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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리에 남은 사람들

어제 밤 '제 3지대'인가요? 하여튼 텔레비젼 프로그램입니다.
어제의 주제는 가리봉오거리였습니다.
수출자유공단이었던 구로, 그곳을 대표하는 가리봉시장과 접해있는 일명 가오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쓸쓸한 보고서였습니다.
아래의 미영언니의 글에서도 보듯이 수많은 전자회사, 봉제공장과 노동자들이 넘실거렸고, 구로동맹파업을 비롯해 노동운동사의 주요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그곳..구로..가오리..
젊은 시절 사랑도, 명예도 던지고 위장취업을 시작으로 뛰어들었던 나이든 선배들은 구로는 나의 고향이라고 가슴 벅차게, 한편 쓸쓸하게 말합니다.
처음 '삶이 보이는 창'을 찾아가던 길, 동행한 자영언니는 평소보다 유난히 더 말이 많아져서, 초차배기인 저에게 이곳이 원래 공단서점이었으며 저기가 어떤 곳이었다고 설명을 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만났는지 급한 말로 이어갔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직도 그곳 공장에 강습가는 미영언니, 16년을 구로를 지키며 노동자문학회를 꾸려가고 있는 구로노동자문학회, 노래단체 햇빛세상 등,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은 좀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주노동자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거리의 닭장집을 매꿔준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인 교포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불법체류자들이지요.
한국에서 구로지역은 유일하게 중국교포에 대한 검문/단속이 없는 곳, 그들에게는 치외법권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그곳에 모여 사는 그들은 모습은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어지고, 한편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지는구나 감탄했습니다.

22살 미혼모가 된 한 중국교포는 사랑했던 한국 남성의 부모, 가족들이 찾아와 사정하며 '떠나달라'고 하면서 '애기는 없애던 살리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답니다.
그녀가 처음 한국으로 올때에는 돈도 모으고 컴퓨터도 배워서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었지만 지금은 자기가 낳은 아이도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키게 된 미혼모이지요. 유도분만 끝에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화면속의 그녀의 아픔이, 고통이 전염되어서..저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구로에 와서는 세번 놀란다고 하네요. 집이 커서 놀라고, 그 큰집에 너무나 많은 집이 있어서 놀라고, 그방이 너무 작아서 놀란다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은 닭장집에 모여사는 중국교포들은 나름대로 명절에 모여 마작을 즐긴다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그 친구들은 서로가 배려하며 기대는 마음의 의지가 됩니다.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더군요.
한편으로 구로의 거리 한귀퉁이 점차 중국교포의 거리화 되고 있음을 간판들이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이 구로의 한 구성원으로 중국교포들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나게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들이 멈춘 그 곳에 의류 가내수공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당시 구로의 봉제업에 종사하며 미싱을 돌리던 여공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중국교포들과 함께 여전히 미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저 밑바닥에, 꿈틀꿈틀거리는 사람들. 초라하고 희망도 없고, 왜 사는지 의미도 알 수 없는 생활을 하는 저 사람들. 그저 보기엔 그렇습니다만..지겨울 만치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을 그야말로 견디면서 사는 끈질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한 희망을 가지거나 의미부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찰을 피해 마음대로 거리를 걷지도 못하는 밑바닥 생활속에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는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제 밤 발견했습니다. 아니 확인했다고 해야지요. 저는 아직도 곳곳에서 끈질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런 저의 작은 소망이 여기 이자리, 이정표도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 서있게 하고 있지 않나라고 돌아보았습니다.

(20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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