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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미혼여성, 꿈은 있나

[친구를 만나다]

서울와서 참세상 BBS 동호회에서 만나 햇수로 벌써 5년째가 되어가는 친구가 있다.
둘다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어서 문득문득 글을 남기기도 하고..
봄이 가기 전에 만나야 되지 않겠냐는 약속을 하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만났다.
이 친구가 워낙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는 1년을 채워야겠다는 목표아래 꾹 참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회사사람들 얘기를 하다가 현대카드 광고 얘기가 나왔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 광고에 대해서 나도 나름대로 분노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도 그랬다.
엘리트주의의 전형 아니냐는 얘기이다. 주 5일 근무를 겨냥한 광고에 대해서 열심히 일하고 멋진 차와 멋진 애인과 함께 떠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돈 좀 버는 전문직에서나 가능한 말이다라는 얘기이다.
더 나아가 5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2일 동안 멋지게 논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환상인지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며 분노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잘논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잘 논다는 것은 일상에서의 자신에 대한 투자와 꾸준히 쌓아가야 하는 것이지 죽도록 일하고 나서 잘 논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적인 성공한 사람의 상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친구는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혼신을 다바쳐 일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 안보이는데.
40대까지 10여년 바짝 열심히 일해서 탄탄하고 안정된 생활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늘이 죽어 있는데..

주 5일 근무는 허상이다. 친구는 2일간의 휴일은 열심히 일한 5일간의 스트레스의 배출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투자로 스스로가 성장하는 풍요로운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광고처럼 되면 일과 휴식의 엄청난 이분화에 따른 분열을 누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다. 매일매일이 자신을 돌아보며 쉬는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이고 나역시 한발 더나아가 하루의 8시간은 노동문화운동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노동문화운동의 주장을 설명했다.

상기되었지만..어느새 둘은 이게 실현되기 어려운 꿈일까? 큰 욕심인가?

[절망과 꿈이 없는 20대,그리고 30대 미혼 여성으로 한국 땅에서 산다는 것! ]

나나 그친구나 내년이면 서른살이 된다. 서른살이 된다고 해서 특별히 내 생활 조건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저 또 하루를 사는 것일텐데..40대까지를 바라봤을때..참 갑갑하다.
"30대가 되면 직장을 옮겨다닐 수 있는 폭도 훨씬 좁아지고, 파트타임의 일을 할때 한국은 아직도 직업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하잖아. 거기다가 전문직으로 입지를 세우기도 힘든 일이고..결국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혼 밖에 없는 것이지. 그래서 내 주변의 20대 후반의 여자애들은 너무너무 초조해 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혼에 대한 꿈도 환상도 없고, 결혼생활을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데..앞이 안보여. 한편으로는 한국이라서 더 심한 것 같아. 욕심이 나는 것은 다른 문화를 만나보고 싶지. 담배하나 피우는 것 하나도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하고, 예를 들어 내가 청소부를 하겠다고 해봐봐. 주변에서 난리가 날 걸..직업을 선택할 때도 가족과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옷차림, 걸어다는 것 하나하나 마찬가지지. 선택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던가, 아니면 주위의 시선에 대해서 나를 놔주던가, 아니면 이땅을 떠나던가.. 앞으로를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 때인것 같아. 나도 살아야 하니까"

내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의 이십대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 절망의 깊이를 알고 있어서이다.
90년대 중후반, 철학의 빈곤, 부정을 먼저 해야 하는, 적과 아의 뒤섞임의 시대. 사회에 첫발을 딛는 순간 IMF를 맞아 오갈데 없이 해매었던 숱한 청춘들이다.
폭력적인 적에 대한 존재를 알았고, 그래서 지금에 와서 평가가 어떠하든 당시에는 자신의 몸을 던져 싸워야할 명확한 목적이 있었던 선배들의 시대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그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명확한 목적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계획과 꿈이 참 부럽다.
우리는 어떤 일을 두고 이게 될까?라는 생각부터 한다. 왜? 작은 것 하나도 되는 것을 본적이 없으니까..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여기에 있나? 나는 왜 이것을 하나? 사회에 나가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운동을 하면 나는 행복할까? 내 앞가림이라도 감당해낼 수 있나?
이 모든 질문의 배후에는 잘 안될 것이다라는 부정의 의미들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
오늘을 산다는 것, 그래서 내일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나도 즐겁지 않고, 한가닥의 꿈도 보이지 않아서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거의 지워지고..희망이라는 말에 코웃음 치는 오늘..그래서 일은 그냥 돈받기 위한 정신이 떠난 시간이며, 휴일은 멍뚤린 가슴에 뭔가 채워넣을 것이 없나 두리번 거리는 발길이라..그 이전의 어떤 세대들 보다 영화를 열심히 보고...음악을 열심히 듣고..
개개인들이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고, 살아가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늘 내 또래들을 만나면 암울하고 절망스런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 누구나 묻는 말..
"잘 지내냐?"
"너는 잘 살고 있나? 나야 뭐..죽지 못해서 살지뭐.."
"나도 그렇지 뭐.."
노문센터에서 일하기 전까지 잎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죽지 못해서 산다..

[살기 위해서 ]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때 회사에서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짤리고, 이런저런 상실의 아픔까지 겹쳐서,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짤리기 전부터 이건 사는게 아니다 싶었다. 회사생활에서 향휴 몇년 동안 생활하면 전망이 보이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없는 탄탄한 구조에 숨막혀 있었으니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기해버린 나의 싸움에 대한 패배감까지..살고 싶었다.
99년도에 노문센터 준비위 활동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데..일상에서의 어려움이나 괴로움..일의 항상 즐겁냐고 물으면 그것은 아니지만..적어도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내 의지로 선택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고..같이 사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어서..좋다. 친구도 나보고 참 다행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편 나는 친구가 자신이 자유로워질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 이 땅이 질식하게 만든다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물론 다른 곳에도 다른 아픔이 있음을 그 친구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뭉클하다..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말인지..
"넌 잘 할 거야..잘 할 수 있어."

(200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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