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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나의 소중한 안식처였고 나의 슬픔이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안동이 고향이라고 7살에 고향을 떠나 그 때 어머니는 고향과 형제의 이름을 잊는 것이 제일 두려웠답니다 이름 석자도 쓰지도 읽지도 못하신 어머니 서울 어느집에 식모살이가 너무 힘들어 10살에 어느 아저씨를 따라 황해도 연백으로 바느질 솜씨가 눈에나 어느 지주집의 침모로 다시 지씨집 종가 민며느리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어습니다 사남 삼녀의 여섯째인 나는... 글께나 읽었다고 피난이후 어려운 일 피해 무의도식한 아버지 덕분에 온갖일 마다 안하시고 일곱을 자신이 벌어 가르치시며 아버지 원망 한번 안하시는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하고 안스러웠습니다 큰 형이 자기가 벌어 대학을 가고 둘째형도 공부를 잘해 어려움 속에 대학을 가고 누이들도 최고학부를 가고... 우리 어머니 형들의 입학금을 위해 뼈를 깍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벽 물때를 맞추어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고 낮에는 노동판에 막일을 하고 저녁에는 아침에 캐온 조개를 팔러 나가시고 어머니는 두,세시간 주무시었습니다 날씨가 추어지면 바다 보다는 양키놈 덜 유류저장소에서 나온 휘발류 를 몰래 팔러 다니시고 통금시간에나 들어 오시던 엄니... 나는 들풀처럼 클수 밖게 없었습니다 그 형제들 사이에 나의 존재를 어머니가 거두시기는 벅차기도 했을 겁니다 막내 동생을 본 다섯살부터 끼니도 내가 알아서 챙길 수 밖에 없었고 학교는 둘째누나 손을 잡고 입학을 하고 운동회때 어머니가 한번 오는 것이 막내누나 와 동생과 나의 소원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어머니의 소원도 우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놈들은 머리커 색시 얻으니 지에미 몰라라하고 둘째놈 압구정동 한양 아파트 살며 어머니 가면 둘째며늘년 어머니가 궁상 맞다고 날벼락을 맞을 년놈들 처가 덕에 공장 차렸다고 자랑하는 큰아들놈 우리어머니가 가면 큰며늘년 늙은이 냄새가 난다고 염병헐 년놈들 남의 일인줄 알았는데... 내놈 어머니가 불쌍스러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형놈들 잘나 대학나와 에미 몰라라 하는 형놈들 따를까 봐 나는 인테리 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냥 들풀처럼 살아 가기를 어릴적 나 스스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 어려움속에 결국은 딸년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 파킨슨 병을 얻으시어 한수족마저 떨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신 어머니 내놈 월세방 겨우 면해 지금 사는 열세평짜리 주공의 임대 아파트 얻어 방두칸 짜리로 옮겨 어머니를 모시고... 세째 며늘년 수족 못쓰시는 헌신에 어머니는 고마워하시고 가끔 딸년들 들여다보고 훼방 놓고 같지만 어니 옆에 계시니 행복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상 바꾸겠다고 오른손 하늘로 내졌다가 내놈 좇기는 신세가 되어 집사람과 아이는 처가로 가고 어머니는 동생네로 가시고... 그 잘난 형놈들은 몰라라 했지요 ... 마지막 가시기전 어머니는 울엄니는 집사람에게 그러셨답니다 세째네 집으로 가고 싶다고... 네 서방 출소를 하면 함께 살자고 그러셨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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