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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이십대 중반이 넘으면서 잦은 죽음을 경험했다.
가까이는 내 반려자라 믿었던 이부터 멀게는 같은과 2년 선배의 변사까지..
그리고 또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욱이형이 할일이 많은데 저리 가서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어린 아들과 젊은 형수의 모습때문에 밟혀서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좋은 세상 못보고 가서 원통해서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
나는 아쉬워서 원통하다.
형을 처음 본 게 99년 5월 구로에서 열린 열사문화제에서 연대공연을 하러 왔던
인천 철의 노동자 형들을 만난 것인데..
그 이후 인천이 옆동네라고 해도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같은 활동공간도 아니라 자주 만나기는 힘들었다.
뙤얕빛 아래 열렸던 거리공연에 땀 뻘뻘 흘리며 노래부르던 모습을 보았고, 인천노동문화제의 감동적인 공연, 노둣다리 공연. 뒤풀이에서 가끔 막걸리 따라주던 손길을 기억한다.
인천에서 형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던 2000년.
인천 노동문화의 총화와 힘으로 발휘하게 만들었고, 그 힘이 전국의 노동문화일꾼들에게 까지 전달되었다. (2000년 여름캠프에 처음으로 기획단으로 나가서 나는 어리버리했다. )
기욱이형은 전국의 노동자문화패장단 회의를 이끌었고, 밤새 술도 참 많이도 마셨다.
폭우속에서 여름캠프도 끝나고..곧바로 인천에서는 노동문화제에 돌입했다.
아..그리고..형이 암이라는 소식.
나는 정말 아쉽다. 너무너무 아쉽다.
형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는 더 없어서 나는 너무나 아쉽다.
개인적으로 만났던 적이 딱 한번 있었다. 딱 한번!
투병중의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나는 여러번 상황을 보다가 형의 몸도 괜찮을 때 종남언니와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형이 마중을 나와 분위기 좋은 카페로 갔다.
피자를 시켰다. 피자라...형도 맛있게 먹었고..
인터뷰하면서 실제로 형이 살아왔던 삶, 노동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변화한 가치관들을 보았고, 상상치 못했던 잘못도 참 많이 했던 형이 담담하게 풀어가는 모습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주거니 받거니 노문센터 얘기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기억..
올해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여의도 성모병원에 찾아갔던 날.
고향에 내려가던 길, 우연히 종남언니에게 전화했다가 창곤이형과 통화하고, 기욱이형과 통화하고..가슴이 저릿했던 기억.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 응급실에서 응급실 유리문에 매달려 있던 동지들을 고통속에서도 바라보던 그 깊은 눈길..
나는 그것이 다이다. 진짜..그래서 너무나 아쉽다.
그러나 어찌하겠나. 형은 그렇게 떠났고, 우리는 남아서 살아간다.
여려명의 친우들을 떠나보내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죽은 사람을 보내며 슬퍼하는 것은 산사람들의 아쉬움과 한과 고통을 죽음을 빌어서 풀어낸다는 것을, 그래서 장례는 한판의 굿이며 축제라는 것을.
기욱이형을 보내면서 나는 눈을 감고 암흑 속에서 내 자신을 본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두손을 흩뿌리며 덩실 덩실 춤을 춘다.
형을 만나서 배웠으니 나는 스승을 만나 행복했오, 이런 어린 후배가 줄줄이 있었으니 형도 오지게 좋았고, 행복했겄소. 그러니 슬퍼하지 맙세다.
잘 가세요..기욱이형..이승에서 춤추며 보내드립니다. 웃으며 보냅니다.

(20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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