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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움베르또 마뚜라나의 자기생성, 구조 접속 그리고 인지

[20111117_자기생성 구조 접속 그리고 인지.hwp (94.30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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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ww.isss.org/maturana.htm

[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AND COGNITION.mht (68.19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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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AND COGNITION

자기생성, 구조 접속 그리고 인지

 

Humberto Maturana Romesin 움베르또 마뚜라나 로메인

F. Ciencias Dpto. Biologia F. Ciencias Dpto. Biologia

University Of Chile 칠레 대학교

Casilla 653 Santiago Chile 카실라 653 산티아고 칠레

 

DRAFT 초고

 

editorial changes not yet reviewed by author

저자에 의해 아직 재검토되지 않은 편집의 변화들

 

Purpose 목적

 

My intent in this essay is to reflect on the history of some biological notions such as 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and cognition, that I have developed since the early 1960’s as a result of my work on visual perception and the organization of the living. No doubt I shall repeat things that I have said in other publications (Maturana and Varela 1980 and 1988), and I shall present notions that once they are said appear as obvious truisms. But the reader it is not invited to attend to the truisms, rather he or she is invited to attend to the consequences that they entail for the understanding of biological processes. After all, explanations or demonstrations always become self evident once they are understood and accepted. 이 논문 안에서 나의 의도는 1960년대 초 이래로 시(視) 지각과 살아 있는 것의 조직의 결과로서 내가 개발했던 자기생성, 구조접속, 그리고 인지와 같은 몇몇 생물학적 관념의 역사를 성찰하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내가 다른 출판물{마뚜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 1980, 1988} 안에서 말했던 것들을 반복해야 하고, 그리고 나는 명백하고 자명한 이치로 보인다고 말해졌던 관념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독자는 자명한 이치를 경청하도록 초대되지 않고, 차라리 그 또는 그녀는 그들이 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일으킨 결과를 경청하도록 초대된다.

 

KEYWORDS Autopoiesis, structural coupling, cognition, explanations, self-consciousness, 키워드 자기생성, 구조 접속, 인지, 설명, 자기 의식,

 

1. Autopoiesis

1. 자기생성

 

1.1 Origins of the notion

1.1. 관념의 기원들

 

In November 1960, a first year medical student asked me the question “What began three thousand eight hundred million years ago so that you can say now that living systems began then?” I realized that I could not properly answer that question, so I said “I cannot answer this question now, but if you come back next year I shall propose an answer then.” Thus I accepted the question of the student to be answered later, and as I did so, I accepted also the question for myself. I realized that to answer this question I had to create a living system, either conceptually or practically, because I had to be able to say what kind of systems were living system to be able to say how they began.

1960년 11월에, 1학년 의대생이 나에게 질문했다 “3천 8백만 년 전에 무엇이 시작했고 그래서 당신은 지금 그때 생명체가 시작했다고 말하는가?” 나는 알았다 내가 그 질문에 적당하게 대답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이 질문에 지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내년에 돌아온다면 나는 그때 대답을 제시하겠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대답될 학생의 질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또한 내 자신을 위하여 질문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생명체를 창안해야 했다는 것을 실감했는데, 개념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그들이 시작했는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체계가 생명체였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While in the attempting to answer the dual questions of what kind of systems are living systems, and of how did they begin so that I could now speak of their origin, it became obvious to me that living systems exist as autonomous entities in the form of self contained closed molecular dynamics of self production,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ndeed, one can say that living systems arose in the history of the earth in the moment in which some spontaneous networks of molecular autocatalytic processes became closed upon themselves. This happened when, as a result of their own dynamics, they became singular separable entities that realized their boundaries as a consequence of their own operation, and existed in that way as autonomous totalities in a molecular medium with which they were in recursive molecular interchange. Through this understanding my claim became that a living system is a dynamic composite entity, realized as a unity as a closed network of productions of components such that through their interactions in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the components:

어떤 종류의 체계가 생명체인가의, 그리고 내가 지금 그들의 기원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시작했는지의 이중의 질문들에 답하기를 시도하는 동안, 자기 생산의 자기 내포적인 폐쇄된 분자 역동성의 모양으로, 그것들을 관통하는 분자들의 흐름들에 개방된 채, 생명체가 자율적인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명백해졌다. 진실로, 일부 자동적인 분자적 자정 과정이 스스로 닫친 순간에 지구의 역사상 생명체가 일어났다고 누구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때 일어났다, 그들 자신의 역동성의 결과로서,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작업의 결과로서의 그들 자신의 경계들을 실현한, 그리고 귀납적인 분자적 교환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있는 분자적 매질 안에서의 자율적인 총체성으로서 그 과정에 존재하는 특이한 개별적 실재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성 요소들의 혼합과 분해의 그들의 상호작업을 통해서 그 같은 성분들의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로서의 통일체로서 실현된, 역동적인 합성의 실재가 생명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 되었다.

 

a) recursively constituted the same network of production that produced them, and

ㄱ)그들을 생산한 귀납적으로 구성된 똑같은 생산의 네트워크, 그리고

 

b) specified the extension of the network and constituted operational boundaries that separate it as ㄴ) a dynamic unity in a space defined by elements of the kind of those that compose it, is an autopoietic system.

그것을 구성하는 그것들의 종류의 요소들에 의해 정의된 공간 안에서의 역동적 통일체로서 그것을 잘라서 떼어 놓는 구성되고 작업적인 경계들과 상술된 네트워크의 연장이, 자기생성적인 체계이다.

 

My first full understanding of living systems as discrete self producing molecular networks closed in the dynamics of molecular productions, but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took place suddenly at the end of 1963. In conversation with my friend Dr. Guillermo Contreras I was highlighting a fact that we of course both knew, namely, that nucleic acids participate with proteins in the synthesis of proteins, and that proteins participate as enzymes with nucleic acids in the synthesis of nucleic acids, all together constituting a discrete circular dynamics supported by the continuous flow of the molecules that we usually call metabolites. As I was drawing a diagram of this circularity, I exclaimed “This is it!”.

분자적인 생산들의 역동들안에 닫혀 있는, 그러나 그것들을 거쳐서 분자들의 흐름에 개방된 따로따로의 자기 생산적 분자적인 네트워크로서의 생명체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충분한 이해는, 1963년의 끝에 갑자기 일어났다. 나의 친구 길레르모 박사와의 대화 안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단백질의 합성 안에서 단백질과 핵산이 참여한다, 그리고 핵산의 합성에 핵산과 효소로서의 단백질이 참여한다, 우리가 대개 물질대사라고 부르는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 의해 지지되는 따로따로의 순환적 역동성들을 모두 함께 구성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 순환성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나는 설명했다 “이것이 그것이다!”

 

After this event I was impressed to see that although the metabolic charts that usually hang on the walls of biochemistry laboratories show cases of closed molecular dynamics, they do not show the participation of molecules in the realization of a boundary that would make of the molecular network a discrete entity in the molecular space. I think that those metabolic charts did not show autopoiesis because there was no concept of metabolic closure as a central feature of the constitution of a living system as a discrete entity, and because the metabolic network represented there did not constitute in its operation an autopoietic unity. But I did not have the word “autopoiesis” to speak with then.

이 사건 이후, 나는 그것을 본 것에 인상지어졌다 비록 생화학 연구실들의 벽 위에 보통 걸린 물질교환의 도표는 폐쇄된 분자적인 역동성의 경우를 보여준다, 그것은 분자 네트워크를 분자적 공간에서 구별된 실재로 취급하는 경계의 실현에서의 분자들의 참여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저 물질대사 도표가 자기생성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구별된 실재로서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중심적인 특징으로서 물질대사 폐쇄라는 개념은 없기 때문이고, 거기에 나타난 물질대사 네트워크가 그것의 작업으로 자기생성적 통일체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지고 말할 “자기생성”이라는 용어를 그때 가지고 있지 않았다.

 

At the beginning of 1964 I began to say that living systems were constituted as unities as circular closed dynamics of molecular productions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n which everything could change except their realization as unities as closed circular dynamics of molecular productions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t was later, in 1968 that I began to speak of living systems as closed molecular networks, and it was not until 1970 that I choose the word autopoiesis in order to connote the organization of living systems as closed networks of molecular production, and I could say that living systems existed only as long as their autopoietic organization was conserved. I did not think of autopoiesis in an experiential vacuum as I conceived it as an abstraction of what I knew of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times.

1964년의 시작에 그것들을 거쳐 모든 것이 그들의 분자적인 생산들의 폐쇄된 순환적 역동성들이 그들을 거쳐 분자들의 흐름으로 열릴 때 통일체로서의 그들의 실현을 제외하고 변할 수 있었던 그것들을 거쳐 분자적인 생산들의 순환적인 폐쇄적 역동성이 분자들의 흐름을 열 때 생명체가 통일체로서 구성됐다고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명체를 페쇄된 분자적 네트워크라고 물하기 시작했던 것은 더 뒤의, 1968년이었고, 내가 자기생성이라는 단어를 분자적인 생산들의 페쇄된 네트워크로서의 생명체의 조직을 내포하기 위해 선택했던 것과, 그리고 나는 생명체가 오직 그들의 자기생성적 조직이 보존될 수 있었던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이 되어서였다. 나는 그 시대의 분자 생물학이라고 내가 알았던 것의 추상으로서 그것을 내가 품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생성을 경험적인 진공에서의 자기생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1.2 Molecular systems

1.2. 분자적인 체계

 

If the components of a closed network of productions that recursively constitute the same network of productions that produced them are molecules, then this autopoietic system is a living system that exists in the molecular space in a continuous molecular interchange with the molecular medium that contains it. Molecular systems exist only in the satisfaction of the structural conditions of molecular existence, thus the satisfaction of all that is required for molecular processes to occur is implicit in the understanding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The fundamental thing that happens in the constitution of a living system as a molecular autopoietic system is its constitution as an autonomous entity that has a singular existence as such in the continuous flow of molecules through it. Biological phenomena occur in the actual realization of living systems as singular unities, not in the particular nature of any of the molecular processes that realize them. Any phenomenon that occurs through the actual realization of the living of at least one living system, is a biological phenomenon.

만약 귀납적으로 생산의 똑같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리고 그것이 그것을 생산하는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의 성분은 분자들이라면, 그러면 이 자기생성적 체계는 그것을 내포하는 분자적 매질과 연속적인 분자적 상호교환의 분자적 공간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분자적인 체계는 오직 분자적인 존재의 구조적인 상태의 만족에만 존재하고, 따라서 일어나는 분자적인 과정에 요구된 모든 것의 만족은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이해에서 암시적이다.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서의 생명체의 구성에서 일어나는 기초적인 것은 그것을 거쳐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그러한 것처럼 특이한 존재를 갖는 자율적인 실재로서의 그것의 구성이다. 생물학적 현상은 특이한 통일체로서의 생명체의 현실적 실현에서 일어나고, 그것을 실현하는 어떤 분자적 과정의 특정한 본성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한 생명체의 삶의 현실적 실현을 거쳐 일어나는 어떤 현상은,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Biological phenomena take place in a dynamics that occurs in the present without any operational relation to the past or the future. Past and future are explanatory notions introduced by the observer. The notion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has been minimized by some biologists under the claim that it is a notion already used by Kant as he thought of organisms as totalities in which each part existed both for and by means of the whole, while the whole existed for and by means of the parts (Kant1952, Kauffman 1995). Yet, what I say has a precision beyond what Kant could have said. I am speaking of how living systems are constituted operationally as singular molecular entities in a way that reveals their dynamic architecture. I am not saying, as Kant and others have said, that the parts exist for the whole and the whole for the parts. I talk of the manner in which the molecular process interconnect with each other so that a living system exists as a totality that appears to an observer as if the parts existed for the whole and the whole for the parts -- which is not the case. The components of any system exist as local entities only in relations of contiguity with other components, and any relation of the parts to the whole established by the observer as a metaphor for his or her understanding has no operational presence. Autopoiesis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called a property of living systems; rather it is their actual manner of being as the organization that constitutes them as singular entities in the molecular space.

생물학적인 현상은 과거 또는 미래에 어떤 작업적으로 관계도 없이 현재에 일어나는 역동성에서 생긴다. 과거와 미래는 관찰자에 의해 소개된 설명적 관념이다.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관념은 그것은 이미 칸트가 유기체를 총체성 - 전부가 부분의 수단을 위해 그리고 수단에 의해 존재했던 동안, 각각의 부분들이 전부의 수단을 위해 그리고 수단에 의해 존재했다는 - 으로 생각했을 때 이미 사용된 관념이라는 주장 하에 일부 생물학자들에 의하여 과소평가 되어 왔다(칸트1952, 카우프만 1995).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칸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을 넘어서 정밀함을 가진다. 나는 어떻게 생명체가 그들의 역동적인 건축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특이한 분자적인 실재로서 작업적으로 구성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칸트와 다른 이들이 말했던 것처럼, 전부를 위해 부분이 존재하고 부분을 위해 전부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 아니다. 나는 분자적인 과정이 서로서로에게 상호연결되어 그래서 생명체가 마치 부분이 번부를 위해 존재하고 전부가 부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 실정에 맞지 않게 - 관찰자에게 보이는 전체성으로서 존재하는 방법을 말한다. 어떤 체계의 성분은 다른 성분과의 접촉의 관계에서만 오직 특정한 실재로서 존재하고, 그 또는 그녀의 이해를 위한 은유로서 관찰자에 의해 확립된 전체에 대한 부분의 어떤 관계도 어떠한 작업적 현존을 가지지 않는다. 자기생성은 생명체의 재산으로 불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분자적 공간에서 특이한 존재로서 그들을 구성한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그들의 현실적인 방법이다.

 

As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living systems exist in the continuous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in their realization as closed networks of molecular process that exist as movable singularities in a molecular space. Accordingly, and this is basic to their understanding, living systems are not the molecules that compose and realize them moment by moment, they are closed networks of molecular productions that exist as singularities in a continuous flow of molecules through them. Their closed dynamics constitute them as separable entities that float in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they exist. It is this manner of constitution of living systems as molecular systems that Francisco Varela and I (Maturana and Varela, 1973) connote when w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n operational terms. Of course living systems are not unique in being entities that are not the components that realize them at any instant because they exist as dynamic unities in the continuous flow of the elements that compose them. I shall mention two cases in which it is apparent that what constitutes a dynamic system is its manner of composition, not the elements that compose it. One is a tornado, that exists as the manner in which the air molecules that realize it as a singular entity at any instant flow through it. Another is a club, that exists as a discrete network of conversations realized by persons that change in the course of the years, but which remains the same club as long as the network of conversations that defines it is realized and conserved through the interactions of the persons that are its members at any moment. The elements that compose a system are not its components by themselves, they are its components only as they participate in its composition, and only while they do so. So a particular molecule is a component of an autopoietic system only as it participates in the autopoietic molecular dynamics that constitutes it, and stops being a component of it as it stops participating in such dynamics.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생명체들은 분자적인 공간에 움직이는 특이성들로 존재하는 분자 과정의 폐쇄된 체계로서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 그들의 실현에서 그들을 거쳐 존재한다. 따라서,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이해 - 생명체가 순간순간 그것들을 실현하고 합성하는 분자들이 아니다 - 에 기본이고, 그들은 그들을 거쳐 분자들의 연속적인 흐름에 특이성들로서 존재하는 분자적인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이다. 그들의 폐쇄된 역동성들이 그들을 그들이 존재하는 분자적 영역에서 떠다니는 분리할 수 있는 실재로서 구성한다. 그것이 우리가 작업적인 관점에서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주장했을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와 내가 (마뚜라나·바렐라, 1973) 내포했던 분자적 체계로서 생명체의 구성의 이 방법이다. 물론 생명체들은 어떤 순간에 그들을 실현하는 성분들이 아닌 존재하는 실재에서 유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역동적인 통일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역동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합성하는 그것의 방법이지, 그것을 합성하는 요소들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한 두 가지 경우를 언급해야 한다. 하나는 토네이도이다, 그것은 그것을 어떤 순간에 특이한 실재로서 실현하는 공기 분자들이 그것을 거쳐 흐르는 방법으로서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클럽이다, 그것은 다년간의 진행에서 변하는 사람들에 의해 실현된 대화의 따로따로의 네트워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규정하는 대화의 네트워크가 어떤 순간에 그것의 멤버들인 사람들의 상호작업을 거쳐 실현되고 보존되는 한 같은 클럽으로 남는다.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그들 혼자에 의한 성분이 아니고, 그들은 오직 그들이 그것의 구성에 참가할 때만, 오직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만 그것의 성분이다. 그래서 특정한 분자는 그것이 그것을 구성하는 자기생성적인 분자적 역동성에 오직 참가할 때만 자기생성적 체계의 성분이고, 그것이 그러한 역동성에 참가하기를 멈출 때 그것의 성분이기를 멈춘다.

 

1.3 Conservation and historical processes

1.3. 보존과 역사적 과정

 

The notion of conservation is a fundamental notion of which I was aware since I was a medical student in the early fifties, but which I did not begin to use with full understanding until the early sixties. In fact, it was when I began to think on how to answer the question about the origin of living systems that it became obvious to me that that which we usually call relations of conservation are not features of the process in which we see them, but abstractions of the structural coherences under which the historical process takes place. As such, the notion of conservation has heuristic value because it reveals operational coherences in the structural (relational) matrix of the dynamic architecture of the domain in which a process takes place. Thus, in 1978 I began to speak of two relations (or laws) of conservation in the domain of biology that defined the course that different biological processes necessarily had to follow in order to happen at all. These are, the law of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the law of conservation of adaptation. These are both relational conditions of the realization of living systems in the medium that must be satisfied for biological process to occur. That is,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conservation of adaptation are constitutive conditions for the realization of living system as such. Historical processes occur moment after moment following a path constituted at every instant in the conservation of something that connects the successive moments in it, and around which all else is open to change. To say that living systems are historical systems, is to say precisely that they exist as singular entities in a continuous flow of structural change around the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adaptation. Thus it is not change that makes biological evolution a historical process, but the continuous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adaptation as that around which all else is open to change. What is primarily conserved in the history of living systems is living (autopoiesis and adaptation), and what is secondarily conserved are the different forms of the realization of living. These forms are conserved through the reproductive conservation of different manners of realization of autopoiesis in the conservation of adaptation. Understanding the participation of the dynamics of conservation makes possible the understanding of living systems and their history so that one can say now how they began millions of years ago. In this sense the biosphere, as I began to describe it in my lectures since 1990, is a historical wave front of co-evolving living systems in the systemic reproductive conservation of both autopoiesis and adaptation (Maturana and Mpodozis 1992 and 1999).

보존의 관념은 내가 50대 초반에 의학대학의 학생이었던 이래로 내가 알고 있던 기초적인 관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6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상, 바로 내가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법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리가 보통 보존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들이 우리가 보는 그것들을 보는 과정의 두드러진 점들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이 일어나는 구조 응집의 추상이라는 것이 내게 명백하게 됐던 것은 말이다. 그 자체로, 보존의 관념은 발견적인 가치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정이 일어나는 영역의 역동적인 건축술의 구조적인 (관계적) 매트릭스에서의 작업적 응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8년에 나는 어쨌든 일어나기 위해서 다른 생물학적 과정이 필수적으로 좇아야만 하는 코스들을 규정하는 생물학의 영역에서 보존의 두 가지 관계 (또는 법칙)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자기생성의 보존 법칙과 적응의 보존 법칙이다. 이것들은 둘 다 일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을 위해 만족되어야만 하는 매질에서 생명체의 실현의 관계적 상태이다. 즉, 자기생성의 보존과 적응의 보존은 그 자체로 생명체의 실현의 구성적인 상태이다. 역사적 과정은 그것 안에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변화에 열려 있는 주위에 잇따른 순간을 연결하는 무언가의 보존에서 모든 순간마다 구성된 작은 길을 따르는 순간 이후 순간에(moment after moment) 일어난다. 생명체가 역사적 체계라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들이 적응과 자기생성의 보존 주위에 구조적 변화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특이한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틀림없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진화를 역사적 과정으로 만드는 것은 변화가 아니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변화에 열려 있는 주위에 그것으로서 적응과 자기생성의 연속적인 보존이다. 생명체의 역사에 첫째로 보존되는 것은 삶 - 자기생성과 적응 - 이고, 두 번째로 보존되는 것은 삶의 실현의 다른 모양이다. 이 모양들은 적응의 보존에서 자기생성의 실현의 다른 방법의 재생산적인 보존을 거쳐서 보존된다. 보존의 역동성의 참가를 이해하는 것은 생명체의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고 그래서 한 사람이 지금 그들이 수백만 년 전에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말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생물권, 내가 1990년 이래도 나의 수업에서 그것을 묘사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자기생성과 적응 둘 다의 체계적인 재생산적 보존에서 생명체 공진화(共進化)의 정면의 역사적 물결이다.

 

1.4 The living

1.4. 살아 있는 것

 

My assertion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s neither a definition nor an explanatory proposition, it is a claim about what constitutes living systems, a claim about how they arose, and a claim about how they operate in the pragmatics of their living. That is, it is a claim that I have generated as an abstraction from the observation of how living systems on earth operate as unities and are constituted as autonomous molecular entities in the domain of the processes that molecular biology has revealed. Moreover, as I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 do not make a claim about some particular molecular structure in them, but I make a claim about the kind of molecular network that constitutes them, and the domain in which they exist. In these circumstances, the claim that living systems exist as singular autonomous molecular autopoietic unities through interactions in a medium with which they are in a continuous molecular interchange, is a claim about how they exist in their internal composition as well as about how they exist as totalities. Systems as composite entities have a dual existence, namely, they exist as singularities that operate as simple unities in the domain in which they arise as totalities, and at the same time they exist as composite entities in the domain of the operation of their components. The relation between these two domains is not causal, these two domains do not intersect, nor do the phenomena which pertain to one occur in the other. The generative relation between the two as seen by an observer is a historical relation. And the totality arises together with the relational domain in which it exists as such. That living systems are autopoietic molecular systems entails, then, several conditions that all biologists know even though they do not always fully consider their consequences: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나의 주장은 정의도 아니고 설명적인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주장이고, 그들이 일어나는 방법에 대한 주장이고, 그들이 그들의 삶의 기호론에서 작업하는 방법에 대한 주장이다. 즉, 그것은 내가 생명체가 도대체 통일체로서 작업하는 방법의 관찰로부터의 추상으로서 낳은 주장이고 분자적 생물학이 드러낸 과정의 영역에서 자율적인 분자적 실재로서 구성된 주장이다. 게다가, 내가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주장한 것처럼 나는 그것들에서 일부 특정한 분자적인 구조에 대한 주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적 네트워크의 일종에 대한 주장을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는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생명체가 그들이 연속적인 분자적 상호교환에 있는 매질에서 상호작업을 거쳐 특이한 자율적인 분자적 자기생성 통일체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총체성으로서 존재하는 방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부의 합성에서 그들이 존재하는 방법에 대한 주장이다. 합성의 실재로서 체계는 이중의 존재를 갖으며, 즉, 그들은 그들이 총체성으로서 일어나는 영역에서 단순한 통일체로서 작업하는 특이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성분의 작업의 영역에서 합성의 실재로서 존재한다. 이 두 영역 사이의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고, 이 두 영역은 교차하지 않으며, 하나에 속하는 현상이 다른 것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관찰자에게 보여진 둘 사이의 발생적 관계는 역사적 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관계적 영역과 함께 총체성은 일어난다. 자기생성적인 분자적 체계인 그 생명체는, 그러면, 그들이 그것의 결과를 언제나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물학자들이 아는 몇몇 상태들을 남긴다.

 

1) Living systems exist as singular entities that operate as totalities in interactions in the medium where each conserves its individual identity under the form of a unicellular or a multicellular organism.

생명체는 각자가 단세포적 또는 다세포적 유기체의 모양 아래 그것의 개개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매질에서 상호작업의 총체성으로서 작업하는 특이한 실재로서 존재한다.

 

2) A living system as a molecular system is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thus everything that happens in it or to it, happens in each moment as determined by its structure at that moment.

분자적 체계로서의 생명체는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이고, 따라서 그것에서 또는 그것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순간에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각각의 순간에 일어난다.

 

3) Each living system as a molecular system is constituted as a closed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in which the molecules produced through their recursive interactions constitute the same closed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that produced them, dynamically realizing its operational boundaries as a singular entity that operates as a totality in interactions in a molecular domain.

분자적 체계로서의 각각의 생명체는, 역동적으로 그것의 작업적 경계를 분자적 영역에서 상호작업의 총체성으로서 작업하는 특이한 실재로서 실현하면서, 그들의 귀납적 상호작업을 거쳐 생산된 분자들이 그들을 생산하는 분자적 생산의 같은 폐쇄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분자적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로서 구성된다.

 

4) Living systems as molecular systems are constitutively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in the continuous realization of the recursive closed self-producing dynamics that constitutes them as singular entities.

분자적 체계로서의 생명체는 연속적으로 특이한 실재로서 그들을 구성하는 귀납적인 폐쇄된 자기생산적 역동성의 연속적인 실현에서 분자들의 흐름에 열려 있다.

 

5) Everything that happens in the history of living systems occurs through their realization as singular entities that exist as organisms while in interactions with the medium in which they operate as totalities.

생명체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들이 총체성으로서 작업하는 매질과의 상호작업에 있는 동안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특이한 실재로서의 그들의 실현을 거쳐 일어난다.

 

6) Living systems exist in two domains: one; the domain in which they exist as totalities or organisms, that is the domain in which they realize and conserve their identity as multicellular or unicellular singular beings, and two; the domain in which they operate as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which is the domain of their realization as composite molecular entities.

생명체는 두 가지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들이 전체성 또는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영역,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분자적 또는 단세포적인 특이한 존재로서 보존하고 실현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합성적인 분자적 실재로서의 그들의 실현의 영역인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그들이 작업하는 영역.

 

Frequently the dual existence of living systems in particular, and of systems in general, is obscured by the notion of emergent properties. By treating the features that an observer distinguishes in a system as if they were intrinsic to it, the notion of property obscures the relational nature of these features. All the characteristics that we as observers distinguish in a system pertain to the relational space in which it operates as we distinguish it, and are dimensions of its existence in that space. So, to speak of emergent properties in the constitution of a system is both a mistake and misleading. As a system is constituted as a totality, a new domain arises, the domain in which the system exists as that totality. To say that autopoiesis is an emergent property would be a mistake. To say that the constitution of an organism gives rise to emergent behavior would also be a mistake; the behavior that appears is not a feature of the organism, but a condition of its existence in the relational space in which it is a totality, and in which behavior as a relational dynamics involves both the organism and the medium in which it exists.

종종 특정한 생명체와 일반적인 체계의 이중적 존재는 불시에 나타나는 성질의 관념에 의해 모호해진다. 관찰자가 체계에서 구분한 특징들을 마치 그것들이 그것에 본질적인 것처럼 다룸으로써, 성질의 관념은 이 특징들의 관계적 본성을 모호하게 한다. 우리가 관찰자로서 체계에서 구분한 모든 특징들은 우리가 그것을 구분할 때 그것이 작업하는 관계적 공간에 속하고, 그리고 그 공간에서 그것의 존재의 차원들이다. 그래서, 체계의 구성에서 불시에 나타나는 성질들의 말하는 것은 실수와 오해 둘 다이다. 체계가 총체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처럼, 새로운 영역이 일어난다, 체계가 그 총체성으로서 존재하는 영역이. 자기생성이 불시에 나타나는 성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유기체의 구성이 불시에 나타나는 행위를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 또한 실수일 것이다. 나타나는 행위는 유기체의 특징이 아니고, 그것이 전체성이고, 관계적 역동성으로서의 행위가 그것이 존재하는 환경조건과 유기체 둘 다를 말아 넣는 관계적 공간에서 그것의 존재의 상태이다.

 

1.5 Not an explanatory principle

1.5. 설명적인 원리가 아닌

 

One of the basic conceptual difficulties in understanding living systems as autonomous autopoietic systems arises from our cultural training that leads us to think in terms of external causes to explain the occurrence of any phenomenon. This attitude blinds us to the spontaneous nature of all processes in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we exist. All molecular processes occur spontaneously following a path that arises moment after moment according to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different molecules involved. That is, nothing occurs in the molecular domain through an external cause, and all that happens occurs as determined by the structural coherences inherent in the circumstances in which it occurs. In our culture, we are surprised when we see order appearing spontaneously, and we do no find an external cause for it. When that happens the conceptual difficulty entailed is frequently avoided or denied by resorting to some explanatory principle that is used without full awareness as if it were the external cause of that unexpected order.

생명체를 자율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로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개념적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현상의 일어남을 설명하기 위해 외부의 원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우리의 문화적 훈련으로부터 생긴다. 이 태도는 우리가 존재하는 분자적 영역에서 모든 과정의 자발적인 본성에 우리가 눈멀게 한다. 모든 분자적 과정은 관련된 다른 분자들의 구조적 역동성에 따라서 순간 이후의 순간에 일어나는 좁은 길을 좇으며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즉, 어떤 것도 외부적 원인을 거쳐 분자적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선천적인 구조적 응집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일어난다. 우리의 문화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보이는 명령을 볼 때 놀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외부적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것이 일어날 때 남겨진 개념적 어려움은 마치 그것이 그 예기치 못한 명령의 외부적 원인인 것처럼 충분한 인식 없이 사용되는 일부 설명적 원리들로의 재분류를 통해 종종 부정되거나 피해진다.

 

This is, I think, what has happened with the use of the notion of autopoiesis as it has been frequently treated as an explanatory principle. But the notion of autopoiesis as I have conceived it, and as I have indicated above, is not an explanatory principle. Autopoiesis occurs only when the dynamic structural architecture of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it can occur satisfies the conditions for its occurrence.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종종 설명적 원리로서 취급되었을 때 자기생성의 관념의 사용과 함께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생성의 관념은 내가 그것을 착상했을 때처럼, 그리고 내가 위에서 지시했던 것처럼, 설명적인 원리가 아니다. 자기생성은 오직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분자적 영역에서 역동적인 구조적 건축술이 그것의 사건을 위한 상태를 만족시킬 때에만 일어난다.

 

Furthermore, I claim that autopoietic systems exist only in the molecular domain, and that this is so because the molecular domain is the only domain in which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elements that define it, produce elements of the same kind as a spontaneous result of their structural dynamics: the interactions between molecules produces molecules through composition or decomposition. Indeed, this was my original claim when I said in my lectures in 1971, and later in the first edition of the book "De máquinas y seres vivos" that Francisco Varela and I published in 1973, that autopoiesis was both the 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 for the constitution and realization of living systems. Later, while answering questions about whether there were other autopoietic system in other domains, and whether they were living systems or not, I though that it was perhaps possible that autopoietic systems could exist in other domains different from the molecular one. While considering this I found it necessary to insist that living systems were autopoietic systems in the molecular space. Yet, as I became more aware of the uniqueness of the molecular domain, I realized that it is only in the molecular domain that systems like living systems can exist because it is only in this domain where autopoiesis can take place. Let me be explicit.

더욱이, 나는 자기생성적 체계가 오직 분자적 영역에만 존재한다고, 그리고 이것이 그렇다면 왜냐하면 분자적 영역이 그것을 정의하는 상호작업이, 그들의 구조적 역동성의 자발적인 결과와 같은 종류의 요소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업은 합성과 분해를 거쳐 분자를 생산한다. 진실로, 이것이 내가 1971년에 나의 강의에서, 그리고 나중에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내가 1973년에 출판한 책 “(De máquinas y seres vivos)”의 첫 번째 판에서 자기생성이 생명체의 구성과 실현에서 필요조건 충분조건 둘 다라고 했을 때의 본래의 주장이었다. 나중에, 다른 영역에 다른 자기생성적 체계가 있는지에, 그리고 그들이 생명체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자기생성적 체계가 분자적인 것과는 다른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숙고하는 동안 나는 생명체가 분자적 공간에서 자기생성적 체계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그러나, 내가 분자적 영역의 독특함을 더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생성이 일어날 수 있는 영역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생명체와 같은 체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오직 분자적 영역에서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분명히 해보도록 하자.

 

The molecular space is peculiar in that,

분자적 공간은 저것에서 특유한데,

 

a) it is constituted by dynamic composite entities (the molecules) that as a result of their interactions produce through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elements of their same kind (that is new molecules),

ㄱ) 그것은 그들의 상호작업의 결과로서 합성과 분해를 거쳐 그들의 같은 종류의 (새 분자들인) 요소들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합성의 실재들 (분자들) 에 의해 구성된다.

 

b) the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of the elements of this space (the molecules) occurs while these elements exist as composite entities under thermal agitation that operationally constitutes the energy for their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and

ㄴ) 이 요소들이 그들의 합성과 분해를 위한 에너지를 작업적으로 구성하는 열 운동 아래 합성의 실재로서 존재하는 동안 이 공간 (분자들) 의 합성과 분해가 일어나고, 그리고

 

c) the course of the compositions and decomposition to which the elements of this space give rise in their interactions, is determined at every instant by the dynamic architecture of the composition (the structure) of the interacting elements (molecules).

ㄷ) 이 공간의 요소들이 그들의 상호작업에 일으키는 합성과 분해의 진행은, 상호작업하는 요소들 (분자들) 의 합성 (구조) 의 역동적인 건축술에 의해 매순간마다 결정된다.

 

In these circumstances, the molecular space is a space in which all that happens in it in terms of structural dynamics occurs without any external guidance or support as a spontaneous architectural dynamics. Or, in different words, the molecular space is a space in which all that happens in it at any instant occurs following a course determined and guided by the structure of the elements that constitute it in a dynamics that is proper to it as a dynamic architecture. There is no other domain like this in which the interactions of the elements that define it generate through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elements of the same kind without external support. Thus, the interactions of the elements of the sub-molecular space do not give rise to composite elements of the same kind. The elements of the supra-molecular space constitute entities that exist as totalities in a different domain than the molecular domain and exist as dynamic entities through the spontaneous dynamic architecture of the molecular components that realize them, and not by themselves as molecules do. So, I claim that the elements of neither the sub-molecular nor the supra-molecular domain cannot by themselves give rise to autopoietic systems as singular entities constituted as closed networks of productions of components that do not need external- support to operate as such.

이 상황에서, 분자적 공간은 구조적 역동성의 관점에서 그것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어떠한 외부적인 안내 또는 자발적인 건축적 역동성 없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또는, 다른 말로, 분자적 공간은 어떤 순간에도 그것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역동적 건축술로서 그것에 적당한 역동성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구조에 의해 안내되고 결정된 진행을 따르면서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것을 규정하는 요소들의 상호작업이 합성과 분해를 거쳐 외부적인 지지 없이 같은 종류의 요소를 낳는 이 같은 다른 영역은 없다. 따라서, 하위 분자적 공간의 요소들의 상호작업은 같은 종류의 합성의 요소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상위 분자적 공간의 요소들은 분자적 영역보다 다른 영역에서 총체성으로서 존재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적 성분들의 자발적인 역동적 건축술을 거쳐 실재를 역동적인 실재로서 존재하는 실재를 구성하고, 그리고 분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들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하위 분자들도 아니고 상위 분자들 영역도 아닌 요소들이 그 자체로 작업하기 위해 외부적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성분들의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로서 구성된 특이한 실재로서 자기생성적 체계를 그들 혼자서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Accordingly, a living system exists as an autopoietic system in the molecular space. But, at the same time, a living system exists also as an organism in the supra-molecular space where it arises as a totality through its interactions as a whole while it is constituted and conserved as a dynamic supra-molecular singularity through the autopoiesis of its cellular components. That is, an organism is an autopoietic system through its cellular composition, not through its supra-molecular existence. (some comments on social systems and ecosystems to be added in the final version of this paper)

따라서, 생명체는 분자적 공간에서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체는 또한 그것이 그것의 세포적 성분의 자기생성을 거쳐 역동적인 상위 분자적 특이성으로서 보존되고 구성되는 동안 전부처럼 그것의 상호작업을 거쳐 전체성으로서 그것이 일어나는 상위 공간에 유기체로서 존재한다. 즉, 유기체는 그것의 세포적 합성을 거친 자기생성적 체계이다, 상위 분자적 존재를 거친 것이 아니라. 생태계와 사회적 체계에 관한 일부 논평은 이 논문의 최종 버전에서 덧붙여질 것이다.

 

2. Structural coupling

2. 구조 접속

 

2.1 Structure and organization

2.1. 구조와 조직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is a system such that all that takes place in it, or happens to it at any instant, is determined by its structure at that instant. We living systems, as molecular systems,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There are two features of the constitution of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that I distinguish with the words organization and structure. These two features correspond to distinctions that we make in daily life as we handle any system or composite entity, even though we are frequently not consistent with the words that we use to refer to them. In these circumstances, I shall consistently use the word organization to connote the configuration of relations between components that define the class identity of a composite unity or system as a totality or singular entity. I shall consistently use the word structure to refer to the components and the relations between them that realize a system or composite entity as a particular case of a particular class.

구조 결정된 체계는 어떤 순간에 그것 안에서 일어나는 또는, 그것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순간의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체계이다. 분자적 체계로서, 우리 생명체는 구조 결정된 체계이다. 내가 조직과 구조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구분하는 구조 결정된 체계의 구성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우리가 어떠한 체계 또는 혼성의 실재를 다룰 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만드는 구분과에 상당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와 우리가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혼성의 통일체 또는 체계의 종류 정체성을 총체성 또는 특이한 실재로 규정하는 성분들 사이의 관계의 배치를 내포하는 조직이라는 단어를 시종일관하게 사용해야 한다. 나는 체계 또는 혼성의 실재를 특정한 종류의 특정한 경우로 실현하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들과 성분들을 언급하기 위해 구조라는 단어를 시종일관하게 사용해야 한다.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is only an aspect of the relations included in the structure of the system, and does not exists independently of the structure in which it is realized. In these circumstances, a system conserves its class identity, and stays the same while its structure changes, only as long as its organization is conserved through those structural changes. The conservation of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is a condition of existence, if the organization changes, the system disintegrates and something different appears in its place. This is not the case for the structure of a system. The structure of a system is open to change, and can change in two ways:

체계의 조직은 체계의 구조에 포함된 관계의 단지 양상일 뿐이고, 그것이 실현되는 구조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상황들에서, 체계는 그것의 계급 정체성을 보존하고, 그것의 구조가 변하는 동안 똑같이 머문다, 오직 그것의 조직이 그 구조적 변화를 거쳐서 보존되는 한에서만. 체계의 조직의 보존은 존재의 조건이다, 만약 그 조직이 변한다면, 그 체계가 분해되고 그리고 다른 무언가가 그것의 장소에 나타난다. 이것이 체계의 구조에 대한 경우는 아니다. 체계의 구조는 변화에 열려 있고, 두 가지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

 

1) structural changes through which the organization of the changing system is conserved; I shall call these changes of state

1) 변화하는 체계의 조직이 보존되면서 거치는 구조 변화; 나는 이것을 상태의 변화라고 불러야 한다.

 

2) structural changes through which the organization of the structurally changing system is lost, not conserved; I shall call these disintegrative changes

2)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체계의 조직이 분실되고, 보존되지 않으면서 거쳐야 하는 구조 변화; 나는 이것을 분해 변화라고 불러야 한다.

 

In changes of state the operational characteristics of the system change while it conserves it class identity. In disintegrative changes, as the original system disappears, something else arises in its place.

상태 변화에서 체계의 작업적 특징은 변한다 그것이 그것의 계급 정체성을 보존하는 동안. 분해 변화에서, 조직적 체계가 사라질 때, 다른 무언가가 그것의 장소에서 일어난다.

 

2.2 Congruent change

2.2. 적합한 변화

 

The structure of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changes both as a result of its internal structural dynamics and as a result of its interactions. The structural changes arising as part of the internal dynamics of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follow a course that arises determined at any moment by the structure of the system at that moment. The structural changes triggered in the interactions of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arise moment after moment determined by its structure also, but they follow a course that is generated moment after moment by the succession of encounters with the medium in which the system participates. The same applies to the medium as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that changes following a course that arises in the interplay of its own structural dynamics and the structural changes triggered in it by the systems that interact with it. As a consequence, in this process the structure of the living system and the structure of the medium change together congruently as a matter of course, and the general result is that the history of interactions between two or mo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becomes a history of spontaneous recursive coherent structural changes in which all the participant systems change together congruently until they separate or disintegrate. I have called this structural dynamics, including the structural coherences between the interacting systems that results from it, structural coupling.

체계를 결정한 구조의 구조가 그것의 내부적 구조적 역동성의 결과로서와 그것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둘 다 변한다.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의 내부적 역동성의 부분으로서 일어나는 구조 변화는 그 순간에 체계의 구조에 의해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과정을 따른다.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의 상호작용에서 촉발된 구조 변화는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순간 이후 순간에 일어나고 또한, 그러나 그들은 체계가 참가하는 매질과 우연히 만나는 것의 연속에 의해 순간 이후 순간에 낳아진 과정을 따른다. 그 자신의 구조적 역동성의 상호간작용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따르면서 변하는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로서 똑같은 것이 매질에 적용되고 구조 변화는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체계에 의해 그것을 촉발한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생명체의 구조와 매질의 구조는 진로의 문제로서 일치해서 함께 변하고, 그리고 일반적 결과는 둘 또는 더 많은 구조 결정된 체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역사가 모든 참가 체계들이 그들이 떼어 놓거나 분해할 때까지 적합하게 함께 변하는 자발적이고 귀납적이며 응집된 구조 변화의 역사라는 점이다. 나는 이것을 구조적 역동성이라고 불렀다, 그것, 구조 접속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호작용하는 체계들 사이의 구조 응집을 포함해서 말이다.

 

All living systems, as well as the non-living medium with which they interact recursively,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that change together congruently, form ing the biosphere as a network of multidimensional structural coupling. Indeed, living systems and their conditions of living, whichever these may be, exist in a network of continuous structural coupling, and change together congruently in a process that spontaneously lasts as long as the autopoietic organization of the living systems is conserved. In these circumstances, a living system lives only as long as its internally generated structural changes occur with conservation of autopoiesis, and its encounters in the medium do not trigger in it a disintegration. Disintegration does not happen as long as there is an operational dynamic congruence between the medium and the living system through which the living is conserved. I call the operational coherence between the living system and the medium in which it exists, adaptation. A living system lives only as long as its organization and its relation of adaptation to the medium are conserved. Or, in other words, the life history of a living system courses as a spontaneous flow of continuous structural changes that follow the path or course in which the living system conserves autopoiesis and adaptation in its domain of existence. I call this process ontogenic structural drift. We biologists do not easily see that adaptation is a constant and not a variable because we usually treat it as a variable in the evolutionary discourse.

그것들이 함께 귀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비(非) 생명적 매질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적합하게 함께 변하는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이다, 다차원적 구조 접속의 네트워크로서 생물권을 형성하면서 말이다. 진실로, 생명체와 생명이라는 그들의 조건은, 이것들이 무엇일지도 모른다더라도, 연속적 구조접속의 네트워크에 존재하고, 그리고 생명체의 자기생성적 조직이 보존되는 한 자발적으로 지속되는 과정에서 적합하게 함께 변한다. 이 상황에서, 생명체는 그것의 내부적으로 낳아진 구조 변화가 자기생성의 보존, 그리고 매질에서의 그것의 만남과 함께 일어나는 한에서만 그 안에서 분해를 촉발하지 않는다. 분해는 그것을 통하여 생명이 보존되는 매질과 생명체 사이에 작업적인 역동적 조화가 있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 안에서 그것이 존대할 수 있는 생명체와 매질 사이의 작업적 응집성을, 적응이라고 부른다. 생명체는 조직과 매질에 대한 적응이라는 그것의 관계가 보존되는 한에서만 산다. 다시 말해서, 또는 생명체의 삶의 역사는 그 안에서 생명체가 존재라는 그것의 영역에서 자기생성과 적응을 보존하는 경로와 진로를 따르는 연속적인 구조 변화의 자발적인 흐름으로서 일정 코스를 나아간다. 나는 이 과정을 개체적인 구조적 표류라고 부른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적응이 지속적이고 가변적이지 않다고 쉽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진화론에서 가변적인 것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The most fundamental result of the dynamics of structural coupling is that a living system is never out of place while living. I call the place that a living system occupies in the realization of its living its niche. As a living system lives in the conservation of adaptation in its niche, it will always appear knowing how to live until it dies: living systems are never out of place, or more or less adapted, while living. As a living system it lives in its niche in the spontaneous conservation of adaptation and autopoiesis, the niche is also its cognitive domain.

구조 접속이라는 역동성의 가장 기초적인 결과는 생명체가 사는 동안 제 장소에 놓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생명체가 그것의 생명의 실현에서 일어나는 장소를 그것의 생태적 지위라고 부른다. 생명체가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의 적응의 보존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이 죽을 때까지 사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 늘 보일 것이다 : 생명체는 절대로 제 장소에 놓이지 않을 수 없거나, 또는 다소 적응되지 않을 수 없다, 사는 동안 말이다. 생명체로서 그것은 적응과 자기생성의 자발적인 보존에서의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 산다, 생태적 지위는 또한 그것의 인지적 영역이다.

 

Precisely because an organism, as a system, exists as an architectural dynamics in the present that it is realized moment after moment according to the local structural coherences of its components, that there is no general organizational principle or force guiding the operation of its components. Further, the organism is not a whole by itself, rather it results as a whole in the relational space in which it is conserved as an autopoietic system through its interactions in its niche. And it is precisely because living systems exist in this way, that the wholeness of a particular organism is defined through the conservation of its particular manner of being as a result of its operation in structural coupling in its niche. What constitutes the identity of a living system as a particular organism is the manner of living conserved in it through structural coupling.

틀림없이 왜냐하면 유기체는, 체계로서, 그것이 그것의 성분의 지역적 구조 응집에 따라 순간 이후 순간 실현되는, 그것의 성분의 작업을 안내하는 일반적 조직 원리 또는 힘이 전혀 없는 현재에서 건축적 역동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기체는 그 혼자서 전체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그 안에서 그것이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 그것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보존되는 관계적 공간에서 전체로서 결과한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왜냐하면 생명체가 이런 방식 - 특정한 유기체의 전체성은 그것의 생태적 지위에서의 구조 접속에서 그것의 작업의 결과로서 있는 그것의 특정한 방법의 보존을 통하여 규정된다 -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유기체로서 생명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구조 접속을 통하여 그것에서 보존되는 생명의 방법이다.

 

2.3 Conservation of organization

2.3. 조직의 보존

 

A system arises in the moment in which the organization that defines it, as well as the relation of adaptation in the medium that makes possible the realization and the conservation of that organization, begin to be conserved. Systems arise, exist, and are conserved spontaneously in this manner. Moreover, the medium in which a system exists, also arises spontaneously with it as a new phenomenal domain defined by the system or systems that constitute it through their existing in it. In fact, all systems arise in this way from a background, that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herences of their existence, was unordered or chaotic. That is, a system arises and exists in the constitution of the dynamics of interactions that realizes and conserves both the system and its domain of existence through their recursive interactions. Nowadays there is much concern with the development of notions such as complexity and chaos, notions that are frequently used as explanatory principles. I think that they are evocative notions, and that the formalisms associated with them permit computations in domains that are operationally isomorphic with those formalisms. A mathematical formalism is a conceptual and operational system that reveals the relational coherences of the space that it defines. It is because of this that one can use mathematical formalisms to compute changes of states in systems whose operational coherences appear isomorphic to the relational coherences that they specify. But mathematical formalisms do not by themselves create an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a that an observer helps to explain through them. In this same context one can say that biological phenomena occur on the edge of chaos, because one can use some mathematical formalisms as evocative metaphors. However, to say that does not say what kind of systems living systems are, nor how they exist in the new domains that arise as their operation as totalities begins to be conserved in the flow of their structural coupling with the medium that arises with them. Living systems, as do systems in general, occur in their happening as actual discrete singular entities, not in the formalisms that an observer may use to think about them.

체계는 그 조직의 실현과 보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매개에서 적응의 실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조직이 보존되기 시작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체계는 이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존재하고, 그리고 보존된다. 게다가, 체계가 존재하는 매개는, 그것에서의 그들을 존재를 통하여 그것을 구성하는 체계 또는 체계들에 의해 규정된 새로운 현상적 영역으로서 그것과 함께 자발적으로 또한 일어난다. 사실상, 모든 체계는 배경으로부터 이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그들 존재의 응집이라는 견해로부터 보여진 것이다, 이 방식은 정연하지 않았고 혼돈스러웠다. 즉, 체계는 그들의 귀납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체계와 그것의 존재 영역 둘 다를 실현하고 보존하는 상호작용의 역동성을 구성하는 데에서 일어나고 존재한다. 오늘날 복잡성과 혼돈과 같은 관념, 설명적 원리로 자주 쓰이는 관념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다. 나는 그것들이 환기적인 관념이고, 그리고 그것들과 연관된 형식주의가 그 형식주의와 작업적으로 동형적인 영역에서 계산을 허가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그것이 규정하는 공간의 관계적 응집을 드러내는 개념적이고 작업적인 체계이다.

이것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의 작업적 응집이 그것들이 상술하는 관계적 응집에 동형적인 것으로 보이는 체계에서 상태의 변화를 계산하기 위해 수학적 형식주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그러나 수학적 형식주의는 관찰자가 그것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을 돕는 현상들의 이해를 혼자서 창조하지 않는다. 같은 문맥에서 누군가 생물학적 현상이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 일부 수학적 형식주의를 환기적인 은유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생명체가 어떤 종류의 체계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총체성이 그들과 함께 일어나는 매개와의 그들의 구조 접속의 흐름에서 보존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작업으로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역에서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또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체는, 체계가 일반적으로 할 때, 현실적인 이산적 특이한 존재자로서의 그들의 발생에서 일어난다, 관찰자가 그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데에 쓸지도 모르는 형식주의에서가 아니라 말이다.

 

2.4 Explanations

2.4. 설명

 

The development of the insight that led to my abstraction of the notion of autopoiesis from the biological molecular dynamics known to me during the years 1960 to 1966, force d me to generate a conceptual frame that would allow me to say what I wanted to say.

1960년부터 1969년까지 동안 나에게 알려진 생물학적인 분자적 역동성으로부터의 자기생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나의 추상을 이끈 시각의 발달은 나에게 내가 내가 말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낳도록 강제했다.

 

The notion of structural determinism is an abstraction that the observer makes from the coherences of his or her experiences. As such, the notion of structural determinism is at the same time the conceptual and the operational fundament of all explanations. The notion of structural determinism does not arise as an ontological assumption about a domain of transcendental realities, it arises as an abstraction that grasps the operational coherences of our living as human beings as we use the coherences of our experiences to explain our experiences. Accordingly, we live as many domains of structural determinism as we live domains of operational coherences as human beings. Further, we live as many domains of explanations as we live domains of experiential coherences that we use to explain our experiences.

구조 결정론이라는 관념은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경험의 응집으로부터 만들 수 있는 추상이다. 그 자체로, 구조 결정론이라는 관념은 동시에 모든 설명의 개념적이고 작업적 기초이다. 구조 결정론이라는 관념은 초월론적 실재의 영역에 관한 존재론적인 가정으로서 일어나지 않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경험의 응집을 사용할 때 인간 존재로 우리 생명의 작업적 응집을 파악하는 추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 존재로 작업적 응집의 영역에서 살 때 구조 결정론의 많은 영역으로 산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험적 응집의 영역에서 살 때 설명의 많은 영역처럼 산다.

 

An explanation entails two conditions that must be satisfied together:

설명은 함께 만족되어야만 하는 두 가지 조건을 일으킨다 :

 

1) the proposition of a structure determined process that if it were to take place in the structural domain in which it is proposed, the result would be that the observer would live the experience to be explained as a result of that process

1) 구조 결정되 과정이라는 주장은 만약 그것이 그 안에서 그것이 제안된 구조 영역에서 일어난다면, 결과가 관찰자가 그 과정의 결과로서 설명될 수 있는 경험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the acceptance by an observer of such a proposition as doing what it claims to do because it satisfies some other conditions that the observer puts through his or her listening.

2) 그것이 하기를 주장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러한 주장의 관찰자에 의한 수용은 왜냐하면 그것이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듣기를 성립하는 일부 다른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I call the first of these two conditions the formal condition, and the second, the informal condition. The formal condition has a fixed form, the form of a generative mechanism, and is what formally defines an explanation as such. The informal condition is fluid, it can be anything that the observer uses in his or her listening in an explicit or implicit manner, aware or not aware of his or her doing so, as a condition that has to be satisfied by the generative mechanism proposed for him or her to accept it as an explanation. The informal condition is arbitrary, yet it is the satisfaction of this in the listening of the observer that makes him or her accept some particular generative mechanism as an explanation. That the formal condition in an explanation entails the proposition of a generative mechanism, has two consequences:

나는 이 두 조건의 첫째를 정식 조건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둘째를, 비정식 조건이라고 부른다. 정식 조건은 고정된 형태, 산출적 매커형태를 가지고, 그리고 그 자체로 설명을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비정식 조건은 유동적이고, 그것은 관찰자가 분명하거나 또는 암시적인 방법에서의 그 또는 그녀의 듣기에서 사용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그 또는 그녀가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또는 모르거나 말이다, 그 또는 그녀가 그것을 설명으로서 받아들이도록 주장된 산출적 메커니즘에 의해 만족되어야 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비정식적 조건은 임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또는 그녀가 설명으로 일부 특정한 산출적 메커니즘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관찰자의 듣기에서의 이것의 만족이다. 설명에서 그 정식적 조건은 산출적 메커니즘의 주장을 일으킨다, 두 결과를 갖는다 :

 

a) the phenomenon explained and the mechanism that gives origin to it take place in different operational (phenomenal) domains that do not intersect

ㄱ) 설명된 현상과 그것에 기원을 주는 메커니즘은 상호작용하지 않는 다른 작업적 (현상적) 영역에서 일어난다.

 

b) as a direct consequence of the above, explanations do not constitute, and cannot constitute, phenomenal reductions.

ㄴ) 위의 직접적 결과로서, 설명은 현상적 환원을 구성하지 않고, 그리고 구성할 수 없다.

 

That the informal condition in an explanation should be arbitrary also has two main consequences:

설명에서 그 비정식적 조건은 임의적이어야 한다 또한 두 주요한 결과를 갖는다 :

 

a) there are as many different kinds of explanations as there are different informal conditions put by the observer in his or her listening

ㄱ) 그 또는 그녀의 듣기에서 관찰자에 의해 두어진 다른 비정식적 조건이 있는 만큼 많은 다른 종류의 설명이 있다.

 

b) if the informal condition that an observer puts in his or her listening is not made explicit, one does not know what the observer accepts when he or she accepts a particular generative mechanism as an explanation.

ㄴ) 만약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듣기에 둔 비정식적 조건이 분명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가 설명으로 특정한 산출적 메커니즘을 받아들일 때 받아들인 것을 모른다.

 

All that I have just said is valid for scientific explanations. Yet, what is peculiar of science as an explanatory domain is the particular informal condition that scientists put in their listening, and that I shall hence forth call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This criterion of validation can be made fully explicit as a set of four operations that an observer must realize in his or her living. What is remarkable is that these four operations are made with no assumption about the existence of an independent reality because what is explained is the experience of the observer with the experiential coherences of the observer. The four operations are:

내가 막 말했던 모든 것은 과학적 설명에 유효하다. 하지만, 설명적 영역으로서 과학의 독특한 것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듣기에 두는, 그리고 내가 그러므로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이라고 네 번째로 부르는 특정한 비정식적 조건이다. 유효성의 이 표준은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의 생명에서 실현해야 하는 네 가지 작업의 세트로서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네 가지 작업이 독립적 실재의 존재에 대하여 어떤 가정과 함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명된 것은 관찰자의 경험적 응집과 함께 관찰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작업은 :

 

1) The description of what an observer must do to experience the experience to be explained.

1) 관찰자가 설명되는 경험을 경험해야 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의 기술(記述).

 

2) The proposition of a generative mechanism such that if it is allowed to operate the result in the observer is the experience that he or she wants to explain.

2) 만약 작업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관찰자에서 결과가 그 또는 그녀가 설명하기를 원하는 결과라는 그러한 산출적 메커니즘의 주장.

 

3) The deduction from all the operational coherences implicit in point 2, of other possible experiences of the observer, and of what he or she should do to live them.

3) 지점 2에서 암시적인 모든 작업적 응집부터의 연역, 관찰자의 다른 가능한 경험들의,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그것들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의.

 

4) The realization of what has been deduced in point 3, and if it happens as deduced, point 2 becomes a scientific explanation.

4) 지점 3에서 연역되었던 것의 실현, 그리고 만약 그것인 연역된 대로 일어난다면 지점 2는 과학적 설명이 된다.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presented above is not an idiosyncratic reformulating of what scientist and philosophers usually call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The epistemological fundaments implicit in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and in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are quite different, even though they seem to lead to the same result, namely, a scientific explanation. These differences can be presented as follows: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does not entail the implicit or explicit assumption of the existence of a reality independent of what the observer does as it only involves the experiential coherences of the observer. Thus an explanation reveals and gives rise to an expansion of those experiential coherences.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entails the implicit or explicit assumption that there is a reality independent of the observer and his or her doings. The observer expects the reality to confront his or her explanations presented as expressions of the phenomena to be explained in more fundamental terms. I claim that we scientists say that we apply the experimental scientific method, but what we do is to follow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위에서 제시된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은 과학자와 철학자가 실험적인 과학적 방법이라고 보통 부르는 것의 색다른 재정식화가 아니다.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에서 그리고 실험적인 과학 방법에서 암시적인 인식론적 입지 조건은 완전히 다르다, 비록 그들이 똑같은 결과를, 즉, 과학적 설명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다름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은 관찰자가 그것이 관찰자의 실험적 응집을 포함하기만 하는 것처럼 하는 것과 독립적인 실재의 암시적이거나 또는 분명한 가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설명은 그 실험적 응집의 확장을 드러내고 일으킨다. 실험적인 과학적 방법은 관찰자와 그리고 그 또는 그녀의 함과 독립적인 실재가 있다는 암시적이고 분명한 가정을 일으킨다. 관찰자는 더 많은 기초적 용어로 설명된 현상의 표현으로 제시된 그 또는 그녀의 설명에 직면한 실재를 기대한다.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우리가 실험적인 과학적 방법을 적용한다고 말한다고 주장하나, 그러나 우리가 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은 따르는 것이다.

 

Accordingly, what I say is that scientific explanations do not explain an independent reality, but explain the experiences of the observer. Moreover, I say that the observer in fact explains his or her experiences, using his or her experiential coherences to fulfill, in his or her experiential domain,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Furthermore, I claim that the observer itself is explained in this way as it exists as a biological process (Maturana, in Maturana and Varela, 1980).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이 독립적 실재를 설명하지 않으나, 그러나 관찰자의 경험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관찰자가 사실상 그 또는 그녀의 경험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을, 그 또는 그녀의 실험적 영역에서, 이행한 그 또는 그녀의 경험적 응집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더욱이, 나는 관찰자가 그것이 생물학적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 방식으로 그 자체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마뚜라나, 마뚜라나와 바렐라, 1980)

 

2.5 Grounds for the claim

2.5. 주장의 근거

 

The main difficulty that one encounters in the attempt to answer any question, is to know when one has indeed answered it. The power of scientific explanations rests on the fact that it constitutes at the same time both the procedure that generates the explanation, and the criterion that tells when the explanation has been fulfilled. Some authors have criticized the notion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s unscientific on the ground that Varela and I have claimed that the condition of autopoiesis cannot be observed directly as a feature of the living system because it occurs in the flow of its changing present as a historical process. They say that a scientific theory must have empirical support. Yes, indeed! But, what constitutes an empirical support or demonstration in scientific explanations is the actual observation that the satisfaction of the criterion of validation of scientific explanations in the domain in which it is claimed has been fulfilled.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한 시도에서 만나는 주요한 어려움은, 누군가가 진실로 그것에 답했을 때 아는 것이다. 과학적 설명의 힘은 그것이 동시에 설명을 낳는 순서와, 그리고 설명이 이행되었을 때 말하는 표준 둘 다를 동시에 구성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일부 저자들은 바렐라(Varela)와 내가 자기생성의 조건이 생명체의 특징으로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적 과정으로 그것의 변하는 현재의 흐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는 근거로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관념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과학적 이론은 실험적 지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진실로! 그러나, 과학적 설명에서 실험적 지지를 또는 증명을 구성하는 것은 실제로 그 안에서 그것이 주장되는 과학적 설명의 유효성에 대한 표준의 만족이 이행되었다는 관찰이다.

 

In the claim that autopoiesis in the molecular space is the organization of living systems, two things are claimed:

분자 공간에서 자기생성이 생명체의 조직이라는 주장에서, 두 가지 것이 주장된다 :

 

1) that as a molecular autopoietic system arises in the molecular space, a living system arises in it, and;

1)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는 분자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명체는 거기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2) that as a molecular autopoietic system arises, all biological phenomena arise or may arise as a direct or indirect historical consequence of their operation as such.

2) 분자적인 자기생성 체게가 일어나는 것처럼, 모든 생물학적 현상은 그 자체로 그들의 작업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역사적 결과로서 일어나거나 또는 일어날 지도 모른다.

 

Accordingly, the scientific demonstration of th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in fact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would be either to show that all the molecular processes in them course constituting a closed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that realizes the autopoietic organization, or to show that all biological phenomena would necessarily occur as either a direct or an indirect consequence of the operation of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nd that they would not occur if molecular autopoiesis were interrupted. Francisco Varela and I show that the latter is the case in a book that we called "De Máquinas y Seres Vivos" and that we first published in 1973 in Spanish, and then in English as part of a book published in 1980 with the title, "Autopoiesis and cognition". Thus, w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nd that such a claim is a scientific claim.

따라서, 생명체가 사실상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주장의 과학적 증명은 그것들에서 모든 분자적 과정이 자기생성적 조직을 실현하는 분자적 생산의 폐쇄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일정 코스를 잡아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는 모든 생물학적 현상이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결과로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은 만약 분자적 자기생성이 가고막힌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와 나는 후자가 우리가 “De Máquinas y Seres Vivos”라고 불렀고 그리고 스페인어로 1973년에 첫 번째로 출판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영어로 “자기생성과 인지(Autopoiesis and cognition)”, 제목으로 1980년에 출판한 책의 부분인 책에서 그 경우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과학적 주장이라고 주장한다.

 

2.6 Implications of the claim

2.6. 주장의 암시

 

What we scientists distinguish as phenomena of the natural world, occur spontaneously. As such the natural world is in its spontaneous presence the proof of its own existence. That is, natural phenomena occur when they occur, and we human beings as observers distinguish them as features of our experiences. An observer attempts to explain only those of his or her experiences (phenomena) which do not seem obvious to him or her. And in order to do so, he or she resorts, as I have said above, to the coherences of his or her experiences and uses them to propose a generative mechanism under the operation of which that which he or she wants to explain will appear or result spontaneously. In these circumstances, the theory of autopoiesis says that whenever the adequate dynamic structural conditions occur in the molecular domain for molecular autopoietic entities to arise spontaneously, a living system will appear. If in addition the conditions for its systemic reproduction occur, the phenomena that result from the conservation of molecular autopoiesis in the constitution of lineages of living systems will also happen spontaneously.

우리 과학자들이 자연 세계의 현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자체로 자연 세계는 그것의 자발적 현재에서 그 자신 존재의 증거이다. 즉, 자연 현상은 그들이 일어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인간 존재는 관찰자로서 우리 경험의 특징으로 그것들을 구별한다. 관찰자는 그 또는 그녀에게 명백해 보이지 않는 그 또는 그녀의 경험 (현상)의 그것만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 또는 그녀는 의지한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또는 그녀의 경험의 응집에 그리고 그것들을 그 또는 그녀가 설명하기를 원하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보이거나 또는 결과하는 작업 하에서의 산출적인 메커니즘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상황에서, 자기생성의 이론은 적당한 역동적인 구조적 조건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존재자에 대한 영역에서 일어날 때에는 언제든지, 생명체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만약 게다가 조건이 그것의 체계적 재생산에 대하여 일어난다면, 생명체의 계통의 구성에서의 분자적 자기생성의 보존으로부터 결과하는 현상이 자발적으로 또한 일어날 것이다.

 

In these circumstances, what is the proof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I claim that the proof is the actual closed dynamics of the network of molecular productions and transformations that becomes apparent when one observes the cellular metabolic processes as a systemic whole, open to the flow of molecules through it. Many people who consider that explanations have to be reductionist propositions, find the claim that explanations in general, and scientific explanations in particular, are not reductions to simpler terms epistemologically objectionable. But explanations are constitutively not reductionist propositions, quite on the contrary, they are, as I have indicated above, propositions of generative processes such that if they take place they give rise as a result to the experience that is being explained. Further, explanation and phenomenon take place in different non-intersecting domains (Maturana 1990). But there are still other difficulties for the full understanding of all the implications of the claims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and that they can be seen to be so when one observes the cellular metabolism as a systemic whole. These difficulties have to do with two other claims that I have made, namely: that a living system does not have inputs or outputs, and that the observer cannot see the organization of the system directly because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is the configuration of relations that makes and defines a system as a singular totality through its conservation through the flow of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system.

이 상황에서,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증거가 누군가 체계 전체로서 세포 물질대사 과정을 관찰할 때 명백해지고, 그것을 통하여 분자의 흐름에 열리는 분자적 생산과 변형의 네트워크가 갖는 실제적인 폐쇄적 역동성이라고 주장한다. 그 설명이 환원주의적 주장임에 틀림없다고 고려한 많은 사람들이, 설명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과학적 설명이 특정하게, 인식론적으로 반대할만한 더 단순한 용어로의 환원이 아니라는 주장을 찾아낸다. 그러나 설명은 본질적으로 환원주의적 주장이 아니고, 아주 이에 반하여, 그것들은, 내가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만약 그것들이 일어난다면 그것들이 설명되고 있는 중인 경험에 대한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산출적 과정의 주장이다. 더욱이, 설명과 현상은 다른 비(非) 교차적 영역에서 일어난다(마뚜라나 1990). 그러나 생명체가 분자적인 자기생성적 체계이고, 그리고 그것들이 누군가가 체계 전체로서 세포 물질대사를 관찰할 때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는 주장의 모든 암시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다른 어려움들이 여전히 있다. 이 어려움들은 내가 했던 두 가지 다른 주장과 관련이 있다, 즉 : 생명체가 투입 또는 산출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자가 체계의 조직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체계의 조직이 체계의 구조적 역동성 흐름을 통한 그것의 보존을 통하여 특이한 총체성으로 체계를 만들고 규정짓는 관계의 배치이기 때문이라는 것.

 

Let us consider first the claim about the absence of inputs and outputs. As living systems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all that occurs in them or to them, happens determined in their structure. The same happens to the medium that contains them to the extent that the medium is also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Accordingly, an external agent acting upon a living system does not specify what happens in it as a result of its action. Such external agent can only trigger in the living system a structural change determined in it. An external agent, therefore, does not and cannot be claimed to constitute an input for the living system because it "tells" nothing to the living system about itself or about the medium from which it comes or about to itself. The same happens as the living system impinges upon the medium; the living system can only trigger in the medium a structural change determined in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medium, and cannot be properly claimed to be an output of the organism because it "tells" nothing about itself to the medium. It is in this sense that I claim that a living system does not have inputs or outputs, and that its relation with the medium is that of structural coupling as long as it lives in interactions with the medium in a structural dynamics in which both living system and medium undergo congruent structural changes until the living system dies (Maturana 1998). If one does not see how it is that living systems do not have inputs and outputs, it is not possible to understand cognition as a natural phenomenon, and one does not see that that which we call cognition is the effective operation of a living system in a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Moreover, if one does not understand that living systems do not have inputs or outputs, one cannot understand how the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of a living system, as the domain in which it realizes its living (autopoiesis), is indeed its domain of cognition (Maturana 1980, and Maturana and Varela 1988).

투입과 산출의 부재에 관한 첫 번째 주장을 숙고해보자. 생명체가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이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또는 그것들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것들의 구조에서 결정된 채 일어난다. 같은 것이 매질이 또한 구조 결정된 체계인 범위까지 그것들을 내포하는 매질에 일어난다. 따라서, 생명체에 근거해서 행하는 외부적 대행자는 그것 안에서 그것의 행위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을 상술하지 않는다. 그러한 외부적 대행자는 생명체에서 그 안에서 결정된 구조 변화를 단지 촉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부적 대행자는 생명체를 위한 투입을 구성하도록 요구되지 않고 그리고 요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체에게 그것으로부터 그것이 나오거나 그 자신으로 방향을 돌리는 그 자신에 관하여 또는 매질에 관하여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생명체가 매질을 침범할 때 일어난다; 생명체는 단지 매질에서 매질의 구조적 역동성에서 결정된 구조 변화를 단지 촉발할 수 있고, 그리고 유기체의 산출이도록 적당하게 요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신에 관하여 매질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생명체는 투입 또는 산출을 가지 않고, 그리고 매질과의 그것의 관계가 그것이 그 안에서 생명체과 매질 둘 다 생명체가 죽을 때까지 적합한 구조적 변화를 겪는 구조적 역동성에서 매질과 함께 상호작용에서 사는 한 구조 접속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이런 의미이다. 만약 누군가 생명체가 투입과 산출을 가지지 않는 방식을 보지 않는다면, 자연적 현상으로 인지를 이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가 인지라고 부르는 것이 구조 접속의 영역에서 생명체의 효율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보지 않는다. 게다가, 만약 누군가 생명체가 투입과 산출을 가지지 않는가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생명체의 구조 접속의 영역이, 그 안에서 그것이 그것의 생명 (자기생성) 을 실현하는 영역으로, 진실로 인지에 대한 그것의 영역인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마뚜라나 1980, 그리고 마뚜라나와 바렐라 1988).

 

The second claim, namely, that an observer cannot see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directly, is related to the first and to the fact that an observer cannot directly see the components of a system because these arise as such through their participation in the relations of composition of the system. Any distinction that an observer makes, is made by him or her in his or her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as a human being. This is why an observer cannot claim that he or she sees something as if it existed in itself, independently of his or her doings in distinguishing it, and must in fact use what he or she does in the doing of the distinction to describe what he or she has distinguished and how it operates. Of course all biologists know this as they know that they must use their interactions with the entity that they have distinguished to characterize it. That the observer cannot directly see the organization of a system does not invalidate the notion of organization or the fact that the organization must be inferred from the history of interactions of the system and from its structural dynamics, because it is the configuration of relations between components conserved through these structural dynamics that constitute its organization as a system.

두 번째 주장, 즉 관찰자가 직접적으로 체계의 조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첫 번째 것과 그리고 관찰자가 체계의 성분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과 관계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체계의 합성이라는 관계에의 그들의 참가를 통하여 그 자체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만드는 어떤 구별이라도, 인간 존재로 구조 접속의 그 또는 그녀의 영역에서 그 또는 그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이 관찰자가 그 또는 그녀가 마치 그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을 구별하는 데에서 그 또는 그녀의 함과 독립적으로 무언가를 보는,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그 또는 그녀가 구별한 것과 그리고 그것이 작업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구별의 함에서 하는 것을 사실상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모든 생물학자들은 그들이 그것의 특성을 기술하기 위해 구별했던 존재자와 그들이 그들의 상호작용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들이 아는 것처럼 이것을 안다. 그 관찰자는 생명체가 조직의 관념 또는 조직이 체계의 상호작용의 역사와 그리고 그것의 구조적 역동으로부터 추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효로 하지 않는다고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체계로서 그것의 조직을 구성하는 이 구조적 역동을 통하여 보존된 성분 사이의 관계 배치이기 때문이다.

 

Accordingly, then, only the results of the operation of an autopoietic system as such can tell an observer that it is an autopoietic system. Thus also, the participation of an element in the relations of composition that constitute a system is what tells the observer whether the element is or is not a component of that system. This is why not just anything that an observer distinguishes or sees as a "part" of a system, that he or she thinks is an autopoietic system, is a component of that system as an autopoietic system. As I said above, something is a component of a system only if it participates in its composition.

따라서, 그때, 오직 자기생성적 체계의 작업 결과만이 관찰자에게 그것이 자기생성적 체계라고 그 자체로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또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합성의 관계에서의 요소는 관찰자에게 요소가 그 체계의 성분인지 또는 아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관찰자가 체계의 “부분”으로 구별하거나 또는 보는,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는 단지 어떤 것이 자기생성적 체계가 아니고, 자기생성적 체계로서 그 체계의 성분이 자기생성적 체계인 이유이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대로, 무언가는 그것이 그것의 합성에 참가하기만 한다면 체계의 성분이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대로, 무언가는 그것이 그것의 합성에 참가하기만 한다면 체계의 성분이다.

 

No doubt the whole situation is circular in the sense that a system defines itself, and the observer can only know it through its operation as it defines itself.

의심할 바 없이 전체 상황은 체계가 그 자신을 규정짓는다는 이 의미에서 순환적이고, 그리고 관찰자는 그것이 그 자신을 규정짓는 대로 그것의 작업을 통하여 그것을 단지 알 수 있다.

 

3. Cognition

3. 인지

 

3.1 What is “to know”?

3.1. “아는 것”은 무엇인가?

 

The understanding of structural determinism brought with it for me the question of cognition as I asked myself: "If structural determinism is the case, what, then, is to know? If living systems are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and if all that occurs to them and in them arises in them at every instant determined by their structure at that instant, and if all that the external agents that impinge on them can do is to trigger in them structural changes determined in them by their structure at the moment of their interactions, what is to know? That which we human beings call cognition is the capacity that a living system exhibits of operating in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with the medium in which it exists. It does not matter if the living system observed is an insect or a human being. We may ask ourselves whether the knowledge that the living system exhibits is learned or instinctive, but our assessment is the same: namely, if we see a living system behaving according to what we consider is adequate behavior in the circumstances in which we observe it, we claim that it knows. What we see in such circumstances, is: a) that the living system under our attention shows or exhibits a structural dynamics that flows in congruence with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medium in which we see it, and b) that it is through that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that the living system conserves its living. We may ask how did the living system arrived at having the dynamic structure that allows it to operate in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in the medium or circumstances in which it happens to live. If w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living system attained that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with the medium or circumstances in which it lives as a result of its development as the kind of living system that it is, and independently of its individual life history, we claim that the knowledge exhibited by it is instinctive. Yet, if on the contrary, after our research w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dynamic structure through which the living system operates in dynamic structural congruence with the medium has arisen in the course of its individual history as a result of its interactions in the medium, we claim that the knowledge that such operational congruence shows, has been learned.

Instinctive and learned knowledge thus differ only in the historical circumstances of their origin. The origin of instinctive knowledge is phylogenic, and the origin of learned knowledge is ontogenic. Therefore, I claim that the process which gives rise to the operational congruence between an organism and its niche, the process that we distinguish in daily life either as learned or as instinctive knowing, is structural coupling.

구조적인 결정의 이해는 그것과 함께 나에게 내가 나 자신에게 물은 것과 같은 인지의 문제를 가져왔다. 만약 구조적인 결정주의가 실정이라면, 무엇이, 그러면 아는 것인가? 만약 생명체가 구조 결정되는 체계라면,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순간에 그들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모든 순간에 그들 안에서 일어난다면, 그리고 만약 그들과 충돌하는 외부의 대행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들 안에서 그들의 상호작업의 순간에 그들의 구조에 의해 그들 안에서 결정된 구조적인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다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인지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체가 나타내는, 그것이 존재하는 매질과의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에서의 작업의 능력이다. 관찰되는 생명체가 곤충인지 또는 인간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생명체가 나타내는 지식이 학습에 의해 터득한 것인지 또는 본능적인 것인지를 물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우리의 판단은 마찬가지다. 즉, 만약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숙고하기에 어울리는 행위인 것에 응해서 행위하는 생명체를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 보는 것은, ㄱ) 우리의 주의 하의 생명체가 보이거나 또는 나타내는 구조적인 역동성, 우리가 그것을 보는 매질의 구조적인 역동성과의 조화로 흘러드는 구조적인 역동성, 그리고 ㄴ) 생명체가 그것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를 꿰뚫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명체가 그것이 그것이 마침 사는 상황 또는 매질에서의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에서 작업하도록 허락하는 역동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에 도달했는지를 물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생명체가 그것이 인 생명체의 일종으로서의 그리고 독립하여 그것의 개체적인 삶 역사의 일종으로서의 그것의 발달의 결과로서 사는 상황 또는 매질과의 그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를 달성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나타내진 지식이 본능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약 이에 반하여, 우리의 연구 후에 우리가 매질과의 역동적인 구조적 조화에서 생명체가 작업할 때 거치게 되는 역동적인 구조가 매질에서 그것의 상호작업의 결과로서 그것의 개체적인 역사의 경과에서 일어났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작업적인 조화가 보이는 지식이, 학습을 통해 터득됐다고 주장한다. 본능적인 그리고 학습에 의해 터득된 지식은 따라서 그들의 기원의 역사적인 상황에서만 오직 다르다. 본능적인 지식의 기원은 계통적이고, 그리고 학습에 의해 터득된 지식의 기원은 개체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기체와 그것의 생태적 지위 사이에서 작업적인 조화를 일으키는 진행, 우리가 학습에 의해 터득되거나 또는 본능적인 앎과 같은 매일의 삶에서 구분하는 진행이 구조적인 접속이라고 주장한다.

 

In other words, any attempt to explain the adequate behavior, that in daily life we call cognition, as if it were the result of some computation made by the nervous system on the data or information that the sensors obtain of an external objective world, is doomed to fail. Because whatever occurs to or in a living system occurs in it as a structure determined system determined by its structural dynamics, hence there is no information, and there is no computation. Knowledge is an assessment made by an observer who sees the organism shifting what it does as it changes in coherence with its medium. We’re usually not aware of this situation, even though in daily life we ascribe knowledge to any living being, human or not, when we see it operating in a manner that we consider adequate for the domain in which we behold it. Indeed, that is the kind of assessment that you, reader, are doing now as you read what I have written, and you will either accept or reject what I have said as revealing knowledge according to whether what I say agrees or does not agree with what you consider adequate behavior in the domain in which you are attending to what you are reading of what I have written.

바꿔 말하면,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인지라고 부르는 어울리는 행위를, 마치 감각기가 외부의 객체 세계의 정보와 자료에 관하여 획득한 것에 관하여 신경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계산의 결과인 것처럼 설명하는 어떤 시도도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거나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그것의 구조적인 역동성에 의해서 결정된 체계에 의해 결정된 구조로서 그것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므로 정보도 없고, 그리고 계산도 없다. 지식은 유기체가 그것이 하는 것을 표류하는 것을 그것이 그것의 매질과의 응집 속에서 변하는 것으로 보는 관찰자 의해 만들어진 판단이다. 우리는 보통 깨닫고 있지 않다, 비록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지식을 어떤 살아있는 존재, 인간 또는 아닌 존재 또는 인간에 기인하는 것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는 영역에 어울린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 안에서 작업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우리가 볼 때 말이다. 진실로, 그것은 여러분, 독자들이, 여러분이 내가 쓴 것을 읽을 때 지금 하고 있는 중인 판단이고, 그리고 여러분은 내가 쓰고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영역에서 어울리는 행위라고 여러분이 숙고하는 것과 내가 말한 것이 일치하는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절할 것이다.

 

3.2 Language

3.2. 언어

 

We human beings exist as observers in language as we operate in the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to which we belong. That is, we human beings exist in structural coupling with all the other living and not living entities that compose the biosphere, and we operate in language as our manner of being in the present in the flow of our interactions in structural coupling as integral components of the biosphere. Our living in language does not violate structural determinism in general, nor our condition as structure determined systems.

우리 인간 존재는 우리가 속하는 구조 접속의 영역 안에서 우리가 작업하는 만큼 언어 안에서 관찰자로 존재한다. 즉, 우리 인간 존재는 생물권을 구성하는 살아 있지 않은 존재자와 모든 다른 살아 있는 것과 함께 구조 접속 안에서 존재하고, 그리고 우리는 생물권의 없어서는 안 될 성분으로서 구조적인 접속에서의 우리의 상호작업의 흐름의 현재에 있는 우리의 방법으로서 언어 안에서 작업한다. 언어 안에서의 우리의 생명은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결정론을 어기지 않는다, 또한 구조 결정된 체계로서의 우리의 조건도 어기지 않는다.

 

Language is a manner of living together in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that arises in living together (Maturana 1988). We exist and operate as human beings as we operate in language; languaging is our manner of living as human beings. Language occurs in the flow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not in any particular gesture, sound, or attitude, taken outside of that flow. It is like the movement seen in a film that exists as such only as long as the film runs. We human beings language while operating in the domain of structural coupling in which we coexist as languaging beings with other languaging beings.

언어는 생명 안에서 함께 일어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 함께 사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언어로 작업하는 만큼 인간 존재로서 작업하고 그리고 존재한다; 언어는 인간 존재로서 사는 우리의 방법이다. 언어는 흐름의 외부에서 가져와진, 어떤 특정한 몸짓, 소리, 또는 태도 안에서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흐름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필름이 상영 중인 한 오직 그만큼 존재하는 필름 안에서 보여지는 운동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다른 언어화의 존재와 함께 하는 언어화의 존재로서 같은 때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접속의 영역 안에서 작업하는 동안 우리 인간 존재는 언어화한다.

 

As we language, objects arise as aspects of our languaging with others, they do not exist by themselves. That is, objects arise in language as operations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that stand as coordinations of doings about which we as languaging beings recursively coordinate our behavior. I shall call the domain of objects that arises in our co-participation in the coordination of coordinations of behaviour a domain of shared objects. It follows that we humans can generate and, therefore, exist as languaging beings in as many different domains of objects as domains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we can generate in our living in structural coupling in the biosphere, and through this, in the cosmos. Accordingly, we human beings can in fact live with each other in as many domains of shared objects, or domains of interobjectivity, as there are dimensions of structural coupling in which we can live in coordinate our coordinations of behavior. Living in languaging is living a domain of shared objects in interobjectivity.

우리가 언어화할 때, 대상이 다른 것들과 함께 우리의 언어화의 양상으로서 일어나고, 그들은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언어화의 존재가 귀납적으로 우리의 행위를 조정하는 만큼 어떤 우리에 대한 행실의 조정으로서 서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작업으로서 언어 안에서 객체가 일어난다. 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의 우리의 공동-참여 안에서 일어난 객체의 영역을 공유된 객체의 영역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가 우리가 우주 안에서, 이것을 거쳐, 생물권 안에서 구조적인 접속 안에서 우리의 생명 안에서 우리 인간이 낳을 수 있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영역만큼 많이 다른 대상의 영역에서 언어화의 존재로서 존재하고 그리고, 그러므로,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따른다. 따라서, 우리가 행위의 우리의 조정을 조정하면서 살수 있는 구조적인 접속의 차원이 있는 만큼, 상호객관성의 영역 또는, 공유된 객체들의 많은 영역 안에서 우리 인간 존재는 서로와 함께 살 수가 사실상 있다. 언어화 안에서 사는 것은 상호객관성에서 공유된 객체들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다.

 

3.3 Self-consciousness

3.3. 자기 의식

 

When an observer sees a flow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 through the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doings on the body of languaging beings, then he or she can claim that the beings are beginning to operate in a domain of awareness of parts of their own body. The body, and self, arise in language in the same manner as any other object arises in language. The operation of self-consciousness is the reflexive distinction of a self in language that takes place as an operation that constitutes our body and our being as an object in interobjectivity. Dr. Gerda Verden-Zöller has shown that this is the way self consciousness arises in human babies when the languaging mother plays with the baby, for example, saying “nose” as she touches the baby's nose (see Verden-Zöller in Maturana & Verden-Zöller, 1993). Thus self-consciousness arises as an operation of coordination of coordination of behavior that takes place in the mother/child play which constitutes self-awareness of the nose as the nose arises as an object in interobjectivity in the recursive coordinations of behavior of the baby with the mother. This is not seen easily when one thinks that language takes place as a symbolic operation that refers to entities that can be distinguished because of their independent existence. If to be conscious means to be aware of something as it exists independently of the being that is aware of it, how could a human being become aware of him or herself, if he or she is not an entity that exists independently of him or herself? It is because of this difficulty that we speak as we refer to ourselves as if we had a dual existence (e.g. when we say “I am speaking about myself”, or “I, in my true self”) The problem generated in this duality dissolves as we understand that language consists in living together in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that arise in the flow of living together in recursive interactions.

관찰자가 언어화적인 존재의 몸에 관한 행위의 조정의 조정을 거쳐서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흐름을 볼 때, 그러면 그 또는 그녀는 존재가 그들 자신의 신체의 일부의 각성의 영역 안에서 작업하기 시작하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몸, 그리고 자기는, 어떤 다른 객체가 언어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언어 안에서 일어난다. 자기 의식의 작업은 상호객체성 안에서 객체로서 우리의 몸과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작업으로서 일어나는 언어 안에서 자기의 귀납적인 구분이다. 게르다 베르덴-졸러 박사는 이것이 언어화적인 어머니가 아기와 놀 때, 예를 들어, 그녀가 아기의 코를 만지며 “코”라고 말할 때 자기 의식이 인간 아기 안에서 일어나는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줬다(베르덴-졸러, 마뚜라나와 바렐라, 1993을 보라). 따라서 자기 의식은 코가 어미니와 함께 한 아기의 행위의 귀납적인 조정 안에서의 상호객체성 안에서의 객체로서 일어날 때 코의 자기 의식을 구성하는 어머니/아이 놀이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작업으로서 일어난다. 이것은 한 사람이 언어가 그들의 독립적인 존재 때문에 구분될 수 있는 존재자에 대해 언급하는 상직적인 작업으로서 일어난다고 생각할 때 쉽게 보여지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깨닫는 존재와는 독립적으로 그것이 존재할 때 무언가를 깨닫는 의식적인 수단이 있다면, 어떻게 인간 존재는 그 또는 그녀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만약 그 또는 그녀가 그 또는 그녀 자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치 우리가 이중의 존재를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 어려움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중이다”, 또는 “나, 나의 진짜 자기 안에서”라고 말할 때). 이 이중성 안에서 낳아진 문제는 우리가 언어가 귀납적인 상호작업들 안에서 함께 사는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 함께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풀린다.

 

No doubt we feel in an act of self-distinction the same way that we feel when we distinguish something that for an external observer has the quality of being an entity independent from the distinguisher. We feel as we feel with any object in the domain of shared objects that we live with others. And this is so precisely because the self arises in interobjectivity. as Dr. Verden-Zöller shows that all objects arise in the mother/child relations of play. Feelings take place as an aspect of our self-distinction in language as in the coordination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the distinction of relations among the body distinctions expands the domain of interobjectivity into a meta-domain of self-distinctions. Due to their manner of arising, feelings are secondary to language. In the origin of humanness the self must have arisen in the same manner that it arises in a modern human babies, namely in the flow of the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behaviors that bring about the body and its parts as shared objects in interobjectivity through the mother/child play. Accordingly, I say that self-consciousness is a simple recursive operation in languaging that constitutes an open ended possibility for the continuous arising of new worlds that we may live as we recursively live as self-conscious languaging beings.

의심할 바 없이 외부의 관찰자에게 구분자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자로 있는 질을 가지는 어떤 것을 우리가 구분할 때 우리가 느끼는 똑같은 방식을 자기-구분의 행동 안에서 우리는 똑같이 느낀다. 우리가 다른 것들과 함께 사는 공유된 객체들의 영역 안에서 우리가 어떤 객체들과 함께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정밀하게 그렇다 왜냐하면 자아는 상호객관성 안에서 일어난다. 베르덴-졸러 박사가 무든 대상들이 연극의 어머니/자식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처럼. 행위의 조정의 조정 안에서 몸 구분 사이에서의 관계가 상호객체성의 영역을 자기-구분의 메타-영역 안으로 넓힐 때, 감정은 언어 안에서 우리의 자기 의식의 양상으로서 일어난다. 일어나는 그것들의 방법에 기인하는, 감정은 언어에 2차적이다. 인간적인임의 기원에서 자기는 그것이 현대의 인간 아기들 안에서, 즉 공유된 객체가 어머니/아이 놀이를 거쳐서 상호객체성 안에서 고유된 객체로서 몸과 그것의 부분을 일으킨 행위의 조정의 조정의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따라서, 나는 자기 의식이 우리가 자기 의식적인 언어화적 존재로서 귀납적으로 살 때 우리가 살 수도 있는 새로운 세계의 연속적인 일어남에 대한 열리게 끝내진 가능성을 구성하는 언어화 안에서의 단순한 귀납적 작업이라고 말한다.

 

Indeed, we can generate many new worlds but we do not have to do so. There is always another realm that may arise; but we do not have to do everything that is possible, not engage in all the reflections, or develop all the concepts, or build all the technologies. We are living in a culture that acts as if we should do everything that we imagine as possible. We do not see that in doing so we are making a choice, and that we should be responsible for it. (the sections on Language and Consciousness will be expanded in the final version of this paper)

진실로, 우리는 많은 새로운 세계를 낳을 수 있으나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날 수도 있는 또 다른 범위가 언제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나, 모든 반사에 종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나, 또는 모든 개념을 개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거나, 또는 보든 기술들을 지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문화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하는 속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는다. 언어와 그리고 의식에 관한 부분은 이 논문의 최종 버전에서 확장될 것이다.

 

4. Epistemology and conclusions

4. 인식론 그리고 결론

 

In my view the central theme of cognition is the explanation of experience, not reality because reality is an explanatory notion invented to explain experience. Moreover, we explain experience with the coherences of experience as we exist in languaging as a domain of coordinations of coordinations of doings as we operate as observers. So, to say that something arises as the observer brings it about in his or her distinction in language by specifying its condition of constitution, is to say that something exists in the same domain of existence in which the observer operates as a living system. That is, the entities that an observer distinguishes have the concreteness of the operations with which the observer distinguishes them through his or her operation as a living human being. It is in this sense that living systems are living systems, and molecules are molecules -- as real or objective entities in their respective domains of existence. It is in this sense that we as observers can claim that molecules arise as the conditions of their constitution apply. What follows is said under this understanding. It seems to me that the main difficulty that biologists have in accepting that the notion of autopoiesis connotes the organization of the living, is our cultural refusal to accept that things, systems, relations, and entities in general, arise as existing in the instant in which the conditions of their constitution take place. We as observers can claim that a living system arises in the moment in which autopoiesis begins to take place and lasts as long as its autopoiesis is conserved. And although that is a cognitive claim, it is a claim that has operational validity as a living system exists in the operational domain (the molecular domain) in which that happens.

나의 견해로 인지의 중심적 테마는 사실이 아니라, 경험의 설명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초대된 설명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관찰자로서 작업하는 행실화의 대등의 대등 영역만큼 우리가 언어화 안에서 존재할 때의 경험의 응집성을 가지고 경험을 설명한다. 무언가가 관찰자가 생명체로서 작업하는 생물 존재의 같은 영역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관찰자로서 말하는 것은 그것의 구성 조건을 상술하는 것을 통해 언어 안에서 그의 또는 그녀의 구별을 야기하는 것이고. 즉, 관찰자가 구별하는 존재자는 관찰자가 그것들을 그의 또는 그녀의 작업을 거쳐 살아 있는 인간 존재와 구별하는 작업의 유형성을 갖는다. 그것들의 각각의 존재의 영역 안에서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존재자로서 생명체는 생명체이고, 그리고 분자들은 분자들이라는 이 뜻 안에서의 그것이다. 우리가 관찰자로서 분자들이 그것들의 구성 조건이 적용될 때 일어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이 뜻 안에서의 그것이다. 따라오는 것은 이 이해 하에서 말해진다. 나에게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생물학자들이 자기생성의 관념이 살아있는 것의 조직을 내포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 안에서 갖는 주된 어려움은, 그것들의 구성 조건이 일어나는 순간 안에서의 존재로서 것들, 체계들, 관계들, 그리고 존재자들이 일반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거부이다. 자기생성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순간에 생명체가 일어나고 그리고 자기생성이 보존되는 한 생명체가 지속된다고 우리는 관찰자로서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지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어나는 작업적인 영역(분자적 영역)에 생명체가 존재할 때 작업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주장이 그것이다.

 

In our culture we like to explain with causes and principles that are external to that which is explained. This is why to say that a living system exists by itself, and that to explain living systems consists in proposing the generative mechanism that gives rise to a living system as a consequence of its operation in a different domain than the domain of its components, appears epistemologically unacceptable. But such a statement is valid and sound epistemologically in the domain in which one is aware that explanations constitute the proposition of generative mechanisms. In these circumstances the claim that living systems are molecular autopoietic systems can only be dismissed by showing that there are biological phenomena that do not directly or indirectly entail molecular autopoiesis. This claim cannot be dismissed on epistemological grounds. Biologists have frequently ignored the notion of autopoiesis and the theory of cognition that it supports (Maturana 1970 and 1980), because it does not seem to be pragmatic enough. Philosophers have frequently objected to it because it relates abstractions and pragmatics (Scheper and Scheper 1998). I also think that sometimes scientists and philosophers do not see that explanations do not replace that which they explain. They forget or ignore that what explanations indeed do is to propose generative mechanisms such that if they were allowed to operate, they would generate as a consequence of their operation that which they intend to explain, and that to do so they relate abstractions and pragmatics.

우리의 문화 안에서 우리는 설명되는 그것에 외재적인 원인과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기를 좋아 한다. 이 때문에 생명체는 그것만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그것의 성분의 영역보다 다른 영역 안에서 그것의 작업의 결과로서 생명체를 일으키는 생식의 메커니즘을 제안하는 것에 생명체에 대한 설명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설명이 생식 메커니즘의 제안을 구성한다고 아는 영역 안에서 그러한 진술은 인식론적으로 건전하고 그리고 근거가 확실하다. 이 환경 안에서 생명체가 분자적이고 자기생성적인 체계라는 주장은 분자적인 자기생성을 직접적으로나 또는 간접적으로나 일으키지 않는 생물학적인 현상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에 의해 결말이 내려질 수 있다. 이 주장은 인식론적인 기초 위에서 결말이 내려질 수 없다. 자기생성의 관념과 그것이 지지하는 (마뚜라나 1970 그리고 1980) 인지의 이론을 생물학자들은 자주 무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분히 실용주의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자주 그것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과 어용론을 (세퍼와 세퍼 1998)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때때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설명이 그들이 설명하는 것을 대체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그들은 잊거나 또는 무시한다 진실로 설명하는 것은 생식의 메커니즘을 그 같이 제안하는 것이고 그들이 작업하도록 허락받았다면, 그들이 설명하기를 의도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이 추상과 그리고 어용론을 연결시키는 작업의 결과로서 낳을 터인 그러한 생식의 메커니즘을 제안하는 것이 설명이 진실로 하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잊거나 또는 무시한다.

 

Finally I think that an epistemological difficulty that is commonly present is that the mistake of using autopoiesis as an explanatory principle. To conclude, I wish to insist in that the epistemological shift in the notions of autopoiesis and the biology of cognition that I have developed lies in abandoning the question of reality while turning to explain the experience of the observer with the experience of the observer. This is a fundamental move away from a domain of transcendental ontologies to a domain of constitutive ontologies.

최종적으로 보통으로 있는 인식론적인 어려움이 자기생성을 설명적인 원리로서 사용하는 그 실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기 위해, 내가 개발한 인지의 생물학과 자기생성의 관념 안에서의 인식론적인 이동이 관찰자의 경험을 가지고 관찰자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에 의지하는 동안 실재의 문제를 버리는 것에 있는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이것은 초월론적인 존재론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구성적인 존재론의 영역으로의 기초적인 움직임이다.

 

References 참고문헌

 

Kant, I. 1952. The Critique of Judgment. In,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Vol. 42

Kauffman, S. 1995. At Home in the Universe. Oxford University Press

Maturana, H. R. 1970. Biology of cognition. BCL Report 9.0. Biological Computer Laboratory.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 University of Illinois

Maturana, H. R. 1980. Biology of Cognition, in Autopoiesis and Cognition, by Maturana and Varela, edited by D. Reidel

Maturana, H. R. 1988.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Irish J. of Psychology (issue on Constructivism) 9(1): 25-82

Maturana, H. R. 1990. Science and Daily Life: The Ontology of Scientific Explanations . In: Selforganization: portrait of a Scientific Revolution. W. Krohn, G. Kuppers. (eds.) Kluwer Academic Publishers, Dordrecht, Boston, London

Maturana, H. R., J. M. Mpodozis. 1992. Origen de las Especies por medio de la Deriva Natural. Publicación Ocacional N 46

Maturana, H. R., J. M. Mpodozis. 1999.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Drift. Revista Chilena de Historia Natural. In press

Maturana, H. R., F. G. Varela. 1972. De Máquinas y Seres Vivos Editorial Universitaria, Chile

Maturana, H. R., F.J. Varela. 1988. The Tree of Knowledge. Shambhala New Science Library, Boston and London

Maturana, H. R., G. Verden-Zöller. 1993. Liebe und Spiel, die Vergessene Grundladge des Menschlichkeit. Carl Auer Verlag, Hamburg

Scheper, W. J., G. C. Scheper 1996. Autopsy of Autopoiesis. Behavioral Science, vol. 41,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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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다이어-위데포드의 공통적인 것의 유통 2009

출처 : http://www.fims.uwo.ca/people/faculty/dyerwitheford/Commons2009.pdf

[Commons2009.pdf (83.96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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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_공통적인 것의 유통 2009.hwp (29.70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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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공통적인 것의 유통

Nick Dyer-Witheford

닉 다이어-위데포드

 

Talk for the “Future of the Commons” series, University of Minnesota, Oct. 2009.

2009년 10월, 미네소타 대학, “공통적인 것의 미래” 시리즈를 위한 대화.

 

1) This talk is about commons and the possibility of life in common.

1) 이 대화는 공유지와 공통적인 삶의 가능성에 관한 대화이다.

 

2) Talk of commons has been, well, common on the left in the last decade. Faced by the onrush of privatizing, deregulating and expropriating global capital, activists and theoreticians in an array of struggles have found in image of the common lands lost to primitive accumulation a point of intellectual and affective inspiration. From land wars in Mexico or India to ‘creative commons’ initiatives of digital culture to attempts to avert chaotic climate change, resistance to the second enclosures of neoliberalism speaks of itself as a defense of the commons.

2) 지난 10년간 좌파에서 공유지에 대한 대화는, 꽤, 공통적이었다. 사유화하는, 탈규제화하는, 그리고 몰수하는 전지구적 자본의 돌진에 직면해서, 투쟁의 대열의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은 원시 축적으로 분실된 공유 토지의 이미지에서 지적이고 정동적인 영감의 한 점을 찾아냈다. 멕시코 또는 인도에서의 토지 전쟁으로부터 혼돈적 기후 변화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디지털 문화의 창조적 공유지 이니셔티브까지, 신자유주의의 두 번째 인클러저에 대한 저항은 그 자신을 공유지의 방어라고 말한다.

 

3) This has been important because it provides a way of speaking about collective ownership without invoking a bad history—that is, without immediately conjuring up, and then explaining (away) ‘communism’ conventionally understood as command economy plus a repressive state.

3) 이것은 중요했는데 나쁜 역사를 불러 일으키지 않고 - 즉, 곧 마법으로 불러내지 않고, 그리고 그때 명령 경제 더하기 억압적인 국가로서 인습적으로 이해된 ‘공산주의’를 잘 설명해 (버리지) 않고 - 집합적인 소유권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At the same time, however, commons-politics has its problems. Since 9/11, war has chilled all talk of alternatives to capital. But, in addition, frequent invocation of the commons does not amount to a convincing articulation of such an alternative. It cover s a variety of proposals for collective management of various resources, some radical, some reformist, and some, even, reactionary. As George Caffentzis has pointed out, neoliberal capital, confronting the debacle of free market policies, is now turning to a ‘Plan B’, in which limited versions of commons, pollution trading schemes, community development and open-source and file sharing practices are introduced as subordinate aspects of a capitalist economy, where voluntary cooperation subsidizes: Web 0.2 is a paradigm case.

4) 하지만, 동시에 공유지 정치는 그것의 문제를 가진다. 9/11 이래, 전쟁은 자본에 대한 모든 대안 논의를 냉각시켰다. 게다가, 그러나 공유지에 대한 잦은 기원은 그러한 대안의 분명한 분절에 이르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자원의 집합적인 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의 제안, 약간의 급진주의자, 약간의 수정주의자, 그리고 약간의, 심지어, 반동주의자에 걸친다.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가 지적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은, 자유 시장 정책의 붕괴에 직면해서, 지금 플랜 비(Plan B)에 손을 대고 있다, 그 안에서 공유지의 제한된 버전, 오염물질 무역 계획, 공동체 발전과 오픈 소스(open-source)와 파일 공유 실천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하위 양상으로서 도입되었다, 그곳에서 자발적인 협력이 장려된다: 웹 0.2는 패러다임적 케이스이다.

 

5) This paper proposes that, to move beyond this impasse, we add to two concepts already in the theoretical tool box of the movement—the circulation of capital, and the circulation of struggle, a third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5) 이 논문은 이 막다름을 넘어서 움직이기 위해, 우리가 운동의 이론적 연장통 - 자본의 유통 - 에 이미 두 가지 개념을 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 그리고 투쟁의 유통, 세 번째 - 공통적인 것의 유통.

 

6) The intention is to think not just what we fight against, or that we are fighting, but what we are fight for--and fight for not just as isolated commons islands in a sea of commodification, but as a world beyond capital, as an emergent commonism.

6) 그 의도는 단지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을, 또는 우리가 싸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 그리고 단지 상품화의 바다에서 고립된 공유지 섬으로서가 아니라, 자본을 넘어서는 세계로서, 떠오르는 공산주의로서. 

 

7) So: Marx deemed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to be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7)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의 세포 형태를 상품, 사적인 소유자들 사이의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라고 생각했다.

 

8) His concept of the circuit of capital traces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which commands the acquisition of further resources to be transformed into more commodities. This cycle of capital is expressed in the formulae M ─ C –. . . P . . .C' ─ M'. Money (M) is used to purchase as commodities (C) labor, machinery and raw materials that are thrown into production (P) to create new commodities (C') that are sold for more money (M'), part of which is retained as profit, part of which is used to purchase more means of production to make more commodities; rinse and repeat.

8) 자본의 순환에 대한 그의 개념은 상품의 화폐로의 변신을 추적한다. 그것은 더 많은 상품으로 변형될 그 이상의 자원의 취득을 명령한다. 자본의 이 주기는 공식 M ─ C –. . . P . . .C' ─ M'으로 표현된다. 화폐(M)는 더 많은 화폐(M')로 팔리고, 더 많은 화폐의 일부는 이윤으로서 보유되고, 일부는 더 많은 상품을 만들 더 많은 생산 수단을 구입하는 데 쓰일 새로운 상품들(C')을 창조하는 생산(P)에 던져질 상품(C)으로서의 노동, 기계 그리고 원료 구입에 사용된다; 씻어내고 반복하고.

 

9) The circulation of capital becomes an auto-catalytic, self-generating, boot-strapping process, a “constantly revolving circle” in which every point is simultaneously one of departure and return.” This dynamic is the growth mechanism that converts the cell form of the commodity into what Marx termed more “complex and composite” forms, an entire capitalist metabolism. It is the path from capital’s molecular level to its molar manifestation.

자본의 유통은 그 안에서 모든 지점이 동시적으로 출발과 복귀의 지점이 되는 자동-촉매적, 자기-생산적, 부트-스트래핑(boot-strapping) 과정, “끊임없이 회전하는 궤도”가 된다. 이 역동성은 상품의 세포 형태가 맑스가 더 많은 “복합적이고 합성적인” 형태라고 말했던 것, 전체적인 자본주의적 물질대사로 전환하는 성장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자본의 분자 수준에서부터 그것의 몰적인 명시까지의 경로이다.

 

10) Within this circuit, Marx identified different kinds of capital—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So, for example, the transformation of commodities into money (C-M) is the role of mercantile capital; that of the production of commodities by means of commodities (P) is conducted by industrial capital, and the conversion of money capital into productive capital is the ostensible task of financial capital (M-C).

10) 이 순환의 내부에서, 맑스는 다른 종류의 자본 - 상인, 산업 그리고 금융. 예를 들어, 그래서 상품의 화폐로의(C-M) 변형은 상인 자본의 역할이다; 생산(P)의 수단에 의한 상품의 생산이라는 그것은 산업 자본에 의해 수행된다, 그리고 화폐 자본의 생산적인 자본으로의 전환은 금융 자본의 외면적 임무이다.

 

11) The elaborations of this model by other theorists have resulted in diagrams of great entanglement. But if we think of a rotating sphere not only accelerating in velocity as its speeds its circulatory processes but expanding in diameter as it fills more and more social and geographic space, we have the image of global capital.

11) 다른 이론가들에 의한 이 모델의 동화는 중대한 얽힘의 다이아그램으로 귀착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회전하는 영역을 그것이 그것이 순환적이 과정을 빠르게 할 때 속도에서의 가속화로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욱 더 사회적이고 지리적인 공간을 채울 때 직경에서의 확대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지구적 자본의 이미지를 가진다. 

 

12) It was the discovery of autonomist theory to show that the circulation of capital wa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Each moment in the circuit of capital is a potential moment of conflict. Thus the attempt to purchase the commodity labor (M-C) could be interrupted by struggles over dispossession of populations from the land necessary to create disposed proletarians; the moment of production (P) was the site of classic work place resistance; the conversion of C-M was liable to dangers from theft to public reappropriation.

12) 그것은 자본의 유통이 또한 투쟁의 유통이라고 보여준 자율주의 이론의 발견이었다. 자본의 순환에서 각각의 순간은 충돌의 잠재적 순간이다. 따라서 상품 노동을 구입하려는 시도(M-C)는 배치된 프롤레타리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땅으로부터 주민의 내쫓음에 대한 투쟁에 의해 방해될 수 있었다; 생산(P)의 순간은 고전적 노동이 저항을 벌이는 장소였다; C-M의 전환은 도둑질부터 공적인 재전유까지의 위험을 면할 수 없었다.

 

13) Each of these flashpoints might ignite others, and then be connected to one another. This de-centered the classic Marxian focus on the immediate point of production, without relinquishing— indeed expanding—the concept of anti-capital struggle. It view of a widening orbit of potentially interlinked struggles is at the root of the idea—however imperfectly developed-- of the multitude.

13) 이 발화점들의 각각이 다른 것들에 불을 붙였을지도, 그리고 그때 서로 연결될지도 모른다. 이 탈중심화된 고전 맑스주의는 생산의 즉각적 지점에 집중한다, 반(反) 자본주의 투쟁의 개념을 포기함이 없이 - 진실로 확장하면서 - 말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상호연결된 투쟁의 넓어진 궤도에 대한 그것의 견해는 다중이라는 - 하지만 불완전하게 발전된 - 생각의 뿌리에 있다.

 

14) But the theory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in a very classically Marxian way, has little to say about what lay beyond these struggles, about life after capitalism. Precisely because the momentum of the movement of movements is today partially stalled in a war situation, it may be a timely moment to consider this question. Such an exercise can condemned as utopian thought, but there is such a thing as immanent utopianism, grounded in practical possibilities of the present.

14) 그러나 투쟁의 유통이라는 이론은, 매우 고전적으로 맑스주의적 방식으로, 이 투쟁 넘어서 있는 것에 관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대하여 거의 말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운동들의 운동의 순간이 오늘날 부분적으로 전쟁 상황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이 문제를 숙고할 적시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연습은 유토피아적 사상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인 유포피아주의로서 그러한 것이 있다, 현재하고 있는 것의 실제적 가능성에 기초하면서 말이다.

 

15) So I postulate another step, from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to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15)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단계를 가정한다, 투쟁의 유통으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유통까지.

 

16) If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is the commodity, the cellular form of society beyond capital is the common. A commodity is a good produced for exchanged, a common a good produced to be shared. A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presupposes private owners between whom this exchange occurs. The notion of the common presupposes collectivities within which sharing occurs.

16) 만약 자본주의의 세포 형태가 상품이라면,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의 세포 형태는 공통적인 것이다. 상품은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이고, 공유물은 공유되기 위해 생산된 재화이다.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 상품은 그 사이에서 이 교환이 일어나는 사적인 소유자들을 미리 가정한다. 공통적인 것의 관념은 그 내부에서 공유가 일어나는 집합성을 미리 가정한다.

 

17) The circuit of the common traces how these collectivities—which I term associations—organized shared, common resources including creativity, machinery and resources into productive ensembles that create more commons which in turn provide the basis for new associations.

17) 공통적인 것의 순환은 - 내가 연합이라고 이름짓는 - 이 집합성이 새로운 연합을 위한 기초를 다음으로 제공할 더 많은 공유지를 창조할 생산적인 종합적 효과로의 창조성, 기계류, 그리고 자원들을 포함한 공유된, 공통적인 자원을 조직하는 길을 밟는다.

 

18) So in a rewritten circulation formula, C represents not a Commodity but Commons, and the transformation is not into Money but Association. The basic formula is therefore: A ─ C ─ A'. This can then be elaborated into A ─ C . . .P . . . C' ─ A'.

18) 그래서 고쳐 쓰인 유통 공식으로, C는 상품이 아니라 공유지를 말한다, 그리고 변형은 화폐로가 아니라 연합으로이다. 기초 공식은 그러므로 : A ─ C ─ A'. 이것은 그때 이것은 그 다음에 A ─ C . . .P . . . C' ─ A'로 정교화 될 수 있다. 

 

19) Just as the circulation of capital subdivides into different types of capital—mercantile, industrial, financial-- we should recognize differing moments in the circuit of the common. Let’s call them eco-social, labour and networked commons.

19) 꼭 자본의 유통이 자본의 다른 유형 - 상인, 산업, 금융 - 으로 다시 나누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순환에서 다른 순간들을 인식화해야 한다. 생태-사회적, 노동 그리고 네크워크 공유지.  

 

20) Eco-social commons would be planning institutions to manage the biosphere not as commercial resources but as the shared basis for any continuing form of human association-- agencies for planetary climate control, fishery reserves, protection of watersheds, and prevention of pollution. Naming these eco-social commons indicates that the same planning logic also encompasses epidemiological and public health care provisions, regulation of food chain, biotechnological monitoring understood, again, not as strategic opportunities for commercial exploitation of species life.

20) 생태-사회적 공유지는 상업적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연합의 어떤 연속적인 형태에 대한 공유된 기초로서의 생물권을 관리하기 위해 제도를 계획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 행성적 기후 통제, 어업 보류, 유역 보호, 그리고 오염 방지를 위한 기능. 이를 생태-사회적 공유지라고 이름 짓는 것은 같은 계획적인 논리가 종 생물의 상업적 착취를 위한 전략적 기회로서, 다시, 이해되지 않는 역학적이고 공적인 건강 보호 예비, 식량 페인을 위한 규제, 생물공학적 감시를 또한 둘러싼다는 것을 가리킨다.

 

21) By labour commons we mean the democratized organization of productive and reproductive work. This would include worker cooperatives, and co-managed public enterprises, land redistribution. But it should also be conceived more widely to include measures such as the introduction of a planetary basic income or guaranteed wage, conceived not as a glorified welfare hand out, but as an acknowledgement of the contribution to collective productivity of every species life.

21) 노동 공유지를 통해 우리는 생산적이고 재생산적인 일의 민주화된 조직을 의미한다. 이것은 노동자 협력, 그리고 참여 관리된 공적인 기업, 땅 재분배를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성적인 기본적 소득 또는 보장된 임금의 도입 그 자체와 같은 수단을 포함하는 것으로 또한 더 많이 넓게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미화된 복지가 나눠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모든 종 생물의 집합적인 생산성에 대한 기여의 인정으로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22) By networked commons we mean systems that unleash, rather than repress, the tendency of communication systems to overflow commodified intellectual property regimes in favor of the creation of common pool resources. We are talking an approach to communication that sees in its tendency to create non-rivalrous goods whose reproduction cannot be easily controlled not a problem but a vast potential. We are talking the reduction. We are talking not just of creative commons; but of large scale adoption in public institutions of open source practices; the remuneration of cultural producers in ways that allow the relaxation of commercial IP rights; plus the education and infrastructures that make access to peer to peer systems a public utility as common as the telephone.

22) 네트워크 공유지를 통해 우리는 공통적인 풀 자원의 창조를 찬성하여 지적 재산권 체제를 넘쳐 흐르는 소통 체계의 경향을, 억누르기 보다는 차라리, 해방시키는 체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잠재력이라 그것의 재생산이 쉽게 통제될 수 없는 비(非) 경쟁적 재화를 창조하는 그것의 경향을 본 소통에의 접근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창조적인 공유지를 단지 말하고 있는 중이 아니라; 오픈 소스 실천의 공적인 제도로의 큰 규모의 차용; 상업적인 IP 권리의 이완을 허락하는 방식으로의 문화적 생산자들에 대한 보상; 더해서 피어 투 피어(peer to peer) 체계에의 접근을 전화만큼 공통적인 공적인 유틸리티(utility)로 만드는 교육과 기반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23) To speak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is to propose process in which eco-social labour and networked commons each reinforce and enable the other: in which the common goods and services generated by associations at one point in the circuit provide inputs and resources for associations at another.

23) 공통적인 것의 유통을 말하는 것은 그 속에서 생태-사회적 노동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 각각이 나머지를 강화하고 가능하게 하는 과정을 제안하는 것이다 : 그 속에서 순환 안의 한 지점에서 연합에 의해 낳아진 공통적인 재화와 용역은 또 다른 지점에서의 연합을 위한 투입과 자원을 제공한다.  

 

24) So, for example, we can envisage a process in which large scale eco-social planning seeds various labour commons, worker cooperatives and associative enterprises, which then in turn generate the goods and services required for ecological and public health and welfare planning. Amongst these goods and services would be the non-rivalrous software goods of the networked commons, a pool of free knowledge & innovation to be used in turn in the planning and production of the eco-social and labour commons.

24) 예를 들어,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큰 규모의 생태-사회적 계획이 다양한 노동 공유지, 노동자 협력 그리고 연합적 기업의 씨를 뿌리는 과정을 구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때 다음으로 생태적이고 공적인 건강과 복지 계획에 요구된 재화와 용역을 낳는다. 이 재화와 용역 중에서이다, 네크워크 공유지의 비 경쟁적 소프트웨어 재화가, 생태-사회적 그리고 노동 공유지의 계획과 생산에 다음으로 사용될 무료 지식 & 혁신의 풀이 있을 곳은 말이다.

 

25) To speak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is thus to begin to think about how open source and peer to peer models provide a potential reservoir of non-commodified applications for labour cooperatives and associated enterprises, from programming for micro-fabrication tools to inventory control to networked coordination of associations of self-managed enterprises.

25) 공통적인 것의 유통을 말하는 것은 따라서 오픈 소스와 피어 투 피어 모델이 노동 협력과 연합된 기업에 대한 비 상품화된 적용의 잠재적 저장지가 되는 방식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 관리된 기업의 연합에 대한 네트워크화된 조정에 대하여 재고 관리를 하는 미세-직조 도구를 위한 프로그래밍으로부터.

 

26) It is also to begin to think of both the equity and eco-social dimensions of highly distributed peer to peer systems, for example in coordinating micro-grid systems of household generated solar and wind energy supply—what Monbiot (2006, 124) terms an ‘energy Internet’ or of the role in public planning of grid computing projects--projects where millions of people make available the unused screen saver cycles to measure global warming. It is ultimately to think how highly distributed

26) 그것은 높이 분포된 피어 투 피어 체계의 공평과 생태-사회적 차원 둘 다를 생각하기 또한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쓰지 않는 화면 보호기 주기를 전지구적 온난화를 재기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장소인, 가구가 생산하는 태양력과 풍력 에너지 공급 - 모비오(Monbiot; 2006, 124)가 ‘에너지 인터넷’이라고 칭했던 것 또는 그리드 망상 컴퓨팅 프로젝트의 공적인 계획에서의 역할인 것 - 프로젝트의 미세-망상(網狀) 체계를 조정하는 데에서 말이다.

 

27) To speak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is also to think both how large scale molar governmental planning creates the conditions for autonomous projects—by funding coops or adopting open source and peer to peer standards-- and, in turn, how these autonomous molecular units in turn guaranteed innovation, variegated input and dissent against the dangers of bureaucratization, rigidity, and sectional interest.

27) 공통적인 것의 순환을 말하는 것은 큰 규모의 몰적인 통치적 계획이 자율적인 프로젝트를 - 생활협동조합에 자금을 대거나 또는 오픈 소스와 피어 투 피어 표준을 채택함을 통해 - 창조하는 방식과, 다음으로, 이 자율적인 분자적 단위가 다음으로 혁신을 보장했고, 관료제, 경직, 그리고 부문적 이윤에 맞서 투입과 불찬성에 변화를 줬던 방식 둘 다를 또한 생각하는 것이다.

 

28) ‘Commonism’ would thus be a social order assembled from a connection or circulation of different commons, preventing the capitalist cooption and subsumption of current and new commons by link ing them up, attaining a critical mass that counters the weight of established relations. Such a project need not predicate an instant abolition of the market, only the transformation from central system to a sub-system, surrounded by, and subordinated to a more powerful ‘commons’ dynamics. It process of what Christopher Spher describes as ‘out-cooperating Empire.’

28) ‘공통주의’는 따라서 다른 공유지들의 연결 또는 유통으로부터 모아진 사회적 질서일 것이다, 확립된 관계의 무게에 반대하는 비판적 대중에 이르고, 그것들을 이음을 통해 현행적이고 새로운 공유지의 자본주의적 무단점용과 포섭을 방지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프로젝트는 시장의 즉각적 폐지를 단언할 필요가 없고, 오직 중심적 체계로부터 하위-체계로의 변형을 단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더 많이 강력한 공유지의 역동성에 의해 에워싸이고, 하위에 두어진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토퍼 스피어(Christopher Spher)가 ‘아웃-코오퍼레이팅(out-cooperating) 제국’로 묘사한 것의 과정이다.

 

29) This is speculative, but not, however, entirely one of those abstract cook-books for the future the Marxian left so rightly distrusts. Where one can see elements of this type of project in action is in some of the ‘solidarity economics’ of the Latin American left. Here we see models of a twenty first century socialism that works on the basis of a ‘quilt’ or ‘patchwork’ of decommodified activity includes interaction between central state planning and a decentralized network of worker cooperatives, self-management projects, nuclei of development, and so on. In the work of solidarity economists such as Euclides Mance, the units of these networks are conceived not just as individually following principles of social and environmental justice, but as providing inputs for each other, to create an autopoeitic, self-boosting system whose logic is similar to that outlined here. What is being increasingly thrown into the mix in Venezuela, Brazil is now publically sponsored use of open source systems—networked commons. So the recipes are being tested.

29) 이것은 사색적이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이 그렇게 올바르게 불신했던 미래에 대한 추상적인 요리책(cook-books)의 아주 하나는 아니다. 누군가 이 유형의 프로젝트 요소로서 볼 수 있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남긴 ‘연대 경제’의 일부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탈상품화된 활동의 ‘누비이불’(quilt)과 ‘쪽모이 세공’(patchwork)에 기초해서 작동하는 21세기 사회주의의 모델을중심적 국가 게획과 노동자 협력, 자기 관리 프로젝트의 탈중심화된 네트워크, 발전의 핵, 등등 사이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것을 본다. 에우클리데스 만스(Euclides Mance)와 같은 연대 경제주의자들의 연구에서, 이 네트워크의 단위는 꼭 개인적으로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정의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를 위해 투입을 제공하는 것처럼, 자기산출적, 자기 추진적(self-boosting) 체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베네수엘라, 브라질에서 혼합으로 점점 던져지고 있는 중인 것은, 오픈 소스 체계 - 네트워크 공유지 - 의 사용을 지금 공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그래서 그 처방은 시험되는 중이다.

 

30) Let me now very quickly draw out some of the implications of this way of thinking. First, it is against the grain of postmodern thought in so far as it proposes a model of a totality, counter-totality against capital.

30) 나로 하여금 지금 매우 빠르게 사고의 이 방식이 갖는 몇몇 함축을 꺼내게 하자. 첫째, 그것은 총체성의 모델, 자본에 맞선 대항-총체성을 제안하는 한에서는 포스트모던적 사고의 찌꺼기에 맞선다.

 

31) Second, however, it starts small. By moving from a cellular model of commons and association that is simple, even rudimentary, this paper has aimed to suggest a process thinkable at levels from the domestic to municipal to the planetary and implementable at both modest and large levels. It scales.

31) 하지만, 둘째 그것은 작게 시작한다. 공유지의 분자적 모델과 간단한, 심지어 잔유적, 연합으로부터 움직이므로, 이 논문은 시에 내부적인 것으로부터 겸손하고 큰  둘 다 수준에서 행성적이고 도구적일 수 있는 것까지의 수준들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과정을 제안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32) Third, it suggests a multiplicitous totality. Speaking of a complex, composite non-capitalist society composed by an interaction of different kinds of commons—eco-social, labour, networked— each with distinct, specific logics, we can wake from the hallucination both of a uniform socialist utopia, and of a capitalism to which there is no alternative, in favor of a new potential assembled from multiple forms of common logic.

32) 셋째, 그것은 다양한 총체성을 제안한다. 각각이 별개이고, 특유의 논리를 가지는 다른 종류의 공유지들 - 생태-사회적, 노동, 네트워크 - 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복합적인, 혼성적인 비 자본주의적 사회를 말하면서, 우리는 한결같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대안이 없는 자본주의 둘 다의 환각으로부터 깰 수 있다, 공통적인 논리의 복합적 형태로부터 모아진 새로운 잠재력을 찬성하면서 말이다.

 

33) Fourth, this is not necessarily a model of changing the world without seizing power. It does not preclude a punctual moment or moments of radical crisis. It simply suggests that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have to precede such a moment, to establish its preconditions, and extend beyond it, to actualize its potential.

33) 넷째, 이것이 권력을 잡음이 없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모델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엄수하는 순간 또는 급진적인 위기의 순간을 미리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것의 유통이 그러한 순간에 선행해야, 그것의 전제조건을 확립해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뻗어야 한다고 단순히 제안한다, 그것의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34) As circulation of struggles arises from the circulation of capital, so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arises from the circulation of struggle. Fights for commons--terrestrial, planned and networked-- are happening, now, even in the teeth of mounting war danger. Commonism is a forward projection of these contests. It is an emergency concept – a concept of emergence. If capital is an immense heap of commodities, commonism will be a multiplication of commons. Under such conditions it may be possible once again to say: “Omnia sunt communia”—everything in common.

34) 투쟁의 유통이 자본의 유통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공통적인 것의 유통이 투쟁의 유통으로부터 일어난다. 공유지 - 대지적, 계획, 그리고 네트워크 - 를 위한 싸움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전쟁 위험을 개시하는 톱니에서조차도 말이다. 공통주의는 이 논쟁의 전방으로의 투사이다. 그것은 사태 개념 - 출현의 개념이다. 만약 자본이 상품의 막대한 퇴적이라면, 공통주의는 공유지의 증식일 것이다. 그러한 조건 하에 그것은 다시 한번 말하는 것지도 모른다 : “Omnia sunt communia” - 모든 것은 공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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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다이어-위데포드의 공통적인 것의 유통 2006

출처 : http://www.fims.uwo.ca/people/faculty/dyerwitheford/Commons2006.pdf

[Commons2006.pdf (117.80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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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_공통적인 것의 유통 2006.hwp (57.01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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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공통적인 것의 유통

 

Nick Dyer-Witheford [University of Western Ontario]

닉 다이어-위데포드(웨스턴 온타리오 대학)

 

Paper presented at IMMATERIAL LABOUR, MULTITUDES AND NEW SOCIAL SUBJECTS: CLASS COMPOSITION IN COGNITIVE CAPITALISM, Saturday 29th and Sunday 30th April 2006, King’s College, University of Cambridge

발표 논문, 비물질적 노동, 다중 그리고 새로운 사회 주체 : 인지 자본주의에서 계급 구성, 2006년 4월 29일 토요일과 30일 일요일, 킹스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

 

Introduction

도입

 

This paper makes theoretical propositions to assist conceive an emergent communism, a “coming community” that is neither capitalist, socialist nor anarchic, and the place within it of “immaterial labor.” [1] Its argument, in brief, is as follows.

이 논문은 이론적 제안들이 떠오르는 코뮤니즘, 자본주의적이지도, 사회주의적이지도, 아나키즘적이지도 않은 “다가오는 공동체”, 그리고 그것 내부에 “비물질적 노동”[1]의 장소를 마음 속에 그리는 데에 조력한다. 요컨대, 그것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Marx deemed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to be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His model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traced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which commands the acquisition of further resources to be transformed into more commodities. The theorists of autonomist Marxism demonstrated how this circulation of capital i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meeting resistances at every point. But although this concept proved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multiplicity of contemporary anti-capital, it says very little about the kind of society towards which these struggles move, a point on which the autonomist tradition has mainly been mute. Today, new theorizations about multitude and biopolitics should to reconsider this silence.

맑스(Marx)는 자본주의의 세포 형식이 상품, 사적인 소유자 사이에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자본의 유통 모델은 상품의 화폐로의 변신을 추적했고,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상품으로 변형될 그 이상의 자원의 취득을 명령한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이론가들은 어떻게 이 자본의 유통이 또한 투쟁의 유통인지를 증명했다, 모든 점에서 저항에 대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비록 이 개념이 동시대의 반(反)자본주의의 다양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했을지라도, 그것은 이 투쟁들이 향해 움직이는 사회의 종류, 자율주의적 전통에서 대개 말이 없었던 지점에 대하여 정말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다중과 삶정치에 관한 새로운 이론화는 이 침묵을 재고해야 한다.

 

I suggest that the cellular form of communism is the common, a good produced to be shared in association. The circuit of the common traces how shared resources generate forms of social cooperation—associations-- that coordinate the conversion of further resources into expanded commons. On the basis of the circuit of capital, Marx identified different kinds of capital—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unfolding at different historical moments yet together contributing to an overall societal subsumption. By analogy, we should recognise differing moments in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These include terrestrial commons (the customary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in traditional societies); planner commons (for example, command socialism and the liberal democratic welfare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free associations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the numerous other socializations of technoscience).

나는 코뮤니즘의 세포 형태가 공통적인 것, 연합에서 공유되기 위해 생산된 재화라고 제안한다. 공통적인 것의 순환은 공유된 자원이 확장된 공유지로 그 이상의 자원의 전환을 조정하는 사회적 협력-연합-의 형태를 낳는 방식의 경로를 밟는다. 자본의 유통에 기초해서, 맑스는 다른 역사적 순간들에 펼쳐지지만 함께 전반적인 사회의 포섭에 기여하는 자본의 다른 종류들 - 상인적, 산업적 그리고 금융적 - 을 확인한다. 유추를 통해,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유통에서 다른 순간들을 인식화해야 한다. 이것들은 대지적 공유지 (전통 사회에서 자연 자원의 관습적 공유지); 계획자 공유지 (예를 들어, 통제 사회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복지 국가);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 (무료 연합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피투피 네트워크, 망상(網狀) 컴퓨팅과 기술과학의 다수의 다른 사회화).

 

Capital today operates as a systemic unity of 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moments, but the commanding point in its contemporary, neoliberal, phase is financial capital.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can, again by analogy,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but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These must however, also be seen in their dependency on, and even potential contradiction, with the other commons sectors. The concept of a complex, composite communism based on the circulation between multiple but commons forms is opens possibilities for new combinations of convivial custom, planetary planning and autonomous association. What follows expand on these cryptic observations.

자본은 오늘날 상인적, 산업적 그리고 금융적 순간의 체계적 통일체로서 작용하나, 그것의 신자유주의적인 동시대의 국면에서 유리한 장소를 차지한 지점은 금융 자본이다. 다시 유추에 의해서, 21세기 코뮤니즘은 대지적, 국가적 그리고 네트워크적 공유지의 복합 통일체로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종합적 효과에서 전략적이고 가능적인 지점은 네트워크적 공유지이다. 이것들은 하지만, 또한 그것들이 의존물과, 심지어 잠재적 모순에서, 다른 공유지 분야들과 함께 보여야 한다. 복합적, 합성적 코뮤니즘의 개념은 다양체 사이의 유통에 근거하나, 공유지 형태들은 연회 관습, 지구상의 계획 그리고 자율적인 연합의 결합들에 대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따라오는 것은 이 숨은 관찰에 의하여 확장된다.

 

The Circulation of Capital

자본의 유통

 

Marx famously described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as the “cell-form” of capital, the primordial point from which grew all its more complex and composite manifestations.

맑스는 상품, 사적 소유주들 사이의 교환을 위한 재화를 자본의 “세포-형태”, 보다 모든 그것의 복합적이고 합성적인 명시가 성장하는 근본적인 지점으로 묘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The wealth of societies in which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prevails appears as an ‘immense collection of commodities; the individual commodity appears as its elementary form. Our investigation therefore begins with the analysis of the commodity.”[2]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막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2]

 

The processes of this growth were however, not fully described until Volume Two of Capital, which outlines a model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This model traces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and back again. This cycle is expressed in the classic formulae M ─ C (LP/MP) . . . P . . .C' ─ M'. Money (M) is used to purchase as commodities (C), including labor power (LP), and the machinery and raw materials that are the means of production (MP). These are thrown into production (P) to create new commodities (C') that are sold for more money (M'), part of which is retained as profit, part of which is used to purchase more means of production to make more commodities. The money at the end of the process is greater than that at the beginning and the value of the commodity produced is greater than the value of the commodities used as inputs: repeat ad infinitum.

이 성장의 과정은 그러나, 자본의 유통 모델을 개괄하는 자본론 2권까지 완전히 묘사되지 않았다. 이 모델은 화폐로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상품의 대변모를 추적한다. 이 주기는 고전적 공식들 M ─ C(LP/MP) . . . P . . .C' ─ M'로 표현된다. 화폐(M, money)는 노동력(LP, labor power), 그리고 생산의 수단인 기계와 가공되지 않은 재료들을 포함하며, 상품 구입에 사용된다. 이것들은 새로운 상품을 창조하는 생산에 던져지고, 상품은 더 많은 화폐로 팔리고, 더 많은 화폐의 일부는 이윤으로서 보유되고 일부는 더 많은 상품을 만들기 위한 더 많은 생산 수단들을 구입하는 데에 사용된다. 화폐는 그 과정의 끝에서 시작에서의 그것보다 크고 생산된 상품의 가치는 투입물로서 사용된 상품의 가치보다 크다 : 무한대로 반복.

 

This circuit could, both in any specific instance or in general, fail. A C may not find its M if a seller does not meet a buyer, nor M tryst with C, if a buyer lacks a seller, and all may fall completely apart in the ugly abode of P. But if it surmounted these hazards, the circulation of capital becomes an auto-catalytic, self-generating, boot-strapping growth process, a “constantly revolving circle” in which every point is simultaneously a point of departure and a point of return.”[3]

이 순환은, 어떤 특정한 순간 또는 일반적으로 둘 다, 실패할 수 있다. 만약 판매자가 구매자에 응하지 않는다면 A C는 아마도 그것의 M을 찾아내지 않을 수도 있고, 만약 구매자가 판매자에게 부족하다면 M이 C와 회합의 약속을 지킬지 않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은 P의 추한 장소와 완전히 떨어져서 실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 위험들을 넘는다면, 자본의 유통은 그 안에서 모든 지점이 동시적으로 출발과 복귀의 지점이 되는 자동-촉매적, 자기-산출적, 부트 스트래핑(boot-strapping) 성장 과정, “끊임없이 회전하는 궤도”가 된다.[3]

 

This circuit is the dynamic process that converts the cell form of the commodity into what Marx termed more “complex and composite” forms, a process of organ-creation, forming an entire capitalist metabolism, that subsumes previous forms of the social body. It is, to use a different language, the path from capital’s molecular level to its molar manifestation.

이 순환은 상품의 세포 형태가 완전한 자본주의적 변모를 형성하면서, 맑스가 더 많은 “복합적이고 합성적인” 형태라고 말했던 것, 기관-창조의 과정으로 전환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몸의 이전 형태를 포섭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분자 수준에서부터 그것의 몰적 명시까지의 경로이다.

 

The circulation process that begins with money and ends with more money is a never ending process, but it can be punctuated in different ways. We could look at it beginning and ending with the act of production or with capital in a commodity state, or in its money state. As David Harvey puts its, “We can create three separate windows to look in on the overall characteristics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From each window we can see something different. . . .In the end, of course, we are interested in the circulation of capital as a whole, but we cannot understand this . . . without first examining the differentiations within it.”[4] So, for example, the transformation of commodities into money (C-M) is the role of mercantile capital; that of the production of commodities by means of commodities (P) is mediated by industrial capital, and the conversion of money capital into productive capital is the ostensible task of financial capital (M-C). While all have an interest in the expansion of surplus value, they do not necessarily always agree about how to divide it up.

화폐와 함께 시작하고 더 많은 화폐와 함께 끝나는 그 유통 과정은 절대로 끝나지 않으나, 그것은 서로 다른 방식들로 구두점을 찍는다. 우리는 생산의 행동과 함께, 또는 상품 국가에서나 그것의 화폐 국가에서 자본과 함께 시작하고 끝나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그것의 것을 “우리는 자본유통의 전체 특성들을 살펴볼 수 있는 세 개의 분리된 창문들을 만들 수 있다. 각 창문으로부터 우리는 상이한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본 전체의 유통에 관심이 있지만, 자본 전체의 순환을 이해할 수 없다 ······ 먼저 그 내부의 상이성들을 고찰하지 않고서는.”[4] 예를 들어, 그래서, 상품의 화폐로의(C-M) 변형은 상인 자본의 역할이다; 상품들의 수단들(P)을 통해 상품 생산의 그것은 산업 자본에 의해 조정되고, 화폐 자본의 생산적인 자본으로의 전환은 금융 자본의 외면적 임무이다(M-C). 모든 것이 공급 가치의 팽창에 관심을 갖는 동안에, 그들은 그것을 분할하는 방식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언제나 합의하는 것은 아니다.

 

hese different sectors are both synchronic and diachronic aspect. That is to say, while they are simultaneously necessary for the fully actualised operations of capitalist society, each has assumed preeminence at different times. So, for example, the growth of mercantile capital from 16th to 18th century is often seen as the precondition for the emergence of industrial capital in the 19th century, which in turn has generated an increasing preeminence to financial capital in the late 20th century. None of these different subsets of capital replace each other, but at specific historical moments one or other sounds a keynote or takes the lead for the entire ensemble.

이 다른 부문들은 공시적이고 동시에 통시적인 양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충분하게 실현된 작용에 동시적으로 필연적이라고는 하나, 각각은 다른 시간들에서 걸출함을 취했다. 예를 들면, 그래서 16세기로부터 상인 자본의 성장은 자주 19세기에 산업 자본의 출현에 대한 선결조건으로 자주 보이고, 그리고 그것은 차례로 20세기 후반에 금융자본에 점점 증가하는 걸출함을 낳았다. 자본의 이 서로 다른 부분집합의 어떤 것도 서로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순간들에 하나나 다른 것은 으뜸을 소리가 나거나 전부의 종합적 효과에 대한 리드를 가진다.

 

The ramifying elaborations arising from these circuits have been depicted by theorists who have developed Marx’s model into intricate diagrams showing our current deep entanglement in the commodity-form. If we think of a rotating sphere not only accelerating in velocity around its circumference but expanding in diameter as it fills more and more space we have the image of global capital, aka “empire.”

이 순환들로부터 일어난 그 분지한 동화는 상품-형태에서 우리의 현행의 깊은 얽힘을 보여주는 뒤얽힌 다이어그램으로 맑스의 모델을 발전시켰던 이론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만약 우리가 회전하는 구체(球體)를 그것의 원주 주위 속도에서의 가속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점점 더 큰 공간을 채울 때 지름에서의 팽창 또한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지구적 자본의, 별칭으로는 “제국”인 것의 이미지를 가진다.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투쟁의 유통

 

It was the great rediscovery of autonomist theory that the circulation of capital wa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Each node in the circuit of capital is a potential site of conflict where the productive subjectivities capital requires may contest its imperatives. If not all, at least many of the breakdowns in capital’s circulation occur because LP (labor-power) refuses to remain LP: it resists and re-appropriates.

자본의 유통이 또한 투쟁의 유통이기도 했다는 것은 바로 자율주의 이론의 위대한 재발견이었다. 자본의 순환에서 각각의 마디는 생산적인 주체성 자본의 필요들이 그것의 명령과 경쟁할지도 모르는 충돌의 잠재적인 장소이다. 만약 모두는 아니라할지라도, 어쨌든 자본의 유통에서 붕괴는 LP(노동력, labor-power)가 LP로 남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저항하고 재전유한다.

 

Although this insight was given many expressions, perhaps the most complete English language version is the essay by Peter Bell and Harry Cleaver, “Marx’s Theory of Crisis as a Theory of Class Struggle.” [5]This proceeds systematically around the circuit of capital showing the range of insurgent interruptions possible at each phase. Thus the attempt to purchase the commodity labor, M-C (LP), could be interrupted by struggles over dispossession of populations necessary to create a proletarian workforce, or the maintenance of that workforce in a suitable condition of precarity. The purchase of raw materials, M-C (MP), might be frustrated by eco-struggles. The moment of production (P) was the site of classic work place resistances to exploitation, from strikes, occupations and sabotage. The sale of commodities, C-M, was menaced by dangers from theft to boycotts to public reappropriation.

많은 표현들에 이 통찰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가장 완벽한 영어 버전은 피터 벨(Peter Bell)과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에 의한 에세이, “계급 투쟁의 이론으로서 위기의 맑스 이론”[5]이다. 이것은 각각의 국면에서 반역적인 방해의 범위를 보여주면서 자본의 순환을 둘러싸고 체계적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상품 노동력을 구입하려는 시도{M-P (LP)}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주민의 내쫓음에 대한, 또는 불안정성이라는 적당한 조건에서 그 노동력의 유지에 대한 투쟁에 의해 방해될 수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재료의 구입{M-C (MP)}은 생태 투쟁에 의해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 생산(P)의 순간은 고전적 노동이 착취에 대한 저항 - 파업, 점거, 그리고 사보타주 -을 벌이는 장소였다. 상품의 판매(C-M)는, 도둑질부터 공적인 재전유에 대한 보이콧까지의 위험들에 의해 위협받았다.

 

Furthermore, each of these flashpoints might ignite others. This knock-on effect might happen as it were unconsciously—if, for example, capitalists exposed to heightened costs for raw materials caused by “resource wars” responded by intensifying the rate of exploitation in production, thereby precipitating strikes, or responds to strikes by technological innovations that then overproduce so much that goods cannot be sold, generating recessions, unemployment and militant movements of the immiserated. But the connection could also be a conscious process, as subjects contesting capital at different points linked or allied one with another. The concept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underlies much of the richest thought about the use of means of communication, old and new, to link together these variegated agencies into new combinations, a line of analysis running from Romano Alquati’s reflections on “radiating the operational information of struggle” to Cleaver’s concept of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6]

더군다나, 이 발화점들의 각각이 다른 것들에 불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이 연쇄 효과는 그것이 무의식적이었을 때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 예를 들어, 만약 자본가가 생산에서 착취율의 강력함에 대응된 “자원 전쟁”에 의해 야기된 가공되지 않은 재료에 대한 증대된 비용에 노출된다면, 그것에 의해 파업을 촉진하면서, 또는 재화가 팔릴 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이 그때 과잉생산하는 기술적 혁신에 의한 파업에 대한 대응을 촉진하면서,  점점 비참해진 사람들의 후퇴, 미고용, 그리고 군사적 운동을 낳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연결은 또한 의식적 과정일 수도 있었다, 다른 지점에서 자본을 다투는 주체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결되거나 동맹했을 때. 투쟁의 유통 개념은 낡게 그리고 새롭게, 이 얼룩덜룩한 기능들을 새로운 결합 안으로 연결하는  소통 수단의 사용에 대하여, “투쟁의 발열적 작용 정보”에 관한 로마노 알꽈띠(Romano Alquati)의 성찰로부터 “투쟁의 전자적 직조”라는 클리버의 개념까지 달리는 분석의 라인에 대하여 가장 풍부한 사고의 많은 부분 근저에 있다.[6]

 

In its intention, Bell and Cleaver’s analysis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 was an attack on objectivist Marxism that saw capital proceeding to crisis according to teleological laws: what they showed was that most of these “laws” were the outcome of colliding vectors of struggles waged by collective subjects. But ultimately, the concept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had even wider implications. In its various autonomist articulations it decentered traditional Marxist concerns with conflict at the immediate point of production. A focus on factory resistance became displaced to a multiplicitous view of contestation throughout a circuitously interconnected social factory. Marx’s singular old mole of the proletariat digging through the factory floor became the ”tribe of moles”, burrowing a network of tunnels through schools, households, and welfare offices. [7] This view of a widening circulation of struggles, occurring at different nodes all along the circuit of capital, all potentially interlinked, is part of the genealogy of transversal politics and of the multitude, concepts which have become part of the theoretical lexicon of the contemporary movement of movements.

그것의 의도에서, 투쟁의 유통이라는 벨과 클리버의 분석은 기술적 법칙에 따라 자본 과정을 보는 객관적 맑스주의에 관한 공격이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이 “법칙들”이 집단적인 주체들에 의해 수행된 투쟁들이라는 충돌하는 힘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투쟁의 유통 개념은 암시를 한층 더 넓혀주었다. 그것의 다양한 자율주의 절합에서 그것은 생산의 즉각적인 지점에서의 갈등과의 전통적 맑스주의의 관심사들을 분산시켰다. 공장 저항에 대한 포커스는 우회적으로 상호연결된 사회적 공장을 관통하여 논쟁하는 다양한 관점으로 대체되었다. 공장 바닥을 통하여 파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맑스의 특이한 오래된 두더지는 학교, 가정, 그리고 복지 사무실을 통하여 터널의 네트워크를 뚫는 "두더지 떼"가 되었다.[7] 투쟁의 유통을 넓힌다는, 자본의 유통을 모두 따라, 잠재적으로 모두 이어 붙여진 다른 마디들에서 일어난다는 이 관점은 횡단적 정치학에 관한 그리고 운동의 동시대 운동의 이론적 사전의 부분이 되었던 개념인 다중에 관한 계보의 부분이다.

 

Yet if the theory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 both subverted objectivist Marxist accounts of crisis, and de-centered the classic Marxian focus on the immediate point of production, it also, in a very classically Marxian way, has little to say about the long term outcome of these struggles. Yes, sufficient proliferation of such struggles will bring capital to breakdown. Yes, in the struggles subjects self-valorise, reappropriating use-values from the sphere of exchange, winning back time and life. Bell and Cleaver’s wonderful essay ends by remarking that what “defines a revolutionary subject” is “not only the negative power to abolish capital but the positive power to increasingly define its own needs, to carve out an expanding sphere of its own movement and to create a new world in place of capitalism.”[8] But the organizational or institutional forms this “expanding sphere” might take are unnamed. If today the concept of circulation of struggles speaks well to the multiple voices declaring “another world is possible,” to the begging question “but which world?” –or even, if one wishes to emphasise a potential diversity of arrangements, “which worlds?”-- it does not answer.

하지만, 투쟁의 유통 이론은 위기 객관적 맑스주의적 기술을 뒤엎었고, 그리고 생산의 즉각적 지점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의 포커스를 탈중심화했다면, 맑스주의적 방식으로 매우 고전적으로, 그것은 또한 이 투쟁들의 장기적 결과에 대하여 거의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그러한 투쟁들의 충분한 증식이 자본을 붕괴로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 투쟁에서 주체는 교환의 영역에서 자기 안정화한다, 사용가치를 재전유하고, 시간과 삶을 확보하면서 말이다. 벨과 클리버의 훌륭한 에세이는 “혁명적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 “자본을 폐지하는 부정적인 힘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필요를 점점 정의하고, 그 자신의 운동의 확장하는 영역을 개척하는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소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긍정적인 힘”이라는 언급으로 끝맺었다.[8] 그러나 이 “확장하는 영역”이 가졌을 지도 모르는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형태는 이름 지어지지 않는다. 만약 오늘날 투쟁의 유통 개념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고 선언하는 다양한 목소리에게, “그러나 다른 세계를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 또는 심지어, 만약 누군가, “어떤 세계를?”이라며 배치의 잠재적 차이점을 강조화하기를 바란다면 - 유효하려면, 그것은 답이 되지 못한다.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공통적인 것의 유통

 

Because the practical struggles of a multiplicitous movement, and the theoretical reflections that arise in tandem with them, have over the last decade and a half reached quite a high level, we might now be able to take another step. Having gone from the circulation of capital to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we can proceed from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to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다원적인 운동의 실제적인 투쟁과 그것들에 협력하여 일어나는 이론적 반영이 높은 수준에 완벽하게 도달했던 최근 십오 년보다 우위에 섰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단계를 지금 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본의 유통부터 투쟁의 유통까지 가버리면서, 우리는 투쟁의 유통에서 공통적인 것의 유통까지 나아갈 수 있다.  

 

The common, and the commons, are terms that have amongst activists recently become, well, common. The usual point of reference is the lands collectively used for subsistence purposes by pre-capitalist agricultural communities and destroyed by enclosure in the process of primitive accumulation.[9] Although enclosure was resisted by overt and clandestine insurrections whose full dimensions were only recently disclosed by Peter Linebaugh and Maurice Rediker’s account of a “hydra-headed” rebellion, these struggles were lost.[10] But interest in the commons has been revived by opponents of global capital seeking a vantage from which to criticise the “new enclosures” privatizing of natural and social resources across the planet.[11] Some accounts romanticise the historical commons as a pre-capitalist utopia, rather than a marginal supplement to a hierarchic feudal order. Others invoke the commons only the better to plan their commercialization. But the concept remain an important lever for rethinking issues of collective production and ownership, and it is to this end, and with a profound debt to theorists such as John McMurtry and Massimo de Angelis who have already thought along these lines, that it is deployed here.[12]

공통적인 것, 그리고 공유지는 활동가들 중에서 최근, 글쎄, 공통적이 되었던 용어이다. 언급의 보통의 관점은 전자본주의 농업 공동체에 의해 생존 목적으로 집합적으로 사용된 그리고 원시 축적의 과정에서 인클로저(enclosure)에 의해 파괴된 땅이다.[9] 인클러저가 “히드라의 머리를 한” 모반에 대한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와 마커스 레디커(Maurice Rediker)의 기술에 의해 단지 최근에 그것의 완전한 차원이 드러났던 공공연하고 은밀한 반란에 의해 저항 받았을지라도, 이 투쟁은 사라졌다.[10] 그러나 공유지에 대한 관심은 전지구적 자본의 적들에 의해 소생했다, 그들은 행성을 가로질러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자원을 사유화하는 “새로운 인클로저”를 비평하는 우월한 지위를 추구한다. 일부 기술은 역사적 공유지를 전자본주의적 유토피아로 낭만화 한다, 차라리 위계적 봉건 제도에 대한 가장자리의 보충이라기보다 말이다. 다른 것들은 그것의 상품화를 단지 더 많이 계획하기 위해 공유지를 예로 든다. 그러나 그 개념은 집합적인 생산과 소유권의 문제를 재사고하는 데 중요한 지렛대로 남고, 그리고 그것이 여기에서 전개되는 것은 바로 이 끝으로이고, 이 선을 따라 이미 생각했던 존 맥머트리(John McMurtry)와 맛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같은 그러한 이론가들에 대한 깊은 빚과 함께이다.[11]

 

If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is the commodity, the cellular form of communism is the common. A commodity is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A common is a good produced for shared use. Capital is an immense heap of commodities. Communism is a multiplication of commons.

만약 자본주의의 세포 형태가 상품이라면, 공산주의의 세포 형태는 공통적인 것이다. 상품은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이다. 공유물은 공유된 사용을 위해 생산된 재화이다. 자본은 상품의 막대한 퇴적이다. 공산주의는 공유지의 증식이다.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presupposes private owners between whom such exchange occurs. The common presupposes collectivities within which sharing occurs, collectivities that coordinate, organise and plan this sharing. I will call these collectivities Associations.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 상품은 그러한 교환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소유자들을 미리 가정한다. 공통적인 것은 공유가 일어나는 집합성을, 이 공유지를 조정하고,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그리고 계획하는 집합성을 미리 가정한다. 나는 이 집합성을 연합이라고 부를 것이다.

 

We can thus postulate a circulation of the common. This traces how associations of various types, from tribal assemblies to socialist cooperatives or open source networks organise shared resources into productive ensembles that create more shared resources which in turn provide the basis for the formation of new associations. If C here represents not a Commodity but Commons, and A stands for Association the basic formulae is therefore: A ─ C ─ A'. This can then be elaborated as:

A ─ C . . . P . . . C' ─ A'; repeat ad infinitum.

우리는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유통을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다양한 유형의 연합, 부족적(部族的) 모임부터 사회주의적 협동조합 또는 오픈 소스 네트워크까지가 공유된 자원을 새로운 연합의 형성을 위한 기초를 다음으로 제공할 더 많은 공유된 자원을 창조할 생산적 종합적 효과로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길을 밟는다. 만약 C가 여기서 상품(Commodity)가 아니라 공유지(Commons)를 말한다면, 그리고 A가 연합(Association)을 나타낸다면 기본 공식은 그러므로  : A - C - A`. 이것은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이 정교화 될 수 있다 : 

A ─ C . . . P . . . C' ─ A'; 무한대로 반복.

 

Two notes on this formulae. First: we are dealing not only with Commons instead of Commodities, but with Associations instead of Money. The implication is that collective organization, not market exchange, governs the distribution of Commons, whether through mutual aid, public planning or gift economies. We will discuss this later. Second: in this formulation, the resources organised by Association into Commons production cannot be described as Labor Power and Means of Production, because these terms imply precisely the reductive abstraction and alienation that is inherent to commodity accumulation. To indicate that human creativity and ecological riches become something other than just factors of production when organized through Association , they are labeled here as GI, General Intellect and NM, Natural Metabolism. These may be the wrong terms, but we won’t discuss this further, because it is the topic for another paper.

이 공식에 대한 두 가지 노트. 첫째 : 우리는 상품(Commodities) 대신의 공유지(Commons)뿐만 아니라 화폐(Money) 대신의 연합(Associations)을 다루고 있다. 그 함축은 시장 교환이 아니라, 집합적인 조직이 공유지의 분배를 통치한다, 상호 부조, 공공 계획 또는 선물 경제(gift economies)를 통하든지 어떤지를. 우리는 이것을 뒤에 토론할  것이다. 둘째 : 이 공식에서, 연합(Association)에 의해 공유지(Commons) 생산으로 조직화된 자원은 노동력(Labor Power)과 생산 수단(Means of Production)으로서 묘사될 수 없는데, 이 용어들은 상품 축적에 고유한 환원적 추상과 소격(疏隔)을 엄밀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연합을 통해 조직될 때 인간적 창조성과 생태적 풍부함이 생산의 단지 요인보다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그들은 GI,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과 NM, 자연 물질대사(Natural Metabolism)라는 명칭이 붙여진다. 이것들은 잘못된 용어일지도 모르나, 우리는 이것을 더 많이 토론하지 않는데, 그것이 또 다른 논문을 위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If an agricultural Association (A) on the basis of its successful cultivation of a Common banana plantation (C) joins together with other such Associations, first to place more lands under cultivation, and then to form a industrial packing plant which then provides the nucleus for further cooperatively conducted activities, we have a circulation of commons. If the Associative organization of a publicly funded education system researches collectively created software that provides the basis for open source associations (A’) we have a circulation of commons. And if these open source software is then made freely available to our initial agricultural cooperative to enable its planning activities, we have a further circulation.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is thus a dynamic in which commons grow, elaborate, proliferate and diversify in a movement of counter-subsumption against capital, generating the “complex and composite” forms of communism.

만약 (A) 공동(Common) 바나나 플랜테이션에 대한 그것의 성공적 경작에 기초한 농업적 연합이 (C) 다른 그러한 연합들과 함께 한다면, 첫째로 보다 많은 땅들을 경작 하에 두기 위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이상 협력적으로 집행된 활동들을 위한 핵들을 그 다음에 제공할 산업적 포장 공장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유지의 유통을 가진다. 만약 공적으로 자금이 조달된 교육 체계 연구들의 연합 조직이 집합적으로 오픈 소스 연합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창조했다면 (A') 우리는 공유지의 유통을 가진다. 그리고 만약 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가 그것의 계획 활동들을 가능케 하는 우리의 처음의 농업적 협력에 무료로 이용가능하게 그 다름에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유통을 가진다. 공통적인 것의 유통은 따라서 공유지가 자본에 맞서 대항-포섭의 운동에서 자라고, 잘 다듬어지고, 증식하고 그리고 다양한 것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공산주의의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형태를 낳으면서 말이다.

 

We can describe this composite complexity by analogy with Marx’s differentiation of specific sub-circuits within the circulation of capital. Similarly we can differentiate specific moments in the circuit of the common, moments which give varied priorities in the basic relation of Associations and Commons, and which also have, at varying historical moments had a different weight or importance. So, we might speak of:

우리는 이 혼성적인 복합성을 자본의 유통 내에서의 특유한 하위 순환에 대한 맑스의 구분과의 유사성을 통해 묘사할 수 있다. 비슷하게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순환에서 특유한 순간을, 연합(Associations)과 공유지(Commons)의 기초적 관계에서 변화된 우선권을 주는 순간들을 구별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은 또한 가진다, 변화하는 역사적 순간에 다른 무게 또는 중요성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을 지도 모른다 :

 

Primitive communism (so called), based on a terrestrial commons that involves the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such as land, game, firewood and water, on the basis of associations shaped by custom. In  so as these associations take as their foundation the apparently given quality of natural resources, we can say they proceed from Commons to Association (C-A).

원시 공산주의는 땅, 사냥감, 땔감 그리고 물과 같은 자연 자원의 공유를 수반한 대지적 공유지에, 관습에 의해 공유된 연합의 기본에 (이른 바) 기초했다. 이 연합이 자연 자원의 명백히 주어진 질을 그들의 기초로 다루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그들이 공유지(Commons)로부터 연합(Association)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C-A).  

 

In contrast, various forms of planner commons emerged as radical project for the public ownership and state management in the factories and urban conurbation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Insofar as these centered on the marshalling of new industrial capacities of production into forms of collectivity, they proceeded from Production to Commons (P-C). The main examples are the command economies of authoritarian socialism and the welfare state of liberal capitalism, bit there are also the important minoritarian traditions of the cooperative and self-management movements.

대조적으로, 계획자 공유지의 다양한 형태들은 공적인 소유를 위한 급진적인 프로젝트와 공장에서의 상태 관리와 산업 혁명의 도시의 집합화로서 출현했다. 이것이 생산의 새로운 산업 능력을 집합성의 형태로 정렬하는 것에 집중했던 한에서는, 그들은 생산(Production)으로부터 공유지(Commons)로 나아갔다 (P-C). 주요한 보기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의 통제 경제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복지 국가이다, 협력적인 것의 중요한 소수주의적 전통과 자주 관리 운동이 있다 조금.

 

Finally, a networked commons proceeds on the basis of social communicative capacities, from language on up, that enable Associative practices to occur. So the movement here is from A-C. Today we are seeing an explosion of new developments in this sub-circuit, including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other socializations of labor intrinsic to high technoscience, which we will discuss further in the next section.

마침내, 네트워크 공유지는 협력적 실천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인 소통적 능력에 기초해서 나아간다, 언어로부터  계속 위로. 그래서 여기에서 운동은 A-C로부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하위 순환에서 새로운 발전의 폭발을 보고 있는 중이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 기술과학에 본질적인 망상(網狀) 컴퓨팅와 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 부문에서 더 많이 토론할 것이다.

 

Like the different types of capital, these different forms of commons have blossomed or blazed at distinct historical epochs. Indeed, the varying forms of capital and commons should be seen as each summoning each other, or provoking one another into being. Thus terrestrial commons were attacked by the forces of mercantile capital, which in doing so lay the basis for the industrial capitalism to which the planner commons was a response. The temporary success of these largely state based commons was then undermined by the fluid mobility of finance capital, whose appearance is however, inextricably tied up with the development of a means of communication—the Internet—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ergence of networked commons. The concept of the cycle of struggles can be re-written as the story of this antagonistic spiral, between the circulation of capital and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자본의 다른 유형과 같이, 공유지의 이 다른 형태들은 별개의 역사적 시대에 꽃이 피거나 타올랐다. 참으로, 자본과 공유지의 변화하는 형태는 서로서로 각각 소환되거나, 또 다른 하나를 자극하여 존재하게 시키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따라서 대지적 공유지는 상인 자본의 힘에 의해 공격 받았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서 계획자 공유지가 대응이었던 산업 자본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 크게 상태가 공유지에 기초한 일시적 성공은 그 다음에 금융 자본의 유동적인 가변성에 의해 토대가 침식되었다, 그것의 외관이 하지만, 네트워크 공유지의 출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소통 - 인터넷 - 의 수단의 발달에 탈출할 수 없게 묶여 있다. 투쟁의 주기라는 개념은 적대적인 나선으로 다시 쓰여질 수 있다, 자본의 유통과 공유지의 유통 사이에 말이다.

 

Because to date capital has mainly retained the initiative in this contest, many forms of commons have been partially destroyed. Although terrestrial commons persist, however imperiled, in some peasant and indigenous communities, we have only a fragmentary understanding of how they worked in their heyday. To a great extent planner commons have been conceived under conditions guaranteeing great malformation, and then yet further attacked and degraded. We are dealing often with an archeology of the commons, a set of ruins. But these ruins can also be, to use Fredric Jameson’s fine phrase, an “archeology of the future.”[13]

자본의 날짜를 정하는 것이 이 논쟁에서 발의를 보류했기 때문에, 공유지의 많은 형태들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비록 대지적 공유지가 지속되었을지라도, 하지만 위태롭게 되었다, 몇몇 소작농의 토착적인 공동체에서, 우리는 그들의 그들의 전성기에 일했던 방식에 대한 파편적 이해를 단지 가진다. 대부분 계획자 공유지는 큰 기형을 보증하는 조건 하에서 품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지만 더 많이 공격받았고 지위가 낮춰졌다. 우리는 자주 공유지의 고고학을, 파멸의 한 세트를 다루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 파멸은 또한, 프레데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휼륭한 구를, “미래의 고고학”을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Complex Communism

복합적인 공산주의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can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planner and networked commons, in which each reinforces and enables the other. As capital today operates as a systemic but differentiated unity of the 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moments of its circuit, so a contemporary communism would from the cellular forms of the common grow complex, composite forms that combine the logic of mutual aid customs, governmental planning and free and open-source peer to peer networks.

21세기 공산주의는 대지적, 계획자,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의 복합적인 통일로서 구상될 수 있다, 그 속에서 각각은 나머지를 강화하고 가능케 한다. 자본이 오늘날 그것의 순환의 상인, 산업적 그리고 금융 운동의 체계적이나 미분화된 통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동시대의 공산주의는 공통적인 것의 세포적 형태로부터 상호 부조 관습, 통치적 계획 그리고 무료이고 오픈 소스인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를 결합시키는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형태로 자랄 것이다.

 

The terrestrial commons today reappear today as the requirement for a set of ecological arrangements preserving the biosphere from exhaustion. The imperative of new habits and norms and daily practices in regard to production and consumption is the great message of the green movement. But the need for a commons biopolitics extends beyond environmental questions to issues of climate control, epidemiology, and administering the biotechnologies which are in effect producing a common global social body. The generation of new customs in common adequate to the reality of this shared corporeality, on everything from safe sex to recycle ing to emissions and cloning, is the issue of 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 today.

대지적 공유지는 오늘날 고갈로부터 생물권을 보전하는 한 세트의 생태학적 배열을 위한 요구물로 오늘날 다시 나타난다. 생산과 소비와 관련된 새로운 습관과 기준과 매일의 실천의 명령이 녹색 운동의 큰 메시지이다. 그러나 공유지 삶정치에 대한 필요는 환경 문제를 넘어서 기후 조절의 문제까지 뻗는다. 이 공유된 유형의 사실에 적당한 공유에서의 새로운 관습의 발생은, 안전한 성관계부터 배기가스 순환과 유전자복제까지의 모든 것에 관해, 오늘날 주체성의 생산의 문제이다.

 

Such customs can neither be implanted, germinate nor flourish without new forms of planning. Despite all libertarian objections, it seems to me impossible to envisage address of global poverty, disease, or climate change without the restoration of an ethic of public ownership and coordinated resource allocation, and at all levels, municipal, national, and global. And at this last level, it will have to be on a scale that would in fact make some of the efforts of the planner states of the past look quit modest and circumspect. One basis of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is the return, possibly too late, of the plan, to redress the ruination of the planet from phantasmagoria of neoliberalism laissez-faire.

그러한 관습은 계획의 새로운 형태 없이 심어질 수도, 싹이 틀 수도 번영할 수도 없다. 모든 자유론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적 소유와 조정된 자원 할당의 윤리적 회복 없이 전지구적 가난의, 병의, 또는 기후 변화의 주소를 구상하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해보인다, 모든 수준에서, 시의, 국가적, 그리고 전지구적 수준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수준에서, 그것은 사실상 과거 계획자 국가의 노력의 일부가 단념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보게 만들곤 했던 규모에 있어야 한다. 21세기 공산주의의 한 가지 기초는 자유 방임적 신자유주의의 환등상으로부터 행성을 멸망을 고치기 위한 계획의, 어쩌면 너무 늦은, 복귀이다. 

 

That such planning could, however, be a nightmare is all too apparent from a legacy of catastrophic socialist experiments. The only way such planetary co-ordinations can take a radical-democratic, rather than a despotic-technocratic one, is through a mobilizing the capacities of the networked commons to open forms of collective ownership and planning participation. It is in this context that we can locate the issue of immaterial labor, which I loosely interpret as those forms of communicational and affective production associated, not exclusively but strongly, with digital networks. Here I make three propositions.

그러한 계획이, 하지만, 악몽일 수 있다는 것은 파국적 사회주의 경험으로부터 너무 명백하다. 그러한 행성적 조정이 독재적이고 테크노크라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급진 민주주의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합적인 소유와 계획적인 참가의 형태를 여는 네트워크 공유지의 능력을 가변화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우리가 비물질적 노동의 문제를 위치지을 수 있는 이 전후 관계의 안에 있다, 그것은 내가 디지털 네트워크와 연합된 소통적이고 정동적인 생산의 그 형태로서 느슨하게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세 가지 제안을 만든다.

 

First, such immaterial labor is bringing into being a post-scarcity software economy whose commons logic troubles the commodity form. Free and open source” and “peer to peer networks” are the twenty first century’s way of saying what Marx in 1844 called “free association.”[14] Such experiments are not immune to commercial capture, but in their non-rivalrous plenitude and instantaneous circulation of goods they create acute problems private ownership and market rationing. Contra the “tragedy of the commons” hypothesis favored by market advocates, foretelling the inevitable degeneration of resources outside individual ownership, such immaterial practices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a “cornucopia of the commons” in which collaborative creation and shared use generate most robust and abundant goods. [15] In this sense, then, the construction of a network commons has already been raised to a very high level.

첫째로, 그러나 비물질적 노동이 그것의 공유지 논리가 상품 형태를 교란하는 포스트 스캐서티(post-scarcity) 소프트웨어 경제의 존재를 초래하고 있다. 무료이고 열린 소스 그리고 “피어 투 피어 네크워크”는 맑스가 1994년에 “자유로운 연합”이라고 불렀던 것을 말하는 21세기의 방식이다.[14] 그러한 실험은 상업적 포획에 면역되어 있지 않으나, 그들의 비경쟁적 충분과 재화의 즉시적 유통에서 그들은 사적인 소유권과 시장 배급에 날카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시장 옹호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는 “공유지의 비극” 가설, 사적인 소유권 외부 자원의 피할 수 없는 퇴보를 예언하는 가설에 반하여, 자원의 그러한 비물질적 실천이 협력적인 창조와 공유된 사용이 가장 튼튼하고 풍부한 재화를 낳는 “공유지의 풍요의 뿔{cornucopia : 그리스 신화에서 어린 제우스(Zeus)에게 젖을 먹였다는 염소의 뿔에서 유래한다. 뿔 속에 과일, 곡물 따위를 가득히 담은 모양으로 표현되는 뿔 모양의 장식 또는 풍요의 상징이다. - 한역자}”이라는 가능성을 탐구한다.[15]    

 

Second, the consequence of this development are flowing back through other commons sectors—those of the terrestrial and planner commons. If the network effects was simply to stay in the realm of immaterial goods—music, films, games, intellectual production—it might be contained as an aberrant and ghettoised sub-sector of an otherwise un-impeached capital. But such containment is increasingly difficult. This is because the circulation of software is a “traffic in tools” that distributes, as code, instruments for production and planning. [16] This has profound implications for the reinvigoration of a planner commons of public ownership and governmental coordination.

둘째로, 발전의 결과는 다른 공유지 부문 - 대지적 그리고 계획자 공유지의 것 - 을 통하여 뒤로 흐르고 있는 중이다. 만약 네트워크 효과가 비물질적 재화 - 음악, 영화, 게임, 지적 생산물 - 의 영역에 단순히 머무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탄핵되지 않은 자본인 정도(正道)를 벗어나고 게토화된 하위 부문을 억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억누름은 점점 어렵다. 이것은 소트프웨어의 유통이 생산과 계획을 위한 도구를, 코드로서, 분배하는 도구에서의 교통량이기 때문이다.[16] 이것은 공적인 소유권과 통치적 조정의 계획자 공유지의 재활성화에 대한 깊은 함축을 갖는다.

 

The creation of the personal computer was arguably a major step in the socialization of production. But this step is already being extended by the creation of microfabricators. low cost, programmable machine tools that can “print out” what were formerly thought of as large scale industrial artifacts, and also the tools to make even larger ones promises to bring manufacturing the same informational logic that pervades the cultural field.[17] If one starts to think of peer to peer networks of microfabricators running on open-source software one sees the possibility for a decentralised collective dispersion of industrial capacity to make the pioneers of workers’ cooperatives delirious.

개인용 컴퓨터의 창조는 생산의 사회화에서 아마 틀림없이 주요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이 걸음은 이미 마이크로페브리케이터의 창조에 의해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는 큰 규모의 산업적 인공물로 생각되었던 것을 “프린트 아웃”(print out)할 수 있는 낮은 가격의, 프로그램할 수 있는 기계 도구와, 문화적 장에 널리 퍼져 있는 같은 정보 논리의 제조를 가져오기 위해 한층 더 큰 누군가에게 약속이 되어주는 도구. [17] 만약 누군가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에서 쓰이는 마이크로페브리케이터의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누군가는 노동자들의 협력의 개척자들을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산업적 능력의 탈집중화된 집합적 분산을 위한 가능성을 본다.      

 

Something of the same process is affecting even the politics of governmental planning projects.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 is today made up not just by the circulation of e-alerts, communiqué, and guerilla news but equally importantly by a circulation of research instruments, cyber-geographical tools, search capacities, accountancy packages, data banks, knowledge aggregators, spreadsheets and simulators. This is effecting dissemination down to levels of molecular activism of administration, management and planning capacities that were once the possession of the great molar concatenations of governmental and corporate power. In this sense Lenin’s aphorism that “every cook should learn to govern the state”, so bitterly ironic after of a Soviet experiment where “the state governed every cook,” is being obliquely renewed. [18]

같은 과정의 무언가가 심지어 통치적 계획 프로젝트의 정치에도 영향을 심지어 주고 있는 중이다. 투쟁의 전자적 직조는 오늘날 전자 경보, 코뮈니케, 그리고 게릴라 뉴스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한 연구 도구, 사이버 지형적 도구, 검색 능력, 회계 패키지, 자료 은행, 지식 집합소, 스프레드시트와 시뮬레이터의 유동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은 한때 통치적이고 법인적 권력의 큰 몰적 연쇄의 소유였던 행정, 관리 그리고 계획 능력의 분자적 행동주의의 수준에 대한 아래로의 파종을 초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모든 요리사는 국가를 통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는 레닌의 금언은, 그래서 “모든 요리사에 의해 통치된 국가”가, 비스듬히 재개되고 있는 중인 소비에트 경험 히우에 모질게 역설적이다.

 

Some of the most dramatic implications of this networked socialization of production tools bear on the new terrestrial commons of eco- and bio-spherical concerns. Large scale research projects such as th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global warming and climate change prediction and epidemic control, requiring vast calculative capacities, are being realised through the myriad singular donations of unused computing cycles from individuals. Adopted on a very large scale, this would amount to vote ing with one screensaver as to which programs of research to support-- a massive re-socialization of collective knowledge, an exercise of general intellect.

생산 도구의 이 네크워크화된 사회화라는 가장 극적인 함축의 일부는 생태 - 그리고 바이오 - 환경적 관심의 새로운 대지적 공유지에 영향이 있다. 여분의 대지적 지성에 대한 탐색, 전지구적 온난화와 기후 변화 예언와 유행병 통제와 같은 큰 규모의 연구 계획, 광대한 계산상의 능력을 요구하는 연구 계획은, 개인들로부터의 쓰지 않은 컴퓨팅 주기의 무수한 특이한 증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큰 규모로 채택되면서, 이것은 집합적 지식의 대량의 재사회화, 일반적 지성의 연습을 지지하는 연구의 어떤 프로그램에 관하여 한 화면보호기와 함께 투표에 이를 것이다.

 

Let us take it as understood that the these radical potentials can be actualised, not according to any automatic technology determinist progression, but only via struggles about not just the ownership but the most basic design and architecture of networks, struggles that have to be not only fought, but fought out in detail, with great particularity. With that undertanding—and only with that understanding--there are grounds for suggesting that while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should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of immaterial labor.

이 급진적인 잠재력들이 현실화될 수 있고, 어떤 자동적 기술 결정론적 과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러나 오직 소유권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의 가장 기초적인 디자인과 건축술 또한에 대하여 투쟁을 거쳐서만이, 그러나 큰 특이함과 함께 세부에서 싸워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자. 그 이해와 함께 - 그리고 오직 그 이해와 함께 - 21세기 공산주의가 대지적, 국가적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의 복합적 통일체로서 마음 속에 그려질 동안, 이 종합적 효과에서 전략적이고 가능성을 주는 점은 비물질적 노동의 네트워크 공유지라고 제시하는 근거가 있다.

 

The third proposition is, however, more cautionary. While the expansion of networked commons created by immaterial labor can circulate through other commons sectors, the actualization of network potentials is also dependent on—perhaps sometimes even in contradiction with—transformations in these other sectors. Thus, whether or not the democratizing capacities of networked commons are realised will depend on planner commons in constructing free or cheap access communication infrastructures, from municipal wi-fi hot spots to mass distribution of ultra-cheap laptops; in building educational and literacy programs; in rolling back corporate IP regimes; and in establishing open source standards for public institutions. It is true also that digitally networked commons, dependent as they are electrical supplies, on resource intensive and computer fabrication, and on the generation of e-wastes places its own ecological load on the terrestrial commons. These types of interconnections, interdependencies, and possible contradictions between different sectors are, however, precisely what a model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highlights, and as an invitation to grounded utopianism.

하지만, 세 번째 제안은 더 많이 경계적이다. 비물질적 노동에 의해 창조된 네크워크 공유지의 확장이 다른 공유지 부문을 통하여 유통을 창조할 수 있다, 네트워크 잠재적의 현실화는 또한 의존적이다 - 아마 때때로 심지어 모순적으로 - 이 다른 부문들에서 변형에. 따라서, 네트워크 공유지의 민주화하는 능력이 실현될지 아닐지는 무료 또는 싼 접근 소통 구조를 건설하는 데에서 계획자 공유지에 의존할 것이다, 다의 와이파이 핫스팟부터 초저가 노트북의 대량 보급까지 말이다; 교육적이고 식자적 프로그램을 건설하는 데에서; 법인의 IP 체제를 격퇴시키는 데에서; 그리고 공적인 기관에 대한 오픈 소스 표준을 설립하는 데에서. 그들이 전기적 공급일 때, 집중적인 자원과 컴퓨터 직조에, 그리고 전자 쓰레기에 의존적인, 디지털적 네트워크 공유지는 그것 자신의 생태학적 부담을 대지적 공유지에 놓는다. 하지만, 다른 부문들 사이의 상호연결, 상호의존, 그리고 가능한 모순의 이 형태는 정확하게 공유지의 유통 모델이 유토피아주의에 근거된 초대장으로서 강조하는 것이다.

 

Conclusion: Pre-Cogs

결론 : 예지자

 

This long-sealed issue of left utopianism has in fact over the last decade been reopened from numerous directions. This resurgence has taken its impetus from both the streets of Berlin and the jungles of Chiapas—from the fall of command socialism, and the revival of anti-capitalist activism. It is, I suggest, an important move. In Milan, precarious entrants to the cognitariat or immaterial labor force have, using the metaphor of Minority Report, refrrred to themselves as “pre-cogs.” Taking that metaphor seriously, let us see into the future to perceive not just its dangers, but its hope. This paper has attempted such a glance, while avoiding the locked gaze of the abstract utopianism Marx so famously criticised. Just as the idea of a circulation of struggles arises, methodologically, from the concept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so the notion of a circulation of the commons arises that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 Fights for commons--terrestrial, planned and networked-- are happening, now. Complex communism is a forward projection of these aspirations.

좌익 유토피아주의의 이 길게 봉인된 문제는 사실상 지난 10년에 걸쳐 수많은 지도로부터 다시 열렸다. 이 재유행은 그것의 힘을 베를린의 거리와 치아빠스의 정글 둘 다로부터 - 통제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반자본주의 행동주의의 소생으로부터 - 가져갔다. 나는 제시한다, 그것이 중요한 움직임이라고. 밀라노에서, 코그니타리아트 또는 비물질적 노동력에 대한 불안정 신참자들은,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의 은유를 사용하면서, 그들 자신을 “예지자”로서 언급했다. 그 은유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위험뿐만 아니라, 그것의 희망 또한 지각하는 미래를 볼 수 있게 하자. 이 논문은 그러한 일별을 시도했다, 맑스가 너무 그렇게 유명하게 비판했던 추상적 유토피아주의의 자물쇠가 채워진 시선을 피하는 동안 말이다. 꼭 투쟁의 유통이라는 생각이 자본의 유통 개념으로부터, 방법론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그래서 공유지의 유통이라는 관념은 투쟁의 유통의 그것을 일으킨다. 공유지 - 대지적, 계획된 그리고 네트워크 - 를 위한 싸움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복합적 공산주의는 이 열망의 전진의 계획이다.  

 

It is a concept of emergence. Postulating the common as its cellular form, and the circular generation of common goods and associative organization as its dynamic of growth, it envisages a composite communism built from the aggregation and interlinking of such cells and cycles. Unlike the top down, seamless blueprints of some other current left utopias, it envisages a communism bubbling from below. We might think by analogy with shifts in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Here emphasis has over recent decades shifted from the programming of comprehensive and impeccable logic-models to the assembly of many small units of code that can in their interaction bootstrap themselves, albeit unpredictably, to higher levels of complexity. The motto of such research is “Fast, cheap and out of control.” [19]

그것은 출현의 개념이다. 공통적인 것을 그것의 세포 형태와, 그리고 성장의 그것의 역동으로서 공통재와 연합적인 조직의 순환적 산출로서 가정하면서, 그것은 그러한 세포와 주기의 집합과 상호연결로부터 건설된 혼성적 공산주의를 구상한다. 탑 다운, 일부 다른 현행의 좌익 유토피아와의 이음매 없는 청사진과 달리, 그것은 아래로부터 거품처럼 이는 공산주의를 구상한다. 우리는 인공 지능 연구에서의 이동과 함께 유추를 통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강조는 최근 10년에 걸쳐 포괄적이고 결함 없는 논리 모델로부터 그들의 상호작용에서 그들 자신을, 비록 예언할 수 없게, 복합성의 높은 수준으로 독력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코드의 많은 작은 단위의 집합까지 이동했다. 그러한 연구의 모토는 “빠르게, 싸게 그리고 통제 밖으로.”[19]

 

Commons may be fast or slow; even better than cheap is free; but out of control—out of the control of the society of control, out of control from global capital—that is indeed the aim. By moving from a cellular model of commons and association that is simple, even rudimentary, this paper has aimed to suggest a process that is scalable, thinkable at levels from the domestic to municipal to the planetary, and terms of the interconnections between these levels. And by speaking of a communism composed by a circulation of distinctive modalities—terrestrial, planner, networked--that nonetheless can be linked and reinforce on another it has tried to wake from the hallucination--dream-world or nightmare--of a uniform utopia, of which Soviet style socialism was the only the most notorious, in favor of a heterogeneous communism built from multiple forms of common logic, a communism of singularities. Under such conditions it may be possible once again to say: “Omnia sunt communia.”

공유지는 빠르거나 또는 느렸을지도 모른다; 싸기 보다는 한층 좋게 무료다; 그러나 참으로 목적인 통제 밖으로 - 통제 사회의 통제 밖으로, 전지구적 자본으로부터의 통제 밖으로 - 이다. 단순한, 심지어 잔유한 공유지와 연합의 세포 모델로부터 움직임으로써, 이 논문은 시정에 내부적인 것으로부터 행성적인 것에까지의 수준에서 달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과정을 암시하기 위해 목표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될 수 있고 강화할 수 있는 독특한 양식 - 대지적, 계획자, 네트워크 - 의 유통에 의해 합성된 공산주의를 말함으로써 그것은 그것의 소비에트 스타일 사회주의가 가장 유명한 유일한 것인 한결같은 유토피아의 환각 - 꿈 - 세계로부터 또는 악몽으로부터 깨려고 노력했다, 공통 논리의 복합적 형태로부터 건설된 이종적 공산주의를, 특이성의 공산주의를 찬성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 그것은 다시 한번 말할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공통의 소유이다.”

 

NOTES 

 

1. Giorgio Agamben, The Coming Communit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Harvar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2. Karl Marx. Capital. Volume 1. New York: Vintage, 1977, 125.

3. Karl Marx, Capital Vol. II. New York: Vintage, 1981, 180.

4. David Harvey, The Limits to Capital. Oxford: Blackwell, 1982. 69-71

5. Peter Bell, and Harry Cleaver. “Marx’s Theory of Crisis as a Theory of Class Struggle.” Research in Political Economy 5 (1982). Available online The Commoner: A Journal for Other Values 5 (2002). http://www.commoner.org.uk/cleaver05.pdf

6. Romano Alquati, “The Network of Struggles in Italy,” Unpublished Paper, 1974. Red Notes Archive: London.

7. Sergio Bologna, “The Tribe of Moles.” In Italy: Autonomia—Post-Political Politics, ed. Sylvere Lottringer and Christian Marazzi. New York: Semiotext(e), 1980, 36-61.

8. Bell and Cleaver, 60.

9. See E.P. Thompson, Customs in Common. Merlin, London, 1991; Michael Perelman, The Invention of Capitalism: Classical Political Economy and the Secret History of Primitive Accumula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2.

10. Peter Linebaugh & Maurice Rediker, The Many Headed Hydra: Sailors, Slaves, Commoners and the Hidden History of the Revolutionary Atlantic. Beacon, Boston, 2000.

11. Midnight Notes Collective, Midnight Oil: Work, Energy. War 1973-1992. New York: Autonomedia, 1992.

12. John McMurtry, Value Wars: The Global Market Versus the Life Economy. London: Pluto, 2002; Massimo De Angelis, The Beginning of History: Global Capital and Value Struggles. London: Pluto. Forthcoming.

13. Fredric Jameson, Archaeologies of the Future: The Desire Called Utopia and Other Science Fictions. London: Verso, 2005.

14. Karl Marx,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4.

15. 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1965) pp. 1343- 48; Eric Raymond, The Cathedral and the Bazaar: Musings on Linux and Open Source by an Accidental Revolutionary, O’Reilly Media, New York, 2001.

16. Peter Lunenfeld, Snap to Grid: A User’s Guide to Digital Arts, Media and Cultures. Cambridge, MA: MIT Press, 2001.

17. Neil Gershenfeld, Fab: The Coming Revolution on Your Desktop—from Personal Computers to Personal Fabrication. New York: Basic 2005.

18. V.I. Lenin, State and Revolution; Spunk Library: An Anarchist Library and Archive, “The Bolsheviks and Workers Control 1921.” Available on-line: http://www.spunk.org/texts/places/russia/sp001861/1921.html

19. Rodney Brooks and Anita Flynn, “Fast, Cheap and Out of Control: A Robot Invasion of the Solar System,” Journal of the British interplanetary Society 48 (1989), pp. 472-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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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전략적 유연성"(배성인, 메이데이, 2007)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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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5 『전략적 유연성』(배성인, 메이데이, 2007)을 읽고 dolmin98@hanmail.net 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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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적 유연성』(배성인, 메이데이, 2007) 표지

 

 1. 이 책은 대략 탈냉전 이후부터 2007년 정도까지의 한미 동맹 전환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특징을 “전략적 유연성”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전략적 유연성이란 무엇일까?

 

 “21세기 효율적 군사전략이라는 기치 아래 이뤄지고 있는 미국의 군사변환전략의 핵심은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를 통해 군사력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에 신속화, 기동화, 정밀화를 통해 군사력을 효율화해 능력(질적 측면)에서는 더욱 더 향상된 21세기형 군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는 유사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활용할 수 있는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해 ‘전략적 유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유연성은 해외 각 지역 미군의 역할과 작전범위를 지역적 지구적으로 확대하고(역할 변경), 이를 위해 미군을 신속기동군체계로 전환하여 부대와 기지를 통합하고 재배치하며, 변화된 미군의 역할과 군사적 기능에 대한 동맹국들의 공동협력체계를 형성(지역동맹화)하는 것 모두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Mational Security Council) 스스로 고백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략적 유연성은 동맹재편의 소프트웨어, 기지 재배치와 군사혁신은 그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셈이다.
 쉽게 말하자면 주한미군을 포함한 전세계 주둔 미군이 특정지역에 얽매이는 둔중한 ‘붙박이 군대’가 아니라 기동성과 신속성을 갖춘 ‘기동 타격대’ 성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 패러다임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략으로 대테러 전쟁과 공세적인 선제공격 독트린을 정식화하고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며, 그 중심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있다.”(배성인, 『전략적 유연성』, 메이데이, 2007, 80~81쪽)

 

 그러므로, “동맹재편의 소프트웨어”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받아들였던 참여 정부가 “그 하드웨어”인 평택미군기지 확장에 나섰다는 셈이다. 자세한 내용들을 넘기고 결론의 일부를 읽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명확하다. 그것은 첫째, 주한미군이 한반도 이외의 분쟁지역에 언제든지 자유롭게 투입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이 국제적 분쟁에 연루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의 작전범위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한미동맹의 성격이 지역동맹화의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한미동맹은 어디까지나 한반도내에서 전쟁방지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전략적 유연성을 합의함으로서 주한미군의 작전범위가 최소한 동북아지역으로 확장되게 될 것이다. 결국 한미동맹의 지역동맹으로서의 성격변화는 동북아지역의 불안정 요인이 될 것이다.
 셋째, 미국의 패권전략 틀에 공고히 편입됨을 의미한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주요 핵심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략에 한국이 불가피하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만약 중국과 대만 간 분쟁이 발생한다면 한국은 실질적으로 분쟁에 연루될 것이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규정된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 목적에 어긋나며, 한국이 미국의 전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미국의 전초기지가 될 경우, 한국은 중국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고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 체제에 편입될 것이다. 또한 중국과 북한의 반발이 예상되고 한국군도 전력 ‘투사’의 대상이 된다는 중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설령 한국군이 미국의 대중국 군사행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더라도, 주한미군이 대중국 군사작전에 투입되거나 한국에 있는 주한미군기지가 대중국 군사작전에 이용된다면, 이것만으로도 한국이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미국은 오산, 평택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 서남부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시키면서 ‘미사일방어 벨트’를 만들고 있다.
 결국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주한미군의 역할변화’나 ‘한미동맹의 성격변화’를 의미하는 한미동맹 재편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지역동맹화와 함께 대북 공격 동맹 침 대중국 봉쇄 동맹으로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침략동맹화를 의미한다. 이처럼 전략적 유연성이 겉으로는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말 속엔 이처럼 긴박하고도 심각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앞의 책, 249~250쪽)

 

 이와 같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갖는 정치적 의미에 더해서, 평택미군기지 확장 강행이 갖는 정치적 의미도 읽어 보자! 역시, 자세한 내용을 넘기고 말이다.

 

 “우리는 자본과 국가의 폭력을 평택에서 보았다. 평택투쟁에서 나타났듯이 현재 한국 사회는 주민의 자율적인 영농의지와 주거 선택이라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기본마저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현재 평택에는 미군기지가 들어서지만 평택투쟁은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이 이름에서도 표현되듯이 ‘땅’의 문제로 집중되었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제대로 알려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땅’이라는 대중적 공감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접목하여 투쟁을 전개했어야 했다. 이것이 평택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학습효과이자 교훈이다.
 또한 한미FTA 저지투쟁과 평택투쟁이 본질적으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양자가 상호보완적 관계 속에서 서로 상승 발전하는 투쟁이 되도록 목적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구축을 위해 평택에 이어 군산, 제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서해안 벨트를 중심으로 주한미군을 재배치하고 있으며, 평택, 군산, 제주를 중심으로 한 평화운동세력은 여전히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미군기지 재편과정에서 기지의 확장과 재배치는 지역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추진되고 있으며, 오로지 주민들에게는 보상에 대한 의견수렴만이 보장될 뿐이다. 국가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물리적 폭력이나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현지 주민들 외에는 불순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차단시키고 있다. 이것은 미군기지뿐만 아니라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지역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이다.”(앞의 책, 262~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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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제주특별자치도 해군기지사업단 정문 앞 강정사수 기지건설 저지 7~8월 비상투쟁 선언 기자회견에서. 출처 : 카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재인용(http://www.na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644)

 

 2. 개인적으로,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가 2006년 5월 4일 행정대집행으로 고비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행정대집행이 “국가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물리적 폭력이나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현지 주민들 외에는 불순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창후 서귀포시장은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심을 거듭하던 끝에 오늘(29일) 제주해군기지 예정지 내 국유지 농로 등의 용도폐지 요구를 수용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이번에 국유지에 대한 용도폐지가 결정됨에 따라 향후 강정마을 주민이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 등에 설치한 천막 등을 철거하는 행정대집행 시기와 주체 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윤주형, “제주해군기지 예정지 내 국유지 용도폐지 결정”, 『제민일보』, 2011년 7월 29일,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960) 그래서,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도 행정대집행으로 고비를 맞을까 봐 개인적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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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일 파주 무건리 무건리 훈련장 확장 저지를 위한 3주년 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무건리훈련장 확장반대 주민대책위원회 주병준 위원장. 사진 출처 :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http://www.spark946.org/bugsboard/index.php?BBS=s_news&action=viewForm&uid=2915&page=1)

 

 3. 개인적으로, 2002년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이 계기라고 생각한다. 이라크파병반대 운동과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이 있었다. 2008년 촛불 봉기가 계기라고 생각한다.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은 단일의제적 성격과 네트워크적 성격이 있었다. 촛불 봉기는 단일의제적이지 않은 성격과 네트워크적 성격이 있었다. 이처럼 다중은 극복한다고 생각한다.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 운동을 단일의제적이지 않은 성격과 네트워크적 성격을 가지고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짧은 생각이나마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2002년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과 2008년 촛불 봉기에서의 “교훈”이다. 왜냐하면, 2011년 8월 1일 월요일 3주년을 맞은 무건리훈련장 확장 저지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의 무건리 훈련장 확장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평화군축팀, “무건리 훈련장 확장 반대 촛불 3주년 행사”,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http://www.spark946.org/bugsboard/index.php?BBS=s_news&action=viewForm&uid=2915&page=1)와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 운동 등과 같은 운동들이 반성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이 되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악이 나올 지도 모른다.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들썩거린다.

 

 끝으로, 촛불 봉기를 다루고 있는 『미네르바의 촛불』(조정환, 갈무리, 2009)로 교정하시길 부탁드린다. 부족한 내 이야기의 논리적 비약들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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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교육학 세미나] 앎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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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표지


 

안녕하십니까? 다중지성의 연구정원 다중 교육학 세미나팀입니다.

 

세미나는 2~3시간 동안, 요약 발제 후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현재 다중 교육학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교재는 "앎의 나무"(움베르또 마뚜나라·프란시스코 바렐라, 갈무리, 2007)입니다. "인간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뿌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학습과 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미나 교재 후보는 "푸코와 교육"(스티븐 제이 볼 외, 청계, 2007),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 나남, 2003), "있음에서 함으로"(움베르또 마뚜나라, 베른하르트 푀르크젠과의 대담, 갈무리, 2006), "비물질노동과 다중"(질 들뢰즈 외, 갈무리, 2005) 등입니다.

 


 

세미나 시간은 격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입니다. 장소는 서울 지하철 2, 6호선 합정역과 2호선 홍대입구역 중간 성지빌딩 4층입니다.

 

세미나 회비는 월 2만원입니다. 2만원을 내시면, 다중 교육학 세미나를 비롯해 미학 - 시학, 불어 강독, 영어 강독 등 연구정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세미나에 갯수에 관계없이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세미나 문의는 다중지성의 연구정원 다중 교육학 세미나 게시판(http://waam.net/xe/pedagogy)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찾아오시는 길

다중지성의 정원 약도


 

1.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 ― 홍대입구역 방면 약 150M 전진 ― 우리은행에서 좌회전 후 40M 전진하면 오른편에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 횡단보도를 건너 bico N 건물 왼편 골목으로 들어감 - 30M 전진하면 오른편 위쪽에 은색 바탕의 다중지성의 정원 간판이 있습니다.

 

2.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1번 출구 ― 합정역 방면 약 250M 전진 ― (구) 청기와 주유소를 지나 20M 전진하면 오른편에 경남예식장이 있습니다 - 경남예식장과 현대자동차 대리점 사이 골목으로 들어감 ― Befurco에서 좌회전 후 20M 전진하면 왼편 위쪽에 은색 바탕의 다중지성의 정원 간판이 있습니다.

 


 

3. 버스(경남예식장 정차) : 파랑(간선) 271, 570, 602, 603, 604 초록(지선) 5712, 5714, 6712, 7012, 7016, 7711, 7716 빨강(광역) 1100, 1200, 921 검정(공항) 602

 


 

4. 마을버스(경남예식장 또는 우리은행 정차) : 마포구 05, 06, 09, 1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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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

[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hwp (1.14 M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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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

dolmin98@hanmai.net 돌민

 

0. 군사·외교·안보 분야의 성역화

 

묻지 마 개발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듯이, 묻지 마 군사·외교·안보도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어야겠다. 그 가운데 하나인 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 문제도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어야겠다. 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불필요한 제주해군기지를 무조건 짓겠다는 묻지 마 군사·외교·안보 분야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우선, 연표부터 시작해 보자.

 

1. 연표1)

 

1993년 12월, 제주 해군기지 신규소요 제기(해군본부)

 

1994년 화순항을 제주지역의 신규항만으로 지정해 3단계로 개발 계획(해양수산부)

1단계(2001년)로 화순항 동쪽에 유류·어선부두,

2단계(2006년)로 화순해수욕장을 매립해 화물부두 조성,

3단계(2011년)로 용머리 방면으로 국제여객선과 마리나 시설 계획

 

2001년 7월, 해군본부가 해수부를 상대로 화순항에 해군전용부두 수용여부 타진

 

2002년 5. 16~17, 함상토론회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과 해양안보”를 통해 외교안보연구원 이서항 교수 전략기동함대 제주건설을 제안

2002년 6월. 해양수산부 2차(2002년-2011년) 연안항 항만기본계획(안)

여객·일반화물 부두로 계획됐던 화순항 북·서쪽이 보안항구로 변경 계획

2002년 7월. “도민대책위(준)”, “안덕면대책위”출범

해군기지건설계획 철회 요구성명 이어짐. 반대운동 본격화

2002년 10월. 제주도, 화순항 해군부두 건설 공식 반대 입장 해양수산부 제출

제주도, 화순항 해군부두 도민설문조사 결과 발표(반대 58.2%, 찬성 24.9%)

2002년 12월.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화순항 문제 백지상태 전면 재검토 약속

제주도의회 화순항 해군부두 건설 반대 결의문 채택

해양수산부, 화순항 해군부두 건설계획 유보 조정안 마련

2002년 12월. 중앙항만정책심의회, 화순항 해군부두 건설계획 유보 결정

보안항구 예정 수역 장래수역 설정, 주민 이해·공감대 형성 후 재반영 여지 부여

 

2003년 6월. 공군의 제주도 항공전략기지 건설 추진 계획 드러남.

 

 

2005년 4월. 제주해군기지추진기획단 구성 - 제주 해군기지 재추진 계획 발표

2006년-2014년 8000억원을 투입해 화순항 일대 39만6000㎡에 해군전략기지를 건설.

함정 20여척이 계류할 수 있는 부두와 지휘·지원 시설을 시설(상주인구 7500여명)

2005년 4월. “제주도해군기지반대 도민대책위”, “안덕면대책위” 재가동

2005년 5월.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계획에 따른 제주지역 영향분석”결과 발표(제주발전연구원)

2005년 5월. 제주도해군기지반대 도민대책위 제주출신 국회의원 입장 표명 발표.

4명의 국회의원 모두 반대 입장을 표명

2005년 6월. 김태환 제주도지사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된 논의 중단 선언

2006년 6월. 5.31지방선거 이후까지 논의 중단 요청

2005년 7월. 국방부 해군기지 강행 파문

국방부 2006년 예산안에 화순항 해군기지 사업비 6억원 기획예산처에 요구

제주도 “해군기지 예산반영 중단” 공문서로 국무총리실에 제출

2005년 9월. 해군기지 위미항 건설 검토 - 기초조사 계획 발표

2005년 11월. 재향군인회 등 “제주해군기지범도민유치위원회” 구성

2005년 11월. 국회 국방위, 해군기지 환경영향평가 사업비 5억6천 “조건부” 통과

2005년 12월. 국회 예결특위, 해군기지 5억6천 전액 삭감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 삭감 강력 주장 “도민동의 있을 경우 예비비 사용” 조건부 삭감

 

2006년 4월. 공군 “2006~2010년 국방중기계획” 언론 보도

공군, 2008년부터 약 4,400억원을 들여 제주에 전략기지 건설한다는 계획

제주도 국방중기계획에 공군전략기지 건설계획을 삭제해 줄 것을 공식 요청

2006년 4월. 5.31지방선거 도지사후보 입장 발표

해군기지, 진철훈·김호성 “경제적 효과”찬성…현명관·김태환 “긍정적” 검토

공군기지, 소음·평화의 섬 이미지 훼손 등…4명 후보 모두 “반대”

2006년 5월. “제주도해군기지반대도민대책위“, “군사기지반대도민대책위”로 재출범

2006년 5월. 방위사업청, 해군전략기지 건설 강행 방침 발표

방사청 “2006년 주요사업계획“에서 2014년까지 제주에 해상 기동전투전단의 수용이 가능한 해군전략기지를 조성할 계획 발표

2006년부터 2년간 환경·재해·교통 영향평가를 벌인 후 2008년부터 착공 계획

2006년 6월. 김태환당선자-해군 해군기지 T/F 구성 합의, 논의 재개함

2006년 6월. 방사청, 제주해군기지 대상지 9월 선정계획 밝힘

화순·위미 놓고 7월 타당성 조사 -> 9월 후보지 선정 -> 2007년 7월 매입

2006년 7월. 제주도, 해군기지 T/F 구성-유치여부 본격논의

사전협의설, 명분쌓기용, 구성원 교체 등 T/F 무용론 등 제기됨

도민대책위와 지역대책위를 중심으로 T/F 해체 및 공정한 구성 요구함

2006년 8월. 공군 “2007~2011년 중기계획”에서 공군전략기지 건설 계획 드러남

“남부 탐색·구조부대”로 명칭만 바꿔 제주 서남부 “군사기지화”야욕 노골화

김태환 지사는 5.31 당시 공군기지 철회 없이 해군기지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지만 T/F 팀에서 공군기지문제 다루지 않겠다는 해군·공군기지 분리 대응 입장 밝혀 “논란”예상

2006년 8월. 3기 화순항 해군기지반대 안덕대책위 출범, T/F팀 해체 요구

2006년 8월 29일, 도대책위 제주도 해군기지 T/F팀 불참 및 해체요구 기자회견

2006년 8월. 해군,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영향평가” 이미 일방적으로 추진

“도민동의 거친 후 예산집행” 국회 의결과도 배치 “논란”

제주도, 용역발주 사실 알면서도 지금까지 “침묵” 일관

또한 “기지건설 전제 11월까지 후보지 결정을 金지사와 이미 합의했다”고 발표함

그러나 제주도는 해군과 그런 합의를 한 사실이 전혀 없음을 강조함

2006년 9월. 국무총리실 김태환지사 논의중단 이후 8월 “2006년 7월 이후 기초조사 실시” 결정, 제주도에 통보했음이 드러남

2006년 9월. 도의회 해군기지 상황보고회 답변을 통해 김태환 지사는 “화순항, 관광미항 개발은 어렵다”면서 사실상 군사항 외 대안 없음을 밝힘

2006년 9월. 해군, 내년 예산 140억원 사업비로 편성 요청할 것임을 밝힘

제주도, 해군본부에 “해군기지 건설예산 중단 요구” 공문 발송

2006년 9월 30, 위미2리 해군기지반대대책위 공식 출범

2006년 10월 11일, 3개 대책위 공동기자회견, TF 해체 및 경제효과 논의 중단 등 요구

2006. 10. 16 ~ 19, 제주도군사기지반대도민대책위와 지역대책위 공동 국내 해군기지 소재지역 조사(진해-부산-동해-평택), 같은 기간 제주도 TF 동일 지역 조사에 나섬.

2006. 10. 24, 제주도 해군기지 관련 전국 시민단체 간담회 (오후2시 참여연대)

2006. 10. 26,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간담회를 통해 “군사기지특위 구성” 합의, 구성

2006. 10. 31, 군사기지반대도대책위 - 지역대책위 연석 대표자회의(오후6시, 참여환경연대)

2006. 11. 7, 제주도 해군기지관련 전국 2차 간담회 (참여연대)

2006. 11. 14, 16 도대위, 해군기지 반대 제주시 선전전

2006. 11. 14 ~ 17 , 제주도의회 군사기지특위 국내 해군기지 소재지역 답사

2006. 11. 17, 제주도군사기지반대도민대책위, 안덕면군사기지반대대책위, 위미지역해군기지반대범대책위 공동으로 “군사기지반대 제1차 도민평화대회” 개최

2006. 11. 21, 중국 관영 신화통신, 한국 해군력 증강 “경계”관련 기사 게재, 한겨레신문은 이를 24일자에 소개함.

2006. 11. 28, 위미지역 대책위, 남원읍 13개마을 리장반대서명 포함의견서 도의회 군사기지 특위에 제출

2006. 11. 30, 제주도의회 군사기지특위, 찬반 초청 의견청취 간담회 개최

2006. 11. 30, 알뜨르 비행장 문화재 등록 무산 관련 성명 발표

2006. 12. 1, 제주도 해군기지 T/F 영향분석조사결과 발표

김태환지사, 12월중 국방부, 정부 입장 확인 후 찬반 토론회 등 추진입장 밝힘.

2006. 12. 1, 전국 평화활동가 워크샵 참가자 명의의 해군기지 반대 기자회견(오후 2시, 서귀포시 제주대 연수원)

2006. 12. 3, 심상정 의원 면담 및 국회 예결소위 의원실 자료배포

2006. 12. 4, 제주도의회 군사기지특위, 국무조정실에 설명회 개최 등 요구

2006. 12. 5, 해군기지 반대 제주지역 231명 교사 선언 발표

2006. 12. 5, 참여연대, 참여환경연대, 평통사, 평화네트워크 해군기지 관련 토론회 공동개최(서울 “희망포럼”회의실, 오후 2시)

2006. 12. 6, 제주도, 국무조정실, 국방부에 국책사업 여부, 주관부처 등 질의

2006. 12. 11, 천주교제주교구 정의구현 사제단, 해군기지 반대입장 기자회견

2006. 12. 14, 도의회 군사기지특위, 정부와 해군, 공군 설명회 개최

2006. 12. 14, 참여연대, 녹색연합, 평화네트워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제주참여환경연대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의견서” 발표

2006. 12. 15, 해군기지 예산삭감 당위성을 알리는 국회방문 활동

도민대책위, 설명회 관련 해설논평 발표

2006. 12. 20, 해군기지 반대 도내 대학교수 88인 선언 발표

2006. 12. 20, 김태환 지사, 공군 탐색구조부대 수용입장 밝힘

도민대책위 해군기지 사전포석용이라는 성명 발표

2006. 12. 21, 해군기지 반대 도내 문화예술인 110명 선언 발표

2006. 12. 27, 해군기지 건설예산 국회에서 삭감의결, 20억만 도민동의 조건부 의결함

 

2007. 1. 8, 김태환 지사, 찬반토론 개최(1. 12~13)방안 등을 밝힘

2007. 1, 9, 안덕-위미2리-도대위 연석회의 개최 - 토론회 개최 관련 입장 논의

2007. 1. 11, 해군기지 4자 협의체 제안 기자회견 개최

2007. 1. 11, 지방신문 일간지에 해군참모총장 명의 대규모 광고 개제

2007. 1. 11, 해군기지유치위원회 청년단 기자회견 “반대론자들 전면으로 나서라”

2007. 1. 12, 제주도 환경부지사 기자회견 “협의체 수용, 1월 토론회 강행”

2007. 1. 15, 제주사랑실천연대 “해군기지 협의체 수용 불가” 성명발표

2007. 1. 16, 국무조정실 “해군기지, 평화의 섬 양립 가능하다” 공문을 통해 입장 발표

2007. 1. 16, 해군기지 협의체 구성관련 1차 회의 개최 - 토론회 일정 확정

2007. 1. 17, 제주도환경부지사 기자회견 “협의체 구성 및 토론회 일정 확정” 발표

2007. 1. 18, 일간지에 국방부 차원의 광고 개제 “평화는 지킬 의지와 힘이 있어야······”

2007. 1. 18, 해군기지 TF보고서 분석 회의

2007. 1, 19, 안덕-위미2리-도대위 2차 연석회의 개최

2007. 1. 22, 해군기지 협의체 2차 회의 개최 - 토론회 일정 및 내용 확정

2007. 1. 24, 장상 민주당 대표 해군기지 관련 발언 “도민 동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2007. 1. 26, 남원읍 신례2리 해군기지 반대입장 발표 기자회견 개최

2007. 1. 28,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 해군기지 관련 발언

“평화의 섬 상징과 맞지 않음, 해군기지는 도민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2007. 1. 30, 해군기지 도민 대토론회

2007. 1. 31, 송영무 해군참모총장 김태환 지사 방문, 기지건설 혐조요청

2007. 1. 31, 송영무 해군참모총장 김태환 지사 방문 관련 피켓시위 개최

2007. 2. 1, 현애자 의원 논평 발표 “송영무 해군참모총장 발언”관련

2007. 2. 2, 군사기지반대도대책위 “송영무 해군총장 발언”관련 성명발표

2007. 2. 5, 현애자 의원 “신례2리 대책위”간담회

2007. 2. 5, 제주사랑범도민실천연대 “해군기지 조속 결정, 대책위 비난” 성명 발표

2007. 2. 6, 한라이로-KCTV 해군기지 여론조사 결과 발표

2007. 2. 6, 해군기지 협의체 3차 회의 개최 - 협의체 운영 및 2차 토론회 관련 논의

2007. 2. 7, 해군 위미1리 기초조사 착수 발표

2007. 2. 9, 위미 1리 해군 기초조사 착수 관련 성명 발표

2007. 2. 10, 해군기지 협의체 3차 보완회의 개최 - 토론회 일정 및 설명회 관련 논의

2007. 2. 11, 위미 2리, 신례 2리 공동 기자회견 개최 - 기초조사 관련 입장발표

2007. 2. 12, 한명숙 국무총리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정부입장 공식답변

“제주 해군기지, 군사전략상 필요․평화의 섬과 양립 가능”

2007. 2. 14, 한명숙 국무총리 국회 답변 관련 공개질의서 발송

2007. 2. 14, 해군 위미1리 기초조사 시작

2007. 2. 15, 해군기지영향분석팀(TF팀) 설명회 개최 - 제주컨벤션센터

2007. 3. 3, 서귀포시 연합청년회 해군기지 찬․반 설명회 개최

2007. 3. 6, 해군기지 위미1리반대대책위 결성

2007. 3. 7, 해군기지 찬성단체(제주사랑실천연대) 국방부 방문

2007. 3. 8, 해군기지 협의체 4차회의 개최 - 경제관련 기초조사 결과 논의 등

2007. 3. 9, 위미1리 대책위 공식 출범 기자회견

2007. 3. 9, 국방부․해군, KBS시사파일 제주 출연 “해군기지 위미1리 최적합지” 발언

2007. 3. 10, 위미1리 최적합지 발언과 관련 위미1리 성명 발표

2007. 3. 18, 위미1리 총회에서 해군기지 반대 표명

2007. 3. 19, 군사기지반대대책위, 해군기지 최근 동향관련 기자회견 개최

2007. 3. 19, 해군기지 협의체 4차 회의 개최 - 2차 토론회 일정 확정

2007. 3. 21, 위미1리 반대대책위 출정식 및 결의대회

2007. 3. 27, 해군기지 경제분야관련 토론회

2007. 3. 29, 남원읍 연합청년회, “해군기지 건설계획 철회 촉구” 기자회견 개최

2007. 3. 29, 군사기지반대대책위, 김태환지사 로드맵 발표 계획 관련 입장발표

2007. 3. 31, 해군기지 결사반대 위미1리 촛불기원제 개최

2007. 4. 1, 김태환지사 신변보장 이유로 위미1리 방문 취소

2007. 4. 4, 김태환지사 위미1리 방문

2007. 4. 4, 해군기지 협의체 6차 회의 개최 - 로드맵관련 도지사 면담 요청

2007. 4. 6, 위미1리 반대대책위 도청 앞 집회

2007. 4. 10, 도의회 군사기지 특위․ 김태환 지사 간담회 - 사실상의 로드맵 발표

2007. 4. 11, 군사기지반대대책위, 김태환 지사 도의회 특위 간담회 결과에 따른 입장발표

2007. 4. 13, 국방부 장관 내도, 기자간담회 저지 과정에서 대규모 강제 연행

2007년 4월. 당시 강정마을 회장 윤태정 마을 운영위원회 소집, 불과 87명 참석한 가운데 만장일치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결의, 다음날 유치 신청. 김태환 지사 개입 의혹

향약에서 정한 공고일 위반, 수시 방송의무 위반, 공고내용위반

2007. 5. 8, 노회찬 의원 제주 전투대대 계획 발표

2007. 5. 9, 제주도군사기지반대대책위원회 국방부-제주도 양해각서 의혹 제기

2007. 5. 14, 김태환 지사, 2차례 여론조사 결과 주민 다수가 찬성한다며 해군기지 강정동 유치결정 발표

여론조사 용역 발주, 설문내용, 설문대상 선정 등 문제

2007. 5. 14, 제주도군사기지반대대책위 여론조사 무효 선언 김태환 퇴진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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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의 아픔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의 현기영 작가. "제주도민은 미국과 전 세계에 평화를 외칠 자격이 있다. 평화를 위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제주에 거대한 해군기지가 말이나 되나?"

  

2007년 7월. 강정마을 해군기지 유치결의한 마을회장 해임, 강동균 마을회장 선출

2007년 8월. 강정마을회 총회 - 강정해군기지 유치 찬반 주민투표 실시. 자연 부락 유권자 1,200여명 중 725명 투표 참여, 94%인 680표의 압도적 반대.

 

2009. 1. 13, 국방군사시설 실시계획 승인

2009. 4. 20,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등 450명, 제주 해군기지 실시계획 승인처분 취소소송

2009. 4. 27, 국방부와 국토해양부,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 해군기지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기로 한 협약서 체결

2009년 4월. 환경영향평가 졸속 시행

연산호 현황조사 미비와 보존 및 저감대책 부재, 해양환경의 영향예측 검토 미흡, 공유수면 매립 및 부유사로 인한 저감대책 부재, 공동생태계조사결과 반영 미흡

2009. 9. 22, 해군, 제주해군기지사업 시행을 위해 도지사에게 강정마을 절대보전지역 지정 해제 요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예정지내 절대보전지역 변경(축소) 조사검토서에 따르면 “현장조사 결과 본 지역에 대한 절대보전지역 지정 당시와 환경여건이 변화되지 않았음”이라고 기재되어 있음

절대보전지역은 제주 전체 면적의 10%에 불과

2009. 12. 17, 제주도의회 절대보전지역 변경(축소) 날치기 처리

도의회, 재석의원 파악 안함, 도의원들의 질의, 토론 신청 무시, 기명전자투표가 아닌 거수표결 실시, 일사부재의의 원칙 위반한 2차례 표결 실시

 

2010년. 강정마을, 세계지질공원 인증

2010. 1. 17, 강정주민들 공사저지투쟁 전개(30여명 연행)

2010. 3. 15, 국방·군사시설 실시계획 변경승인처분, 서울행정법원 적법하다고 판시

2011. 6. 16 서울고법 항소심 선고공판 예정

2010. 6. 2, 해군기지 윈윈 해법을 공약으로 내세운 우근민 도지사로 당선

2010. 8. 19, 강정마을, 제주 전역을 대상으로 민주적, 투명한 입지선정절차를 다시 진행하고, 그래도 입지선정이 되지 않을 경우 해군기지를 수용하겠다는 조건부 수용제안서 전달, 우근민 수락

2010. 10. 31, 강정마을, 제주도정의 조건이행 불충분을 이유로 조건부 수용 전면 백지화 선언

2010. 11. 15, 우근민 도지사,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업 수용 공식화

2010년 12월. 제주해군기지 건설 예산 포함 2011년도 예산 국회 날치기 통과

2010년 12월. 제주지방법원, 강정마을 주민들이 제주도지사를 상대로 제기한 “절대보전지역 변경(해제)처분 효력정지 및 무효확인 등 소송”에서 주민들에게 “원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

2010. 12. 22, 임시 주민총회에서 결사항전 결의

2010. 12. 27, 해군기지 기공식 저지투쟁 전개(32명 연행, 주민 2명 포함)

 

2011. 2. 16, 해군기지 공사 시작

2011. 3. 15, 제주도의회 절대보전지역 해제취소 재결의

2011. 3. 31, 해군기지 건설 반대 주민대책위원회 결성

2011. 4. 2, 제주해군기지 반대 노동자 평화문화제 개최(1,300명 참가)

2011. 4. 6, 불법공사 중단 촉구 과정에서 연행 구속된 양윤모 선생 무기한 단식 돌입

2011. 4. 7, 우근민 도지사 제주도의회 절대보전지역 해제취소 재결 재논의 요구

2011. 4. 14,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영리병원 빼고 제주특별법 개정안 통과

2011. 5. 4, 야 5당의 국회의원 21명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의 조사활동 착수, 결과 나올때까지 해군기지 건설 중단 촉구

2011. 5. 12, 진상조사단 제주 방문, 우근민 도정에 6월말까지 공사 중단 요청

2011. 5. 18, *광주고등법원 제주지사에서 “절대보전지역 해제”에 대한 2차 항소심 기각

2011. 5. 30,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 발족

 

2. 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

 

2.1. 환경영향평가와 개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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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암 하나로 이어진 구럼비 바위3)

 

“제주도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 2007년 세계자연유산등재,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 등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 3관왕을 달성했고(전세계 유일)”4), 이외에도 “제주도 강정 앞바다는 경과보전지구로 1등급, 천연기념물인 연산호 군락이 있는 문화재보호구역, 강정 해안가는 길 약 800미터에 달하는 ‘한 덩어리’ 용암바위인 ‘구럼비바위’, 해안 주변 토지 대부분이 역사 유물 산포지, ‘멸종 위기종’인 ‘붉은발 말똥게’의 대규모 서식지”5)라고 한다.

따라서,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강정의 바다는 사라지게 된다. 공유수면 매립면적은 6만여 평으로 해양생물의 서식지 소멸과 생태계의 절멸은 불가피하다. 경과보전지구 1등급으로 선정된 강정의 바다, 그리고 멸종위기종인 말똥게, 연산호 모두 사라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행정법원은 국방·군사시설 실시계획 변경승인처분에 대해 적법하다고 2010년 3월 15일에 판시하였다. 물론 서울고등법원이 항소심 선고공판을 2011년 6월 16일에 예정하고 있는 즉 아직 재판에 계류 중으로,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중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환경영향평가가 그나마 졸속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영향평가가 실시되었다는 명분으로 서울행정법원이 국방·군사시설 실시계획 변경승인처분에 대해 적법하다고 판시하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환경영향평가가 실시되었다는 명분이 가지는 가능성, 생태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환경영향평가가 실시되었다는 명분이 생태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했으니 생태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면죄부로서 기능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환경영향평가 제도와 관련해서는 한양대학교 법과대학교지편집위원회 본(本)에서 2004년에 낸 『본(本) 19집』에 실린 특집 기사들을 참고할 수 있다. 천성산 “꼬리치레 도롱뇽”과 그 대변인 “도롱뇽의 친구들”이 한국 고속철도건설공사를 상대로 “고속철도 양산시 천성산 구간 공사착공금지 가처분신청”을 2003년 10월15일에 냈던 경우처럼 “‘자연의 권리’ 소송”7)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가능성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신(新)개발주의”라는 것의 문제점이다. 둘째는 이명박 정부의 개발주의라는 문제점이다. 강정마을과 제주해군기지와 관련해서 이 두 가지는 얽혀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속가능하지 않으면 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발을 하되 되도록 지속가능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신개발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개발주의라는 막무가내 식의 묻지 마 개발이 있다.

신개발주의와 관련해서는 『신개발주의를 멈춰라!』(조명래 외, 환경과생명, 2005)라는 책을 참고할 수 있다.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 문제와 새만금 간척사업 문제와 그리고 부안 핵폐기장 문제와 같은 생태 문제들이 국민참여를 강조했던 참여정부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참여를 강조하는데 여하튼 개발하는 쪽으로 참여를 강조하는 그래서 참여를 강조하는 개발주의가 신개발주의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개발주의는 다중지성의 정원 조정환 대표가 쓴 「4대강 사업에 관한 10가지 테제」{아우또노마 M 편집위원회, 『아우또노마』 7호(『자율평론』 33호), 2010년 3분학기}를 참고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4대강 살리기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2008년 촛불시위에서 터져 나온 생명평화의 요구를 속이기 위해 이름만 살리기로 바꾼 4대강 죽이기의 묻지 마 개발주의라는 것이다.

 

2.2. 평화의 섬과 대결주의

 

2.2.1. 평화의 섬

 

우선, 제주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회에서 2011년에 낸 <제주해군기지 사업 바로 알자 5문 5답> 중에 “다섯째, 평화의 섬과 양립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살려보자.

 

“제주는 수많은 도민이 희생된 4·3의 비극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비극을 승화시켜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 ‘2005년 1월 27일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강정마을회의 대국민호소문에 따르면, ‘해군은 회유와 매수로 마을회와 의사결정을 조작하여 입지를 선정했고, 주민들을 협박하고 이간질시키며 공사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은 주민들을 구속·구금하고 벌금 폭탄을 퍼 붇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마을 공동체는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제주의 환경을 파괴하고 주민의 인권을 유린하며 들어오는 제주해군기지가 평화의 섬과 양립할 수 있을까요?”8)

 

그리고, 2011년 6월 8일에 열리는 민주당 최고위원회가 제주해군기지 반대를 당론으로 정할 것을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2011년 6월 7일 제주해군기지 문제의 적극 해결을 촉구하는 제주도 각계 인사 기자회견의 기자회견문에서도 한 부분을 살펴보자.

 

“우리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제주 4․3문제의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에 나섰던 소중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에 대해 진상규명과 공식 사과에 임했던 역사적인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9)

 

이 가운데,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2002년 화순항 건설을 목표로 시작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재검토하겠다며 일시나마 “보류”했다가 2005년 재차 추진했음을 덧붙여야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에 대해 진상규명과 공식 사과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해군지지 건설은 4·3을 승화시켜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 지정한 평화의 섬과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대치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4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합의하고, 평택미군기지확장에 나서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재정 씨가 2009년 11월 29일 인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평화협정과 함께 하는 ‘2009 송년의 밤’” 행사에서 한 강연록을 살펴보자.

 

“2차 남북정상회담 때 우리가 가지고 간 가장 핵심적인 안은 다른 게 아니라 남북 간에 전쟁은 절대로 막아야 된다. 군사적 충돌은 절대로 막아야 된다. 조그만 군사적 충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남북 간의 평화를 깨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해 함대와 함정 간에 군사분계선도 없고 완충지역도 없는 서해 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막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 (중략)

그러면 군사적 충돌을 어떻게 막을까? 막는 방법을 발상의 전환을 하자! 경제적 개념을 가지고 평화를 만들고 그 평화의 개념으로 군사적 충돌을 막자! 그래서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의 가장 중요한 제안은 뭐였냐 하면 첫째로는 남북의 어민들이 공동 어로구역을 가지고 서로 먹고 사는 길을 해결하는 걸로 하자! 그러면 군사적 충돌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남북의 어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공동어로구역을 만들어서 이 군사적 충돌을 막자! 이 경제적 이익 이것이 결국 평화 관계를 만들고 이것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

이것과 함께 해주에서 나오는 항로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자. 지금은요 해주 항에서 나오는 배가 저 옆 공해로 빠져 나가가지고 쭉 내려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름값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거죠. 만약에 이것이 직선으로 내려오면 시간도 절약되고 기름도 절약됩니다. 해주항로를 우리가 내줄테니 그 대신 그쪽에 해주 공업단지를 만들자! 개성공업단지가 경공업 공업단지라면 해주에 만드는 것은 중화학 공업단지로 만들자! 그래서 해주의 공업단지, 개성의 공업단지, 인천의 국제도시 그리고 영종도의 국제공항 이것이 다 서로 연결되면 서해라는 곳이 경제적인 개념에서 군사 충돌을 완전히 막아낼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내는 지역이 되지 않겠느냐!“10)

 

이런 참여정부는 평택미군기지확장을 추진한다.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의 일부분이 된다. 미국이 중국포위를 위해 동북아에서 서남아에 이르는 이른바 "불"안정한 활꼴 모양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고 나토(NATO)의 동진(東進)을 꾀하고 미일동맹과 한미일 동맹을 구축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에 맞서 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로 연결되는 제도련 섬사슬을 뜻하는 것으로 유사시 중국의 1차 해양방위 경계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2020년 2에는 제도련 사이판∼괌∼인도네시아까지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그래서 지역전쟁에서 완승할 수 있는 군사력을 건설한다는 것이 중국의 군사전략11)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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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대외 군사전략을 보여주는 그림12)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를 말하고, 평택미군기지확장에서 전쟁을 말하는 이런 대치는 사실 균열이기도 한데. 백년가는 전쟁기지라는 평택미군기지가 남북정상회담의 평화번영 정책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균열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이라크파병을 결정하고 2005년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것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2003년 이라크파병 당시 국가안보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었던 이종석 씨가 쓴 칼럼을 살펴보자.

 

“노무현은 정직했고 국민에게 솔직했으며 국익 앞에서 자신의 신조도 꺾은 지도자였다. ‘옳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며 고통스러워한 이라크 파병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의의 전쟁이라며 파병을 정당화하려는 외교안보 관리들에게 ‘나는 이 전쟁이 정의의 전쟁인지 모르겠다’라며 정부 안에서 그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 대신 국민에게 한반도 평화와 한-미 동맹이라는 현실적 이해 때문에 파병한다는 점을 솔직히 밝혔다. 정치 역정의 고비마다 현실적 이익보다는 명분을 선택한 그였지만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 때문에 자신의 신조마저 꺾었다. 전후 이라크에서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우리 병사들의 희생을 대가로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파병이 경제적 이권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정확한 현실인식도 가지고 있었다.“13)

 

이런 참여정부는 2005년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한다. 위의 “중국의 대외 군사전략을 보여주는 그림”과 함께 고민해 보자. 제주해군기지와 중국의 1차 해양방위 경계선인 제도련이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라크 파병과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제주해군기지와 평택미군기지확장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평화와 그리고 평화의 섬을 얻을 수 있을까?

 

2.2.2. 대결주의

 

2010년 우리는 1950년 한국전쟁의 1953년 정전 이후 처음으로 상대방 민간인에 대한 포격전을 경험했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을 겪으면서 군사동맹의 강화로 점철되는 과정이었다. 한미 당국은 작년 10월에 있었던 제 42차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공동성명과 한미국방협력지침을 채택하여 군사동맹 강화를 명문화하였다.”14)

이는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 한미일 삼각동맹의 강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중국을 겨눈 창이라고도 불리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것과 한미일 삼각동맹의 대표적인 사례인 미사일 방어체계(MD, Missile Defense) 구축에 나서고 있다. “계속 지적되어 왔듯이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엠디(MD) 체제 편입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등 해양 패권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해군은 제주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미 항모전단이 입항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에 주로 배치된다는 이지스체계를 탑재한 한국형 구축함 개발사업(KDX)-III가 엠디 용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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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북 미사일 요격 개념도16), 미국의 엠디(MD) 체계17) ▽

 

미사일 방어체제는 “미국 본토와 해외 미군기지, 동맹국이 북한·이란 등 적대국의 탄도 미사일 공격을 받을 경우 요격 미사일 및 레이저 무기 등으로 요격하는 방어체계다. 대기권 밖에서 요격하는 상층방어, 대기권 안의 하층방어, 지휘 및 통제체계 등 네 가지 체계로 구성된다.”18)“2001년 부시정권은 자신의 세계 패권전략인 엠디를 구축하기 위해 북한 위협을 과장했고 한국 정부에게도 엠디 참여와 지지를 강요했다. 한국 정부는 엠디 참여를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군은 2003년부터 물밑에서 엠디를 구축했으며 2006년 북한 핵실험을 구실로 패트리어트 미사일, 탄도탄 조기경보레이더, 탄도탄작전통제소로 이루어지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 중에 있다.”19)2011년 4월 “15일 국방부는 한미 두 나라가 작년 9월에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KAMD)’구축과 운용을 위한 공동연구 약정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지난 13~14일 워싱턴에서 열린 엠디 공동연구 실무회의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기술적, 전략적 대응방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브래들리 로버트 미 국방부 차관보는 공동연구의 목적이 ‘미국의 지역 탄도미사일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의 유용성을 한국이 결정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반면 국방부는 ‘엠디 공동연구가 효과적인 한국형 엠디 구축을 위한 것일 뿐 절대 미 엠디에 참가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20)“국방부는 한국형 엠디가 미국 엠디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종속적 한미동맹 아래서 한국형 엠디가 북에 대한 엠디 공격작전(선제 공격 포함) 및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미국 엠디에 복속되는 것은 시간문제다.”21)

이런 엠디 계획을 비롯한, 중국에 대한 포위 전략에 함께 하면서도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국지도발 대비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며 전력증강 우선순위 변경을 밝히고 있다. 즉,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후 국방부는 중국·일본 등 주변국의 미래 위협과 첨단 미래전 대비가 아니라, 현존 위협인 북한의 국지도발 대비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며 국방부가 최근 “대양해군 전략”을 사실상 철회하는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해 대양해군의 모항 구실을 명분으로 추진해온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근거를 스스로 거둬들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음22)에도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대결주의와 중국에 대한 포위 전략에 함께 하는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를 통한 대결주의를 동시에 하겠다는 것이다. 전자에 우선순위를 둘 뿐이지 말이다.

 

3. 균열

 

3.1. 역전(逆轉)

 

이런 강행을 우리는 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얼마나 정당성이 없으면, 그럴수록 강행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2011년 5월 4일 야5당 국회의원들이 국정조사 끝날 때까지 공사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강행할수록 해군 스스로가 정당성이 없음을 그래서 무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무리에 우리는 의혹을 가진다. 신구범 전 지사는 이런 무리한 강행을 두고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안보를 빙자한 군 내부 자체 세력 확장과 이익 도모를 위한 해군의 몸집 불리기에 불과하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23)매슈 라이스는 “한국인들도 강정 기지 때문에 세금을 내야한다. 그러나 ‘안보’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세금이 비생산적으로 사용되리라는 이야기다. 강정 기지와 관련,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해상 주권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 역시 남해의 안보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말리아 해적이 최근 아시아 해상에 나타나기라도 했나? 그렇지 않다면 제주도의 안보를 위협하는 불안 요소는, 일부 관광객이 일삼는 못된 짓밖에 없지 않을까. 더욱이 강정 기지 때문에 한·중 관계만 악화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강정 기지에 애면글면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강정 기지에 레이더·미사일 등을 설치하고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일 록히드마틴 사와 한국 정부 간에 혹시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24)라고 말했다.

 

3.2. 균열

 

매슈 라이스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G20 서울 정상회담에 임하는 동안 중국과 미국 정부가 보여준 경제 및 군사 분야에 대한 입장은 한국이 앞으로 국제 외교 무대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충분한 근거 자료를 제시했다고 본다. ‘태평양 세기(Pacific Century)’가 시작되면서 아시아 이웃 국가와의 무역 및 협력 관계 증진이 한국의 안보와 번영을 결정짓는 시대가 되었다. 방위산업 기반 경제를 선호하는 현 정권에 대한 가치 판단은 같은 길을 앞서가고 있는 일본이 현재 겪는 문제를 살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9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센카쿠 열도 분쟁을 다시 생각해보자.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미·일 안전보장 조약’에 의거해 센카쿠 열도에서 일본의 주권을 보장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신의 있는 친구 일본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중국이 해당 지역에서 석유와 가스 시추를 시작했을 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1월 5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 동맹이 지금보다 더 굳건했던 적은 없다. 미국은 한국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힌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오바마는 북한을 향해서도 ‘북한이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한국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을 향해서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G2 회담을 제안한 것이 전부였다.

결국 서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우월적 지위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던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대중 정책이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클린턴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 스타인버그(현 국무부 부장관)가 제안한 미·중 간 ‘상호 보증(mutual reassurance)’ 개념은 오바마 행정부 들어 ‘전략적 보증(strategic reassurance)’ 개념으로 격상됐다. 지난해 9월24일 신미국안보센터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스타인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도·브라질 같은 신흥 강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상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핵심 전략 과제이며, 전략적 보증을 이룰 핵심이다.’”25)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부설 평화·통일연구소 부소장인 박기학 상임연구위원은 “한편 간 나오토 총리는 한국과의 동맹을 추구하는 속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북 독자외교 노선을 천명하고 있는데 이는 한미일 삼각동맹이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언제든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26)라고 하기도 한다.

강행이라는 무리를 하고 그래서 의혹을 사면서까지 지키려는 제주해군기지와 한미일 삼각동맹이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미동맹의 약속은 영원한 것일까? 2011년 6월 9일 “칼 레빈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은 리언 파네타 국방장관 내정자를 상대로 한 인준청문회에서 주한미군 기지 이전을 비롯, 동아시아 주둔 미군 배치계획의 전면재검토를 거듭 촉구했다.”27)

 

3.3. 혁명

 

“지구상 가장 빠른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는 중국 안후이성의 17세의 한 청년은 아이패드를 사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떼어 360만원을 받고 상품으로 팔았다. ‘중국’은 조반니 아리기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이며 친환경적이고 인적인 자원에 의존해 보다 평등한 분배를 실현할 새로운 문명으로 기대한 거대 주권국가이다. ‘아이패드’는 자본주의적 미디어, 정보, 인지혁명의 총아이다. 그 청년이 제공한 ‘신장’은 현대의 첨단 생명공학이 돼지와 인간 사이의 이종간 이식을 성공시키기 위해 몰입하고 있는 바로 그 생명기관이다. ‘상품’은 맑스가 부르주사 사회의 ‘세포라고 불렀던 것, 즉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구성단위이다.”28)

주권, 인지, 생명, 상품이 서로 교직되고 있는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혁명을 생각한다. 한미동맹과 한미삼각동맹을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영원하지 않게 만들고,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영원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율배반을 속에서 나는, “‘호전(好戰)하는 무리의 눈에는 요새로만 보이기 쉬운’ 그 곳, 제주”29)를 생각한다. 제주도는 유독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 공군기지로 사용되기도 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이 제주도에 7만 명을 결집시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고도 한다. 만약 미군이 실제로 오키나와를 점령한 후 제주를 공격했으면 최소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키나와에서 12만 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또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미국에 영구 기지로 제공할 것을 검토했었다고도 한다. 또 1949년에는 중공군과 싸우던 장개석 정부가 제주도의 해, 공군기지를 제공해달라고 이승만 정권에게 요구한 사실도 있다고 한다.30)4.3 항쟁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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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실·한국진보연대(준)·참여연대·녹색연합, 「제주도 군사기지 추진 관련 주요 경과」, 『토론회 제주 군사기지화의 문제점과 그 대안』 자료집, 미간행, 2007, 2~6쪽;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해군기지 안 돼! 제주 강정마을을 지켜 주세요>, 2011(http://www.spark946.org/webzine/20110511_jeju/20110511_jeju.htm); 참여연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경과보고(6/8 현재)」, 2011(http://blog.peoplepower21.org/Peace/31294); 인터넷 카페 해군기지 건설 반대! 강정을 생평평화의 마을로!, 「제주 해군기지의 문제점」, 2011(http://cafe.daum.net/peacekj/49kU/322) 참고.
2)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홍보팀, 주민의사 무시하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철회 촉구 기자회견 <[6/25] 반세기 전 전쟁과 국가폭력에 희생됐었던 제주를 또다시 미국의 패권전략을 위해 희생시킬 셈인가?>, 2007년 6월 25일(http://www.spark946.org/bugsboard/index.php?BBS=s_news&action=viewForm&uid=1560&page=118).
3)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해군기지 안 돼! 제주 강정마을을 지켜 주세요>, 2011(http://www.spark946.org/webzine/20110511_jeju/20110511_jeju.htm).
4) 위의 글.
5) 제주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회, <제주해군기지 사업 바로 알자 5문 5답>, 2011, 1쪽.
6) 위의 글.
7) “‘자연의 권리’ 소송은 자연물이 직접적인 소송의 당사자가 되고 인간이 그에 대한 대변인이 되어 당사자인 자연이 침해당하고 있는 이익(자연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침해)에 대해 판단을 하고 이에 근거한 판결을 요구하는 소송으로 지금까지 제기된 소송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목적과 내용을 가진 새로운 유형의 자연보호 소송이다.”(양철호, 「자연의 권리와 도롱뇽 소송」,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교지편집위원회 본(本), 『본(本) 19집』,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2004년, 113쪽.)
8) 제주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회, <제주해군기지 사업 바로 알자 5문 5답>, 2011, 2쪽.
9) 제주해군기지 문제의 적극해결을 촉구하는 제주 각계 인사 일동, 제주해군기지 문제의 적극 해결을 촉구하는 제주도 각계 인사 기자회견문 <민주당은 책임있고 적극적인 자세로 제주 해군기지 문제해결에 나서야 합니다.>, 2011년 6월 7일.
10) 이재정, 「평화협정과 한반도 통일」,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91호, 2010년 1월호, 17~18쪽.
11)「2011년도 평통사 워크숍 “올해는 출발부터 조짐이 보여”」,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101호, 2011년 1월호, 19쪽.
12) 위의 글.
13) 이종석,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성>, <<한겨레>>, 2011년 5월 26일(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9904.html).
14) 고영대, 「대화국면으로의 전환과 한미동맹 강화 기도」,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101호, 2011년 1월호, 6쪽.
15) 고유기, 「“호전(好戰)하는 무리의 눈에는 요새로만 보이기 쉬운” 그 곳, 제주」,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64호, 2007년 1월호(http://www.spark946.org/bugsboard/index_young.php?BBS=nuri_1&action=viewForm&uid=231&page=63).
16) 반종빈, <미, 북 미사일 요격 개념도>, <<연합뉴스>>, 2009년 2월 26일(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ArticleGraphic/YIBW_showArticleGraphicPopup.aspx?contents_id=GYH20090226000300044).
17) 오혜란, 「미국의 집요한 MD(미사일방어) 참여 요구」,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93호, 2010년 3월호, 23쪽.
18) 김수정·김정욱, <북 스커드 요격할 “한국형 MD” 착수>, <<중앙일보>>, 2011년 4월 16일(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356303).
19) 오혜란, 「평축집회, 100차의 기록」,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95호, 2010년 5월호, 26쪽.
20)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상임대표 : 문규현, 배종열, 홍근수), “한국형 엠디(MD)”구축과 운용에 관한 한미 공동연구 및 관련 약정서 폐기 촉구 기자회견문 <MD 공동연구는 미 MD참가를 위한 수순 밟기다. 한국형 MD 구축과 운용에 관한 공동연구 약정서를 즉각 폐기하라!>, 2011년 4월 18일.
21) 오혜란, 「평축집회, 100차의 기록」,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95호, 2010년 5월호, 26쪽.
22) 권혁철, <야당도 “제주모항 재검토” 한목소리>, <<한겨레>>, 2011년 4월 9일자.
23) 신구범, <“원래는 해군지지 찬성론자였는데…”>, <<제주의 소리>>, 2011년 4월 27일(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98877).
24) 매슈 라이스, <제주 강정 기지는 미국 본토 방어용?>, <<시사인>> 제156호, 2010년 9월 6일(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7770).
25) 매슈 라이스, <한국의 군비 확충 ‘2차 냉전’ 부른다>, <시사인> 제171호, 2010년 12월 31일(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129).
26) 박기학, 「일본 민주당 정권의 보수화와 한·미·일의 노골적인 삼각군사동맹 구축 행보」,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101호, 2011년 1월호, 13쪽.
27) 성기홍, <美상원군사위원장, 주한미군 이전 재검토 촉구>, <<연합뉴스>>, 2011년 6월 10일(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6/10/0200000000AKR20110610005500071.HTML?did=1179m).
28)  조정환, <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을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인지자본주의에 맞서 절대민주주의를 -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에 즈음하여>, 2011년 6월 4일(http://memory-yuinho.org/board/bbs/board.php?bo_table=COMMISSION&wr_id=47).
29) 고유기, 「“호전(好戰)하는 무리의 눈에는 요새로만 보이기 쉬운” 그 곳, 제주」,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64호, 2007년 1월호(http://www.spark946.org/bugsboard/index_young.php?BBS=nuri_1&action=viewForm&uid=231&page=63)에서 재인용.
30)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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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강독 세미나] 전지구적 자율 대학을 향하여

"전지구적 자율 대학을 향하여" 표지


 

 안녕하십니까? 다중지성의 연구정원 영어 강독 세미나팀입니다. 정해진 분량을 함께 읽고 번역하고, 번역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내용에 대해서도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는 "전지구적 자율 대학을 향하여"(교육 공장 모임, Autonomedia, 2009, http://www.edu-factory.org/wp/wp-content/uploads/2010/10/edufactory-book-en.pdf)입니다.

 

 세미나 시간은 토요일 오후 3시입니다. 장소는 서울 지하철 2, 6호선 합정역과 2호선 홍대입구역 중간 성지빌딩 4층입니다.

 세미나 회비는 월 2만원입니다. 2만원을 내시면, 영어 강독 세미나를 비롯해 미학 - 시학, 교육학, 불어 강독 등 연구정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세미나에 갯수에 관계없이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세미나 문의는 다중지성의 연구정원 영어 강독 세미나 게시판(http://waam.net/xe/seminar_English)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찾아오시는 길

다중지성의 정원 약도

 

1.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 ― 홍대입구역 방면 약 150M 전진 ― 우리은행에서 좌회전 후 40M 전진하면 오른편에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 횡단보도를 건너 bico N 건물 왼편 골목으로 들어감 - 30M 전진하면 오른편 위쪽에 은색 바탕의 다중지성의 정원 간판이 있습니다.

2.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1번 출구 ― 합정역 방면 약 250M 전진 ― (구) 청기와 주유소를 지나 20M 전진하면 오른편에 경남예식장이 있습니다 - 경남예식장과 현대자동차 대리점 사이 골목으로 들어감 ― Befurco에서 좌회전 후 20M 전진하면 왼편 위쪽에 은색 바탕의 다중지성의 정원 간판이 있습니다.

 

3. 버스(경남예식장 정차): 파랑(간선) 271, 570, 602, 603, 604 초록(지선) 5712, 5714, 6712, 7012, 7016, 7711, 7716, 빨강(광역) 1100, 1200, 921 검정(공항) 602

4. 마을버스(경남예식장 또는 우리은행 정차): 마포구 05, 06, 09, 1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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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파병반대 운동과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의 기억

 2002년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이 계기였다. 이라크파병반대 운동과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이 있었다. 2008년 촛불 봉기가 계기였다.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은 단일의제적 성격과 네트워크적 성격이 있었다. 촛불 봉기는 단일의제적이지 않은 성격과 네트워크적 성격이 있었다.

 다중은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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