 빚지게 되고 그것의 상환책임은 국민들의 어깨에 지워진다. 둘째 단계에서 연방정부가 연방준비은행이 개설한 연방준비은행 수표를 받아 배서하면 이것은 연방준비은행 정부계좌에 정부의 저축으로 입금된다. 셋째 단계로 연방정부가 돈을 쓰기 시작하면 크고 작은 금액의 연방수표들이 각 경제주체에게로 흘러들어간다(첫 번째 화폐흐름). 이 수표를 받은 회사나 개인이 자신의 상업은행 계좌에 입금하면 수표들은 상업은행 저축으로 변한다. 이 저축은 은행의 부채이면서 동시에 은행의 자산이라는 두 얼굴을 갖는다. 상업은행은 이때 부분준비금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화폐를 창출할 준비를 한다. 은행은 저축 중에서 10%만을 지급준비금으로 남겨놓고 90%를 대출로 운용한다. 이 만큼의 신용이 은행의 신용화폐로 창조되는 것이다. 이 화폐는 은행에 이자를 가져다주는 돈으로 바뀌어 다른 경제주체들에게로 흘러간다(두 번째 화폐흐름). 이 두 번째의 화폐가 상업은행으로 돌아오면 같은 방식으로 (단위 크기에서는 점점 줄어드는 액수겠지만) 더 많은 횟수로 새로운 돈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와 채무화폐 체계가 결합되어 장기적인 인플레이션을 준비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 마법적 화폐창조 과정이 다름 아닌 외부의 힘, 즉 전쟁과 군사력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개의 현대 화폐이론이 잊고 있는 것에 주의를 돌린다. 미국 국채의 가장 큰 부분은 당연히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다. 달러의 금태환중지와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은 금보유고 부담 없는 채무달러의 발행을 통해 베트남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부채는 기본적으로 전쟁부채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하고 있다. 군사비지출은 산업정책의 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예산에서도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레이버는 몇 시간 안에 지구상의 어느 곳에나 정확히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이 세계의 통화시스템을 달러를 중심으로 단단히 묶어 놓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무역적자로 거대한 양의 달러가 미국 밖에서 유통되고 있지만 달러가 세계의 준비통화이기 때문에 외국의 중앙은행들은 그 달러로 미국 재무부 채권을 구입하는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 특히 미국 재무부 채권의 주요 매입자들은 (뒤늦게 이에 가세한 중국을 제외하면) 주로 독일, 일본, 대만, 한국 등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 있는 국가들의 금융기관들이다.

달러가 국가채무에 기초하며 그 국채에 의한 축적이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은, 폭력적 수탈이라는 시초축적의 논리가 오늘날의 화폐제도와 신용체제의 근간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달러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국민화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논리이다. 오늘날의 화폐제도는 전적으로 국가권력의 조세채집권과 이를 담보로 한 채무발행권에 기초해서 번성하고 있다. 경제관계 외부의 (아니 맑스의 말에 따르면 ‘잠재적 경제력’인) 국가폭력이 채무화폐를 발행하는 근원적 힘일 뿐만 아니라 그가 발행한 화폐, 즉 법정불환지폐의 유통을 강제적으로 보장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연방준비은행은 자신이 보장받은 화폐발행권을 기초로 막대한 이자수입을 누리고 상업은행들도 부분지급준비금 제도를 통해 거대한 이자수입을 누린다. 조세수입권에 기초하는 채권을 담보로 잡고 화폐를 발행하는 이들 금융기관들의 이자추구욕에 시민들의 경제생활은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국가권력은 더 이상 시민사회를 토대로 구축된 그것의 상부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각 개인들의 노동과 삶이 국가권력을 토대로 구축된 이자수탈적 신용체제의 부품으로 기능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2. 부채체제 하에서 노동의 이중화

현대적 신용관계를 통해 확장된 이자수탈적 신용체제 속에서 궁극적으로 모든 시민들은 채무자로 규정된다. 국가도 채무자이며 연방준비은행도 채무자이고 상업은행도 채무자이며 기업도 채무자이고 노동자도 채무자이며 실업자도 채무자이다. 개인적 수준에서 부채를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누적되는 국가채무로 인해 국민-채무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신용카드 사용을 통해 매순간 채무자로 전환된다. 오늘날의 화폐체제와 신용체제는 채무를 일종의 보편적 인간조건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채권채무관계는 적대적 계급논리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 채무가 자산이며 치부의 수단인 계급과, 채무가 예속과 죽음인 계급으로의 균열이 그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은행들이 어떻게 자신의 채무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증하는 자산으로 바꾸는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모든 채무가 자산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사람들의 채무는, 은행의 채무와는 달리, 맑스가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에 대한 논평」에서 분석한 것과 동일한 성격, 즉 실존적 예속양식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마우리찌오 랏자라또는 〈부채인간〉에서 신자유주의 하에서 채권-채무 관계의 성격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맑스, 니체, 들뢰즈-가타리, 푸코의 관점을 우리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다. 그가 분석하는 채권채무 관계는 자본과 자본 사이의 채권채무관계가 아니라 자본소유자와 비소유자간의 세력관계로서의 채무이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공공부채다. 복지국가에서 수혜자를 생산해온 공공부채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수혜자를 채무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 전체를 채무자로 만든다. 신자유주의 권력블록이 공공부채가 파산을 가져오고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권리를 사회적 부채로 전환시키고, 또 사회적 부채를 사적 부채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신자유주의는, 최저임금의 삭감, 복지혜택의 철폐, 사회보험 메커니즘의 민영화, 사회정책의 개인화, 사회안전망의 기업화 등을 통해 빈민과 시민들이 아니라 기업과 부자들을 새로운 구호대상자로 만드는 역전된 ‘복지국가’를 수립하려 한다.

이러한 상황에 걸맞는 개념틀을 만들어 낼 목적으로 랏자라또는 두 개의 가설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사회적 패러다임이 경제적 혹은 상징적 교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용에 의해 제공된다는 가설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에는 교환의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고 ‘임금노동 및 생산의 비대칭성’에 이론적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부채, 신용의 비대칭성’만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또 하나는 채무가, 채무자의 생산 활동 및 그의 도덕성과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경제관계라는 것이다.부채경제는 채무자에게 일정한 도덕률을 강제하면서 ‘자기에 대한 노동’을 강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채경제는 경제적 생산만이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가설 위에서 보면 이른바 ‘실물경제’는 새로운 화폐체제와 신용체제에 의해 축적되는 금융적이고 가공적인 자본축적의 일부이자 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금융은 자본가계급의 공동자본처럼 기능하면서 집단자본가, 사회적 자본의 역할을 수행하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획득한다. 금융이 제공하는 신용은 개별 자본으로 하여금 사회적 노동을 전유할 수 있는 지배권을 부여하고 자본가계급 전체에 일관성과 전략을 제공한다. 하지만 랏자라또는 자본의 관점으로부터 노동의 관점으로, 채권자의 관점에서부터 채무자의 관점으로 관점을 역전시킬 필요성을 제기한다.맑스는, 명확하게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신용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신용관계에 대한 고찰로부터(1844) 점차 채권자의 입장을 표현하는 신용에 대한 고찰(1863)로 관점을 이동했다. 이것은 전자의 신용관계가 예외였다는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는 연구추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신용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신용관계의 핵심적 요소를 구성한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만큼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 상황의 이러한 변화를 고려할 때, 랏자라또의 관점 전환 제안은 설득력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이 관점 전환을 통해 랏자라또는 노동이, 전통적 의미의 노동과 자기에 대한 노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이중화하는 것을 발견한다.가난한 사람들의 채무는, 노동과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짝패를 통해 작동하는 임금노동의 윤리와는 다른윤리를 동원하고 또 생산한다. 약속과 죄라는 짝패가 그것이다.

부채권력은 채무자를 자유롭게 놔두면서 그가 대출계약을 존중하도록 자극하고 행동을 부추긴다. 자본-노동, 복지-수혜자, 기업-소비자 등의 다양한 권력관계는 오늘날 채권채무관계에 의해 횡단된다. 노동자도 수혜자도 소비자도, 공공부채로 인하여 (그가 의식하든 못하든) 채권자에게 이자를 지급하면서 산다. 교환의 평등의 논리가 비록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채무관계의 불평등과 차이의 논리에 포섭된다. 이것은 노동관계가 채무관계에 포섭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채무경제는 노동과 자기에 대한 노동을 불가능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주체성의 통제와 모델화를 재구성한다.주체성, 삶의 형식, 실존양식의 생산은 더 이상 상부구조가 아니라 경제적 하부구조의 일부가 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된다. 부채는 주체성을 제련하고 길들이며 제조하고 틀 지우면서 빚어낸다.

무로부터 창조된 채무화폐는 사용자의 믿음을 통해서만 유통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믿음은, 화폐세계 외부의 조직된 폭력(과 그 행사)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주체의 생산을 통해, 그리고 그 믿음을 물질화한 기계장치의 생산을 통해 부단히 재생산된다. 만약 채무화폐가 어떤 일반적 등가물이라면 그것은 ‘채무는 상환되고 또 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일반성일 것이다. 채무는 지불약속이다.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의 주요한 임무는 이 지불을 약속할 수 있는 사람, 그 지불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결과적으로 금융자산, 주식, 채권의 소유자에게 미래 가치에 대한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며 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이러한 주체를 생산하기 위해선 채무에 대한 기억을 부단히 상기시키고 지불약속을 망각하지 않는 내면성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즉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가진 자, 은혜를 입은 자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채무자가 자기에 대한 노동과 자기에 대한 고문을 멈추지 않을 때에만 그를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를 불량한 사람, 불량한 국가로 평가하여 신용불량자로 추방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신용평가를 수행하는 다양한 기관들(스탠다드앤푸어스, 무디스, 피치 등의 신용평가기관은 물론이고 각급의 은행들, 심지어 정부나 학교, 병원 등)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채무를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그의 미래를 미리 담보로 잡게 된다. 부채의 의무는 현재의 행동과 미래의 행동 사이의 균형을 예측, 계산, 측정, 확립하는 매개고리다. 이것이 책임감과 죄책감을 통해 작동하는 부채의 권력효과이다. 채무는 미래를 대상화한다. 이것은 노동시간의 대상화와는 다른 성격의 것으로서, 미래가 갖고 있는 선택과 결정의 가능성, 즉 자유를 대상화하여 자본주의적 권력관계의 재생산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랏자라또는 이것을 두고, “부채는 피고용자와 국민 전체의 현재 시간표를 전유할 뿐만 아니라 비연대기적 시간, 곧 각자의 미래와 사회의 미래를 통째로 선취한다”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채무자는 상품의 생산, 지식의 생산, 수혜자 활동, 감정노동, 자기계발 등등을 통해 국가와 기업이 외부화 하는 비용과 위험을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을 수행하는 바, 이것이 자본의 생산성 향상과 축적의 증대를 가져오는 채무자의 노동이다.이것은, 행동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노동이 더 이상 아니다.오히려 그 부채경제가 동원하는 것은, 도덕적 실존, 공동체적 실존에서 기원하는 힘들을 동원해 공동체와 개인을 동시에 구성하는 윤리적 행동 그 자체이다.죄책감, 양심의 가책, 책임감 등은 이 노동을 수행함에 있어 채무자가 지녀야할 기본적 덕목으로 강요된다.

랏자라또는 이 강요된 덕목과 결합된 행동을 실존적양자택일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어떤 선택과 결정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폐기하는 것이다. 도덕이 그렇듯이, 실존적 양자택일은, 이해력이나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서는 정념적 본성, 인간 마음속의 가장 소중한 충동들, 영혼의 힘, 희망, 기쁨, 감탄, 열의, 믿음 등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전체가 작용한다. 신용과 대부는, 이 다양한 정념, 욕망, 행동을 자본의 이익에 활용하기 위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 수행하는 권력장치이다.그것은 경험의 빈곤(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음)을 하나의 실험으로 변형시키는 정치기구이다.그렇기 때문에 신용은 새로운 삶의 형식, 새로운 의미작용, 새로운 가치, 새로운 믿음에 대한 자기평가를 결정함으로써 실존적 행동의 시간을 이미 만들어진 범주 안에 가두어버리는 통제장치인 셈이다. 그 결과 창조적 시간은 오직 금융에 의해 파괴되기 위해서만 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상호부조, 연대, 협력, 만인을 위한 권리와 같은 집단행동을 무력화시키고 노동계급의 집단조직, 집단행동, 집단기억을 무력화시킨다.

부채경제에서는 경제적 생산이 주체성의 실존형식의 생산 및 통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화폐는 가치척도, 교환수단, 지불수단, 축장수단이기 전에 피통치자의 임무와 지위를 지정하고 명령하는 권력이 된다. 기존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그치는 소득화폐와는 달리 자본화폐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파괴하고 변형하여 새로운 권력관계를 창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기능 때문에 화폐는 균등한 양들의 관계라는 단순한 교환경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능의 양들, 차이의 잠재력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명령하며 분배를 조직한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제는 더욱더 자본가의 힘은 노동자보다 부유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의 힘은 다른 사람들을 착취, 복종, 명령, 지시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선택 및 결정으로서의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역능에서 나온다.이런 의미에서 자본은 단순한 구매력의 축적이 아니라 권력관계 및 주체화 과정을 재형상화하는 장치, 즉 일종의 인지장치다.심지어 교환경로조차도 이제 평등의 논리가 아니라 불균형과 차이의 논리를 바탕으로 기능한다.교환은 그 외부의 흐름의 작용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교환은 역능의 흐름에 의존한다.

부채경제에서 채무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 된다. 국가형식으로 집중화된 권력이 채무화폐 체제를 채택하는 한, 국채, 회사채, 개인의 채무는 영원히 상환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채무를 상환하는 것은 화폐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채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체제의 원리로 내재화되었다. 인간의 실존 자체가 곧 채무로 된 것이다. 현대 신용체제가 낳는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를 일반화한다.

복지기관들은 신용을 청구하는 가난한 사람, 실업자, 임시직 종사자들을 내심 불신하면서 그들을 잠재적 사기꾼, 모리배, 기생충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서, 신청자의 사생활에 대해 염탐하고 호구조사를 벌이는 것은 복지기관의 당당한 권리처럼 자리 잡는다. 신용에 의지하여 소규모 축산업, 농업을 경영하거나 사회적 기업을 하는 생산자들은 문제와 상황에 대한 자율적 판단 및 선택의 가능성을 박탈당하면서 행정기관에서 코드화해 놓은 측정 및 평가의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만 한다. 목축업의 경우, 동물은 데이터뱅크로 바뀌고, 목축업자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 기술적 경제적 프로세스의 관리자로, 이 프로세스의 인간 구성요소로 되며 이미 정해진 지침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랏자라또는 들뢰즈-가타리의 몰적 주체화와 분자적 주체화라는 개념을 채무자[부채인간]가 내포하는 두 가지 방식의 이질적이고 보완적인 주체화 장치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하나는 양심과 기억, 표현을 동원해 주체에 장악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예속화에 의한 몰적 주체화이다. 또 하나는 어떤 반성적 의식도, 그것에 대한 표상도, ‘자기’도 경유하지 않고 전(前)개체적인 장악력을 행사하는 기계적 노예화에 의한 분자적 주체화이다.사법적 경제적 윤리적 주체화가 전자에 속한다면 신용카드, 자동인출기, 인터넷뱅킹, 인터넷쇼핑몰 등을 통한 주체화는 후자에 속한다.

2008년의 금융위기에서 우리는 국가권력이 은행가들을 구제하고 국민들을 추방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하여 랏자라또는, 국가가 은행의 손실을 공공자금을 통해 인수한 것은 실물경제라는 어떤 가상의 기능적 구조에 자금을 투여한 것이 아니라 기능정지된 현대 자본주의의 특수한 지배와 착취의 장치에 자금을 투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착취와 지배의 장치를 회복하는 일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채무다. 그 채무는 은행가들이 아니라 바로 그 장치로 인해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이 짊어지게 된다는 것이 2008년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갈등과 분쟁의 주요한 영역이 공장임금을 넘어 사회임금으로, 특히 공공부채의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권력이 채무자의 구축을 위한 사회적 권리의 제한, 공공서비스 축소, 공공분야 고용축소, 공무원임금 삭감 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 영역에서의 갈등은 점점 첨예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뉴딜과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현재의 문제는 경제적 균형, 교환의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랏자라또의 〈부채인간〉에 대한 이상의 검토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가 채무권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환보다 폭력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이지만 그 폭력은 임의의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된 사회의 폭력으로서의 국가권력, 즉 국민들의 주권 그 자체이다. 국가권력이 채무화폐를 사회전체에 유통시킬 수 있는 힘은 조세를 강제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노동에 대한 청구권은 이제 조세에 대한 청구권에 의존하며 그것에 포섭되어 있다. 다시 말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은 자기를 생산하는 노동을 보완하는 위치에 놓인다.

국가에 대한 믿음, 주권에 대한 믿음, 즉 국가의 신용은 중앙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등에 의해 조장되고 확인되고 재생산된다. 이 믿음을 재생산하는 과정은 인종, 성별을 불문한 채무자들의 행동시간, 미래를 향한 선택과 결정의 능력,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특정하게 프로그램된 회로를 통해 흐르도록 통제하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통제력이 우리 외부에서 작동하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국가권력은 화폐관계의 외부에 있지만, 화폐관계가 그렇듯이, 우리가 맺는 사회관계 내부에 있다. 그것들이 비록 국가, 신용기관들, 신용평가기관들 등으로 외화되어 있지만, 우리 자신의 힘을 조직하는 가운데서만 권력으로 나타나는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보편적 예속과 노예화를 가져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조직된 그러나 외화되고 소외된 힘이다. 이 점에서 맑스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편적 교환이 유적 능력의 실현이었듯이 보편적 채무 역시 인간의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들의 상호의존성의 형태이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유적 능력의 실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고 저지하는 힘으로, 각자의 힘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분리된 주권권력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3. 정치적 시초축적 형태로서의 국가권력

 

‘시초축적’에서 ‘시초’는 ‘primitive’로 번역된 영어본 〈자본론〉에 충실한 한국어 표현이다. 독일어 원본에서 그것은 ‘ursprünglich’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초’라는 뜻 외에 ‘도약’(영어의 spring)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축적의 도약은 〈자본론〉에서 서술된 바, 한쪽에는 부, 다른 쪽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극단적 축적을 낳는, ‘자본’으로의 도약이었다. 맑스는 그것이 생산수단과 생산재료에서 생산자의 분리를 통해 달성되었다고 설명한다.농민들로부터 공유지의 수탈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생산자들로부터 강탈한 후 임금노예로서 사회에 재결합시킨다. 식민주의와 노예사냥은 원주민들이 속한 환경(생존조건)으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킨 후 식민노예로서 사회에 재결합시킨다. 마녀사냥과 가부장제는 여성을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킨 후 성노예로서 재결합시킨다. 시초축적은 단순한 강탈이나 억압의 과정이 아니라 개체로부터 유(생산수단, 생존조건, 공동체 등)를 분리시키는 (그 후에 예속적 지위로 재결합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강탈과 억압의 과정으로 나타났던 것은 사회의 조직된 폭력으로서의 국가를 배제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토지수탈도, 마녀사냥도, 식민주의도 국가의 폭력을 배경으로 (혹은 전경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적, 성적, 인종적 시초축적에 앞서, 혹은 그와 동시에 정치적 시초축적이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의제의 발생과정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서술은 대의정치가 바로 정치적 시초축적(권력의 시초축적)일 수 있음을 함의한다. 근대혁명은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다수’의 민주주의를 ‘만인’의 민주주의로 전환시킬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민주주의의 그러한 보편적 개념은 대의제를 통해 제한되었다. 만인(everyone)의 민주주의는 모두(all)의, 혹은 전체(whole)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특이성들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민주주의이다. 대의제는 이 특이성들을 정치에 연결시킴과 동시에 분리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것을 ‘이접적 종합’(disjunction)의 방법이라고 부른다.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초축적의 여러 요소들이 이접적 종합을 통해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 자신의 몸을 판매함으로써 그것과 다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을 마친 후에 그의 신체는 다시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다. 원주민들과 여성들도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식민노예나 가내노예의 형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결합되었다. 화폐적 시초축적의 경우에도 국민들은, 조세를 기반으로 한 채무화폐발행과 유통과정에서 화폐로부터 분리된 후, 채무자로 다시 화폐와 결합된다. 그러므로 시초축적의 원리는 분리와 결합의 모순적 통일로서의 이접적 종합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다. 대의제는 정치에서의 이접적 종합, 즉 권력의 시초축적이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다중의 힘이 일단의 지배자들에게로 이전되면 다중은 더 이상 지배의 주체가 아니다.그들은 정치상의 프롤레타리아트(무권계급)로 변형된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성적, 인종적, 화폐적 시초축적을 통해 등장하는 것처럼 근대국가는 바로 이 대의제라는 정치적 시초축적을 통해서 등장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시초축적은 결코 일회적이거나 일과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초축적은 자본이나 국가가 재생산되어 나가는 원리로, ‘제발로 선’ 축적 회로 속에 내재화된다. 그것의 본질적 성격(이접적 종합)은 부단히 새로워지는 형태 속에 보존되고 재생산된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제가 바로 그것의 나날의 실존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다시 말해 이접적 종합의 논리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의 구성적전제로 된다. 그것은 자본의 통치 수단이나 무기라기보다 정확하게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다.

신용화폐는 상품화폐로부터의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 노동시간에 근거하는 상품화폐와는 달리, 신용화폐는 지불의 약속에 근거한다. pay(지불한다)라는 말은 ‘pacare’에서 나온 것으로 please(기쁘게 하다), satisfy(만족시키다), pacify(진정시키다, 평화롭게 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그것이 고통을 참으며 대가를 치른다는 뜻을 갖게 된 것은 14세기 이후이며 자본주의의 발전과 보조를 같이 한다. 기쁨과 만족, 그리고 평화는 공통체적 상호의존의 상태를 표현한다. ‘내가 당신에게 빚지고 있음’에 대한 인정과 그에 근거한 약속으로서의 지불약속은 ‘미래에 당신이 내게 빚져도 좋다’는 것, 서로 다른 특이한 질을 갖는 당신과 내가 분리 불가능한 공통관계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서로간의 유적 관계, 유대관계에 대한 실천적 확인이다. 그러나 이 유적 관계, 공통체적 상호유대의 물적 외화로서의 화폐 관계 속에서 지불은, 그 인간적으로 특이한 질들의 양화 위에서 등가물의 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화된다. 신용화폐는 금속이거나 종이이거나 숫자일 뿐, 그 자체로서는 거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등가물의 보상(교환)이란, 실제적인 등가관계의 실현이 아니라, 화폐의 액면가치의 실현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앞서 서술했다시피, 오늘날 전적으로 국가권력(국제화폐의 경우 제국권력)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신용화폐 체제에서 화폐와 국가(및 제국) 사이의 이 밀접한 관계는 두 장치의 본질에서 유래한다. 화폐가 공통체적 유대관계의 경제적-물적 외화라면, 국가 역시 공통체적 유대관계의 정치적-물적 외화이다. 그것들은 개인들을 그들의 유적 성질로부터 분리시키고 또 결합시키는 이접적 종합의 장치이다.

조세와 국채는 국가가 화폐형태로 수행하는 이접의 핵심적 형태이다. 오늘날의 신용화폐는 조세를 담보로 하고 국채를 매개로 하여 창조되고 은행을 비롯한 각종 금융기관들을 통해 유통되고 증폭된다. 금융적 축적은 농민수탈이나 마녀사냥, 노예무역과는 달리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개되는 시초축적, 화폐적 형태의 시초축적이다. 그것은 본원적 공통관계와 공통생산에 대한 수탈의 양식이다. 금융적 축적의 헤게모니 하에서 산업적 축적은 점점 금융적 축적의 수단, 구실, 외피로 바뀌어 간다. 사회의 상층에 거대한 금융적 부가 집중되는 것의 반대편에 채무자들의 거대한 축적이 있다. 그 결과 채권-채무 관계가 자본-노동 관계(채무자로서의 노동자), 시혜자-수혜자 관계(채무자로서의 수혜자), 생산자-소비자 관계(채무자로서의 소비자), 학교-학생 관계(채무자로서의 학생), 남성-여성 관계(채무자로서의 여성) 등 사회의 모든 관계를 횡단하게 된다.

 

 

4. 채무경제의 첨단에서 높이뛰기

 

여기에 어떤 출구가 있는 것일까? 어떤 전략이 가능한 것일까? 어떤 미래가 가능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가난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빚지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그것은 분명 채무로부터 오는 압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일 수 있겠지만 인간의 유적 능력의 화폐 및 국가로의 외화와 박탈을 긍정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특이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의존과 유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다른 사람들은 능력껏 빚지고 살다가 더 이상 빚지는 것이 불가능할 때 생을 마감한다는 전략을 추구한다. 이것은 채무에 대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수용일 수 있지만 우리의 생명을 일시적이고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한계를 갖는다. 마우릿찌오 랏자라또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담론 및 부채의 도덕”으로부터 빠져나와 한 푼도 상환하지 않으면서 집단적으로 “부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데이비드 그레이버도 근면을 강요하는 부채의 도덕과 사회적 생태의 파괴를 향해 치닫는 부채기계를 거부할 것을 요청하면서 채무의 서판을 깨끗이 닦아줄 희년정신의 회복을 제안한다. 만약 채무의 서판이 깨끗이 닦여진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그레이버는, 채무를 수학과 폭력에 의한 약속의 타락이라고 진단하면서 우리가 진정한 약속, 진정으로 자유로운 남녀들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약속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먼저 채무의 발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불약속으로서의 채무는, 용어를 조금 바꾸어 표현하면, 다중이 수행하는 공통되기의 약속이 타락한 형태이다. 그것은, 공통되기의 약속이 화폐관계와 국가관계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다. 특이성들의 공통되기의 화폐적 국가적 매개와 외화는 공통되기의 경직화와 차단을 가져온다. 경제적 분업과 정치적 개인화, 문화적 구경꾼화는 그것의 효과들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공통되기의 유적 능력의 다중들로부터의 배타적 이접(분리와 결합의 배타)으로부터 기인한다. 배타적 이접은 종합의 가장 경직된 방식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합의 경로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접을 포함적인 것으로 바꾸고, 접속적이고 연접적인 종합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모색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채무의 정치화에 관한 리차드 딘스트의 제안들이다. 그는 랏자라또의 부채경제에 대한 정치적 대응에 값할 수 있는 것으로, 새로운 채무의 정치학의 윤곽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부채를 기본적인 인간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부채가 반란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첫째로 부채가 반란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실현되지 않은 요구들, 경제적 불만족들의 누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채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는 바, 욕망들이, 오직 부채를 통해서만 충족할 수 있는 욕망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란의 잠재력의 축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이 사회경제적 필요를 정치적 요구로 정식화하고 표현하는 것이 채무정치의 관건적 요소일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신용체제를, 불평등을 가속하고 거짓된 소비주의적 선택을 강요하는 장치로부터, 공공적 유용성, 집단적 상호부조의 기관으로 전환시킬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레이버나 랏자라또가 제안하고 있는 희년의 방법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제도화의 문제이기에 앞서 채무상환을 거부하는 투쟁의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희년운동은 채무의 청산과정일 뿐만 아니라 부패한 체제의 청산과정이며 우리의 내면에 내재화된 부채도덕의 청산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채무(에 대항하는 투쟁)는 다시 반란의 계기가 된다.

셋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채무에 기초한 투쟁이 다중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지향하고 또 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나 화폐의 폐지를 통해서 손쉽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권력은 비록 타락하고 물신적인 그리고 환상적인 형태지만, 국가 및 화폐의 형태로 공동체성을 실현함으로써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었다. 그것이 시초축적, 즉 축적을 향한 자본의 도약, 즉 높이뛰기였다. 다중의 높이뛰기는 과거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될 수도 없고 실재하지 않는 미래 어딘가로부터 시작될 수도 없다. 바로 부르주아 사회가 도달한 현실의 그 첨단에서 그 높이뛰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권력은 특이성들의 공통되기의 운동을 국가, 화폐, 그리고 신용체제의 형태로, 즉 기계적 과정의 형태로 실현함으로써 그 운동을 사실상 정지시키고 파괴시킴으로써 그 축적의 도약을 계속한다. 오늘날 그 도약은 채무관계, 채무자, 채무자-도덕, 채무자-주체성의 반복적 생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채무(자)야말로 부르주아 사회의 첨단지점이고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높이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뛰어야할 방향은 현재의 구도가 이미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개개인들이 처한 보편적 채무관계를 특이성들의 보편적 공통되기로, 보편적 상호부조로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채무자로부터 공통인으로, 즉 각자의 삶의 실현이 유적 관계의 실현으로 되는 연합된다중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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