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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워너 본펠드의 아담 스미스와 질서자유주의 관련 자료들입니다.

Freedom, Crisis and the Strong State: On German Ordoliberalism

[German_OrdoliberalismBonefeld.pdf (265.46 KB) 다운받기]

 

출처 : http://www.google.co.kr/url?sa=t&rct=j&q=adam%20smith%20and%20ordoliberalism%3A%20on%20marx%E2%80%99s%20conception%20of%20the%20state%20pdf&source=web&cd=2&ved=0CDYQFjAB&url=http%3A%2F%2Fwww.bisa.ac.uk%2Findex.php%3Foption%3Dcom_bisa%26task%3Ddownload_paper%26no_html%3D1%26passed_paper_id%3D137&ei=jhfQUNalAqTVigKWyYC4DA&usg=AFQjCNHWdgstd2CoTLdmCbPcENOyApTBaA&bvm=bv.1355534169,d.cGE&cad=rj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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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oliberalism and the Crisis of Neoliberal Political Economy: On the Social Market, the Free Economy, and the Strong State.

[Bonefeld_the crisis.pdf (137.84 KB) 다운받기]

 

출처 : http://www.google.co.kr/url?sa=t&rct=j&q=adam%20smith%20and%20ordoliberalism%3A%20on%20marx%E2%80%99s%20conception%20of%20the%20state%20pdf&source=web&cd=4&ved=0CEQQFjAD&url=http%3A%2F%2Fwww.esrc.ac.uk%2Fmy-esrc%2Fgrants%2FRES-000-22-4006%2Foutputs%2FDownload%2F47437971-321b-4105-b55f-5e048db2187d&ei=jhfQUNalAqTVigKWyYC4DA&usg=AFQjCNEjrycjYKzuXrdweJKSEyGxACnSng&bvm=bv.1355534169,d.cGE&cad=rj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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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4_아담 스미스와 질서자유주의.hwp (39.23 KB) 다운받기]

 

 

 

 이 글은 2011년 10월 23일 일요일 저녁 6시(서울시각)/오전10시(영국시각) 갈무리 출판사/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린 『전복적 이성』 출간 기념 저자 화상 강연에서 발표된 원고의 발췌 번역문(출처 : http://waam.net/xe/metropolis/158967)을 더 해 만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dolmin98@hanmail.net 돌민
아담 스미스와 질서자유주의 : 부르주아 집행위윈회로서의 국가라는 맑스의 개념에 관하여(Adam Smith and Ordoliberalism: On Marx’s conception of the state as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Bourgeoisie)

워너 본펠드(Werner Bonefeld)

 

도입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맑스(Marx)는 국가가 부르주아의 중앙 위원회라고 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목적을 결정하는 산뜻한 방식이다. 하지만 더 많이 가깝게 이 개념을 고찰할 때 일어나는 질문들이 많이 있다. 만약 국가가 정말로 부르주아의 집행부라면 어떻게 부르주아는 이 위원회를 조직하고, 떠받치고, 그리고 촉진할까? 공통의 목적, 그것의 많은 경쟁하는 이익에 걸쳐 그리고 이상으로, 그것의 기초적 사교성을, 법과 명령의 형식으로,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무슨 일이 이 집행위원회에 일어날까?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을 민주적 권력으로 단언하고 대의의 권력뿐만 아니라 통치의 권력 또한 얻는다면 말이다.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집행위원회가 될 수 있을까, 합법 사회주의자들이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그것일 수 있을까, 또는 레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폭력적 혁명에 의해서라면 가능한 것일까? 카우츠키(Kautsky)로부터 레닌(Lenin)까지, 고전적 맑스주의에 의해 공유된 견해인, 그것이 부르주아에 의해 운영되는 한에서의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 기간 동안만,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일까, 또는 국가란 누가 권력을 잡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형태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국가인 것일까?
 맑스 개념의 비판적 의도에 대하여 그 이상의 문의 없이, 그것만으로 고찰된다면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라는 개념 자체는 모순된 해석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것은 집행부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지배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 계급의 바람을 실행하고,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로서의 특징이 계급 역학의 균형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은 집행부이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계급 역학의 균형에 관계없이 국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집중되고 조직화된 힘’(Marx, 1983, p. 703)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그의 더 뒤의 비평은 유사한 용어로 정치적인 것을 판단한다. 맑스주의적인 학문은 맑스를 부르주아 경제학의 비판자로서 간주했고, 그리고 맑스에게서 정치 이론이 실종되어 있다고 추정한 후 맑스의 경제 이론을 맑스주의적인 정치 이론을 가지고 보충하려고 노력했다(예를 들어, Poulantzas, 1973을 보라). 다른 이들은 경제학의 범주인 자본에 대한 맑스의 비판으로부터 국가를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국가의 필연성을 평등한 교환 관계로부터 또는 자본주의적 경쟁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지를 논쟁하면서 말이다(the volume edited by Holloway and Picciotto, 1978; and Poulantzas, 1978을 보라). 또는 노동 과정에 걸친 계급투쟁으로부터 국가의 필연성을 끌어냄을 통해서 말이다(the volume edited by Clarke, 1991을 보라). 이 마지막 접근이 기초적이다. 그리고 나는 국가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의 국가가 아니라고 그러므로 주장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국가이다. 국가는 부르주아가 국가권력을 잡기 때문에가 아니라 국가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형식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집행부이다. 맑스는 왜 이 내용(인간의 사회적 재생산)이 이 형식(자본의 형식)을 갖는지를 물음으로써, 그리고 어떠한 필연성의 사회적 법칙이 사회적 재생산의 논리적인 귀결의 이 자본주의적으로 조직화된 형식을 만드는지를 물음으로써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의 비판을 발전시켰다. 그는 고전 정치경제학에 대한, 특히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대한 비판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을 발전시켰다. 이 비판의 목적은 스미스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차라리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를 해독하는 것이었다. 맑스주의적 학문은 맑스가 경제이론가로서 스미스에 대한 비판을 제공했다고 자주 추정한다. 맑스가 스미스의 이론을 더욱이 더 많이 통찰력 있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으로 발전시켰다고, 또는 그가 스미스를 혁명화했다고 암시하면서 말이다, 경구 없이 경제학 범주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면서 말이다(이것에 관해서는 Heinrich, 2009을 보라). 하지만 스미스는 경제학 이론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상업 사회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정치경제학을 제공했다. 이 논문은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그것은 경제적인 것만큼 정치적인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동일한 근본적인 사회적 관계의 상호의존적인 형식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정치경제학의 구성적 장소로서의, 정치적인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개념에 대한 비판적 본질을 붙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절은 시장 자유의 집행위원회로서의 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그의 이론을 상술한 스미스에 손을 댄다. 세 번째 절은 국가에 대한 질서자유주의 이론에 집중한다. 이 절에서는 시장 자유가 명백한 위기인 오늘날 스미스의 근본적 통찰을 분명히 할 것이다. 결론 절은 질서자유주의적 논의가 스미스의 기술(記述)을 명백히 하면서 그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첫째로 주장한다.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에서, 스미스의 입장은 자유주의적 신학으로 바뀌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정치경제학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또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양쪽, 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은 고전 정치경제학 연구로부터, 특히 아담 스미스의 수혜를 받았다. 이 논문은 텍스트적 고고학 연습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 자유의 정치적 형식에 대한 앎을 추구한다.

 

스미스와 정치적인 것의 질서자유주의적 아이디어

 

 아담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와 잘못해서 연합된다. 이에 반하여, 스미스는 정부의 목적과 합리성을 규정하는 정치적 임무로서 시장 자유를 상정한다. 그는 만약 시장의 손에만 모든 것을 맡긴다면, 시장은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전제 조건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상업 사회에 계급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장 자유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힘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서, 국가는 완벽한 자유의 대행자이다. 그것은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유를 배열하고, 도덕 감정의 틀 내에서 자유의 행위를 보장하는 사회의 행위에 간섭한다. 그는 계급투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계급투쟁에 대한 해결책이 노동자 계급의 진정한 이익의 결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결정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계급투쟁을 조절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국가 개입을 거절하지 않는다. 스미스가 문제로 삼는 것은 국가 개입을 통해 시장을 촉진하는 방법, 국가 개입의 자유주의적이고 도덕적인 목적이다. 이것을 하이에크(Hayek, 1944, p. 31)가 간결하게 요약했다. 그가 자유주의적 국가는 ‘경쟁에 대한 계획자’로서 불가결하다고 말했을 때 말이다.
 하이에크의 관념은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적 전통에 핵심이다. 그것은 1920년대 후반에 깊은 경제 위기, 내핍 생활이라는 조건, 정치적 폭력, 참호로 에워싸인 계급 관계라는 배경에 반하여 시장 자유주의적 원리를 재-주장하는(re-asserting) 시도로서 나왔다. 그것은 1945년 이후에 사회적 시장 경제를 지지하는 이론으로 나왔다. 그것은 또한 독일 신자유주의 또는 프라이부르크 학파(the Freiburg School)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주요한 제안자는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 프란츠 뵈헴(Franz Böhm), 알프레드 뮐러-아르마크(Alfred Müller-Armack),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 그리고 알렉산더 뤼스토우(Alexander Rüstow)이다. 1920년대 후반 동안 그들은 자유주의적, 경쟁적 경제를 가장 좋게 안전하게 하는 방법에 관한 토론에 착수했고, 자유 경제가 그것의 창조, 보호, 그리고 발전을 위해 강한 국가 권위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뤼스토우는 ‘시장 경찰’ - 스미스에 의해 그의 법학에 관한 강의에 쓰인 용어 - 이라는 면에서 이 강한 국가를 마음에 그렸다. 하지만, 뤼스토우와 그의 동료들이, 가장 놓은 등급의 경제학자로서 스미스를 칭찬하긴 하지만, 자유 방임 자유주의의 명백한 창립자로서 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1938년의 발터 리프만 콜로키움(Walter Lippman Colloquium)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의 의미와 가능한 미래를 토론했고, 뤼스토우는 자유주의의 오스트리아 학파(the Austrian school) 명사들, 특히 폰 미제스(von Mises) 때문에 특유한 것이었던 자유 방임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신자유주의라는 경구를 만들어냈다. 신자유주의와 달리 질서자유주의는 시장 자유가 정치적 생산물이고 따라서 통치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자유로운 경제는, 시장 자유의 공적인 권위로서의 강한 국가에 의지한다. 그들은 시장이 시장을 승인하는 사회적 인격의 형성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회적 인격들은 기업의 도덕 감정을 생활양식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자기-책임적이고 자기-신뢰적 고용주로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복지의 제공과 완전 고용에 대한 추구라는 프롤레타리아적 아이디어와 대비하여 말이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시장적 개인들이, 필요한 도덕 감정을 갖추고 손쉽게 출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시장 자유를 도덕적 의무로서 명백히 하기 위한 결정적인 도덕적 틀이 제공되어야만 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에 대한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의 한쪽으로 치우친-자유주의적 전통에 찬성하는 비판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비판을 받아들인다. 이 비판은 그를 자유 방임 자유주의의 제안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리스트는 스미스가, 자유 교환에 기초해서, 사해 동포주의적 자유의 이론과 영구적 평화를 말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자유주의적 경제 이론은 영국의 전지구적 지배에 대한, 자유 교환과 자유 경쟁에 기초한 지배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자세의 전지구적 규모에 대한 논의를 논외로 한다면, 리스트의 비판은 세 가지 문제를 강조한다 : 1) 스미스의 작업은 경제학을 자율적인 것으로 다루는 고전 경제 과학이라고 여겨진다; 2) 그리고 이와 이어지는 내용으로, 스미스는 경제적 힘으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3) 사회는 보이지 않는 경제 법칙이라는 수단으로 그 자신을 조절하는 경쟁적인 교환 사회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리스트는 국가를 경제 발전의 활동적이고 책임 있는 매개(agency)라고 불렀다.
 이 문맥에서, 질서자유주의적 사상가 빌헬름 뢰프케는 리스트가 ‘고전 경제 과학이 경쟁적 경제를 자율적인 것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리스트가 스미스적 시민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부터 도출하는 정치적 결론을 거절한다. 리스트의 결론은 경제적 국가로서의 국가라는 단언을 통해 스미스에게 있어서의 국가의 부재를 보상한다. 하지만, 뢰프케는 스미스의 기술이 ‘경쟁적 사회의 사회학적 자율에 대한 재앙적인 믿음; 자유 방임 철학의 기본적 실수인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자유주의에 너무나 심각한 불명예를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영구 가치를 구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Röpke, 2009, p. 56). 경제 자유가 정치적 힘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작동할 때에 그것은 ‘자기 의존적 과정이 자동적으로 윙 돌고 있는’ 체계가 된다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손의 사회학적, 윤리적, 정치적 전제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제적인 방법으로 시장 자유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자연신교의 철학이 된다고 질서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들에게, 자유방임 자유주의는 동화 같은 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경제적 구성과 행동의 무구속(無拘束) 메커니즘으로서 자유 방임의 효과를 만들며 시장 자유의 기초를 파괴한다고 질서자유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경제적 존재의 원리로서의 탐욕은 오직 그것이 법적,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 뼈대 내부에서 적당하게 제지되는 한에서만, 그래서 사적인 악덕을 공적인 도덕으로 변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그것의 능력이 동력화되고 제약되는 한에서만 좋은 것이다. 뤼스토우(2009, p. 24)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스미스의 이론이 경제적 존재의 독립성을 선언하며 그 독립성에 기초하는, 경제과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본다. 뤼스토우가 보기에 이러한 시각은 경제학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일종의 세속화된 신학으로 만든다.
 형이상학으로서 스미스 이론의 질서자유주의적 거부는 오스트리아 자유 방임 자유주의와의 그들의 전투라는 문맥에서 보여져야 한다, 오스트리아 자유 방임 자유주의자는 그 자신을 스미스적 생각의 상속인으로 보고, 따라서 스미스에 대하여 자유 방임 자유주의의 전거와 설립자로 주장한다. 질서자유주의적 전통은 인간 존재의 필수 조건으로서 자유 경제의 고귀함 대문에 오스트리아 자유 방임 주의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이 자유무역이 자기-규제적이지 않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생산한다, 가격 신호에 대한 경쟁적 조정에 의한 경제 자유와 규제에 대한 위협의 자세를 취하는 프롤레타타리아화된 노동자의 형식으로 특히. 그것은 또한 공공 정책의 문제로서 국가에 의하여 그들의 경제적 또는 사회적 힘의 지위를 그들의 각각의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강력한 복수의 이익 그룹의 정치적 단언을 고려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을 개인의 문제로, 복지 보장에 의한 직접적 만족을 대신 추구하며 기업가 정신으로 시장 조건을 조정하기를 거절하는 무언가로 묘사한다; 그리고 조건이 나쁘게 될 때 자기-책임적으로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그리고 대신에 완전 고용 보장을 요구하는 무언가로, 그리고 시장의 힘에 용기, 신념, 그리고 결의를 가지고 대처할 도덕적 스태미너와 성격이 모자란 무언가로. 시장 자유는 자유를 노동자들에게 준다. 그리고 자유는 노동자들이 자유의 책임성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도덕적 강함을 요구한다. 시장 자유는 경제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참가자들의 도덕적 스태미너를 포함해, 자유 경제가 강한 국가 귄위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강한 국가의 산물이라는 것 또한 미리 가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강한 국가를 시장 자유의 정치적 보증인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따라서 시장 경찰로서 국가를 승인한다 - 경제 자유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자유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시장 경찰의 지속적인 노력을 수반한다. 그것은 시장의 완벽한 자유가 본질적으로 정치적 창조물이고, 거버넌스의 연속적인 실천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과의 전투에서 그리고 정치철학으로서 경제학의 신-고전주의적 비난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스미스를 지각한다. 스미스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일차원적이다. 실제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윤리적 책임성을 가진 시장 경찰로서 국가의 질서자유주의 개념은 그것의 기원에서 실제로 스미스적이다. 그들은 자유 방임의 경제학자로 지각된 스미스를 거절하고, 그리고 시장 경찰로서 국가에 대한 그들의 주장에서, 그들은 사회 철학자로서 스미스를 신봉한다. 그러므로 스미스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보다 명백하고 그 다음에 실제적이다: 스미스처럼 그들은 시장의 완벽한 자유는 시장 정책의 실천이라고 말하고, 그들은 완벽한 자유의 체계는 탈정치화된, 시장-확인적 인격의 형성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에 맞서 상업 사회의 시간이 도래했었던 것을 보았던 사람의 활기를 주장했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문명화의 심오한 위기라는 시기, 그들이 누군가 기초를 두었던 것처럼 ‘대중 의견, 대중 요구들, 대중 감정 그리고 대중 열정을’ (Röopke, 1998: 152) 떠나게 하는 시기에, ‘그들 사진의 책임성을 기피하는 “대중-생산된” 사람들을’ (Röopke, 1957: 24) 허락하면서, ‘통치-조직화된 대중 믿음에’ (Roepke 1998, p. 155) 대신 의지하면서. 사회는 나침반을 잃었고 도덕적 정서가 전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대신에,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주의와 한덩어리가됨(enmassment)에’ (ibid.) 의해 큰 손해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1 - 돌민] 경제 규제의 원리로서 경쟁을 깊이 새겨 두는, [2 - 돌민] 자유가 자기 책임적인 사회적 기업으로서 그것에 의존하는 도덕적 정서를 달성하는 사회의 도덕적 뼈대를 촉진하는, [3 - 돌민] 그리고 자유의 오용을 막는 견고한 도덕적, 사회적 그리고 법적 뼈대를 유지하는 열정의 제지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의와 도덕적 행위라는 스미스의 아이디어와 유사한 이 뼈대들을 떠올렸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이 뼈대를 유지하는 열쇠이고, 나는 정의와 도덕성의 규칙에 대한 ‘공평한 구경꾼’으로서 국가에 대한 그들의 예리한 포옹이 스미스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시장 경찰로서 국가에 대한 스미스의 결정은 국가에 대한 맑스의 비평이 예리하게 초점으로 가져왔던 바로 그 개념을 확언한다: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집중이고 행정 위원회로서 작동한다. 국가의 이 개념은 경제 자유주의의 담화에서 사라졌지만, 그것은 스미스의 기술에서 중심적이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이 개념으로 돌아가고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들의 명백한 위기의 시기에 그것을 상술한다.

 

III: 스미스: 경제학자에서 시장경찰의 도덕철학자로

 

 스미스에게 ‘정의는···’ 상업 사회의 ‘전체 건축물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다’(1976b, p. 86). 정의는 외면상으로 평등한 교환 주체들 사이에 계약 자유로서 부르주아 자유의 규제적 힘인, 법과 법의 지배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Fine, 1981; Pashukanis, 1978). 본질적으로 그것은 질서의 문제이다. 법의 지배는 무질서에 동의하지 않고, 법은 질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무질서는 경찰에 대한 문제이다. 더구나, 질서의 유지는 또한 개인들의 직분에 대한 바람직한 행위, 행동, 그리고 실행을 묘사하는 도덕성의 문제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진해서 행하는 굴종에 법의 지배를 주고 그 자체로 사회의 본질적 사회성의 도덕적 정서를 표현한다, 그들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경쟁적이고 소유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지면서, 커먼 웰스(common wealth)가 아니라. 상업 사회는 많은 개인적 이익의 본질적 사교성을 보장하는 도덕적 질서에 기초해야, 계급이익을 조화시켜야, 그리고 사회적 무질서를 예방하고 그래서 (로마) 시민권(civitas)의 커먼 웰스의 조건으로서 시장의 완벽한 자유를 지속해야 한다. 질서를 위해 그리고 커먼 웰스의 전망을 위해, 개인들과 계급들은 도덕적 제한을 실행하라고, 열정을 억누르라고 요구되었다. 스미스에게, 도덕적 질서는 굳게 지켜졌고 개인들과 계급들 사이에서 행동을 규제했던 도덕적 정서로 이루어진다. 그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만둘 것을 촉구했다. 도덕적 정서는 잘 질서 잡힌 전체 미의 타당함이라는 감각에 기초했다. 이 전체는 사적인 개인들에게 목적과 이득을 준다. 그것은 ‘자기-애(愛)’를 통해 통치되는 사적인 개인들을 통치하는 열정들을 제한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사적인 개인들은 단지 그들 자신에 대하여 소유욕이 강하고 단지 그들에게만 책임을 진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각자 모두에 전부 의존적이다. 그들의 이익의 이 사교성은 본질적이다. 그것은 그들의 반사회적, 즉, 자기-이익적 활동의 추구에 걸쳐 그리고 위에 존재한다. 그 잘 질서 잡힌 전체는 따라서 상호적 의존의 커먼 웰스를 묘사하고 그는 국가를 커먼 웰스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체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각각의 자기-애적인 사적 개인들에게서 그들의 각각 누군가를 올바른 방법으로 행동하는 능력이 있게 만드는 정직한 핵심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 ‘공감’ 체계의 타당을 판단하는 기초, 즉, 공평하고 잘 정보를 제공받은 구경꾼의 지위를 채택하는 능력. 하지만, 공감은 상업 사회의 본질적 조건을, 즉, ‘자기-애’의 본질적 조건을 제한할 만하지 않다. 도덕적 정성에 대한 그의 철학은, 반사회적인 이익의 본질적인 사교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이익의 추구에 기초한 사회가 도덕적 토대, 도덕적인 사회적 직조 그리고 윤리적 뼈대를 요구하는 정연한 이유를 준다. 하지만 도덕적 정서 홀로는 사회의 좋은 질서의 유지에 충분하지 않다. 도덕적 장소는 부르주아지의 자비로운 여지를, 맑스가 그의 신성 가족에서 쓴 것처럼, 그것의 감상을 표현한다. [1 - 돌민] 성격 특색처럼 도덕적 정서도 흉악한 기업가적 경쟁과 무자비한 코만도를 공장 바닥에서 결합시킨다, [2 - 돌민] 추가적인 노동력의 원자들을 훔치면서, [3 - 돌민] 그것의 문화, 교육, 존재의 감각을 향상키시기 위해 사회에 어떤 것을 돌려 주고, 그리고 사회적 전환을 위해 주는 자선 행동과 함께. 도덕적 정서 위에 서있었고 서있다 국가가. 스미스 (1976b)에 따르면, 처벌은 우리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그리고 처벌은 정의의 필요한 조건으로서 나온다; 그리고 그는 국부론에서 국가는 정의의 지배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했다. 즉, 국가는 자유의 적당한 사용을 안전하게 할 책임이 있고 – 그것은 자유의 오용을 감사하고, 경찰에 의하여 자유의 적당한 사용을 강요하고, 그리고 도덕에의 끼어듦은 그들의 도덕적 정서를 안전하게 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스미스에게, 국가는 사회를 폭력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할 책임이 있다; 정의의 정확한 행정을 설립할; 상업 사회의 추구가 의지하는 공공의 일들과 공공의 기관들을 똑바로 세우고 유지할; 그리고 그것은 부에서 증가의 기초인, 보다 거대한 노동 생산성에 의하여 노동의 진보적 분할을 촉진하는 ‘식량의 값쌈’ (Smith 1978, p. 6)을 달성할 책임이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그때, ‘커먼웰스(commonwealth)의 힘’을, 즉, 국가를 고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의의 힘을 향상시키는 것이. 이 경계가 없다면, 상업 사회는 유혈의 참사와 무질서로 내려갈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상처를 입었다고 상상할 때마다 자기의 복수를 그 자신의 손에게 할 것이다’ (1976b, p. 340). 완벽한 자유의 체계는 사교성의 법적,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 뼈대 안쪽에 잘 질서 잡힐 필요가 있다. 질서는 국가의 문제이다. 국가는 질서의 대리인이고 그래서 정의의 지배 위에 시장 자유를 촉진한다.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만이 그들 자신의 방식을 추구할, 그리고 그들의 산업과 그들의 자본을 다른 사람과의 경쟁으로 가져올 자유를 완벽하게 남긴다[남는다, are left], 또는 사람의 질서···자연적 자유의 체계에 따르면, 주권자는’ 자유의 적당한 사용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생산과 분배는 경쟁적 교환들에 의해 규제되며,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 이 규제는 ‘완벽한 자유가’ 있는 곳에서 달성된다, ‘자연 가격들’의 위와 아래 ‘시장 가격’의 상승과 하락을 통해서. 조정의 이 과정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치된다, 그것은 개인들이 투자하는 곳과 팔 것에 관해서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을 허락하는 자유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용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의 마술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거절한다. 하지만, 경제적 조화의 비정치화된 장치로서 보이지 않는 손의 유지는 통치를 요구한다. 즉, 경제 체계에 대한 그의 분석의 목적은 국가의 적당한 역할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의무는 완벽한 자유의 체계에 핵심적이다, 실제로 체계는 전체 체계의 유용성을 유지하는 책임을 지는 공평한 권력으로서 국가에 의지한다. 외국의 침략에 맞선 재산 방어가 있고, 그리고 따라서 또한 정복과 해적질에 의하여 전유된 부의 거부도 있다, 부는 생산적 노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다음에 정의가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 의해 제시된 재산에 대한 위협에, 그리고 또한 그들의 탐욕이 사유 재산의 권리를 유지하는 그 똑같은 자유와 일치하지 않는 자산의 보유자들에 맞서 주로 지도된다. 그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직접적인 이익이 그들이 사유 재산의 안전, 노동 생산성에서 증가 그리고 교환의 자유에서 그들에게 결국 생기는 이득을 인정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자들의 조건은 그들을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에 무지하게 만들고, 그리고 부유한 자들의 계급 의식은, 그것은 탐욕에 기초한다, 완벽한 자유 체계의 유용성을 위협한다. 그는 ‘사유 재산 체계가 시민 통치의 설립을 요구한다···시민 통치는, 그것이 재산의 안전을 위해 설치되는 한, 가난한 자들에 맞서 부유한 자들을, 또는 전혀 가지지 않은 이들에 맞서 일부 재산을 가진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설치된다’ (Smith 1976a, p. 770)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재산의 안전이 가난한 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부유한 자의 손에 축적된 부로서, 낙수 효과적인 경향이 - 보다 큰 케이크일수록, 보다 큰 절대적인 관점에서 조각이 가난한 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의 행정은, 그것은 재산과 몸을 안전하게 하고, 가난한 자들에 맞서 부유한 자들을 방어한다, 자연적 자유의 체계와 자기-향상에 대한 유인이 의지하는 그 ‘질서와 좋은 통치’의 토대이다. 커먼 웰스는 그것 위에서 쉬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분노에 맞선 사유 재산의 방어는, 가난한 자들을 지지하여 일을 맡고 있다. 즉, 스미스에게, 국가는 계급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완벽한 자유의 체계에 대한 공평한 관찰자이고, 그리고 따라서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그들의 긴 기간 이익에서 행동한다, 그것은 그들의 무지가 가난한 자들에게 알려지기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두 문단은 이 이슈들을 검토한다.  
 스미스는 ‘임금은 이해가 똑같지 않은 두 집단 사이에 계약에 달려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계급투쟁을 도입한다. 즉, ‘노동자들은 가능한 많이 얻기를 욕망하고, 주인은 가능한 적게 주기를. 전자는 올리기 위한 결합을 하기 위해 배치되고, 후자는 노동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Smith, 1976a, p. 83). 이러한 투쟁에서, 주인은 보다 우세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적으로 보다 작고, 그리고 훨씬 보다 쉽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윤을 얻지 않아도 보다 길게 살 수 있고, 노동자들은 굶주린다’ (ibid.). 그 노동자들의 반역은 그들의 ‘절망적인 조건들을’ 고려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ibid., p. 84).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어리석다 왜냐하면 ‘주인은 목적과 힘을 가지고 노동자에게 반작용하고 즉, 노동자는 소란스러운 결합의 폭력으로부터 어떤 이점을 몹시 드물게 끌어 낸다. 임금을 올리고 조건을 향상시키는 유일한 방식은 지속적 축적이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잉여의 증가와 함께, 자산이 축적된다, 노동자들의 숫자를 증가시키면서, 그리고 수입과 자산의 증가는 국부의 증가이다. 임금에 의해 사는 이들을 위한 요구는 ··· 국부에서의 증가와 함께 증가한다’ (ibid., pp. 86-7). 이것은 그렇다면, 그가 국부를 증가시키고 ‘노동의 임금에서 상승을 야기한다’라고 주장하는 유명한 낙수 효과 - 축적이다 (ibid., p. 87). 스미스는 이것을 ‘노동에 대한 자유적 보상’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그의 주장의 하나의 결과는, 물론, 가난이 있다면, 이것은 ‘모든 종류의 재화의 값쌈을’ (ibid., p. 333) 촉진하는 국가 행동을 요구하는 ‘사태에 서 있다’ (ibid., p. 91), 즉,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의 증가와 따라서 가격 경쟁력의 향상은 보이지 않는 손들의 거친 실재에 의해 통치된다. 자산의 소유자는 일부 나라들에서 다른 나라들에서의 소유자들부다 그들의 투자에 대한 높은 비율의 보답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들 자산의 여분을 증명한다’ (Smith 1976a, p. 109). 차례대로 그들이 자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국에서 경쟁적 조정이 요구되고, 그리고 그것의 촉진은 ‘경찰에 속한다’ (Smith 1978, p. 5). 스미스는 따라서 국가를 경쟁 국가로 생각한다 - 그것은 경제적 가치의 경쟁성을 촉진한다. 완벽한 자유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충돌들을 해결하는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이윤과 투쟁과 모순되기 때문에 조건으로서 보다 거대한 노동 생산성을 달성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완벽한 자유의 체계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일반적으로 인정된 불평등한 교환에서가 아니라 임금들의 과정이라는 역동적인 문맥에서 노동자의 진실한 이익을 노동의 분할의 진정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높은 임금은 노동력에 대한 요구에서의 가장 신속하고 가능한 성장에 의지한다, 그것은 시장의 그리고 노동 분할의 가장 신속하고 가능한 성장에 해당한다, 그것은 차례로 노동 생산성에 의해 부양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이익은 시장의 ‘완벽한 자유’에 의해 가장 잘 도움을 받는다. 그 위에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충돌은 환상적이다, 높은 임금이 인구의 성장, 무역의 확장과 노동의 분할, 그리고 노동자의 근면함을 자극함으로써 자본에게도 이득을 주기 때문이다.

 스미스에 의하면 ‘국부’와 ‘노동자들’은 점진적 축적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그러나 부의 소유자들은, 최소한 즉각적으로는 이득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의 증대는 임금을 상승시켜 이윤을 낮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Smith, 1976a, p. 105)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시장의 천부자유권을 방해함으로써, 예를 들면 가격담합이나 보호주의 같은 수단을 통해, 인위적으로 이윤율을 유지시키고자 한다. 사적 권력의 행사는 ‘경찰을 만들어낸다. 국가의 무역, 상업, 농업, 제조업에 대한 존중으로 만들어진 모든 규제는 경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Smith, 1978, p. 5). 즉, 경제 자유 체제는 그것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시장을 위한 경찰을 필요로 한다. 효과적인 감시활동은 강한 국가를 수반한다. 그 국가란, 서로 상충하는 이해들과 계급투쟁 위에 속한다. 표면상으로는 둘 다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체제의 아름다움을 위해 다스린다.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선한 공동체를 위해 통치하며 그것은 보다 큰 노동 생산성과 점진적 축적을 위한 것이다. 시장을 위한 경찰은 개개인의 열정을 규제하고자 이들의 행동에 개입함으로써 통제한다. 개개인의 열정은 부에 대한 탐욕, 경쟁의 잔인한 무정부 상태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반역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이해를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에서 발견하도록 만듦으로써 이들의 열정은 통제된다. 그러므로 체제에는 사람들의 진정한 이해를 드러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가, 상업사회의 도덕 감정에 홀리지 않아 이윤 기계에 기름칠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 약화된다면 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규제의] 준수는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교육을 통해 시장경찰이 이뤄야 할 문제다. 따라서 스미스(1976a, p. 723)는 주로 교육과 공적 전환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고취시킴으로써’ 국가는 반드시 시장의 완전한 자유를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시민사회의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을 유지하기 위해 문화적 활동들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축적의 사회적 효과들을 일부러라도 상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국가의 목적은 시장질서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시장 안의 무질서함을 뿌리 뽑는 것이며, 도덕과 감정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난한 자의 폭력과 강탈에 맞서 부를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자’ (1976a, p. 723)를 지킨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부에 관한 악명 높은 낙수효과(; 사회의 최고 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면 그 부가 서민들과 그 아래층에게도 확산된다고 보는 이론)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조건을 개선한다.

 스미스는 질서의 문제는 공통의 이익이 질서를 위협하는 개인과 계급 이익의 표면상의 충돌보다 우세하다고 보장하는 제헌적이고 도덕적 질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계급에게 많은 가난을 인정했고, 고용주들이 그들의 권력을 임금을 내리기 위해 남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했으나, 그러나 가난은 일반적으로 어떤 그러한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생산력의 제한된 개발의, 한편으로, 그리고 인구의 과도한 압력의 결과였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 계급의 일반적 조건은 노동 조합의 압력에 의해서나 또는 자유를 부족에서 지키는 정치적 개입에 의해 그러므로 개선될 수 없었으나, 그러나 자본의 생산적 투장의 개발에, 그리고 시장에 적합한 도덕적 가치의 실행에 의지한다. 이 분석의 정치적 함축은 노동 계급이 전체로서 그 경제적이고 도덕적 경과에 의지하는 그것의 개선을, 독립적 이익을 제헌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그들에 대한 증가된 임금을 홀로 안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지대와 이윤에서 진보적 증가에 이익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시민 사회는 의지를 가지는 국가의 존재에, 귄위와 완벽한 자유의 체계의 본질적 조건으로서 정의를 유지하는 권력에 의지한다. 시장 자유는 통치의 실천이다. 그것은 법적이고 도덕적인 뼈대 이내에 펼치고, 그리고 커먼 웰스의 대리인으로서 국가에 의해 강요된다. 자유는 정치적 촉진의 산물이고, 그리고 자유에서 신뢰는 불신에, 즉 시장의 완벽한 자유는 제한되지 않은 자유의 사용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통찰에 기초한다, 사적 권력의 정치적 단언, 이른바 복수의 이익, 또는 사회 계급 사이의 투쟁에 의해 그것이게 하라.

 

VI: 질서자유주의와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인간 경제

 

 질서-자유주의적 사고의 심장에 있는 근본적 질문은 금융 파탄, 불황, 국가의 위기, 가혹한 내핍, 정치적 폭력과 암살들, 그리고 견고한 계급적 지위들의 시기에 시장 자유의 논리를 단언하고 지키는 방식이다. 그들은 법적 뼈대의 규정에 걸쳐서 그리고 위에서, 시장들이 ‘탐욕스럽게 제 것만 찾는 사람’ (Rüstow, 1932/1963, p. 255) 그리고 노동자 투쟁의 앞에서, 고용, 조건들, 그리고 복지를 위해 자유주의적 가치의 생활력을 안전하게 할 윤리적 뼈대의 규정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경쟁은 ‘어떤 자유로운 대중 사회의’ 불가결한 ‘도구’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업과 기업적 자유의 승진이 ‘공적인 의무’ (Müller-Armack, 1979, pp. 146, 147)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불합리성’을,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화라고 불렀던 불합리성을 특히 인정했고,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가격 메커니즘에 의한 규제에 맞서 모반하는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화된 존재 때문에 잃어버려졌던 기업가 정신과 생명력을 복원할 수단을 제안했다. 뵈헴은 썼다 1937년에 (p. 11), 어떤 것도 자유 가격 메커니즘의 능력이 단지 ‘그 운동에 맞서 모반하는 참가자들의 의지에’ 대한 수많은 개인의 선호들의 조화와, 그리고 수많은 개인들의 선호들 사이의 조정을 평화롭게 규제하는 조건보다 나쁘지 않다.  

 질서자유주의는 사회적 위기가 ‘대중들의 모반’에 의해 야기되고, 대중들은 자유로운 사회의 도덕적 정서가 전혀 없다고 견지한다. 그들의 모반은 무지의 결과이고, 그들이 책임 있는 자유 방임 자본주의를 견지하는 이유인 존재의 뿌리뽑힌 양식으로부터 유래하고, 그리고 그것은 부르주아적 문명화의 가치에 대한 전체적 무시를 표현한다. 그들의 모반은 관용적 사회에 찬성하여 달성의 문화를 파괴한다. 이 “대중들의 모반은” 또 다른 모반, “엘리트의 모반”에 의해 문명화된 사회의 가치를 안전하게 하며 반대된다. 그들은 이 가치들이 개인적 자유와 책임성을 함유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 자유는 누구 자신의 조건들의 책임성을 수반한다. 그들은 복지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화된 사회 구조임을 확인하였고, 그리고 개인들이 공동체와 가족에 뿌리박는 사회에 찬성하여 사회적 관계들의 비(非)- 프롤레타리아화를 요구했다. 그들에 대해서, 가난은 성격에서 첫째의 요소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가족들과 공동체들이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수입의 부족에 대처하지 않는 조건들, 그리고 개인들이 더 이상 내핍의 앞에서 그들 자신에게 주는 도덕적 스태미너를 가지지 않는 조건들을 창조하는 박탈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형식을 표현한다. 공적인 정책은 복지 지지에 대한 요구에 따라야 한다. 대신에, 그것은 공동체들, people-size가 된 기관 그리고 개인적인 기업가적 능력의 권력부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들은 사회-경제적 관계들이 계급 대립의 결과로서 정치화되고 있었었다고 주장했고, 그리고 사회적-노동 관계의 비정치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제한되지 않은 민주주의가 민중의 주권에 의해 법의 지배의 주권이 대체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 실로 민주주의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의해 정신을 읽게 되는 것을 막을 그러한 제한들과 보호에 의해 속박되어야 한다고ㅡ 주장했다. 대중적 인간은 그것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의해 대체하기 위해서 자유-민주주의에 맞서 싸운다. (Röpke, 1969, p. 97). 스미스의 정치적 경제처럼, 질서-자유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화에 대한 해결이 유지된 축적에서 노동자들의 진실한 이익을 결정하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안정과 고용의 기초로서.

 비-프롤레타리아트화는 (로마) 시민권의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부르주아’ ((Röpke, 2009: 99) 정신에서 사회를 이해한다. 노동자들은 ‘활성화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의 윤리와 정신’ (Campbell, 2009: xvi)에 의해 홀려지지 않기 때문이다((Röpke, 2009: 99). 그들은 말한다, 자유는 자신과 다른이들을 도우며 책임과 함께 오고, 그들은 그러므로 노동자를 복지 국가의 덫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그리고 따라서 그들 자신의 노동력의 자기-신뢰적이고 자기-책임적 기업가들로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사회에 찬성하여 프롤레타리아화를 막는 행동적인 사회적 정책의 추구를 요구한다. 비밀로, 프롤레타리아화된 대중들은 기업가적 존재가 자기-부조의 코뮤니즘적 관념에 결혼되어진 큰 사회의 회원들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말한다 뮐러-아르마크는 (1976: 182). 그는 완전한 고용 정책 그리고 복지 안전은 실제로 ‘자유에 대한 노동자들 자신의 감각에 모순된다’ (ibid.)라고 주장한다. 큰 사회의 질서자유주의적 개념의 초점은 시장 참가자들의 도덕적 정서의 형성에 착수한다. 그들이 선언하는 진보는, 하지만 복지와 물질적으로 건강한 존재의 규정에 의해 측정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대중들이 ‘그들 자신의 자원들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책임성에 대하여’ (Röpke, 1957: 22) 그들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자연히, 아무도 ‘굶주리도록 허락되어야 한다’라고, 뢰프케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한다, ‘그것은 이것 뒤에 따라지 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유지되기 위해서, 국가는 이것을 보장해야 한다’ (2002: 245). 질서자유주의는 사회적 계급 이익의 먹이가 되지 않는, 그리고 대신에 전체의 이득을 위해 사회적 이익에 대하여 통치하는 강한 국가를 요구한다.

 질서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서 약한 국가를 확인한다. 약한 국가는 자신이 사회적 이해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으로부터 그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 그리고 따라서 사회로부터 그것의 ‘독립성’을 잃었다. 그것은 ‘압력 단체들…독점들 그리고… 노동조합화된 노동자들의 공격’에 굴복하고 (Rüstow, 1942, p. 276), 그리고 ‘그들에 의해 정신을 잃는다’ (Rüstow, 1932/1963, p. 258). 그들에 대하여 통치하는 대신에, 그들은 국가를 통해서 통치하고,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국가를 제한되지 한없는-책임 보험 회사로 변형한다,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위험에 맞서 언제든지 모든 사회적 이익의 보험을 계약하는 사업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것은 통치의 단위로서 국가의 분열을 이끈다, 그것의 시장 자유적 귄위를 해체하면서 말이다. 즉, 약한 국가는 게임의 규칙과 기준을 결정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고, 그리고 대신에 사회적 압력들에 양보하고, 그리고 따라서 자유로운 가격 메커니즘에 간섭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다. 복지 규정은 저항할 수 없게 된다 - 특히 노동 계급에게 손해를 입히고. 복지 국가는 노동자들을 노예로 한다(see Eucken, 2004: 193, 314); 인류를 ‘국가의 거대한 마구간에서 [유지되는] 순종적으로 길들여진 동물로’ 줄이고, ‘그 마구간으로 우리는 무리를 짓게 되고 다소간 잘 먹여지고’ (Röpke, 1998: 155), 그들의 조건이 보다 거대한 노동 생산성의 달성에 기초한 진보적 축적의 결과로서 오직 향상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진실한 이익과 상반된다. 약한 국가는 어떤 도덕적 암호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탐욕스럽게 제 것만 찾는 사람’ (Rüstow, 1932/1963: 255) 에 의해 분열된다 각각이 그들의 먹이로서 국가의 조각을 활용하기를 추구하면서. 그들은 주장한다, 자유 방임은 국가를 연장하지 않는다. 어떤 그러한 연장도 결국 경쟁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제도를 부수고, 비프롤레타리아화되고 따라서 활성화된 노동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자유의 책임 있는 실행이 의존하고 있는 도덕적 정서를 안전하게 한다. 즉, ‘우리는 그것이 줄 수 있는 것보다 경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의 분할에 기초하는 시장 경제의 좁은 영역에 질서를 설립하고 좁은 영역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전체 사회가 지어질 수 있는 원리는 아니라. 사회적이고 도덕적 관점에서, 그것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통일하기보다 해산하는 경향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만약 경쟁이 사회적 폭약의 효과를 가지지 않고 동시에 퇴화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그것의 약속은 상응적으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뼈대로 들릴 것이다.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사업 윤리들의 높은 기준, 서로에게 협력할 준비가 된 퇴화되지 않은 공동체, 그들은 사회에 대한 자연적 부착을, 그리고 견고한 장소를 가진다’ (Röpke, 2009, p. 181). 따라서 또한 특유한 지적 투자가 의존하는 사회적 영역의 상호의존성. 즉, ‘우리 사회의 내부적 통합’은 ‘지적인 사람들을···경제적 질서에 대한 의미있는 관계들로의 질서에···두는’ (Müller-Armack, 1978, p. 329) 포괄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Müller-Armack, 1976, p. 288). 그들은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역할을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유기적 지식인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들의 임무는 ‘우리가 자유롭고 사회적인 안전에서 살 수 있는 생활 스타일’을 진전시키는 윤리적 가치들과 공통적 믿음들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빌헬름 뢰프케와 알프레드 뮐러-아르마크의 작업은 행동의 시장 확인적 구조의 사회학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에 관하여 특히 중요하다. 둘 다 아담 스미스의 정신에서 자유 경제는 사회의 도덕적 정서를 발견하거나 또는 낳을 능력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 자신의 장치들에 남겨지면 유혈의 참사와 무질서로 내려가는 상업적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스미스의 견해를 되풀이하면서, 뢰프케는 강한 국가 귄위가 없이 경쟁적 시장 자유는 그것이 온전히 의지하는 도덕성과 정의의 법들을 파괴할 것이다. 도덕적 나침반을 주는 국가 없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은 사회를 분쇄하겠다고 위협하는 ‘저속한 말다툼으로 퇴화할’ (Röpke, 1982, p. 188)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뮐러-아르마크는 그것을 한데 모으는 ‘형이상학적 접착제’ (Fried, 1950, p. 352)로서 신화에 초점을 맞췄다. 1920년대에 그는 계급을 넘어서 지배적인 뼈대로서 국가의 신화를 신봉했고, 1930년대에 그는 국가적 신화를 운동과 지도자 사이의 통일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전체적 동원’ (Müller-Armack, 1933, p. 38)을 옹호했다, 전후 기간에 그는 ‘그것의 절박한 붕괴를 막는 유일한 실재적 수단으로서 우리 문화의 재(再)-기독교화’를 최초로 주장했다 (1981c, p. 496). 하지만, 이른바 서독의 경제적 기적의 문맥에서, 그는 에르하르트가 (1958) ‘경쟁을 통한 번영’이라고 칭했던 경제적 발전으로부터 유래하는 사회적 응집을 지각했다. 그것은 새로운 공화국의 발견된 신화로서 경제적 기적의 아이디어에 뿌리박힌 새로운 종류의 국가적 신화를 제공했다 (see Haselbach, 1994). 유지된 경제 성장은 가장 많이 가능한 사회적 정책이다 (Müller-Armack, 1976) – 그것은 임금 수입의 안정화와 고용을 줌으로써 노동 계급 불만족을 달랜다. 대조적으로, 경제적 가치의 합리주의적 사상가로서 시작했었던 뢰프케는 그의 인생 만년에 소농의 삶에서 사회적 응집의 전통적 수단이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귀족과 권위와 계서제, 공동체, 그리고 가족의 관계들을 애도했다. 그의 견해에서, 자유로운 경제는 그가 ‘인간 공동체’라고 불렀던 그 자신의 사회적 전제조건을 파괴한다. 경제적 기적은 물질주의적 노동자를 창조했다; 그것은 자기-책임적 기업가로서 그것의 활동성이 자연적 공동체의 전통적 형식들에 의해 유지되는 만족한 노동자를 창조하지 않았다. 그는 지속적인 위협으로서 ‘노동자들의 협박하는 불만족’ (Röpke, 1942, p. 3)을 지각했고 그리고 사회적 정책이 ‘악의 근원을 [공격하고]···프롤레타리아트 그자체를 없앨 것’을 요구했고 ‘...진실된 복지 정책은···프롤레타리아트를 없애는 정책과 같은 뜻이라고’ (Röpke, 2009, p. 225), 그는 주장했다, 사적 소유의 인격을 가지고 프롤레타리아트 인격을 대체하면서, 그리고 그것은 경쟁을 생활-스타일에 반영하는, 그리고 사적 소유의 의무와 정서와 함께 깊이 배어든 인격이다. 그 자신의 것으로 남겨지면서,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 메커니즘은 뿌리째 뽑힌 프롤레타리아들을 창조했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확인적 인격의 창조는 정치적 임무이다. 이 같은 문맥에서, 오이켄은 (2004) 경제 자유가 시장의 논리에 맡겨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통치로부터 유래한다. 그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전체로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상호의존의 힘이고 따라서 시장 자유, 정의의 약속 만큼,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민주주의 이내에서 그것의 본질적인 사교성과,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대응을 안전하게 하는 도덕적 뼈대를 ‘자기-애’에 준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발적 교환에 의하여 만족감을 추구하는 경쟁에 참가하는 기업가들의 자유가 개인적 자유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시장들은 부족, 사적 소유, 계약의 자유, 그리고 평등한 법적 주체들 사이의 교환에 의해 통치된다, 각각이 그들 자신의 자기-이해타산적 끝을 추구하면서 말이다. 자유로운 시장은 ‘신호의 체계’, 가격 메커니즘에 의하여 자율적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협력을 허락한다. 그것은 따라서 전체 경제에서 부족의 정도를 소비자들과 생산자들에게 알리는 ‘계산 기계’ (Eucken, 1948, p. 28)로서 효과적인 작용을 허가하는 통화 안정성을 요구한다. 그러한 ‘부족 계량기’ 때문에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들의 ‘자동적’이고, 강요되지 않는 조화와 균형을 유지한다, 각각이 ‘연속적인 소비자 국민투표’ (Röpke, 1951, p. 76)에 참여하면서 말이다. 가격은, 뢰프케는 말한다 (1987, p. 17), ‘확장하거나 또는 제한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에 대한 시장을 통한 명령들이다’. 자유로운 시장은 따라서 자기-이해타산적 참가자들 사이에 자발적 통신과 자유로운 협력을 허락하는 특정한 ‘사회적 도구’로서 승인된다. 자유가 번창하기 위해서 그것이 타락하여 가는 것이 법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고 중요하게는 그렇게,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 뼈대들에 의해서 그렇게, 또한 질서 잡힐 필요가 있다, 자유의 오용을 막으면서, 가격이 고정될 수 있고, 시장이 갈라질 수, 그리고 경쟁적 조정이 통화 정책의 조작과 보호주의에 의하여 피해질 수 있을 때; 그리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수 있고, 대중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화된 대중 사회가 국가에게 복지를 인정할 것을 강제할 수 있을. 꼭 홉스주의자들(Hobbesian man)이 리바이어던(the Leviathan)에게 그녀의 본질적인 사교성을 유지하라고 요구한 것처럼, 시장의 완벽한 자유는 강한 국가 귄위에게 자기-이해타산적 기업가들의 순서바른 행위를 보증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는 한없지 않다. 질서는 사교성이다. 질서의 옆에서만이다 반사회적 이익의 본질적 사교성이 그 자신을 선언하는 것은 말이다. 법처럼, 부르주아 자유의 도덕적 정서는 질서에 기초하고 질서를 미리 가정하고, 그리고 질서에 의하여 존재한다. 자유는 오직 질서 잡힌 자유로서 효과적이다. 실로, 경제 자유는 자유-방임을 수반한다는 아이디어는 위험한 것이다. 자유 방임은 견고한 도덕적 가치들, 법적 기준들, 그리고 행동의 사회적 패턴들의 존재를 미리 가정한다. 그것은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정책이 기초하는 원리들의 대단히 애매하고 그르치기 쉬운 묘사’ (Hayek, 1944, p. 84)이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개인적 자유의 부족은 그 자유의 강제적인 힘으로서 국가에 의지한다. 자유는 부족에 의지하고, 그리고 그것은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요구가 자유의 안전한 사용에 대한 똑같은 요구에 있는 경우이다.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에 타고난 연결이 있다 (Eucken 2004). 자유는 정치화된 자유이다. 시장 경찰 없이 어떤 시장 자유도 있을 수 없다. 자유 방임의 조직적 중심은 그러므로 정치적 국가이다. 그것은 ‘효율성 경쟁’이 의거하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들을 안전하게 하는 ‘경제적 영역’과 ‘비(非)-경제적 영역’에 ‘끼어든다’ (Müller-Armack, 1979, p. 147). 경제로부터 구분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바로 그 존재는 국가 개입을 수반한다. 이슈가 아니다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지 아니면 안 해야 하는지는. 차라리, 이슈는 국가 개입의 목적과 방법이고, 목표와 목적이다. 질서자유주의적 국가는 따라서 계획자이다, 식별할 수 있는 사회적 끝에 대해서가 아니라 변질되지 않은 경쟁적 관계들에 대해서 말이다. 오이켄은 말한다 (1951, p. 36), ‘경제적 권력의 그 문제는 권력의 그 이상의 집중에 의해 결코 풀릴 수 없다, 카르텔들과 독점들의 형식으로’. 어떤 해결책도 ‘자유를 파괴하는 계약의 자유의 오용을 허가하는 자유 방임의 정책’ (ibid., p. 37)에서 발견될 수 없기도 하다. 그는 그 ‘경제적 권력의 문제는 모든 경제적 법적 정책의 지적인 협력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다···경제적 정책의 어떤 특이한 수단이, 만약 그것이 성공적일 수 있다면, 전체로서 경제적 질서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그리고 설계되는 정책의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p. 54)라고 주장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 시장은 통치적 수단이다 (Eucken, 2004). 그것은 커먼 웰스의 정치적 권위로서 강한 국가에 의거한다 (Böhm, 1937).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사회적 개인들의 질서 잡힌 행동을 보장하는 감시 없이 어떤 자유도 여기 있지 않다. 자유로운 시장은 사활적으로 만족된 개인들을 미리 가정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화라는 자연적 경향의 앞에서, 더 잘 하기 위한 인센티브로서 빈곤을 지각하는 것, 실업을 고용에 대한 기회로서 보는 것, 그들 자신들을 기꺼이 직업으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창의에 대하여 값을 매기는 것, 그들 스스로 일함으로써 그들의 생계 필요들의 부분을 만족시키는 것을 납득할 필요가 있고, 그리고 재산의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그리고 작은 규모의 주식 시장 투자자로서 주화로 바꾸어진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고,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삶의 처지의 기업가들로서 부르주아 자유 – 계약의 자유 - 에 참가한다, 그들이 무엇이었을지 모를지라도. 그들에게, 사활적으로 만족된 노동자들은 그들의 삶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가져가고, 사태들을 진척시키고, 용기있게 살고 삶의 불안정들과 위험들을 참고, 생계 필요들을 만족시키고 다른 이들을 돕는 독립적 일의 여분의 시간에 적응하고, 그리고 그들은 실업을 고용에 대한 기회로 본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실직한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통과 중인 기업가들이다, 고용의 한 형식으로부터 또 다른 것으로. 그들은 따라서 기꺼이 자유로울 개인들이 있을 만큼 충분한 경제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이 기꺼움은 국가의 문제이다. 경제 자유는 경제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임무이다. 자유는 따라서 지속적으로 권력이 주어진 자유이다. 그것은 삶정치(Vitalpolitik)의 정치적 실천이다 – 삶의 정치는 의지, 책임있고, 그리고 완전히 믿음직한 기업가들의 사회를 유지하는 ‘강한 국가 권위와 함께 시장 경찰을 요구한다’ (Rüstow, 1942, p. 289)라는 것이다. 자유는 자유의 도덕적 정서에 의지한다. 그들은 그러므로 자유로운 경제를 도덕적 경제로 본다.
 요컨대 ‘질서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제의 정치적 주인으로서 국가의 권위를 단언한다. 자유는 질서의 뼈대 이내에서 자유이다, 그리고 질서는 정치적 권위의 문제이다. 오직 질서의 기초 위에서 자유는 번영하고, 그리고 완전히 자기-책임적 그리고 즉 기업가적 방식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가격 메커니즘으로 조정되리라 안심하고 기대가 될 수 있다. 질서의 유지는 시장으로부터 모든 ‘질서 없음’을 제거하는 그리고 관계들의 정치적 의의가 없는 교환들로서 시장 관계들을 ‘비정치화하는’ 그리고 따라서 또한 정치적인 것을 독점하는 책임을 지는 강한 국가에 의지한다. 뮐러-아르마크는 말한다 (1981b, p. 102), 국가가 ‘그 자신의 영역 이내에서 가능한 강해야 하나, 그러나 그 자신의 외부에서, 경제 영역에서, 그것은 가능한 적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경제적 관계들의 비정치화와 강한 국가의 정치화는 사회적 조직의 독립적 형식으로서 함께 일치한다 (Eucken, 2004). 그들은 신념의 교리로서 자유 방임 자유주의를 거절한다, 상태가 곤란해지고, 자유를 방어할 힘이 없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의 배경에 맞서, 그들은 자기-책임적 기업가로서 개인적인 것을 복원하고 영속화시키는 적절한 경제적이고 사회적 ‘질서’ 또는 ‘체계’를 결정려고 착수했다. 다음 부문이 주장하는 것처럼, 질서 사회적 정책의 지점은 프롤레타리아로서 노동자의 정치화를 막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를 그들 자신의 노동력의 원기왕성하고, 활동적이고, 그리고 자기-책임적 기업가로서 형태를 바꾸는 것을 겨냥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법의 지배에 기초해서 시장 자유를 유지하는 임무는 그러므로 충분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시장 행동은 ‘심리학적-도덕적 힘들’로 끼워넣어질 필요가 있다.

 

결론

 

 시장 자유와 보이지 않는 손의 형이상학자로서 오스트리아에서 만들어진 아담 스미스는, 1723년 6월 16일에 세례를 받았고 1790년 6월 17일에 그의 죽음 전에 1759년에 도덕적 정서의 이론 그리고 1763년에 법리학 강의 그리고 1766년에 국부론을 저술했던 아담 스미스와 전혀 닮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적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원리의 신성한 이성에 대한 천체의 사상가처럼 실로 보이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인들의 방법의 그 스미스는 질서자유주의적 기술을 통해서 빛나는 아담 스미스와 닮지 않았다. 스미스처럼, 그들은 시장 경찰이 자유의 실천 - 그것은 정의, 생산의 값쌈, 그리고 완벽한 자유의 도덕적 정서를 촉진하는 지속적인 시도에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스미스처럼 그들은 자유의 완벽한 체계에 대한 방해들의, 특히 프롤레타리아적 개성이 선언하는 방해의 제거를 요구하고, 그리고 정의의 법률, 사적 재산의 지배, 식량의 값쌈을 위한 본질적 조건으로서 노동 생산성의 연속적인 개선 그리고 도덕적 정서의 대리인으로서 개인들의 권력부여를 보장하는 시장 경찰로서 국가를 촉구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경제는 음울한 과학이다 정확하게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경제는 인간의 노력을 모든 것을 가격을 알고, 비용과 이득 사이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수고를 생각하고, 그리고 어떤 것의 가치도 모른다. 계산가능한 방정식으로 생각한다. 스미스가 잘 알았던 것처럼, 도덕적 정서는 국내총생산(GDP)보다 중요하다, 국내총생산이 도덕적 정서를 기르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하지만 시장 자유의 체계에 핵심적이다. 질서자유주의적 스미스는 도덕적 정서의, 정의 그리고 사적 재산의, 그리고 노동 생산성의 스미스이다. 자유의 건축물은 도덕성, 정의, 재산 그리고 노동 생산성의 대행자로서 시장 경찰의 노력에 의거한다. 질서자유주의적 스미스와 비교하여, 오스트리아적 스미스는 풍자만화이다. 하지만, 질서자유주의자들과 오스트리아인들, 둘 다, 가난한 자들이 죽음에 의해 규제된다는 점에서 스미스에게 동의한다. 그들은 이것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적인 스미스는 시장이 최선을 안다고 말하고, 질서자유주의적 스미스는 시장 규제가 질서와 윤리적 가치를 유지하는 경찰의 문제라고 말한다. 또 다른 경우에, 그들은 등수(登水, trickle up) 이후에 낙수를 기대하고, 그것은 또 다른 경우에 사회적 부의 등수의 모든 갱신된 현재의 나쁜-무한(bad-infinity)의 형이상학적 수용을 표현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과 스미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스미스가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의 사회 이론과 정치 철학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그러지 않는다. 강한 국가 귄위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자본주의의 사회 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의 명백한 위기 선언 앞에서 시장 자유를 복원하는 방식의 정치적 수단을 표현하고 그것은 시장 자유의 모델을 표현하고 실재가 그것에 맞춰 조정되는 것을 요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자세는 자유주의의 신학을 표현한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필요와 자유주의적 비상(非常)의 시기에 방어되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조적으로, 스미스는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심지어 발언조차 하지 않는다. 방어할 그러한 어떤 체계도 없었다. 커먼 웰스에 대한 그의 자유주의 이론은 낳아지는 것이 여전히 필요했던 세계를 기대했던 시장 자유와 시장 경찰의 보이지 않는 원리들에 기초했다. 대조적으로,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지 않는다 – 그들은 보다 좋은 현재, 프롤레타리아가 이상화된 기업가의 이미지에 있는 미래로서 미래를 예기한다. 그들은 이 현재를 위해 다투고, 그리고 따라서 신학적 보복자처럼, 그들은 교회의 강대(講臺)로부터 바리케이드까지 움직인다. 즉, ‘만약 자유가 생존의 기회를 갖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자유로운 개인의 결정을 안전하게 하는 지배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국가는 행동해야 하고 (Willgerodt and Peacock, 1989, p. 6), 그리고 그것이 ‘자유로운 사회의 가장 본질적 원칙’을 실행했을 때,‘···일시적으로 희생되어야 할지도 모른다···긴 기간에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Hayek 1960, p. 217). 자유의 희생에 대한 상은 그 자체 ‘자유이다’ (Friedrich, 1968, p. 581). 1920년대 후기에, 독일 질서자유주의자들은 그러므로 일어났었던 ‘극도의 비상사태’ 대철하기 위해 대리자의 독재론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회의 거대한 다수는 경제적 충격을 흡수할 ‘도덕적 스태미너’가 (Röpke, 2009, p 52)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맑스가 국가를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 보았다는 서술로 이 글을 시작했다. 아담 스미스의 정치이론은 이 명제의 의미를 때로는 냉소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표현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의 기술은 그 내용상 국가에 대한 스미스의 고전적 개념화에서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 국가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형식이다. 국가의 목적은 행동의 일반적 법칙들을 확립하는 것이다. 또 사적소유의 법칙에 기초하여 사회적 통합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투쟁에 직면하여 노동생산성의 점진적 증대를 촉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과 대면하기보다 이를 테면 독점 및 보호주의를 통해 이윤율을 유지하려고 하는, 또 자본의 점진적 축적이라는 부르주아 사회의 공중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자산 소유자들에 직면하여 노동생산성의 점진적 증대를 촉진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란 경제와의 관계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와 경제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국가이며, 그것의 목적은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맑스는 이 점을 이해했고, 따라서 국가를 부르주아 사회의 집중된 힘, 즉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 이해했다. 따라서 나는 정치경제학이 경제학에 대한 비판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매우 핵심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경제학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므로 맑스주의 경제이론을 보충하는 맑스주의 정치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와 질서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어째서 그러한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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